♣ 六友堂記/산행기록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남창에서 숙성치 가는 길)

도솔산인 2021. 7. 18. 21:35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남창에서 숙성치 가는 길)

 

 

▣ 일 시 : 2021년 07월 17일(토)

▣ 코 스 : 남창-남악사지-원달리-수락-능선사거리-오미자농장-숙성치

▣ 인 원 : 3명(지리산아님, 박준현님)

▣ 날 씨 : 맑음

 

 

1. 잊지 말자 정유재란 길

 

사람이 살면서 잊어야 할 일이 있고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유몽인 길에서 '정유재란 길'을 만났다. 구례에서 숙성치를 넘어 남원으로 가는 길은 정유재란(1597년) 때에 왜군 5만7 천명이 넘어온 길이다. 거꾸로 남원에서 구례로 향하면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이다. 구례쪽에서 숙성치를 넘는 길은 계척리, 원달리, 수기리 세 군데가 있다. 그동안 숙성치를 세 번 답사하였지만 완전한 답을 얻지 못했다. 이번에 수락 마을에서 숙성치를 연결하였다. 왜군이 구축한 도로의 폭에 놀랐다. 수레가 운행할 수 있는 길이다. 우리 선조들이 다니던 길을 정유재란 때에 왜군들이 군용 도로로 구축한 길이다. 숙성치 인근에 오미자 농장(사유지) 때문에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를 밤재로 우회했다고 한다. 정유재란 침략의 길과 충무공 이순신의 백의종군로이다. 어우당 유몽인은 이 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유몽인은 왜 정유재란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을까.

 

 

가. 구례에서 숙성치로 오르는 길

 

① 산동면에서 계척리로 가마바위로 가는 길

② 산동면에서 원달리 상원마을로 숙성치 가는 길

③ 산동면에서 수기리 수락마을에서 숙성치 가는 길

 

 

나. 수락마을에서 숙성치 가는 길

 

이번 답사는 수락마을에서 숙성치로 오르는 길을 거꾸로 진행하였다. 1917년 총독부에서 제작한 오만분지일 조선의 지형도를 보면 이해가 쉽다. 지난 번 확인한 능선 사거리 갈림길에서 수기리 수락 마을을 향했다. 초입부터 길이 깊게 파여 구축된 길임을 알 수 있다. 도사목이 엉켜있고 잡목이 우거졌지만 길은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다. 길폭은 2.5m~3.0m로 우마차가 운행할 수 있는 길이다. 서너 개의 모랭이를 돌고 실계곡을 넘어 임도와 연결되는 지점을 만난다. 건너편을 바라보니 원달리 상원 마을에서 올라간 임도가 보인다. 고개를 넘으니 바로 수락마을에 닿는다. 아래 지도에서 숙성치로 가는 옛길이 보인다. 자료를 찾아보니 1597년 7월 말 왜군 5만 7천 명이 숙성치를 넘었다.

 

 

다. 1917년 총동부에서 제작한 오만 분지일 조선의 지형도

 

 

라. 남원이 겪은 정유재란의 참상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이 주력인 좌군 5728일 부산포 안골포 순천 등에서 하동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쳐 올라갔다. 수군 7도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구례에서 좌군과 합류해 남원으로 쇄도했다. 왜군 종군 승려 케이넨(慶念)<조선 일기>에는 남원으로 쇄도하던 왜병들의 악귀 같은 만행이 사건 기사처럼 기록돼 있다. “너 나 없이, 남에게 뒤질세라 재보를 빼앗고 사람을 죽이며 서로 쟁탈하는 모습들,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기분이다.”(159784)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 죽인다. 그리고 산 사람은 쇠사슬로 꿴 대롱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간다. 어버이 되는 사람은 자식 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처음 보게 되었다.”(159786)

 

813일 전투가 시작되어 815일 남원성이 함락된다. 케이넨은 전투가 끝난 818일 일기에 성안으로 진을 이동하다가 날이 밝아 주위를 돌아보니 길에 시체가 모래알처럼 널렸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라고 썼다. 왜병들은 시체에서 코를 잘라 항아리와 나무통에 넣고 소금에 절여 부산으로 보냈다. 포로로 잡혀 일본에 끌려갔던 강항(姜沆)<간양록>에는 이때 일본에 보낸 코 상자의 높이가 구릉을 이루었다라고 나온다. 피란지에서 돌아온 백성들은 사방에서 썩어가는 시신을 한 곳에 모아 묻고 만인의총이라 불렀다. 시내에 있던 의총은 서원철폐령과 일제의 탄압 등으로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 하다가,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격식 있는 예우를 받게 되었다. 왕릉에 비교될 만큼 큰 유택을 갖게 되었고 국가사적지 지위까지 얻었다. 출처 : 梁씨 종친회(https://cafe.daum.net/namwonyangs)

 

 

수락재(?)
상원제
저곳을 넘으면 수기리 수락 마을이다.
상원에서 올라오는 옛길

 

잊지말자 정유재란 길

 

숙성치
숙성치(210626)
오미자농장(210826)
오미자농장(210826)
210626
정유재란 길을 복원한 분들이 달아놓은 시그널
아래 사거리에서 숙성치 방향
사거리에서 수락폭포 방향 초입
무덤
임도와 연결 지점
임도
운휴정(雲休亭)

 

 

 

2. 남원부 소속의 남악사지

 

가. 지리산 남악사(智異山 南嶽祠)

 

남악사는 통일신라가 삼산오악(三山五嶽)의 산악숭배 사상을 중국에서 도입하면서 유래되었다. 신라에서는 삼국통일 직후에 지방 통치 편제로 9주 5소경과 삼산오악을 배치하면서 남원에 남원경을 두고 지리산을 남악으로 삼았다. 이와 같이 고대부터 지리산은 왕실 및 국가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으며, 고려시대에는 태조 왕건의 고려왕조 창업과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 사전(祀典)에 중사(中祀)로 지리산 신사에서 지방수령이 제사를 봉행하는 장소였다.

 

고려 초에 지리산에 태조 왕건의 고려왕조 창업을 기념하는 남악사가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남원 소의방은 고려시대 행정구역명으로, 현재 전남 구례군 광의면과 산동면 일대를 가리킨다. 구례군 광의면 온당리 당동마을에는 남악사지(南嶽祠址)라고 전해 오는 유적지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사묘조에는 지리산신사가 남원부의 남쪽 64리 되는 소아리(小兒里)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지리산신사가 남악사로 추정된다.

 

남악사지 발굴 결과 통일신라 말 고려 초기의 건물지와 조선 초기의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나말여초(羅末麗初)에 남악사가 조성되었음을 보여 주는 기와와 전(塼)을 비롯해 남악 제사를 봉행하였음을 보여 주는 조선 전기의 분청사기(粉靑沙器)와 조선 후기의 백자류(白磁類) 및 제기(祭器) 등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고려 초에 왕조 창업 기념으로 남악사를 창건하였으며 조선 후기까지 남악사는 지리산신사로서 중창을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나. 구례군 광의면 행정구역

 

1897년 남원부의 소의방(所義坊)이 구례현 방광방(放光坊)에 편입되면서 구례군 광의면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방광방(放光坊)은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라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750년 해동지도 남원부와 1871년 호남읍지(규12175) 남원부 지도를 보면 구남창(舊南倉)이 소의방(所義坊)의 남악사 인근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고문헌에 나오는 남창(南倉)

 

1611년 당시 현 구례군의 산동면(산동방)과 광의면(소의방)은 남원부 관할이었다. 쌍계사를 출발한 유몽인이 4월 7일 하룻밤 묵은 남창(南倉)은 소의방(㪽義坊, 현 구례군 광의면)에 있었다.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신·구남창(新·舊南倉)에 대한 기록이 있다. 1750년 해동지도의 남원부 지도와 1871년 호남읍지(규12175) 남원부 지도를 보면 소의방(㪽義坊, 또는 㪽兒坊, 현 구례군 광의면) 지역에 구남창(舊南倉)이 있고, 수지방(水旨坊, 현 남원시 수지면) 지역에 신남창(新南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원부의 구남창은 한말까지 존재했다. 1897년 남원부의 소의방이 구례현의 방광방과 통합, 광의면으로 개편되기 전까지는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是日宿于本府南倉'의 문구는 '이 날 이 고을(本府, 남원부)의 남창(南倉, 구남창)에서 묵었다.'로 이해가 된다.

 

남원부에서 구례현으로 편입된 구례군 광의면의 탄생은 구남창의 폐창으로 이어진다. 어느날 갑자기 남창과 남악사가 남원군 관할에서 구례군 관할로 행정 구역이 개편된 것이다. 남악사는 1908년에 폐쇄될 때까지 국가의 제례가 행해졌다고 한다. 남창에 대한 근세의 기록을 찾았으나 아무런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고지도와 문헌을 보고 추정할 뿐이다. 광의면 면사무소는 하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수해에 취약하고, 광의초등학교가 구남창터일 가능성이 높다.

 

 

가.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일록

 

○ 4월 7일 병자일 (불일암을 유람하고 쌍계사를 출발하여 화개를 지나), 정오 무렵 섬진강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 와룡정(臥龍亭)에서 쉬었다. 이 정자는 생원 최온(崔蘊)의 장원(庄園)이었다. 큰 둔덕이 강 속으로 뻗어 마치 물결을 갈라놓은 것 같았다. 말을 타고 반석 위로 나아가니 솜을 타놓은 듯 수백 보의 백사장이 보였다. 그 둔덕 위에 초당 서너 칸을 지어놓고 비췻빛 대나무와 검푸른 소나무를 주위에 심어놓았다. 그림 같은 풍광이 둘러쳐져 초연히 속세를 떠난 기상이 있었다. 이 날 남원부 남창(南倉)에서 묵었다.

 

4월 8일 정축일. 숙성령(肅星嶺)을 넘어 용담(龍潭) 가에서 잠시 쉬었다가 관아로 돌아왔다.

 

 

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창고] 읍창(邑倉) 지혜창(紙惠倉) 진휼창(賑恤倉) 성부(城府)는 성내(城內)에 있다. 동창(東倉) 40리에 있다. 서창(西倉) 40리에 있다. 구남창(舊南倉) 40리에 있다. 신남창(新南倉) 40리에 있다. 구북창(舊北倉) 30리에 있다. 신북창(新北倉) 40리에 있다. 산창(山倉) 교룡산성(蛟龍山城)에 있다.<1530년, 제 39권, 전라도>

 

☞ 1860년대(1861~1866) 조선후기 지리학자 김정호가 전국 현지답사를 토대로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있음.

 

 

4. 고지도에 나오는 남창(南倉)

 

가. 1750년 해동지도 남원부

 

 

 

나. 1871년 호남읍지 남원부 지도

 

 

 

다. 1917년 오만분지일 조선의 지형도

 

 

 

 

5. 답사 사진

 

남악사지
기와편
지적도와 지번

 

‘지리산신 제향’ 제단 터 발굴…구례 남악사 복원 기대감 

 

광주일보 2021.05.25. 16:40

 

길이 7.2m·높이 87.42㎝…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 사기·기와 등 유물 다수 수습

 

 

구례군과 재단법인 나라문화연구원이 지난 4월부터 구례군 광의면 온당리 당동마을 인근에서 옛 남악사터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5월 24일 구례군과 발굴조사를 하고 있는 재단법인 나라문화연구원(원장 박태홍)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구례군 광의면 온당리 산 71의9 번지 당동마을 인근 옛 남악사터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결과 제단과 제기 등을 보관한 예감과 담장지, 축대를 발굴하고 분청사기와 명문기와 등 다수의 유물들을 수습했다.

봄 가을로 제향을 올렸던 제단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길이가 7.18m이고 높이는 87.4㎝로 제단의 축대는 고려와 조선시대 것이 같이 발굴됐으며 장방형으로 단변은 약 18m이다. 또 담장지는 80㎝ 폭으로 제단을 감싸며 동에서 서쪽 방향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제단의 북쪽 편에서는 제기 등을 묻어 보관한 예감 추정지도 확인됐다.

수습된 유물은 분청사기와 기와류로 신라말과 고려시대 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시대에 걸쳐 다양한 종류가 함께 출토됐다. 평기와의 문양은 여러 가지로 선문계열은 신라말 고려초에 생산 된 기와이고, 수지문 계열의 복합문은 고려시대 호장집 선문 곡선계는 조선시대의 기와로 보여 남악사가 오랜 세월 걸쳐 축조와 보수가 이뤄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자가 표시된 명문기와에는 사찰표시와 범어 한자 등이 표기되어 있어 사찰 관련성과 기와 생산지역, 당시 공사 관계자 등에 대해 종합적이고 세밀한 분석과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 발굴단의 설명이다. 이번 발굴조사는 남악사지 중심지인 제단 추정지 주변 400㎡만을 중점 발굴 한 것으로 주변에 대한 조사는 이뤄지지 않아 앞으로 전체 추정지에 대한 광범위한 발굴 조사가 이뤄질 전망이다.

한광희 나라문화연구원 연구원은 “제단의 배치와 축조 상태 수습 유물 등을 종합 분석해 보면 남악사는 신라시대의 사찰 터 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며 “앞으로 전 부지에 대해 발굴을 확대 한다면 실체를 명확히 밝힐수 있을것”이라고 말했다. 남해경 전북대(고건축학) 교수는 “현재 조사로 개략적인 성격은 파악되나 세부적인 내용 파악을 위해 추가적인 주변 조사가 필요하다”며 전면 발굴 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남악사지는 지난 1992년 부분적 지표 조사를 실시했으나 이후 중단됐다 현 김순호 구례군수가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김순호 군수는 “남악사 옛터에 대한 발굴을 전면적으로 확대 실시하고 구체적인 복원 사업을 추진하겠다”며 “중앙정부와 협력해 지리산 남악제를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국가적 행사로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밝혔다.

남악사
국가에서 국태민안(國泰民安)과 시화연풍(時和年豊)을 기원하며 지리산신을 제향했던 국가의 제례 공간이다. 전면 3칸, 측면 1칸반의 전통적인 사묘이며 산문 객사 유생청 등 다수의 부속건물로 이뤄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08년에 폐쇄될때까지 조선왕조의 국가 제례 공간이었다.

/구례=이진택 기자 lit@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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