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을 좇아서(반선~갈월령)

도솔산인 2021. 6. 28. 12:21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을 좇아서(반선~갈월령)

 

 

▣ 일 시 : 2021년 06월 27일(일)

▣ 코 스 : 반선-정룡암-와운-갈월령

▣ 인 원 : 3명(지리산아님, 박처사님)

▣ 날 씨 : 맑고 구름

 

 

사람이든 사물이든 얕잡아보면 탈이 난다. 산행 또한 그렇다. 산길을 놓치는 일이 없는데, 목적한 산행을 못해본 일이 거의 없는데, 영원령을 지척(咫尺)에 두고 돌아섰다. 와운마을 포장도로 끝에서 마을 주민이 들어갈 수 없다고 진행을 제지했다.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계곡에 들어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불법으로 참나무를 십여 그루를 벌목하여 표고버섯 종균를 심어놓았다. 설상가상으로 벌목한 참나무를 피해 진행하다가 초입을 놓쳤다. 계곡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조금 올라가 오른쪽으로 작은 언덕을 넘어 계곡으로 진입해야 한다. 확인하지 않고 왼쪽 계곡으로 계속 진행한 것이 실수였다. 영원재 450m까지 접근을 했지만, 4일 연속 산행의 피로로 미련 없이 중도이폐(中途而廢)하고 유몽인이 올라간 길을 되찾아 와운마을로 내려왔다. 끝.

 

 

※ 반선-와운옛길-정룡암(대암)-참샘-북두재-와운마을 식당 앞 포장도로 진행-양쪽으로 산돼지 퇴치 철망(포장도로 끝)-계곡 초입(참나무 10여 그루 벌목 표고 종균)-계곡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은 언덕을 넘어 오른쪽 계곡 진입(주의)-941.6봉(영원령이 보임)-갈월령(영원령)

 

 

1917년 총독부에서 제작한 조선의 지형도

 

트랙 : 산영님

'윗보실골'을 검색하니 영원재에서 와운골로 내려서는 푸른 점선길에 표기하고 있다. 와운마을에서 출생하여 석실 주막집 와운댁 할머니(82세)에게 확인을 하니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영원령으로 가는 옛길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미 답사한 길이다. 윗보실골은 지명에 혼선과 오기가 있는 듯하다. 보실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

 

4월 1일 (백장암을 출발하여) 내원(內院)에 이르니 두 줄기 시냇물이 합쳐지고, 꽃과 나무가 산을 이룬 곳에 절이 세워져 있었다. 마치 수를 놓은 비단 속으로 들어가는 듯하였다. 소나무 주변의 단()은 숫돌처럼 평평하였고, 금빛푸른빛의 단청이 숲 속 골짜기에 비추었다. 또 천 번이나 두드려 만든 종이에 누런 기름을 먹여 겹겹이 바른 장판은 마치 노란 유리를 깔아놓은 듯, 한 점 티끌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 허연 늙은 선사(禪師)가 승복을 입고 앉아 불경을 펴놓고 있었다. 그의 생애가 맑고 깨끗하리라 여겨졌다. 이에 머무는 대신 시를 지어놓고 떠났다. 동쪽 시내를 따라 오르니 산은 깊고 물은 세차게 흘러내렸다. 한걸음 한 걸음씩 올라 정룡암(頂龍菴)에 이르렀다. 앞에 큰 시내가 가로막고 있는데 냇물이 불어 건널 수 없었다. 건장한 승려를 뽑아 그의 등에 업혀서 돌을 뛰어넘으며 건넜다. 낭떠러지에 가까이 있는 바위가 자연스럽게 대()를 이루었는데 그 바위를 대암(臺巖)이라 하였다. 그 아래에 시퍼렇게 보이는 깊은 연못이 있었지만 겁이 나 내려다볼 수 없었다. 그 연못에 사는 물고기를 가사어(袈裟魚)라 부르는데, 조각조각 붙은 논 혹은 한 조각씩 기워 만든 가사(袈裟) 같은 모양의 비늘이 있다고 하였다. 이 세상에 다시없는 물고기로, 오직 이 못에서만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른다고 한다. 이에 어부를 시켜 그물로 잡게 하였으나, 수심이 깊어 새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이 날 저녁 伯蘇(백소)[雲峰 수령李復生(이복생)]가 하직하고 돌아가다가 내원에서 묵었다. 나는 내원이 깨끗하고 고요한 것을 사랑하여 처음에는 그곳으로 돌아가 자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룡암에 이르자 지쳐서 그럴 수 없었다. 심하구나! 나의 쇠함이여. 정룡암 북쪽에 한 채의 집이 있었는데. 이 암자의 승려가 말하기를,이곳이 바로 판서(判書) 노진(盧禛)의 서재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옛날 옥계(玉溪) 노진(盧禛) 선생이 자손들을 위해 지은 것이다. 선생도 봄날의 꽃구경과 가을날의 단풍놀이를 하러 왔으며, 흥이 나면 찾은 것이 여러 번이었다. !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 깊은 산속 외딴곳에 자제들을 위해 집을 짓고 살게 했으니, 선생의 깨끗한 지취는 후학을 흥기 시킬 수 있겠구나.

 

노진(盧禛)[1518~1578] 조선 중기 남원에서 활동한 문신. 옥계(玉溪) 노진(盧禛)[1518~1578]은 조선 중기 명종과 선조 연간에 주로 활약한 문신으로, 30여 년 동안 청현(淸顯)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지례 현감과 전주부윤 등 외직에 나가서는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였다. 성리학과 예악에 밝았다. 노진은 1518(중종 13) 함양군 북덕곡 개평촌에서 태어났으나 처가가 있는 남원에 와서 살았다.

 

4월 2 신미일. 새벽밥을 먹고 월락동(月落洞)을 거쳐 황혼동(黃昏洞)을 지났다. 고목이 하늘에 빽빽이 치솟아 올려다봐도 해와 달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밝은 대낮일지라도 어두컴컴하기 때문에 월락동․황혼동이라고 부른다. 와곡(臥谷)으로 돌아들자 수목이 울창하고 돌길이 험하여 더욱 걷기 힘들었다. 천 년이나 됨직한 고목들이 저절로 자라났다 저절로 죽어, 가지는 꺾이고 뿌리는 뽑혀 가파른 돌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곳을 지날 때는, 그 가지를 베어내고 문을 드나들 듯이 구부리고서 그 아래로 빠져나오기도 하고, 문지방을 넘듯이 걸터앉아 넘기도 하고, 사다리를 밟고 오르듯이 밟고서 지나기도 하였다. 그 외에 공중에 선 채로 말라죽어 반쯤 꺾이거나 썩은 것도 있고, 가느다란 줄기가 우뚝 위로 천 자나 솟구쳐 다른 나무에 기대어 쓰러지지 않은 것도 있고, 푸른 등나무가 오랜 세월 뻗어나가 가지를 드리우고 잎을 늘어뜨리고서 장막처럼 펼쳐져 있는 것도 있었다. 수십 리에 걸쳐 굽이굽이 뻗은 시내는 높은 언덕이 없어 맑은 바람이 항상 가득하고 상쾌한 기운이 흩어지지 않았다. 함께 유람 온 사람들이 봄옷을 입은 지 한 달 남짓 되는데, 이곳에 이르러 모두 두터운 솜옷을 껴입었다. 해가 뜰 때부터 등산을 시작하여 정오 무렵에 비로소 갈월령(葛越嶺)을 넘었다. 갈월령은 반야봉(般若峯)의 세 번째 기슭이다. 가느다란 대나무가 밭을 이루고 몇 리나 펼쳐져 있었지만, 그 사이에 다른 나무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사람이 개간하여 대나무를 심어놓은 듯하였다.

 

 

 

정룡암터
대암과 가사어가 있던 沼
포장도로 끝 계곡 진입 지점

 

※[주의] 계곡 초입 참나무를 벌목하여 쓰러뜨려 놓아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왼쪽으로 산돼지 퇴치 철망을 설치했다. 이곳에서 조금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지능선 작은 언덕을 넘어 오른쪽 계곡으로 진입해야 한다.

 

 

갈월령(영원재) 사진 지리산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