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마을 은병암(隱屛岩)에서 청이당 가는 길
▣ 일 시 : 2021년 09월 23일(목)
▣ 코 스 : 송대마을-은병암(隱屛岩)-선녀굴-의논대-고열암-일강-사립재골(습지)-세모롱이 바위(三隴巖)-방장문-청이당-방장문-두리의 폐사지-품개동(야철지)-강계형의 장구목-장암(마당바위)-송대마을
▣ 인 원 : 5명(송장섭님, 이광수님, 백승철님, 조교수님)
▣ 날 씨 : 맑음
曺교수님에게 선녀굴 아래 마을 터에서 '은병암(隱屛岩) 강시영(姜時永)' 인명 석각의 발견 소식을 듣고, 남해에 계신 송장섭 선생님 팀과 점필재의 아홉 모롱이 길 안내 산행 약속을 잡았다. 송선생님은 선인들의 유람록과 관련 자료를 읽고 유람록 길을 답사하시는 분이다. 선생님은 함양 지곡의 개평 마을 출신으로 얼마 전에 '박여량의 초령이 새재'라는 의견을 주셨다. 유람록 복원을 하면서 관심 있는 분들과 소통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최근에 점필재의 아홉 모롱이 길을 답사하시다가 두 번이나 길을 놓쳤다고 한다. 어떤 일이든 혼자서 하면 시행착오를 겪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송대마을을 출발하여 隱屛岩(은병암) 석각 명문을 확인하고, 고열암에서 청이당까지 점필재의 아홉 모롱이 길을 걸었다. 고열암에서 일강(一岡)을 향했다. 일강(一岡) 길의 숯가마터 아래에 미타샘이 숨어있다. 이 샘은 송대 계곡의 발원지이다. 매번 감사하게도 '나돌아갈곳' 노란 시그널이 샘터의 안내를 돕는다. 일강(一岡)을 넘어 두 모롱이를 돌아 사립재골로 내려서면 숯가마터가 나오고 곧바로 강계형의 두류록에 나오는 벗 치조의 집터에 닿는다. 사립재 고원의 습지를 지나 가칭 고래바위 움막터에서 점심을 먹었다. 습지를 지날 때마다 조교수님은 당귀 씨를 뿌렸다. 세 모롱이 바위는 중요한 갈림길이다. 오봉에서 사립재를 넘어서 아홉 모롱이 길과 만나는 지점이다. 네 모롱이 초입에 들어서면 김종직이 유극기에게 이끼를 긁어내고 이름을 새기게 한 바위가 있다.
다섯 모롱이 길은 수명이 다한 산죽밭이다. 일행들과 '박명부가 상류암에서 읽었다.'라는 삼필사설(三必四說)을 이야기했다. 대나무만 꽃이 피면 죽는 것이 아니다. 세상 일이 다 그렇다. 꽃만 피우고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다. 다섯 모롱이를 지나 평탄한 문바위골을 가로질러 주막터로 이어진다. 천왕봉을 오르는 길과 추성에서 유평으로 넘어가는 연도가 만나는 지점이다. 이곳은 화전민이 소개되기 전까지 실제로 주막터였다고 한다. 유람록 기록의 동선으로 본다면 1472년 김종직, 1611년 유몽인, 1871년 배찬, 1922년 권도용이 이곳을 지나갔다. 여섯 모롱이는 산죽과 도사목이 기억을 돕는다. 대개 여섯 모롱이 초입에서 길을 놓친다. 주막터에서 지리산길 지도를 따라 좌측(위)로 진행하면 경로를 이탈한다.
일곱 모롱이는 얼음터에서 옹암(진주독바위)으로 오르는 능선길이다. 구롱길과의 교차 지점 아래에 샘터가 있다. 여덟 모롱이 초입에 고목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쉼터가 있다. 여덟 모롱이를 지나면 드디어 방장문이 나온다. 처음에 구롱 길을 완성하고도 길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 계속 답사를 하였다. 지난해 5월 구롱 길을 조사하다가 벽소령 대피소 조봉근 팀장이 방장문 석각을 찾았다. 지리산 역사문화조사단 조봉근 팀장은 완폭대, 은정대, 오암 등 석각 발견에 일등공신이다. 여덟 모롱이와 아홉 모롱이 사이는 방장문골이다. 방장문의 고도가 1079m이고 아홉 모롱이 정점인 동부 능선과 만나는 지점이 1250m로 표고 차이가 약 170m이다. 우리 일행은 구롱을 지나 청이당에 닿았다.
하산 길은 올라갔던 길을 되짚어 방장문까지 내려왔다. 일곱 모롱이에서 두리(杜里)의 폐사지로 진행하여 벽송사 능선 장구목을 넘어 송대 마을로 하산 루트를 잡았다. 여기에서 장구목은 송대에서 사립재골로 넘어가는 1924년 강계형 길이다. 무엇보다 선인들의 유람록을 답사하시는 분들과의 산행이라 의미가 있었다. 같은 분야에 관심 있는 분들과 소통과 교류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유람록 복원에 있어 나 아니면 안 된다.'라는 독불장군(獨不將軍)은 금물이다. 답사 자료를 공유하고 끊임없이 수정과 보완을 거듭해야 한다. 송대마을 마당바위에 내려서니 금대산의 저녁노을이 아름답다. 산행을 마치고 지리산 둘레길 함양센터 금계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산행에 대한 촌평을 하고 구롱 길 안내 산행을 마감했다. 소리 소문 없이 유람록 복원을 하고 계신 두 분 교장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끝.
은병암(隱屛岩) : 주자(朱子, 1130~1200)의 이름은 희(熹), 자는 원회(元晦), 호는 회암(晦庵).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학을 집대성함. 54살 되던 1183년에 무이구곡(武夷九曲) 중 다섯 번째 구비에 해당하는 은병암(隱屛岩) 밑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세우고 제자를 가르쳤다. 그가 터를 잡고 신진들을 가르친 무이구곡(武夷九曲)은 예전부터 중국에서 신선이 살았던 곳으로 이름난 명승지이다. 중국 복건성 숭안현에 있다.
강시영[姜時永, 1788년(정조 12)-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여량(汝亮, 汝良). 1819년(순조 19)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수찬을 지내고, 1829년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으로 정사 이광문(李光文)과 부사 한기유(韓耆裕)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8년(헌종 4) 부수찬을 거쳐 1843년 충청도관찰사, 1846년 행호군(行護軍), 1848년 한성부판윤·형조판서, 1854년(철종 5) 대사헌을 지냈으며, 1859년 예조판서가 되었다.1866년(고종 3) 조대비가 수렴섭정(垂簾攝政)을 철회하고,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아 인사배치를 할 때 남인으로 기용되어 홍문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로 승진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헌종실록(憲宗實錄)철종실록(哲宗實錄)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국조방목(國朝榜目)
집필자집필(1996년) 오성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점필재의 유두류록에 '(유극기로 하여금)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 한가운데에 이름을 새기게 하였다.(使之刮苔蘚。題名于巖腹)'라는 문구이다. 국역본마다 해석이 다른데(이름을 쓰게 하였다), 내 생각은 '유극기로 하여금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의 전면(복판 腹板)에 이름을 새기게 하였다.'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묵서로 썼다면 당연히 지워졌을 것이고, 석각을 새겼다고 해도 550년 세월에 남아있을 가능성은 없다. 혹시 이 바위가 아닐까. 개인적인 생각이다.
☞ 李璡雨(1897~1954) : 본관은 경주 자는 성유(性悠) 호는 은계(隱溪) 마천면 의탄리 의중마을 출신. 향토교육 사업가. 천석꾼의 부호로 마천초등학교를 설립(1929년)하는데 재산(100두락)을 희사함. 1922년 함양명승고적보존회 이진우와 벽송사 僧 일동이 중봉 마암에 마암당을 건축하고 벽송사에서 마암까지 등산로를 정비함. 도계 공원에 마천 면민이 세운 송덕비가 있음.
☞ 1923년 개벽 제34호 지리산보에 나오는 마암당을 지은 이진우(李璡雨) : https://blog.daum.net/lyg4533/16488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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