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어우당길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기담(妓潭)과 사정(獅頂)

도솔산인 2021. 8. 2. 00:00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기담(妓潭)과 사정(獅頂)

 

 

▣ 일 시 : 2021년 08월 01일(일)

▣ 코 스 : 세이암-신흥교-사자곡-사정-기담(석각)-독가-평지교-대성교

▣ 인 원 : 2명(조봉근님)

▣ 날 씨 : 흐림

 

 

1611년 유몽인(柳夢寅)의 유두류산록과 1651년 오두인의 두류산기에 기담(妓潭)이 등장한다. 유몽인 길 전구간을 부분 답사하면서 마지막 남은 지명이 기담(妓潭)사정(獅頂)이다. 기담과 사정은 의신사(義神寺)가 있는 의신마을과 신흥사(神興寺)가 있는 신흥마을 사이에 있다. 1651년 오두인(吳斗寅)의 두류산기를 읽어보면 포위망이 좁혀진다. (세이암을 지나) '왼쪽으로 길을 틀어 뒷 산등성이 오르니 길이 더욱 험하고 산세가 더욱 기이하다. 사자곡(獅子谷)에서 10리 정도 가니 넓은 계곡에 물이 세차게 뿜어져 흘러 깊은 못을 하나 이루었는데 기담(妓潭)이라 한다.' 오두인은 현재 신흥교 서산대사길 초입의 벼랑길 구간을 사자곡(獅子谷)이라고 하고 있다. 오두인의 여정은 세이암을 출발하여 기담에서 쉬고 대성교에서 능인암을 거쳐 은정대로 올라갔으니, 기담과 사정(사자곡)이 신흥교에서 대성교 사이에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유람록에 등장하는 지명 중 장구목(缶項), 노루목(獐項嶺), 사자목(獅子項), 아홉 모롱이(九隴) 등은 지형의 형태에 따라 지은 이름이다. 사자목(獅子項)은 사람이 겨우 비켜갈 수 있을 정도의 높은 벼랑 위에 좁고 험한 길이다. 사정(獅頂)은 사자곡(獅子谷) 벼랑길에서 가장 높은 지점으로 이해하면 된다.

 

 

▶ 지리산 서산대사길(지리산 옛길)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를 거쳐 의신계곡을 지나 지리산 주능선의 벽소령을 넘어 함양군 마천면으로 넘어가던 길 중에서 하동군 화개면 신흥마을에서 의신마을까지 이어지는 옛길 구간 4.2km를 말한다. 신흥사가 있던 신흥마을과 의신사가 있던 의신마을을 연결한 옛길이다. 서산대사가 16살 때 화개동을 유람하다 출가해 두 차례에 걸쳐 18년을 머물며 수행하는 동안 다니던 옛길로 서산대사길이라고도 한다. 지리산 옛길은 보부상들이 하동, 광양 등 남해안의 해산물을 함양 등 내륙지방으로 운송하던 길이다. 봇짐, 등짐장수들이 광양 등에서 생산된 소금과 해산물을 이고 지고 벽소령 넘어 함양 쪽으로 팔러 다니던 길이자, 의신마을 주민들이 산에서 구워낸 참숯을 화개장에 팔러 넘나들던 옛길이다. [펌] 서산대사 길은 하동군이 예산을 지원하고 공단에서 시공을 발주하였다. 2012년 착공을 하였지만 주민들의 민원이 많아 2013년에야 완공되었다고 한다.

 

 

구례 고속도로에서 본 일출
사자곡 초입
선유동계곡 합수점
사정(獅頂) 「시냇가에 불룩 나온 높은 언덕이 보였는데 , 의신사의 승려가 사정(獅頂) 이라고 하였다 .」

여기가 사자곡(獅子谷)에서 가장 높은 고개이다. 지도에서 보면 더욱 확연하다. 의신 마을 주민들은 이 고개를 '사지 고개', '사징이 고개', '사지넘이 고개'라고 부른다. 버스가 없던 시절 의신마을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 화개장에 다녔다고 한다. 의신과 대성마을 아이들이 왕성초등학교를 다니는 등굣길이기도 하다. 왕성초등학교는 범왕리와 대성리에 한 글자씩 따서 학교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고개 이름의 유래를 벼랑에서 떨어지면 죽는 사지(死地) 고개로 알고 있었다. 유몽인은 청류가 흐르는 기담으로 내려서면서 이 고개를 바라보고 의신사 승려의 설명을 듣고 기록한 것이다. 「시냇가에 불룩 나온 높은 언덕이 보였는데, 의신사의 승려가 사정(獅頂)이라고 하였다.」 사정(獅頂)은 본래 '사자넘이 고개'인데 세월이 지나면서 '사지넘이 고개'로 음이 전성(轉聲, 변음)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현상은 사투리에서 많이 나타난다. 후설(後舌) 모음(ㅏ)이 발음하기가 불편하여 전설(前舌) 모음(ㅣ)으로 변하는 음운 현상을 '전설모음화'라고 한다.

 

 

위성지도에서 잘록한 지점(대성계곡)이 사정(獅頂)
사정(獅頂)
사정(獅頂)은 사자넘이 고개→사지넘이 고개(전설모음화)

 

기담(妓潭)은 글자 그대로 기생들이 노래를 부르고 주연(酒筵)을 펼칠 수 있는 넓은 반석과 담(潭)이 갖춰진 곳이다. 소인 묵객들이 쉬어간 곳이니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동초(東樵) 김석곤(金晳坤, 1874~1948)이 초서로 쓴 7언절구 필획과 작자 미상의 석각이 있다. 초서로 쓴 칠언절구 필획 옆에는 '性者心之理 心者性之器(사람의 본성은 마음의 이치요. 마음은 사람의 본성을 담는 그릇이다.)'라는 문구와 '秀堂 金敎潤, 雲樵 高炳斗, 金彰坤'의 인명 석각이 있다. 인명 석각은 동초(東樵) 김석곤(金晳坤)과 함께 유람을 왔던 사람들로 추정된다. 필자 석각이 있는 넓은 암반과 소(沼)를 기담(妓潭)으로 보고있다.

 

여기에서 위로 조금 올라가면 소나무가 있는 절벽 아래 바위 암반 위에 초서로 쓴 두류만첩(頭流萬畳) 석각이 있다. 맨 마지막 글자가 마모가 되어 판독이 어렵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두류만묵(頭流萬墨)으로 읽고 있다. 혹시 성여신(成汝信, 1546~1632)의 최문창찬(崔文昌贊, 4言 12聯)의 9聯에서 '倻山千丈 : 천 길 높은 가야산에 들어가고/頭流萬疊 : 만 겹 깊숙한 두류산에 의탁했네.'라는 문구에서 취한 것은 아닌지. 지리산을 유람한 유호인의 뇌계집(㵢谿集) 七言律詩 ‘등구사탄이당(登龜寺坦夷堂)’에 '好在頭流萬疊山(좋은 경치 두류만첩산에 있어)'라는 시구가 있다. 두류만묵(頭流萬墨)이 맞는지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화개면지에 “지리산의 모든 시서를 대표한다는 뜻인지 두류만묵(頭流萬墨)이라 했다.“라는 설명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관련자료 붙임3 참조)

 

 

기담I
기담II
기담III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기담(妓潭) 가로 옮겨 앉으니 고인 물은 쪽빛처럼 새파랗고, 옥빛 무지개가 비스듬히 드리워져 있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곳을 정류석(停留石)으로 소개한 기록을 보았는데, 유람객들의 쉼터라는 의미는 맞지만 출처가 명확하지 않아 설명을 유보한다.

 

 

 

▼ 기담의 동초(東樵) 김석곤(金晳坤)의 석각

 

김석곤(金晳坤, 1874~1948)】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천안(薦按), 호는 동초(東樵) 또는 눌어(訥語). 본관은 김해이고, 전북 태인(泰仁) 출생. 부친은 김연추(金演秋).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수당(秀堂) 김교윤(金敎潤)과 교유.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며 바위에 글씨를 새기기를 즐겨, 내장산 서래봉 불충암(佛充庵)의 뒤쪽 바위에는 ‘내장 풍악(內藏楓嶽)’, 정읍두승산 정상에는 ‘수두목승(水斗木升)’이라고 새겼다. 또 칠보산(七寶山)에는 ‘도불원인(道不遠人)’, 상두산(象頭山)에는 ‘산명수류(山明水流)’, 백운대(白雲臺)에는 ‘유수불부(流水不腐)’라고 새겼다. <출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_한국학 중앙연구원>

 

 

性者心之理 心者性之器(동초 김석곤의 성명이 없다.)
秀堂 金敎潤, 雲樵 高炳斗, 金彰坤

 

一經一緯有誰知 : 날줄이 하나이면 씨줄도 하나임을 누가 있어 알겠는가
雖由縱橫亦不知 : 비록 종횡으로 오고 가더라도 또한 알지 못할 것이네
疑惑人人莫深究 : 의심하고 수상히 여기는 사람들아 깊이 연구하지 마소
相從織者自然知 : 베 짜는 이와 친하게 지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네


東樵又題 동초가 또 짓다.

 

 

頭流萬疊 東樵金晳坤書 乙丑九月 : 만겹의 두류산(첩첩 산중 두류산) 동초김석곤서 을축(1925년)9월

 

▶ 頭流萬疊山(두류만첩산)과 頭流萬疊(두류만첩)

 

頭流萬疊(두류만첩)은 석각이 마모되어 마지막 글자의 판독이 불가능하다. 頭流萬墨(두류만묵)은 어휘가 생경스럽다. 화개면지의 설명(지리산의 모든 시서를 대표한다는 뜻인지 두류만묵(頭流萬墨)이라 했다.)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두류산을 찾아오는 많은 소인묵객(騷人墨客)'이라는 의미인가. 개인적인 생각은 頭流萬疊(두류만첩)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뇌계(㵢谿) 유호인(兪好仁)과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의 시문에 頭流萬疊山(두류만첩산)과 頭流萬疊(두류만첩)의 시어가 보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기담(妓潭)에서 영신봉이 보인다.(관련 시는 붙임 자료 3에 첨부)

 

 

사진 출처 : 정읍사람들

 

 

서예대자전의 疊자와 墨자

 

 

독가
전답의 석축
주막터

오늘 답사로 유몽인 길 전구간의 답사를 마쳤다. 새벽 4시 반에 대전을 출발하여 구례에 도착할 즈음 일출을 보았다. 답사를 마치고 집에 도착하자(13:30) 비가 한 줄기 쏟아지기 시작했다. 2020년 1월 7일에 시작한 유몽인 길 답사는 여러 산친들의 도움으로 비교작 쉽게 풀어나갔다. 구간마다 끊어서 부분 답사를 하였으니 전구간을 이어서 일괄 답사를 할 계획이다. 백장사에서 와운 구간을 안내한 산내의 신강님, 벽에 부딪칠 때마다 구원 투수를 자청한 산영 曺교수님과 칠성님, 서복연구회 문호성 회장님, 확인과 검증 답사를 함께 해주신 일정(一丁) 민병태 선생님과 관리공단 조봉근 주무관, 구례에서 남원 구간을 함께한 지리산아님, 섬진강 와룡정을 먼저 선답하신 순천산님, 남창(南倉) 자료를 공유해 주신 지리산 마실 조용섭 이사장님과 그동안 함께한 여러 산친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끝으로 유몽인길 복원 소식에 이호신 화백님이 보내주신 격려의 휘호 문구를 소개한다. 『길은 걷는 자가 주인』 끝.

 

 

길은 걷는 자가 주인(이호신 화백님)

 

♣ 이호신 화백님의 설명

 

구름은 나그네 길을,
꽃길은 걷는 자에게 걸음마다

꽃이 피어난다는 역설의 의미지요.(210803)

 

 

 

▶ 붙임 참고 자료(유람록과 관련 시)

 

1. 1611년 유몽인(柳夢寅)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

 

○ 4월 6일 을해일. 드디어 홍류동(紅流洞)으로 내려가 시내를 따라갔다.[遂下紅流洞. 竝溪而行.] 시냇가에 불룩 나온 높은 언덕이 보였는데, 의신사의 승려가 사정(獅頂)이라고 하였다. 푸른 소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맑은 시냇가로 가서 초록 이끼를 깔고 앉았다. 이에 비파로 영산회상(靈山會上)과 보허사(步虛詞)를 연주하고, 범패(梵唄)로 그에 맞춰 춤을 추고, 징과 북의 소리가 그와 어우러졌다. 평생 관현악을 들어보지 못한 깊은 산 속의 승려들이 모두 모여들어 돋움 발로 구경하며 신기하게 여겼다. 기담(妓潭) 가로 옮겨 앉으니 고인 물은 쪽빛처럼 새파랗고, 옥빛 무지개가 비스듬히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거문고, 비파 같은 소리가 숲 너머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른바 홍류(紅流)사영운(謝靈運)의 시 돌층계에서 붉은 샘물 쏟아지네石磴射紅泉라는 구절에서 취한 것인데, 이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홍천(紅泉)은 단사(丹砂) 구멍에서 나오는 것이니 홍류라는 이름은 선가(仙家)의 책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지금 내가 기담(妓潭) 가로 옮긴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진경(眞境)이 허물을 뒤집어씀이 심하구나.이에 두 승려가 작별을 고하였다. 나와 순지는 이별을 애석해하였다. 그들을 데리고 함께 유람하고 싶었으나, 두 승려가 말하기를,합하를 모시고 내려가 시냇가에서 노닐고 싶지만 속세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꺼려집니다.”라고 하여서, 시를 소매 속에 넣고 떠났다.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니 두 사람의 지팡이가 나는 듯하더니 이내 그들의 자취가 보이지 않았다.이곳을 떠나 내려가다가 한 줄기 시냇물과 한 맑은 연못과 한 무더기 봉우리를 만나 바위에 걸터앉아 시를 읊조렸다.

 

注 영산회상(靈山會上) : 불교의 음악인 ‘영산회상곡’의 준말. 석가모니불이 설법하던 영산회의 내용을 노래한 곡으로 조선 세종 때 지은 것이다. 보허사 : 「보허자」의 다른 이름. 조선() 영조() 이후()부터 쓰였는 데, 순조() 때 이 이름의 거문고 악보()가 전()해져 「관악보허자」에 상대()하여 「현악보허자」라고도 함.

 

 

2. 1651년 오두인(吳斗寅)의 두류산기(頭流山記)

 

114, 그 해가 무오년(1618년)이라면 지금부터 30여년 전이다. 지난날의 장엄하고 화려한 사찰이 여우와 토끼가 노는 터로 바뀌었으니 참으로 30년 동안의 하나의 큰 변()이다. 이리저리 배회하면서 구경하는 동안에 서러운 감회가 계속 일어났다. 절 앞의 계석은 산중에 으뜸인데 각은 '능파각'라고 하고 대는 '세이대'라고 한다.(寺前溪石. 甲於山中. 閣曰凌波. 臺曰洗耳)[수정] 계단 좌측에 동불상 하나가 가시덤불 사이에 서 있으며, 그 좌측에도 역시 이런 동불상 하나가 있다. 옛적에 절의 좌우에 나란히 세워 둔 것이다. 왼쪽으로 길을 틀어 뒷 산등성이 오르니 길이 더욱 험하고 산세가 더욱 기이하다. 사자곡(獅子谷)에서 10리 정도 가니 넓은 계곡에 물이 세차게 뿜어져 흘러 깊은 못을 하나 이루었는데 기담(妓潭)이라 한다. 바위를 쓸고 앉아서 데리고 온 기생에게 노래를 부르도록 시켰다. 함께 놀러온 여러 사람도 뒤이어서 모두 당도하였다. 서로 한 차례 씩 심호흡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였다.

 

 

 

3. 성여신의 崔文昌贊과 유호인의 登龜寺坦夷堂

 

 

 

登龜寺坦夷堂(등구사 탄이당)

 

                      유호인(兪好仁, 1445~1494)

 

好在頭流萬疊山 : 좋은 경치 만겹 두류산에 있기에

暫偸休暇此登攀 : 잠시 틈을 내어 여기에 올랐노라.

金堂玉室尋前約 : 금당과 옥실 옛 언약대로 찾으니

碧嶺丹崖摠舊顏 : 푸른 고개와 단애가 옛 안면일세.

歲聿蒼茫鴻北去 : 해가 저물니 기러기 북으로 날고

黃花搖落客南還 : 황국 질때 객이 남으로 돌아오네.

鑾坡遠與雲林隔 : 난파(鑾坡)가 멀리 운림(雲林)에서 떨어지니

兩地歸來鬢已斑 : 두 곳에서 돌아오니 머리가 이미 반백이네.

 

출처 : 㵢谿集卷之六 / 七言律詩

 

金堂 玉室 : 부처를 모신 법당, 鑾坡(난파)예문관(藝文館). 雲林(운림) : 평안북도 운산군 상원리의 동쪽 향산군과의 경계에 있는 마을.

 

이 시는 유호인의 뇌계집(㵢谿集) 6登龜寺坦夷堂偶得三律錄似主人(등구사탄이당우득삼율녹사주인)이라는 제목의 3수중 첫번째 시이다.

 

 

崔文昌贊(최문창찬)

 

                     성여신(成汝信, 1546~1632)

 

風儀秀麗 : 풍모와 위의가 수려하며

精敏好學 : 정밀하고 민첩하여 학문을 좋아하였네.

仙風超塵 : 신선의 풍치는 풍진을 초탈하고

道骨脫俗 : 도인의 풍골은 세속을 벗어났네.

十二入唐 : 열두 살에 당나라에 들어가

尋師問業 : 스승을 찾아 학업을 물었네.

十八登第 : 열여덟 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歷授華職 : 화려한 관직에 두루 제수되었네.

草檄高幕 : 고변의 군막에서 격문을 지으니

老賊裭魄 : 늙은 도적은 넋이 달아났다네.

文章耀世 : 문장은 세상에 빛나고

名振中國 : 이름은 중원에 떨쳤네.

奉詔東還 : 조서 받들고 신라로 돌아오니

年二十八 : 당시 나이 이십 팔세였네.

遭時昏濁 : 시대를 만난 것이 혼탁하여서

無處寄跡 : 자취를 맡길 거처가 없었네.

倻山千丈 : 천 길 높은 가야산에 들어가고

頭流萬疊 : 만 겹 깊숙한 두류산에 의탁했네.

蟬蛻塵紛 : 어지러운 속세에서 허물을 벗고

嘯詠雲壑 : 구름 낀 골짜기에서 시를 읊었네.

題詩石古 : 시를 새긴 바위는 오래되었고

四字門矗 : 넉 자 새긴 석문은 우뚝하구나.

遺風仙跡 : 남긴 풍도와 신선의 자취

千載如昨 : 천 년이 지나도 어제 일 같구나.

 

출처 : 부사집 제4東方諸賢贊 1632(壬申) 二十首

 

 

 

※ 注意 저의 주관적인 견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