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어우당길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남원 관아에서 백장사까지

도솔산인 2021. 4. 17. 19:50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남원 관아에서 백장사까지

 

 

▣ 일 시 : 2021년 04월 15일(수)

▣ 코 스 : 남원용성초교-목동재간당-산동면사무소-번암-황산비전-혈암

▣ 인 원 : 2명(김문광님)

▣ 날 씨 : 맑음

 

 

▶1611년 어우당 유몽인 선생의 [두류산록] 지리산 유람일정

 

• 2/23(한식) : 한식이 가까울 무렵, 승주(昇州) 수령 순지(詢之) 유영순(柳永詢)과 재간당에서 만나 두류산 유람 약속.
• 3/27 : 승주(昇州:순천) 수령 순지(詢之) 유영순(柳永詢) 만남
• 3/28 : 남원관아→김화의 재간당(1박)
3/29 : 재간당→반암→운봉 황산 비전→인월→백장사(1박)

4/1 : 백장사황계영대촌흑담환희령내원정룡암(1)

4/2 : 정룡암월락동황혼동와곡갈월령영원암장정동실덕리군자사(1)

4/3 : 군자사의탄촌원정동용유담마적암송대두류암(1)

4/4 : 두류암석문옹암청이당영랑대소년대천왕봉향적암(1)

4/5 : 향적암영신암의신사(1)

4/6 : 의신사홍류동신흥사만월암여공대쌍계사(1)

4/7 : 쌍계사불일암화개동섬진강와룡정남원 남창(1)

4/8 : 남창숙성령남원부 관아

 

▣ 동행 : 龍城 수령 於于堂 柳夢寅, 承州 수령 詢之(순지) 柳永詢, 在澗堂(재간당) 進士 金澕(김화), 생질 [申尙淵, 申濟] 雲峰 수령 伯蘇(백소) 李復生(이복생)

 

 

1. 두류산 유람을 떠나기로 지인들과 약속하고 지리산 백장사에 들다.

 

나는 벼슬살이에 종사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지낸 것이 벌써 23년이다. 스스로 헤아려보니 외람되게 청현직(淸顯職 : 지평 헌납 장령 등)에 있으면서 임금 계신 곳에 출입한 것도 오래되었으니, 불초한 나에게는 너무 과분한 것이었다. 이제 늙은 데다 잔병이 잦아지니 물러나 유유자적하는 것이 마땅하다. 나는 평소 산과 바다를 즐겨 유람하였으며 귤유자매화대나무 등이 어우러진 시골에서 살고 싶었다.만력(萬曆) 신해년(1611, 광해군 3) 봄에 벼슬을 사양하고 식구들을 거느리고서 고흥(高興)의 옛날 집으로 향하려 하였는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조정의 대부들이 내가 아직 상늙은이가 아닌데도 미리 물러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용성(龍城:남원)의 빈자리에 나를 추천하여 은혜롭게도 수령으로 임명되었다. 나는 용성은 고흥과 1백 리도 채 안되는 거리이므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행장을 풀어놓고 쉬어가는 것도 무방하리라고 생각하였다.

 

 

남원관아(남원용성초교)

 

2월 초에 임지로 부임했는데 용성은 큰 고을이라 공문을 처리하는 데 정신없이 바빴다. 게으르고 느긋한 나로서는 감당할 만한 일이 아니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식(寒食)이 가까울 무렵, 승주(昇州:순천) 수령 순지(詢之) 유영순(柳永詢) 이 용성의 목동(木洞) 선영에 성묘하러 왔는데, 나는 불초한 내가 이 고을의 수령으로 있으니 나보다 선배인 순지에게 예모를 갖추어야 겠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목동 수용암(水舂巖) 근처 수석의 빼어난 경관에 꽤나 마음을 기울였다. 진사 김화(金澕)가 그곳에 살고 있는데, 집의 이름을 재간당(在澗堂)이라 하였다. 재간당은 두류산 서쪽 기슭에 있어, 서너 겹으로 둘러쳐진 구름 낀 봉우리를 누대 난간에서 마주 바라볼 수 있었다.두류산은 일명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하여, 두보(杜甫)의 시에, ‘방장산은 바다 건너 삼한에 있네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 주석에 방장산은 대방국(帶方國) 남쪽에 있다.’고 되어 있다. 지금 살펴보니, 용성의 옛 이름이 대방’(帶方)이니 그렇다면 두류산은 곧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다. 진시황(秦始皇)과 한 무제(漢武帝)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삼신산을 찾게 하느라 쓸데없이 공력을 허비하였는데, 우리들은 앉아서 이를 구경할 수 있다.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 내가 술잔을 들고 좌중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나는 올 봄에 두류산을 마음껏 유람하여 오랜 소원을 풀고 싶은데 누가 나와 유람하시겠는가?” 라고 하였다. 순지가 말하기를,내가 영남 지방의 감사로 나왔을 적에 이 산을 대략 유람했지만 종자들이 너무 많아서 한 방면도 제대로 구경하지 못하다가 내가 승주로 부임해오게 되어 우연히 이 산과 이웃하게 되었소.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지만 어찌 혼자 쓸쓸히 유람을 할 수 있겠소? 그대와 유람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외롭지 않을 것 같소.”라고 하였다. 드디어 굳게 약속하고 술자리를 파하였다. 그 뒤에 여러 번 서신을 교환하며 재간당(在澗堂)에서 만날 날을 기약하였다.

 

 

수용암/재간당
재간당1
재간당2
고남산
88고속도로 아래로
황산비전

○ 3월 27일 정묘일. 순지가 약속한 날에 도착하였다. 28일 무진일. 처음 약속했던 장소에서 다시 모여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기생들이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여 모두들 실컷 취하고 한밤중이 되도록 술자리가 이어져 그대로 시냇가 재간당에서 잤다. 29일 기사일. 수레를 준비하도록 하여 서둘러 떠났는데, 순지는 술이 덜 깨 부축해 수레에 태웠다. 재간당 주인 김화(金澕)와 순창(淳昌)에 사는 내 집안 생질 신상연(申尙淵)과 천한 몸에서 난 인척 생질 신제(申濟)도 나를 따라 동쪽으로 향했다. 요천(蓼川)을 거슬러올라 반암(磻巖)을 지났다. 온갖 꽃이 만발하는 철인 데다 밤새 내린 비가 아침에 개이니, 꽃을 찾는 흥취가 손에 잡힐 듯하였다. 정오 무렵 운봉(雲峯) 황산(荒山)의 비전(碑殿)에서 쉬었다.

 

 

황산

 

만력 6(1578, 선조 11) 조정에서 운봉 수령 박광옥(朴光玉)의 건의를 받아들여 비로소 비석을 세우기로 의논하였다. 그리하여 대제학 김귀영(金貴榮) 이 기문(記文)을 짓고,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이 글씨를 쓰고, 판서 남응운(南應雲)이 전액(篆額)을 썼다. 지난 고려 말 왜장 아기발도(阿只拔都)가 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영남 지방을 침략하였는데, 그가 향하는 곳은 모두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 나라의 참위서(讖緯書:비결서)황산에 이르면 패하여 죽는다라고 하였는데, 산음(山陰) 땅에 황산(黃山)이란 곳이 있어 그 길을 피해 사잇길로 운봉 땅에 들이닥친 것이다. 그때 우리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께서 황산의 길목에서 기다리다 크게 무찌르셨다. 지금까지 그 고을 노인들이 돌구멍을 가리키며, ‘옛날 깃발을 꽂았던 흔적이라고 한다. 적은 군사로 감당하기 어려운 적과 싸워 끝없는 터전을 우리에게 열어주셨으니, 어찌 단지 하늘의 명과 인간의 지모 이 둘만을 얻어서이겠는가? 그 땅의 형세를 살펴보면 바로 호남과 영남의 목을 잡는 형국이다. 길목에서 치기에 편한 것이, 바로 병가(兵家)에서 말하는 적은 수로 많은 수를 대적하는 방법이다.지난 정유년(1597, 선조 30) 왜란 때, 양원(楊元) 등은 이 길을 차단할 줄 모르고 남원성을 지키려다 적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 어찌 땅의 이로움을 잃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혈암(피바위)
혈암(피바위)

비석 곁에 혈암(血巖)이 있었는데 이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이 바위에서 피가 흘렀는데, 끊이지 않고 샘처럼 솟아났다. 이 사실을 서울에 알렸는데 답변이 오기도 전에 왜적이 남쪽 변경을 침범하였다라고 하였다. ! 이곳은 태조대왕께서 위대한 공을 세우신 곳이니, 큰 난리가 일어나려 할 때 신이 알려준 것인가 보다.

 

 

백장사[ 2020.01.007(재간당에서 백장사까지)]

운봉 수령 백소(伯蘇) 이복생(李復生)이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미리 역참(驛站)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술을 몇 순배 돌리고 나서, 곧바로 일어나 함께 길을 떠났다. 시내를 따라 10여 리쯤 가니 모두 앉아 구경할 만한 곳이 있어 수레에서 내려 시냇가에 앉아 쉬었다. 북쪽으로부터 산세는 점점 높아지고 길은 점점 험난해져, 말이 끄는 수레에서 남녀(藍輿)로 바꾸어 타고 백장사(百丈寺)로 들어갔다. 순지는 숙취가 아직 풀리지 않아 먼저 불전(佛殿)으로 들어가 누웠는데, 코를 고는 소리가 우레처럼 들렸다.어린아이가 꽃 두 송이를 꺾어 가지고 왔다. 하나는 불등화(佛燈花)라고 하는 꽃인데 연꽃만큼 크고 모란꽃처럼 붉었다. 그 나무는 두어 길이는 됨직하게 높았다. 다른 하나는 춘백화(春栢花)였는데 붉은 꽃받침은 산에서 나는 찻잎처럼 생겼고 크기는 손바닥만하였다. 병풍과 족자에서 본 것과 같았다. 절의 위쪽에 작은 암자가 있는데, 천왕봉을 바로 마주보고 있어 두류산의 참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 요천(蓼川)은 섬진강의 지류들 중 하나로서 남원시의 중앙부를 지나 남서부의 금지면에서 섬진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이다.하천 주위에 여뀌꽃이 많이 핀다하여 蓼(여뀌 요)川이라 한다. * 백장사(百丈寺) : 실상사에서 남원 인월 방향 국도로 3킬로미터 정도 가다가 백장휴게소가 있는 매동마을에서 우측 산도로 1킬로미터 정도 올라간 곳에 위치하고 있다.

 

 

☞ 유람록 출전 : 한국문화 콘텐츠 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