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어우당길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을 좇아서(내령~부운)

도솔산인 2021. 1. 22. 00:29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을 좇아서(내령~부운)

 

 

41일 경오일. 동행한 사람들은 각자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고 새끼로 동여매고서 남쪽으로 하산하였다. 물가 밭두둑을 따라 굽이굽이 난 길을 가니 큰 냇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바로 황계(黃溪, 橫溪?)의 하류였다. 동네가 넓게 열리고, 돌이 구를 정도로 물이 세차게 흘렀다. 북쪽은 폭포이고 아래쪽은 못인데, 못 위의 폭포수(소동폭포?)는 노하여 부르짖는 듯 쏟아져 내리며 벼락이 번갈아 치는 듯한 광경이었다. ! 얼마나 장대한 모습인가. 길을 가다보니 푸른 소나무는 그늘을 드리우고 철쭉은 불타듯이 붉게 피어 있었다. 남여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 서서 쉬었다. 골짜기에 두세 집이 있는데 영대촌(嬴代村, 靈臺村?)이라 하였다. 닭이 울고 개가 짖는 마을로, 깊은 골짜기와 많은 봉우리들 사이에 있었다. 참으로 하나의 무릉도원이었다. 이 마을이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구나. 한. 곳에 이르니 높은 언덕에 가파른 협곡이 나타났다. 양쪽 언덕으로 길을 내놓았는데 협곡이 매우 깊었다. 그 협곡 안은 모두 돌이었다. 시냇가에도 큰 돌이 수없이 널려 있었다. 이곳의 이름을 흑담(黑潭)이라 하였다. 나는 웃으며 말하기를,세상에 단청(丹靑)의 그림을 좋아하여 자신의 솜씨를 최대한 발휘해 화려하게 꾸며놓은 사람이 있었다네. 지금 이곳을 보니, 돌이 희면 이끼가 어찌 그리 푸르며 물이 푸르면 꽃이 어찌 그리도 붉은가? 조물주도 한껏 화려함을 뽐냈으니 그 화려함을 누리는 자는 산신령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산유화(山有花) 녹복(祿福)은 비파를 타게 하고, 생이(生伊)는 젓대로, 종수(從壽)청구(靑丘)는 태평소(太平蕭)를 불게 하였다. 음악이 산골짜기에 울려 메아리치고, 시냇물 소리와 서로 어우러지니 즐거워할 만하였다. 어린아이에게 통을 열어 먹과 붓을 준비하게 하고, 암석 위에서 시를 지었다. 황계폭포(黃溪瀑布, 橫溪?)를 지나 환희령(歡喜嶺)을 넘어 이어진 30리 길이 모두 푸른 노송나무와 단풍나무였으며, 비단 같은 날개를 가진 새들이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날아다녔다. 내원(內院)에 이르니 두 줄기 시냇물이 합쳐지고, 꽃과 나무가 산을 이룬 곳에 절이 세워져 있었다.

 

 

1. 歡喜嶺(환희령) : 불법을 듣고 믿음을 얻음으로써 갖게 되는 마음의 기쁨을 얻기 위해 넘는 고개.

2. 歡喜地(환희지) : 십지(十地)의 처음 단계. 보살이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의 하나로, 번뇌를 끊고 마음속에 환희를 일으키는 경지.

3. 內院(내원) : 도솔천의 내부로, 미륵보살이 사는 곳.

4. 獅子項(사자목) : 높은 바위 사이로 좁다란 길이 이어지는데, 겨우 사람 2명 정도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

5. 獅子座(사자좌) : 부처님이 앉는 자리, 부처님은 인간 세계에서 존귀한 자리에 있으므로 짐승의 왕인 사자에 비유함.

6. 米洞(미동) : 싸래골, 싸라기의 방언. 농사가 잘되지 않아 도정 과정에서 싸라기가 많이 나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7. 伴仙(반선) : 신선과 짝하다는 뜻으로 신선이 사는 곳.

8. 開仙(개선) : 신선이 마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지리산(智異山)기슭 산내(山內)면 부운(浮雲)리 개선마을.

9. 黑潭(흑담) : 중국 장안(長安)의 남쪽에 있는, 중난 산(終南山) 기슭에 있는 못. 물이 깊고 거뭇하여, 예로부터 비가 오기를 비는 곳이었다.

10. 嬴代村(영대촌) : 靈臺村(?), 橫溪 : 黃溪(?)

 

 

 

지도 조박사님
신강님 답사 트랙

※ 신강님 의견 : 몇년 전, 내령 이장님과 함께 걸었던 옛길 지도입니다. 미동(싸리골)에 대한 이야기는, 싸리나무가 많았다, 배고픈 시절 싸리나무가 쌀처럼 보였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반선에 대해서도 半仙이라고 지칭하고, 익히 아시는 반만 신선이라는 전설도 있네요...

 

* 장재(張載: 1020~1077)는 중국 송나라 시대의 사상가이다.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자는 자후(子厚)이다. 봉상 미현의 횡거진(橫渠鎭) 출신이었기 때문에 횡거 선생(橫渠先生)이라고 호칭된다. 존칭하여 장자(張子)라고 불린다.

 

장횡거(張橫渠·1020∼1077)는 송나라 때 높은 학식과 명강연으로 이름을 날린 학자다. 어느 저녁 정씨 성을 가진 젊은 형제가 그를 찾아왔다. 이들은 함께 유교 경전인 주역을 논했다. 다음 날 장횡거는 강의할 때 깔고 앉던 호랑이 모피를 거두고(撤皮)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난날 강의한 것은 도를 혼란하게 한 것이니라. 두 정씨가 근래에 왔는데, 도를 밝게 알고 있어 내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더라. 그대들은 그를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 그는 이 말을 남기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호피는 학문을 강론하는 스승의 자리를 뜻하는 상징적 물건이다. 장횡거는 당대 최고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였다.저서 ‘정몽(正蒙)’에서 “땅이 하늘을 따라 왼쪽 방향으로 돈다”며 별과 달의 움직임에 대해 상세한 묘사를 했을 정도로 뛰어났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한 것보다 약 500년이나 앞선 것이다. 그런 그가 후배 정씨 형제의 능력을 한눈에 알아보고 자리를 선뜻 내주고 떠나갔다는 일화는 중국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학자들의 귀감이 됐다.

 

실학자 이덕무(1741∼1793)도 “호피를 걷어내는 일에 인색하지들 말게”라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횡거철피’ 외에도 동양의 역사서와 경전에는 제때 물러남으로써 자신과 가족을 지키고 명예를 높였던 이들의 기록이 무수히 많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부족함을 모르고 그칠 줄 모르는 어른이 많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오히려 더 물러서지 않는 어르신도 적지 않다.

 

권력의 자리를 단숨에 걷어낼 줄 알았던 장횡거의 소탈한 현명함이 이런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준다. 그는 물러난 후에도 앞서 언급한 ‘두 정씨’인 정호(程顥·1032∼1085), 정이(程이·1033∼1107)와 함께 송나라 유학, 즉 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대학자로 존경을 받았다.

 

[출처] 횡거철피(橫渠撤皮)|작성자 moonkok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