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어우당길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呂公臺(여공대)

도솔산인 2021. 7. 27. 20:09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呂公臺(여공대)

 

 

▣ 일 시 : 2021년 07월 29일(목)

▣ 코 스 : 여공대-만월암-기담-와룡정-남창

▣ 인 원 : 3명

▣ 날 씨 : 맑음

 

 

1472년 김종직의 아홉 모롱이길, 1610년 박여량의 초령길에 이어서 1611년 유몽인의 환희령과 와룡정 등 매 고비마다 단톡방에서 의사소통과 토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유몽인이 1611년 4월 5일 의신사에서 자고 4월 6일 홍류동으로 내려오면서 사정(獅頂)기담(妓潭), 만월암(滿月巖)여공대(呂公臺)를 지난다. 2주 전 일요일 칠불암을 다녀오면서 계곡을 내려다보았지만 숲이 우거져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차를 돌려 황산비전과 혈암(피바위)을 보고 백장사에서 매동마을로 내려가는 옛길을 확인하였다.

 

1611년 유몽인길의 답사가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영대촌에서 흑담과 환희령, 내원에서 갈월령, 영원사에서 사자항과 장정동, 용유담에서 마적사, 두류암에서 석문과 옹암, 의신사에서 사정과 기담, 섬진강의 와룡정, 남창에서 숙성치를 넘었다. 화개동천에서 만월암과 여공대를 찾으면 유몽인의 유람록에 나오는 지명은 거개(擧皆) 해결하는 셈이다. '물에 비친 보름달을 볼 수 있는 바위, 만월암(滿月巖)과 '청산에 해가 저물도록 머무르며, 흥겨움에 내가 내가 아님을 알았다.'라는 여공대(呂公臺)는 어디일까.

 

홍류교에서 쌍계사 사이에 만월암과 여공대가 있다. 답사 1주일 전부터 유몽인의 유두류산록과 두류록 기행시를 발췌하여 단톡방에 올리고, 1917년 오만분지일 지도의 옛길과 카카오 맵 위성지도에서 바위와 소(沼)가 있는 사진을 캡춰하여 공유하였다. 이름명(名)의 자원은 从夕也, 从口也이다. 夕은 달이 산 위로 절반쯤 떠오른 모양으로 달월(月)의 획줄임(省體, 夕)이다. 명(名)의 자원은 밤(夕)이 되었을 때 상대와 말하기(口) 위해 이름(名)을 지은 것으로 이해한다. 사람의 이름이 의사 전달과 소통을 위해 만들어졌듯, 지명은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을 보다 원활하게 하기위해 만들어진 어휘이다. 여공대와 만월암과 기담으로 추정되는 곳의 공통점은 인마가 이동하는 갈림길이라는 점이다.

 

이번 답사에서 여공대, 만월암, 기담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에 구례의 용두리의 와룡정과 구남창의 위치로 추정되는 광의초등학교를 둘러보았다. 이제 남은 것은 유몽인의 사정(獅頂)과 오두인의 사자곡(獅子谷)이다. 선인들의 옛 기록을 읽고 답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금은 생각을 나누고 함께하는 분들이 있어 답사가 한결 수월하다. 처음 가는 길은 누구나 어렵다. 초벌 답사에서 정확한 답을 찾을 수는 없다. 내게 묻고 내가 답을 하여 내가 이해하고 납득이 갈 때까지 답사가 이어질 것이다.

 

유람록 복원을 하면서 '지리산 인문학은 내가 최고다.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라는 생각은 금물이다. 시대가 바뀐 줄도 모르고 고루한 고정관념을 아교로 붙이고 고집하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누구나 오류는 있을 수 있다. 오류를 알았으면 바로 인정하고 수정해야 한다. 선답자들에게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얼마 전 광주의 ○○님이 지리산에서 지리 99 회원을 만났는데, '왜 도솔산인과 산행을 하느냐?'라는 황당한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자기들과 다른 의견을 냈다는 이유로 강퇴시키는 것도 모자라, 아직도 뒤에서 이렇게 저열()한 짓들을 한다. 끝.

 

 

 

▶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홍류교(紅流橋)를 건너 만월암(滿月巖)을 지나 여공대(呂公臺)에 이르러 앉았다. 깊은 못 가에 나가 구경을 하고, 흐르는 개울가에 나가 물소리를 들었다. 갓끈을 풀어 씻기도 하고, 손으로 물을 움켜 입을 헹구기도 하였다.

 

 

▶ 유몽인의 두류록(2)

 

呂公臺(여공대) - 유몽인(1559~1623)

 

樹色溪聲一石㙜 : 신록의 나무숲에 물소리 들리는 바위라

靑山日仄不知廻 : 청산에 해 저물도록 돌아갈 줄 모르네.

陶然忽覺吾非我 : 활홀함에 문득 내가 아님을 깨달았으니

無慮何須更死灰 : 생각이 없다고 어찌 고목사회처럼 하리.

 

 

注 呂公臺(여공대) : 신흥교에서 쌍계사로 내려가는 시내에 있는 바위를 가리킨다. 이름으로 미루어 보아 여공(呂公, 姜太公)이 낚시하던 바위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고목사회(枯木死灰) : 불가에서 쓰는 말로 말라죽은 나무나 타고 남은 재처럼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경지를 가리킨다.

 

출처 : 선인들의 지리산 기행시(최석기 외)

 

 

呂公臺(여공대) - 유몽인(1559~1623)

 

樹色溪聲一石臺 : 석대에서 숲 바라보고 계곡 물소리 듣느라
靑山日仄不知廻 : 청산에 해가 기울도록 돌아갈 줄 모르노라
陶然忽覺吾非我 : 흥에 겨워 문득 내가 내가 아님을 알았으니
無慮何須更死灰 : 굳이 식은 재처럼 사념 없을 필요 있으리

 

[주-D001] 식은 재 : 《장자》 〈제물론(齊物論)〉에 “형체를 진실로 말라 죽은 나무처럼 할 수 있으며, 마음을 진실로 식은 재처럼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데서 온 말로, 마음이 외물에 전혀 동요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출처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장유승 최예심 (공역) | 2018

 

 

 

 

 

남도대교

 

1.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여공대(추정)

 

가. 모암마을 아래 계곡가에 위치함.(소년바우 있는 곳)

나. 바위에 세로로 된 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 석각

다. 통나무다리를 놓았던 약작(略彴)을 설치했던 홈이 있는 바위

라. 다리의 교각을 세우기 위해 바위에 깊은 구멍을 파놓은 흔적 발견

마. 여근석 아래 제단이 있고 제단 위에 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 석각

바. 여공대는 쌍계사에서 칠불사 가는 길목, 연곡사로 넘어가는 갈림길 사거리

 

 

 

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
약작(略彴)을 설치했던 바위 홈
약작(略彴)을 설치했던 바위 홈 I
약작(略彴)을 설치했던 바위 홈 II
교각을 설치했던 바위 구멍 I
교각을 설치했던 바위 구멍 II
교각을 설치했던 바위 구멍 IIl
교각을 설치했던 바위 구멍 IIlI
학생들 서있는 위치가 교각 바위 구멍
여근석(女根石)
여근석 아래 제단 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 석각
소년바우

 

 

2.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만월암(추정)

 

홍류교에서 얼마쯤 내려오면 바위를 절개하여 도로를 낸 튀어나온 지점에 있다. 지적도의 옛길도 현 도로이다. 난간을 넘어 바위에서 내려다보면 잔잔한 계곡물이 보인다. 동쪽으로 산이 높다. 보름달이 뜨면 물에 비친 보름달을 볼수 있는 바위로 이해가 된다. 실제 그런지 확인이 필요하다.

 

 

 

 

3.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기담(재답사가 필요함)

 

가. 1917년 조선의 지형도에 물을 건너는 곳에 위치함.

나. 정류석 동초 김석곤의 석각-단천계곡과 세이암, 의신 방향 갈림길

다. 유몽인의 사정(獅頂)과 오두인의 사자곡(獅子谷)이 같은 지명일 가능성

 

라. 1651년 오두인 두류산기(頭流山記)

 

114, 그 해가 무오년(1618)이라면 지금부터 30여년 전이다. 지난날의 장엄하고 화려한 사찰이 여우와 토끼가 노는 터로 바뀌었으니 참으로 30년 동안의 하나의 큰 변()이다. 이리저리 배회하면서 구경하는 동안에 서러운 감회가 계속 일어났다. 절 앞 계곡 바위에는 산 속에서 으뜸가는 건물이 있는데 능파대(凌波臺)세이사(洗耳寺).(국역오류) 절 앞의 계석은 산중에 으뜸인데 각은 '능파'라고 하고 대는 '세이'라고 한다.(寺前溪石. 甲於山中. 閣曰凌波. 臺曰洗耳)[수정] 계단 좌측에 동불상 하나가 가시덤불 사이에 서 있으며, 그 좌측에도 역시 이런 동불상 하나가 있다. 옛적에 절의 좌우에 나란히 세워 둔 것이다. 왼쪽으로 길을 틀어 뒷 산등성이 오르니 길이 더욱 험하고 산세가 더욱 기이하다. 사자곡(獅子谷)에서 10리 정도 가니 넓은 계곡에 물이 세차게 뿜어져 흘러 깊은 못을 하나 이루었는데 기담(妓潭)이라 한다. 바위를 쓸고 앉아서 데리고 온 기생에게 노래를 부르도록 시켰다. 함께 놀러온 여러 사람도 뒤이어서 모두 당도하였다. 서로 한 차례 씩 심호흡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였다.

 

 

능인암과 은정대 세이암, 의신 갈림길 I
주변 암반과 소

 

 

 

4.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와룡정(추정)

 

용두리의 유래 : "용두"라는 지명은 전국에 많이 있고 대부분 산맥에서 물로 이어진 곳의 지명이다. 노고단의 기운이 월령봉능선을 타고 섬진강까지 이어지는 끝자락에 자리 잡은 용두리 또한 그런 지명에 부합되는 곳이다. 길지(吉地)라 그런지 배틀재 이후로는 고금의 봉분이 산재되어있고 섬진강변까지 이어진 평지에 용두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주변에 용두재 저수지와 용호정이 자리하고 있다.(토산 칠성님) 현재 용두정 인근를 와룡정 터로 추정하고 있다. 노고단 기운이 월령봉능선을 타고 섬진강으로 내려와 암반이 강물 속으로 뻗어있다. 강물 위로 드러난 바위가 용이 물속에 엎드려있는 형상이다.

 

 

가. 유몽인(柳夢寅)의 두류록 기행시 와룡정(卧龍亭)

 

巖居寥落兩三家 : 바위는 두어 집뿐인 쓸쓸한 곳에 위치하고

臺下江聲繚白沙 : 높은 대 밑 강물소리 백사장을 둘러 흐르네.

地暖南溟饒翠篠 : 남쪽 지방 따뜻하여 푸른 조릿대가 무성하고

山高方丈足靑霞 : 높고 높은 방장산엔 푸른 노을이 넉넉하네.

舟人捩柁叉銀鱖 : 뱃사공은 키를 틀어 은빛 쏘가리를 낚아채고

村女持鑱擷玉椏 : 시골 여인은 칼을 들고 옥빛 나물을 뜯는구나.

堪笑龍城五斗米 : 녹봉위해 남원에서 벼슬하는 신세 우습구나

堆床朱墨鬢成華 : 책상에 위 공문에 귀밑머리 허옇게 세었다네.

 

선인들의 지리산 기행시(최석기, 강정화)

 

 

나.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와룡정 부분)

 

○ 4월 7일 (불일암을 유람하고 쌍계사를 출발하여 화개를 지나), 정오 무렵 섬진강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 와룡정(臥龍亭)에서 쉬었다. 이 정자는 생원 최온(崔蘊)의 장원(庄園)이었다. 큰 둔덕이 강 속으로 뻗어 마치 물결을 갈라놓은 것 같았다. 말을 타고 반석 위로 나아가니 솜을 타놓은 듯 수백 보의 백사장이 보였다. 그 둔덕 위에 초당 서너 칸을 지어놓고 비취빛 대나무와 검푸른 소나무를 주위에 심어놓았다. 그림 같은 풍광이 둘러쳐져 초연히 속세를 떠난 기상이 있었다.

 

 

섬진강 물속의 와룡
섬진강 물속의 와룡

 

 

5.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남창(추정)

 

1611년 당시 현 구례군의 산동면(산동방)과 광의면(소의방)은 남원부 관할이었다. 쌍계사를 출발한 유몽인이 4월 7일 하룻밤 묵은 남창(南倉, 구남창)은 소의방(㪽義坊, 현 구례군 광의면)에 있었다.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신·구남창(新·舊南倉)에 대한 기록이 있다. 1750년 해동지도의 남원부 지도와 1871년 호남읍지(규12175) 남원부 지도를 보면 소의방(㪽義坊, 현 구례군 광의면) 지역에 구남창(舊南倉), 수지방(水旨坊, 현 남원시 수지면) 지역에 신남창(新南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원부의 구남창은 한말까지 존재했다.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是日宿于本府南倉'의 문구는 '이 날 이 고을(本府, 남원부)의 남창(南倉, 구남창)에서 묵었다.'로 이해가 된다. 구 남창의 위치를 지리산 마실 조용섭 이사장님께서 보내주신 자료[1752년 편찬된 용성지(龍城誌)]에 근거하여 산동방(山洞坊)으로 수정합니다.(2021.09.30)

 

 

▼1752년 편찬된 용성지(龍城誌)

 

구남창(舊南倉) : 남원부의 남쪽 40리 산동방(山洞坊)에 있다. 옛날에는 주리(舟里)의 동쪽 뒤 달촌(達村)의 북쪽에 두었다가 지금은 약수(藥水)의 동쪽으로 옮겼다. 도청(都廳) 2칸, 색리청(色吏廳) 2칸, 동고(東庫) 4칸, 서고(西庫) 4칸, 남고(南庫) 4칸, 대문 1칸, 감관(監官) 1인, 고자(庫子) 1명, 사령(史令) 2명을 두었다.

 

 

 

 

 

 

6. 기타 사진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7. 홍류동에 이르러 두루 구경한 후 쌍계사에 들다.)

 

6일 을해일. 드디어 홍류동(紅流洞)으로 내려가 시내를 따라갔다.[遂下紅流洞. 竝溪而行.] 시냇가에 불룩 나온 높은 언덕이 보였는데, 의신사의 승려가 사정(獅頂)이라고 하였다. 푸른 소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맑은 시냇가로 가서 초록 이끼를 깔고 앉았다. 이에 비파로 영산회상(靈山會上)과 보허사(步虛詞)를 연주하고, 범패(梵唄)로 그에 맞춰 춤을 추고, 징과 북의 소리가 그와 어우러졌다. 평생 관현악을 들어보지 못한 깊은 산 속의 승려들이 모두 모여들어 돋움 발로 구경하며 신기하게 여겼다. 기담(妓潭) 가로 옮겨 앉으니 고인 물은 쪽빛처럼 새파랗고, 옥빛 무지개가 비스듬히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거문고, 비파 같은 소리가 숲 너머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른바 홍류(紅流)사영운(謝靈運)의 시 돌층계에서 붉은 샘물 쏟아지네石磴射紅泉라는 구절에서 취한 것인데, 이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홍천(紅泉)은 단사(丹砂) 구멍에서 나오는 것이니 홍류라는 이름은 선가(仙家)의 책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지금 내가 기담(妓潭) 가로 옮긴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진경(眞境)이 허물을 뒤집어씀이 심하구나.이에 두 승려가 작별을 고하였다. 나와 순지는 이별을 애석해하였다. 그들을 데리고 함께 유람하고 싶었으나, 두 승려가 말하기를,합하를 모시고 내려가 시냇가에서 노닐고 싶지만 속세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꺼려집니다.”라고 하여서, 시를 소매 속에 넣고 떠났다.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니 두 사람의 지팡이가 나는 듯하더니 이내 그들의 자취가 보이지 않았다.이곳을 떠나 내려가다가 한 줄기 시냇물과 한 맑은 연못과 한 무더기 봉우리를 만나 바위에 걸터앉아 시를 읊조렸다. 신흥사(神興寺)에 이르니 동행한 사람들이 오래 전에 도착하여 누워 쉬고 있었다. 함께 시냇가 바위 위에 올랐다. 시냇물이 대일봉(大日峯), 방장봉(方丈峯) 사이에 흘러 나오는데, 우거진 숲이 하늘을 가리고 맑은 물이 돌을 굴렸다. 평평한 바위는 6, 70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바위 위에 세이암(洗耳巖)이라는 세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는데 누구의 글씨인지 모르겠다. 동네 이름이 삼신동(三神洞)인데, 이는 이 고을에 영신사(靈神寺), 의신사(義神寺), 신흥사(神興寺) 세 사찰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보아도 세속에서 귀신을 숭상하는 풍속을 알 수 있다.비결서에 ‘근년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푸른 당나귀를 타고 독목교(獨木橋)를 나는 듯이 건넜다. 강씨(姜氏) 집의 젊은이가 고삐를 잡고 만류하였지만, 채찍을 휘둘러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고 하였다. 고운은 죽지 않고 지금도 청학동에서 노닐고 있다. 청학동의 승려가 하루에 세 번이나 고운을 보았다라고 하였다. 이런 이야기는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세상에 참다운 신선이 있다면, 고운이 신선이 되지 않았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고운이 과연 신선이 되었다면 이곳을 버리고 어느 곳에서 노닐겠는가?이 날 순지는 먼저 칠불암(七佛菴)으로 갔다. 나는 이 절의 승려에게 자세히 묻기를,칠불암에 기이한 봉우리가 있는가?”라고 하니,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또.“폭포가 있는가?”라고 하니,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맑은 못이 있는가?”라고 하니. 역시,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다시,그러면 그곳에 무엇이 있는가?”라고 물으니, “칠암정사(七菴精舍)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단청칠한 절은 실컷 구경했고, 녹음이 우거진 계절인지라 볼만한 기이한 경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산비탈을 오르내리는데 이미 흥이 다하여, 시냇가 길을 따라 내려가며 수석(水石)을 구경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였다.길을 떠나 홍류교(紅流橋)를 건너 만월암(滿月巖)을 지나 여공대(呂公臺)에 이르러 앉았다. 깊은 못 가에 나가 구경을 하고, 흐르는 개울가에 나가 물소리를 들었다. 갓끈을 풀어 씻기도 하고, 손으로 물을 움켜 입을 헹구기도 하였다.

 

쌍계석문에 이르렀다. 고운 최치원의 필적이 바위에 새겨져 있었는데 글자의 획이 마모되지 않았다. 그 글씨를 보니 가늘면서도 굳세어 세상의 굵고 부드러운 서체와는 사뭇 다른 참으로 기이한 필체였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은 이 글씨를 어린아이가 글자를 익히는 수준이라고 평하였다. 탁영은 글을 잘 짓지만 글씨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은 듯하다. 이끼 낀 바위 위에 모여 앉아 맑은 물과 흰 물결을 바라보았다. 어린 종이 말하기를,해가 이미 서쪽으로 기울었습니다.”라고 하여 쌍계사로 들어갔다.쌍계사에는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이수龍頭와 귀부(龜趺)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전액(篆額)쌍계사 고 진감선사비(雙溪寺故眞鑑禪師碑)’라고 씌어 있었는데, 전서체(篆書體)가 기이하고 괴이하여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그 밑에 전 서국 도순무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이 교서를 받들어 지음前西國都巡撫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帒臣崔致遠奉敎撰이라고 씌어 있었다. 곧 당 희종(唐僖宗) 광계(光啓) 연간 에 세운 것이다. 손가락을 꼽아 헤아려보니 지금으로부터 700년 전이다.여러 차례 흥망이 거듭되었지만 비석은 그대로 남아 있고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비석을 보면서 눈물을 떨구기보다 어찌 신선술을 배워 오래도록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랴. 나는 이 비석을 보고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다. 또한 나는 어려서부터 고운의 필적이 예스럽고 굳센 것을 사랑하여 판본(板本)이나 탁본(拓本)의 글씨를 구해 감상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집도 글씨도 모두 없어져 늘 한스럽게 여겼다. 내가 금오(金吾)문사랑(問事郞)이 되었을 적에 문건을 해서(楷書)로 쓰는데, 곁에 있던 금오장군(金吾將軍) 윤기빙(尹起聘)이 한참 들여다보더니,그대는 고운의 서법을 배웠는가? 어찌 그리도 환골탈태를 잘 하시오.”라고 했었다. 지금 진본(眞本)을 보니 어찌 옛 사람을 위문하며 감회가 일어날 뿐이랴. 옛 일이 떠올라 슬픈 마음이 들었어서 종이와 먹을 가져오라고 하여 탁본하였다. 절에는 대장전(大藏殿)영주각(瀛洲閣)방장전(方丈殿)이 있었다. 예전에는 학사당(學士堂)이 있었는데 지금은 무너져버렸다. 날이 저물어 순지가 칠불사를 구경하고 돌아왔다.

 

사영운(謝靈運,385-433):劉宋代 시인, 晋代 名將 謝玄, 康樂公의 작위를 얻다. 文帝때에 侍中에 이르렀으나 讒言에 의해 죽음. 그의 淸新詩風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불교에도 조예가 깊다. [대반열반경] 36권의 번역을 완성하다. 元嘉 10년에 죽다.

 

 

문사랑(問事郞) : 치죄를 하는 취조관. 금오(金吾) : 조선시대 특별사법 관청. 조옥(詔獄)·금부(禁府)·왕부(王府)·금오(金吾)라 부르기도 하였다.

 

 

출처 : 한국문화콘텐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