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实踐人文 59

해유령(蠏踰嶺)&선암(船巖)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190903)

해유령(蠏踰嶺)&선암(船巖)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190903) 해유령과 선암에 대한 기록은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이 유일하다. 유람길은 안내한 승려 법종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해유령을 지나면서 보니 곁에 선암이 있었는데 법종이 말하기를, "상고 시대에 바닷물이 산릉을 넘쳐흐를 때, 이 바위에 배를 매어 두었는데, 방해가 여기를 지났으므로 이렇게 이름 한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때의 생물들은 모두 하늘을 부여잡고 살았단 말인가?"라고 하였다.』법종의 말은 누군가 지어낸 말로 생각된다. 운해가 있을 때 영랑대에서 천왕봉 쪽을 바라보면 마치 바다에서 육지와 섬 사이로 바닷물이 넘쳐흐르듯 하봉 헬기장으로 운해가 넘쳐 하봉헬기장으로 ..

少年臺(소년대)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181006)

少年臺(소년대)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181006)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원문]自此至永郞岾。道極懸危。正如封禪儀記所謂後人見前人履底。前人見後人頂。攀挽樹根。始能下上。日已過午。始登岾。自咸陽望。此峯最爲峻絶。到此。則更仰視天王峯也。永郞者。新羅花郞之魁。領三千徒。遨遊山水。甞登此峯。故以名焉。少年臺。在峯側。蒼壁萬尋。所謂少年。豈永郞之徒歟。余抱石角下窺。若將墜也。戒從者勿近傍側 。 ○ 8월15일, 이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심하게 가팔라서, ‘봉선의기(封禪儀記)’에서 말한,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밑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는 것처럼, 나무뿌리를 부여잡아야만 비로소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미 한낮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영랑재로 올라갔다. 함양(咸陽)에서 바라보..

마암과 행랑굴, 개운암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181006)

마암과 행랑굴, 개운암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181006)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듀류록 [8월14일] 又並脊南登中峯。山中凡隆起爲峯者。皆石。獨此峯。戴土而端重。可以布武焉。稍下步。憩馬巖。有泉淸冽。可飮。値歲旱。使人登此巖。蹈躪便旋。則必致雷雨。余前年及今夏。遣試之。頗驗。 [8월14일] 또 등성이의 곁을 따라 남쪽으로 중봉을 올라보니, 산중에 모두 융기하여 봉우리가 된 것들은 전부 돌로 되었는데, 유독 이 봉우리만이 위에 흙을 이고서 단중하게 자리하고 있으므로 발걸음을 자유로이 뗄 수가 있었다. 여기에서 약간 내려와 마암에서 쉬는데 샘물이 맑고 차서 마실만하였다. 가문 때를 만났을 경우, 사람을 시켜 이 바위에 올라가서 마구 뛰며 배회하게 되면 반드시 뇌우를 얻게 되는데, 내가 지난해와 금년 여름에 사람을 ..

淸伊堂(청이당)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181006)

淸伊堂(청이당)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181006) 청이당에 대한 유람록의 기록은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과 1611년 유몽인 선생의 두류산록에 청이당(淸伊堂)과 청이당(淸夷堂)으로, 1871년 배찬 선생의 유두류록에는 천녀당(天女堂)으로 각각 기록하고 있으나 같은 곳을 지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1472년 김종직 선생이 쉬어간 계석은 청이당터 석축 앞 약 20m 지점에 위치해 있고, 1711년 배찬 선생은 이곳에서 '계곡 옆의 바위 위(澗邊石上)에 빙 둘러 앉아서 밥을 먹었다' 라고 한 장소는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 현재 지리 마니아들이 알고 있는 청이당터(숙밭재 아래 평평한 터)와 유람록의 청이당터는 거리(약100m)가 있다. ​ ​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원문] 抵淸伊堂。以..

香積臺(향적대)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180915)

香積臺(향적대)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180915)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과 기행시 ○ 16일, 경진일. 비바람이 아직 거세므로, 먼저 향적사(香積寺)에 종자들을 보내어 밥을 준비해 놓고 지름길을 헤치고 와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정오가 지나서는 비가 약간 그쳤는데 돌다리가 몹시 미끄러우므로, 사람을 시켜 붙들게 하여 내려왔다. 몇 리쯤 가니 철쇄로(鐵鎖路)가 있었는데 매우 위험하므로, 석혈(石穴)을 뚫고 나와 힘껏 걸어 향적사에 이르렀다. 향적사에는 승려가 남아 있지 않은 기간이 벌써 2년이나 되었지만 계곡 물은 아직도 쪼개진 나무에 의지하여 졸졸 흘러서 물통으로 떨어졌다. 창문의 자물쇠와 향반(香槃)의 기름이 이전처럼 남아 있었으므로, 깨끗이 청소하도록 하고 분향(焚香)하게 한 다음 들..

雙磎石門(쌍계석문)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

雙磎石門(쌍계석문)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 1. 1463년 8월 청파 이륙 선생의 유지리산록  쌍계사(雙磎寺)는 신라의 문사 고운(孤雲) 최치원이 글을 읽던 곳이다. 뜰에 백 아름 정도 되는 늙은 회화나무가 있는데 그 뿌리가 북쪽으로 작은 시내에 뻗어 넘어간지라 다리처럼 반석에다 묶어 놓고 절의 승려들이 다리로 삼아 왕래한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고운이 손수 심은 것이다.”라고 한다. 골짜기 입구에 바위 두 개가 문처럼 서 있는데 ‘쌍계석문(雙磎石門)’ 네 글자를 크게 써놓았고 절 앞에도 오래된 비가 있는데 모두 최치원이 쓴 것이고 비문도 그가 직접 지은 것이다. 이 절은 섬진강과 가까워 이곳 승려들은 절 서쪽에 있는 최공(崔公)의 서루(書樓)에서 섬진강물을 속속들이 바라볼 수 있고 아직 그 집터가 남아..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지장사와 지장암(180817)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지장사와 지장암(180817) 1472년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에 노장동의 지장사와 1558년 남명 조식 선생의 유두류록에 불일평전의 지장암이 나오는데, 이름은 같지만 각각 다른 곳에 위치해 있는 암자이다. 암자터를 찾는데 덮어놓고 '와편이 반드시 나와야 암자터다.'라는 전제는 옳지 않다고 본다. 1463년 선생의 유지리산록에 '산꼭대기에 있는 향적사 등 몇 개의 절은 모두 목판으로 지붕을 덮었는데, 오직 영신사만 기와로 지붕을 덮었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와편과 폐암자를 연결시키는 것은 당시 승려의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생각이다. 불일암에 대한 선인들의 유람록을 보더라도 기와지붕이 아닌 너와집(판자나 굴참나무 껍질)이거나 갈대(茅)나 산죽으로 지붕..

초암능선 朴回城 기초조사 자료(180410)

초암능선 朴回城 기초조사 자료(180410) 1. 자원명 : 함양 추성 초암능선 朴回城(麗末鮮初에 축성된 피난성) 2. 소재지 :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3. 해발고도 :학계에 보고 된다면 우리나라에서 최고 높은 고도(1,238m)에 위치한 山城임. 4. GPS좌표 가. 경도 : 127-71814 나. 위도 : 35-35841 5. 조사자 : 3명(정○○, 임○○, 이○○) 6. 조사내용 가. 해발 1238m에 위치하며 하봉아래 초암능선에 위치함. 나. 잔존 성벽이 남아 있으며, 망루로 추정되는 자연바위 위에 석축을 쌓았음. 다. 자연지형을 이용한 전형적인 포곡식성(包谷式城)으로 추정됨. 7. 참고문헌 가. 1530년《신증동국여지승람》제31권 / 경상도(慶尙道) 함양군(咸陽郡) 지리산(智異山)은 군 남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