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 236

경술통문 동지인 서상업(徐相業)

서상업(徐相業)1873년~1929년 경북 문경(聞慶) 사람이다. 1907년 이강년의진(李康 義陣)에 종군, 좌종사부(坐從事部)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그후 1921년 3월경에 의용단(義勇團)의 요원인 이응수(李應洙)·한양이(韓良履)의 권유로 동단에 가입하여 재무국장(財務局長)에 임명되었으며 군자금 40원을 의용단에 헌납하였다. 의용단은 경북 안동(安東)·영천(永川)·군위(軍威)·영일(迎日) 등의 지역에서 상해 임시정부(臨時政府)와 재만독립군(在滿獨立軍)을 지원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금하던 비밀결사로서, 경남지역까지 조직을 확대하여 경북단장에 신태식(申泰植), 경남단장에 김찬규(金燦奎)가 선임되었으며 총무·군무·군량·재무의 부서를 갖추었는데 그는 경북지역 재무국장을 맡아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동단은 이후 ..

경술통문 동지인 유시연(柳時淵)

유시연 [柳時淵 1873(고종 10)~1914. 1. 29] 본관은 전주. 이명은 시연(時然)·승일(承一). 자는 박여(璞汝), 호는 성남(星南). 유연각(柳淵覺)에게 수학했으며, 어려서부터 전사(戰史)와 병서를 탐독하는 한편 수레바퀴·활·창·화약 등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1895년 을미사변 후 안동의병장 권세연 막하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해 유선봉(柳先鋒)으로 불렸다. 안동의진이 패한 뒤 1896년 5월 29일 단양·풍기·영천·경주 등지를 거쳐 안동지역에 이른 김하락(金河洛) 의진에 합세했다. 이후 김하락이 전사하고 의진이 깨지자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유창식(柳昌植)·유인식(柳寅植)·이현규(李鉉奎) 등과 뜻을 모으고 각계 각층의 사람들과 접촉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소모장(召募將)으..

경술통문 동지인 이긍재(李兢宰)

이긍재(李兢宰) 1888.6.16.~1951.1.20 이긍재는 경상북도 문경(聞慶) 출신으로 의병장 이강년(李康 )의 차자(次子)이다. 1907년 7월 부친 이강년 의진에 입진하여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었으며, 단양(丹陽)·제천(堤川)·문경(聞慶) 등지에서 대소의 전투에 수십 차례 참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나, 1908년 6월 부친이 적에게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되었다. 소식을 듣고 의진을 해산하였다. 곧 형 승재(承宰)와 함께 상경하여 형제가 옥문을 지키며 절치부심하였으나, 결국 부친의 순국소식에 접하게 되었고 형 승재 또한 객사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권 209·294·295·3..

경술통문 통지인 안재극(安在極)

안재극[(安在極)1879.6.26.~1940.7.23.] 이강년(李康秊) 의진의 좌종사(坐從事)로 경북 예천·문경 일대에서 활약하였으며, 경술국치 이후에도 「격문(格文)」과 「효유문(曉諭文)」을 작성하여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이 체결되어 우리의 자주적 외교권이 침탈되더니, 이듬해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어 통치권을 장악함에 따라 우리 나라는 식민지나 다름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안재극은 이 시기가 우리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임을 절감하고 국권회복운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1907년 7월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와 「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

경술통문 동지인 노병대(盧柄大)

경술의병 통문 동지인 盧柄大(노병대) 盧柄大 노병대[1856(철종 7)∼1913]. 조선 말기의 의병장. 초명은 노병직(盧炳稷), 자는 상요(相堯), 호는 금원(錦園). 경상북도 상주 출신. 허전(許傳)에게 배웠으며, 1889년(고종 26)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었다. 1895년 을미개혁 때 향교가 폐지된다는 소문을 듣고 극간으로 상소한 뒤, 다시 을미개혁을 주도하던 왜병을 물리치기 위하여 1898년 중국에 가서 지원군을 교섭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궁중의 일본세력을 축출하는 상소를 올려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의병봉기의 밀칙(密勅)이 내리고, 비서원의 비서승(祕書丞) 벼슬까지 받았다. 밀칙을 받고 그날로 고향에 내려와 의병을 모았다. 1907년 8월 김운로(金雲老)·..

전주이씨효령대군정효공파 雲崗 李康䄵 世系

전주이씨효령대군정효공파 雲崗 李康䄵 世系 황용건 관장님이 보내주신 사진 자료를 가지고 雲崗 李康秊 선생의 世系를 확인했습니다. 효령대군 8세손 思騫 공에서 雲崗 선생은 一子 應吉 공의 후손이고, 止山 선생은 二子 應瑞 공의 후손입니다. 두 분이 寸數로는 21촌입니다. 1910년 경술통문에 雲崗 李康秊 선생의 아들 3형제(이승재, 이긍재, 이명재)와 지산 이기찬 선생의 長子 李康夏 선생과 小山 李起夏 선생이 동지인으로 나온다. 李起夏 선생은 止山 선생이 왕산 허위 선생을 만나러 구미 甘川에 갈 때 동행했던 인물이다. 李起夏 선생의 3형제 중 둘째 李起商 선생(1915년 옥사)은 旺山 許蔿 선생의 비서였고, 셋째 이기영 선생(1918년 옥사)은 사위로 옥중에서 순국했다. 경술통문에 나오는 동지인에 대해서는 ..

전주이씨효령대군정효공파 小山 李起夏 世系

전주이씨효령대군정효공파 세보 李起夏 世系 孝寧大君 補(1세) - 二子 瑞原君 ○(2세) - 六子 淸渠守 蕙(3세) - 五子 密山副守信孫(4세)- 一子 璉(5세) - 子 應生(6세) - 一子 承器(7세) - 四子 師閔(8세) - 一子 長馨(9세) - 一子 柱厦(10세) - 二子 衡祥(11세)[기축보 수권 457面] - 一子 如綱(12세)[기축보 見二之一769面] - 系子 若松(13세) - 系子 東世(14세) - 三子 廷梅(15세) - 子 日榮(16세) - 子 奎儀(17세) - 一子 起夏, 二子 起商, 三子 起永[18세] 一子 起夏(1862.12.03~1945.01.07) 通仕郞(정8품 문관) 보령 청라면 의평리 丑坐 二子 起商(1871.20.02~1945.06.30) 墓 청양군 적곡면 은곡리 後麓 卯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