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경술통문

경술통문 동지인 한양이(韓良履)

도솔산인 2018. 9. 22. 02:35

독립유공자(공훈록) ㅣ 국가보훈처 www.mpva.go.kr

성 명 : 한양이

생몰년도 : 1883.1.16 ~ 1946.2.16

출신지 : 경북 문경 운동계열 : 의병

훈격(연도) : 애국장 (90)

 

공적내용

字 女敬 號 石樵 경상북도 문경(聞慶)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미의병 출신으로 문경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한바 있던 이강년(李康秊)이 의병활동의 재개하였다. 이에 한양이는 이강년 의진에 참가하고 농토 6,700여 평을 매각하여 군자금으로 희사하였다고 한다. 이강년 의진이 의병활동을 본격화시키자 그 종사관이 되어 소모활동을 전개하면서 원주(原州단양(丹陽제천(堤川문경·안동(安東내성(乃城재산(才山) 그리고 경기도 관악산 등의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86월 청풍 까치성(鵲城) 전투에서 의진이 크게 패하고 의병장 이강년이 체포되어 의진이 해산되자, 이등(伊藤)을 암살하고자 이강년의 장남 이승재(李承宰)와 함께 전국을 돌며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에 이기하(李起夏) 등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경성으로 잠입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이일이 적에게 탐지되어 은신하였다가 예천군 용궁(醴泉郡 龍宮)에서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2년 출옥 후에는 문경군 가은(加恩)에서 사숙을 열고 문인을 모아 배일 사상을 고취시키는 한편 동지를 규합하였다고 한다. 1919년 동지 이응수(李應洙서상업(徐相業김찬규(金燦奎) 등과 거사할 것을 상의하고, 이듬해 4월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였다. 한편 해외의 길림군정서(吉林軍政署) 및 흥업단(興業團)과 연락 제휴하고, 군정서로부터 군자금모집사서(軍資金募集辭書권총·폭탄·암호문·독립신문 등의 지원을 받고, 의용단 경북간사에 임명되어 무장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1922년 동지 이응수·이대기(李大基) 등과 함께 대구 계림여관(鷄林旅館)에 비밀사무실을 열어 연락서신을 작성하던 중 적의 밀정에게 탐지되어 50여 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4년 출옥한 후에는 신태식(申泰植김찬규(金燦奎서상업 등과 다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다가 옥고의 여독이 재발하여 1939년까지 입산하여 정양하였다고 한다. 1940년에 예천군 유산면(柳山面)에서 사숙을 열고 문인을 모아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운강문집(雲崗文集)을 정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운강창의일록 13·18

   · 고등경찰요사 209·210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286309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0747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