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지리동부 행랑굴과 마암의 묵서 개운암 이야기(170702~03)

도솔산인 2017. 7. 5. 19:41

 

지리동부 행랑굴과 마암의 묵서 개운암 이야기(170703)

 

 

1. 同名異所 馬巖과 異名同稱의 行廊窟과 馬巖 그리고 開雲巖

 

 가.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듀류록 <馬巖 부분>

 

[814] 又並脊南登中峯山中凡隆起爲峯者皆石獨此峯戴土而端重可以布武焉稍下步馬巖有泉淸冽可飮値歲旱使人登此巖蹈躪便旋則必致雷雨余前年及今夏遣試之頗驗

 

[814] 또 등성이의 곁을 따라 남쪽으로 중봉을 올라보니, 산중에 모두 융기하여 봉우리가 된 것들은 전부 돌로 되었는데, 유독 이 봉우리만이 위에 흙을 이고서 단중하게 자리하고 있으므로 발걸음을 자유로이 뗄 수가 있었다. 여기에서 약간 내려와 마암에서 쉬는데 샘물이 맑고 차서 마실만하였다. 가문 때를 만났을 경우, 사람을 시켜 이 바위에 올라가서 마구 뛰며 배회하게 되면 반드시 뇌우를 얻게 되는데, 내가 지난해와 금년 여름에 사람을 보내어 시험을 해 보니, 자못 효험이 있었다.

 

* :나란히 병 / :값치, 때를 맞이하다./ 蹈躪: 도린(밟을 도,짓밟을 린) / 可以 : ~할 수있다. / 布武 : 발자국이 분산되어 겹치지 아니함. 곧 빨리 달림

 

 

 나-1.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馬巖 부분>

 

[96] 李君允迪復取君子路告歸余等由甑峯而下馬巖從童孫得就水而飮遇一官醫多採當歸取三四本以來進之當歸是我素所好者戒使勿遺噫歸而不能歸只好草之當歸可謂好之得其實乎歷少年臺至行廊窟各進水飯回望天王峰已不啻風馬牛之不及矣一轉足之間已至於此所謂從惡如崩者也可不懼哉

 

[96] 이윤적(李允迪)은 다시 군자사로 되돌아가겠다 했고, 우리들은 증봉(甑峯)을 거쳐 내려와 마암(馬巖)에 이르렀다. 따라온 종 손득이 물을 마시러 갔다가 당귀(當歸)를 많이 캔 관아의 의원을 만나 그 중 서너 뿌리를 얻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올렸다. 당귀는 내가 평소 좋아하는 것이어서 종들로 하여금 잘 간수하라고 주의를 시켰다. !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갈 수 없구나. 단지 當歸라는 약초만을 좋아할 뿐이니, ‘當歸를 좋아함이 그 이름에 걸맞다고 할 수 있겠는가? 소년대(少年臺, 하봉)를 지나 행랑굴(行廊窟)에 도착했다. 각자 물을 마시고 밥을 먹었다. 천왕봉을 되돌아보니 이미 바람난 마소도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한번 걸음을 옮긴 사이에 이렇게 멀리 내려왔으니, 이른바 ()을 따르는 것은 산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쉽다는 말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當歸 : 당귀는 마땅히 돌아가야한다는 뜻이다.

 

점필재와 박여랑의 기록으로 보면 지금의 馬巖은 기록과 전혀 다르다. 중봉과 상봉 사이 작은 봉우리가 甑峰이라면 중봉샘이 馬巖이고 점필재와 감수재의 기록과 일치한다. 현재 마암이나 중봉샘과 하봉샘이 다 당귀가 자생할 수 있는 환경이나 중봉샘이 유력하다. 중봉 신하가 상봉 왕에게 떡을 올리는 형국이라 봉이며 중봉샘은 떡시루 옆에 놓인 물()이 된다.

 

 

 다. 1871년 배찬(裵瓚) 유두류록 <馬巖 부분>

 

[95] 小憇于嶺上. 過艾峴. 到天女堂平田. 從者進午飯. 遂環坐於澗邊石上. 各執匏器. 折木爲匙. 足爲免飢. 各吟一律拈平田之田字.

 

又攀木緣崖. 行十餘里. 到馬巖山幕. 幕是鷹者木器者之所處. 而適無人焉. 忽有指路者急告曰. 驟雨大至. 此去中峰山幕. 又十餘里. 則所謂進退維谷. 不如因宿于此. 遂設席于幕. 縱火於前. 卽炊飯煑羹. 已而林雨亦霽. 眼界甚暢. 幕在巖間. 不見西北. 而只見東南. 是晉洲界也.

 

夕飯後. 各散步于巖下. 忽見虹色環於山下. 近者如白硫璃. 遠者如紅錦繡. 相顧欣然. 莫知其所以然. 無乃海色爲月光所射. 紅暈自近而及遠. 故萬里卽階前. 而紅白交映者乎. 各吟一律拈馬巖之巖字.

 

[95] 산마루 위에서 잠시 쉬었다가 애현(艾峴)을 지나 천녀당(天女堂)평전(平田)에 이르렀다. 시종(侍從)들이 점심을 내와서 마침내 모두 계곡 옆의 바위 위에 빙 둘러 앉아서 각자 바가지 그릇을 잡고 나무를 꺾어 젓가락을 만들어 밥을 먹으니 배고픔을 면할 만하였다. 각자 평전의 ()’ 자를 끄집어내어 시 한 수씩을 읊었다.

 

다시 나무를 부여잡으며 벼랑을 따라 10여 리를 가서 마암(馬巖)의 산막(山幕)에 이르렀다. 산막은 매사냥꾼이나 목기(木器)를 만드는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인데 때마침 사람이 없었다. 갑자기 길을 안내하는 자가 급히 보고하기를, “소낙비가 심하게 올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봉(中峰)의 산막까지는 다시 10여 리를 더 가야하니, 이른바 진퇴유곡(進退維谷)하기보다는 여기서 하룻밤 묵는 것이 낫습니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산막에 자리를 펴고 앞에 불을 피워 곧 밥을 짓고 국을 끓였다. 이윽고 숲에 비가 걷히자 눈앞이 시원스럽게 탁 트였다. 산막은 바위 사이에 있어서 서북쪽은 보이지 않고 다만 동남쪽이 보였는데 진주(晋州)의 경계였다.

 

저녁식사 후에 각자 바위 아래를 산보하였는데, 갑자기 무지개빛이 산 아래에 빙 둘러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운 데는 하얀 유리 같고 먼데는 분홍 비단 같았는데, 서로들 보며 기뻐했지만 그런 풍경이 어떻게 생기게 된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는 아마도 바다에 달빛이 비추어서 붉은 달무리가 가까이에서 먼 곳으로 퍼져나가기 때문에, 만 리가 곧 섬돌 앞처럼 되어 붉은 빛과 하얀 빛이 서로 투영된 것이 아니겠는가? 각각 馬巖의 ()’ 자를 끄집어내어 시 한 首씩을 읊었다.[배찬은 중봉 샘터를 중봉산막이라고 기술함]  

 

 

 라. 1877년 허유의 두류록 <開雲巖 부분>

 

[89] 애전령(艾田嶺)으로 올라갔는데, 고개가 몹시 험준하여 애써 서로 의지하며 조금씩 조금씩 나아갔다. 산꼭대기에서부터 거의 15(원문 확인이 필요함)를 기어 내려오니 큰 바위가 있는데 밑의 형세가 넓어서 의지하여 묵을 만하였다. 옆에는 나무로 만든 산신의 위패가 있어, 이곳이 산신령에게 기도하던 천막이 있던 곳임을 알 수 있었다. 하인에게 명하여 한편으로는 땔감을 가져다 밥을 짓게 하고, 한편으로는 나무를 베어 천막을 치게 하였으며, 무명옷을 입고 장작을 쌓아 불을 지펴 밤을 지새울 계책을 삼았다.

 

명원(곽종석)이 말하기를, “이 바위가 이처럼 궁륭(穹窿)하였는데 지금까지 이름이 없으니, 이름을 지어주었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감히 그럴 수 없다고 사양하였지만 여러 사람들이 강권하여, “이번 산행에서 마음속으로 말없이 비는 것이 단지 구름이 걷히는 한 가지 일이니 개운(開雲)' 이라고 이름 짓는 것이 어떻겠는가.” 라고 하였다.

 

* 穹窿 : 활 무지개처럼 높고 길게 굽은 형상 또는 그런 형태로 만들어진 천장 이나 지붕. *개운(開雲 : ‘구름이 걷힌다.’는 뜻.

 

이에 은거(하용제)가 붓을 적셔 크게 썼는데, 쓰기를 마치자 검은 구름이 흩어졌으며, 서쪽 하늘의 해는 이미 지려하고 있었다. 명원(곽종석)이 말하기를, “그대의 정성이 비록 형산(衡山)의 구름은 걷히게 하였지만, 다만 내일 화산(華山) 꼭대기에서 미쳐 날뛸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대개 한퇴지(韓退之:중국 당나라시대의 문장가 한유(韓愈)를 말한다.)의 일을 끌어다 나를 놀린 것이다.

 

[812] 마침내 (남사마을에서)은거(하용제)를 따라가서 그 집에서 저녁을 먹고 물러나와 찬여(瓚汝)의 집에서 묵었다. 하우석공(은거 하용제의 父)은 강계(江界)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집에서 밥을 먹은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언제나 격앙되고 강개한 것이 나라의 큰 선비로서의 풍모가 있었다.

 

[813] 길을 나서니 여러 현인들이 멀리 숲 밖까지 함께 왔다. 내가 은거에게,개운암(開雲巖)에서의 일에 힘쓰라.”고 말하니, 은거가 알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원지점(院旨店)에 이르러 치수를 기다렸는데 오지 않았다. 먼저 지나간 것이 아닌가 싶어서 길을 나아가 진태점(進台店)에 이르렀는데, 치수가 뒤쫓아 와서 말하기를, “어른이 뒷사람을 이처럼 버리면, 뒷사람은 누구에게 기대야 합니까?”라고 하여, 내가 나는 그대가 먼저 올라갔나보다 했는데, 뒤에 있었는가?”라고 말하였다. 술을 따라 서로 위로한 뒤, 권성거(權聖擧)형을 섬계(剡溪)로 찾아가 만났다. 저녁나절에 법물(法勿)로 들어가 치수의 서당에서 묵었으며, ()과 지()가 서로 다른 점에 대하여 논하였다.

 

[825] 한주(寒洲 : 이진상(李震相)) 선생이 도남정사(道南精舍)로 나를 찾아왔다. 남사(南沙)를 향해 가고 있는 중인데, 또한 뜻이 천왕봉 꼭대기에 올라가는 데 있으며, 은거가 따라 가서 내 성명을 일월대에 새기겠다.고 하였다. [출처 : 지리99 옛 산행기방]



마. 1877년 곽종석과 권규집의 開雲巖 次韻詩 

 

謹次南黎開雲巖命名韻 : 남려(허유)가 개운암이라고 불인 이름에 차운하다. 

 巖在方丈中峯之下 : 개운암은 방장산 중봉의 아래에 있다.

 

                              俛宇 郭鍾錫(1846~1919)

 

昌黎奇氣本巖巖 : 한창려의 기이한 기상은 높은 산에 근본 했는데 

苦不能人大嶺南 : 괴로워 못오르는 사람은 고개 남쪽을 크다 하네.

登高一撫頭流石 : 높은 곳에 올라 두류산 바위를 한번 어루만지고 

鼓發天風掃碧嵐 : 하늘 바람 불러 일으켜 푸른 남기를 쓸어버리네.

 

 

宿開雲巖 : 개운암에서 묵다.  

有數椽 依巖結幕 : 몇 개의 석가래를 가지고 바위에 의지해 장막을 쳤다.

 

                              俛宇 郭鍾錫(1846~1919)

 

夜宿頭流巖穴中 밤이 되어 두류산 바위밑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營居猶藉往人功 : 잠자리는 오히려 옛 사람이 잤던 데에 마련 했네.

飛雨連山淘浩劫 : 쏟아지는 비가 온 산에 퍼부어 억 겁을 씻어내고

靈風吹火燭寒空 신령한 바람 불을 붙이듯, 차가운 허공을 밝히네

下界焉知吾輩在 : 저 아래에 우리들이 있는 곳을 어떻게 알겠는가

後來無忘此時同 : 먼훗날 지금 우리 함께한 것을 잊지는 말아야지.

聯肱試做遊仙夢 : 팔뚝을 나란히 하고 선계에 노니는 꿈울 꾸게나

一切蓬瀛東復東 : 모두 봉래와 영주를 찾아 동쪽으로 또 동쪽으로...

 

* 蓬瀛 蓬莱瀛州’. [다같이 전설에서 신선이 산다는 발해(渤海)에 있는 산] [비유] 선경(仙境).

 

 

謹次南黎許丈愈開雲巖命名韻 : 남려 허유 어른이 개운암이라고 불인 이름에 차운하다.

 

                              兼山 權奎集(1850~1916)

 

今黎杖屨抵奇巖 : 지금 남려 어른이 기이한 바위에 이르르니

衡岳餘愁有巉南 : 형악에서의 남은 근심 지리산에도 있었네.

認是精誠天所感 : 이 간절한 정성 하늘이 감읍한 줄 알았으니

長風頃刻簸蒼嵐 : 긴 바람이 삽시간에 푸릉 남기 걷어내누나.


 

 바. 1877朴致馥의 東遊記行 <開雲巖 부분>

 

[829] 命僕夫卸擔炊飯飯訖緣溪拚壁而上至艾田嶺嶺以外湖南界也小憩納涼見群山之自雄於區域者皆斂容屛氣隱然有嚮化拱極之意已覺吾身之占地差高又行十里許踰峻嶺緣崖而西可想山之事已半矣俯見萬脊南流齊烟渺茫霜葉正酣磎壑通明斷雨殘雲起滅於山腰差覺臆間爽然大石陡斷千尺下有煤痕榾頭蓋障儲胥猶存崖面書開雲巖三字許南黎姓名在焉可想前行留宿處撞著歡喜如對眞面

 

[829] 말몰이꾼에게 명령하여 매단 것을 풀어놓고 점심을 준비하도록 하여, 밥을 먹고 시내를 따라 절벽을 붙잡고 올라가 애전령(艾田嶺)에 도달하였다. 고개의 밖은 호남의 지역이다. 잠시 쉬면서 서늘한 바람을 맞았다. 여러 산들이 각각의 구역에서 웅장하게 솟아 있는데, 모두 용모를 단정히 하고 기운을 엄숙히 하여 이곳을 향하여 공손함을 드러내고 있으니, 내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 상당히 높은 것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10리 정도를 가서 험준한 고개를 넘었다. 절벽을 따라 서쪽으로 가니, 이제 반절은 된 듯싶었다. 아래를 굽어보니, 많은 산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있는데 안개가 높이 끼어 아득했다. 서리 맞은 잎은 참으로 붉고, 시냇가 골짜기는 활짝 열려 밝다. 산허리에는 구름이 약간 피어올라 비가 내렸다 그쳤다 한다. (이런 경치를 바라보노라니) 마음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큰 돌이 우뚝 솟아 뚝 끊어졌는데 그 천 길 아래에 나무 등걸을 그을린 흔적이 있고, 가로막은 울타리가 아직도 남아 있다. 절벽의 면에는 개운암(開雲巖)’ 세 글자가 쓰여 있는데, 허남려(허유)의 이름이 옆에 있다. 앞에 행차하여 머물러 유숙한 곳으로 생각된다. 다가가 만져보니 매우 기뻐 그의 얼굴을 대하는 것 같았다.

 

* 이진상(李震相) [18181886]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여뢰(汝雷), 호는 한주(寒洲).조선 말기의 대유학자.

* 허 유(許 愈) [1833~1904] 자 퇴이(退而), 호 후산(后山) 남려(南黎),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문인.

* 곽종석(郭鍾錫) [1846~1919] 조선말의 주자학자·독립투사. 본관은 현풍. 자는 명원(鳴遠), 호는 면우(俛宇), 유석(幼石) 단성(丹城) 출신. 이진상(李震相)의 문인.

* 하용제(河龍濟) [1854~1919] 자는 은거(殷巨) 호는 약헌(約軒). 곽종석(郭鍾錫)의 문인. 남사마을 출신. 원정구려의 주인

* 권규집(權奎集)[1850(철종 1)~1916] 산청 단성,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학규(學揆) 호는 겸산(謙山)

 

 


2. 異名同稱 행랑굴과 마암 그리고 개운암

 

1472년 점필재와 1610년 감수재의 馬巖과 1871년 배찬의 馬巖은 기록한 연도의 차이도 크지만 전혀 다른 곳이기 때문에 점필재와 감수재의 馬巖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먼저 감수재의 行廊窟과 배찬의 馬巖, 그리고 후산 許愈의 유산기에 나오는 開雲巖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610년 감수재의 행랑굴/1871년 배찬(裵瓚)의 마암/1877년 후산 허유의 개운암

 

 

 가. 1610년 감수재의 행랑굴

 

행랑(行廊)은 회랑(回廊)과 같은 어휘로 종교 건축이나 궁전 건축 따위에서 건물의 중요 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벽이 없고 지붕이 달린 복도(통로)를 뜻한다. 감수재는 바위 상단부가 튀어나와 비를 피할 수 있는 형태의 암벽을 일컬은 말로 馬巖을 행랑굴(行廊窟)설명한 것이다. 187789일 후산 허유와 함께 이곳에서 하룻밤 묵어간 면우 곽종석은 馬巖을 모양을 穹窿(활 무지개처럼 높고 길게 굽은 형상 또는 그런 형태로 만들어진 천장이나 지붕)으로 묘사하고 있다. 行廊窟은 고유명사로서 行廊窟이 아니라 '오버행의 바위로 비를 피할 수 있는 모양'으로 이해하면 된다.

 

 

 나. 1871년 배찬(裵瓚)의 마암

 

배찬(裵瓚)은 이곳에서 하룻빔 유숙했고 馬巖에서 巖자로 韻을 띄워 시를 읊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馬巖 각자를 보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리고 그는 유산기에서 馬巖 산막은 '매사냥꾼이나 목기(木器)를 만드는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이라고 했다. 나는 먼저 말봉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말봉을 한자로 표기하면, 꽃봉산이 花巖이듯 말봉(현 두류봉)이 馬巖이다. 은 같은 의미이니 馬巖(말봉) 산막에서 이곳에 거처하는 隱者가 馬巖이라는 刻字를 새겼다고 추정된다. 馬川의 지명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아무튼 민간에서는 상봉을 임금, 중봉을 중신, 하봉을 신하, 영랑을 장수, 말봉을 軍馬로 인식한 것은 아니었을까.

 

 

 다. 1877년 후산 허유의 개운암

 

187789國儒 寒州(한주) 李辰相 선생의 제자인 (후산)后山 허유(許愈) 선생과 면우(俛宇) 郭鍾錫 선생 일행은 이곳에서 하룻밤 유하면서 면우(俛宇)의 요청에 따라 后山은이開雲巖이라고 이름하고, 면우(俛宇)의 제자 약헌(約軒) 河龍濟 선생에게 암벽에 墨書(묵서)를 쓰도록 하였고, 면우(俛宇) 郭鍾錫은 개운암 관련 를 남겼다. 그로부터 20일 뒤에 그곳에 간 박치복(朴致馥) 일행이 암벽에 開雲巖이라는 墨書가 있는 것을 유산기에 기록했다. 后山은 산행을 마치고 約軒과 헤어지면서[813일] 約軒에게 '開雲巖에서의 일을 잊지 말라.' 라고 당부한 것은 馬巖 암벽에 開雲巖이라는 刻을 하도록 부탁하한 것으로 추정된다. 約軒은 后山 許愈와의 산행에서 발이 부르텄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산행[박치복(朴致馥)과 산행]에 나섰으나, 대원사에서 천왕봉까지의 하루 일정을 앞당기면서 馬巖에 開雲巖을 남기지 못했다. 그리고 825約軒 河龍濟寒州(한주) 李震相 선생[박치복(朴致馥)과 산행함]을 따라가 '后山의 이름을 日月臺에 새기겠다.'고 하였으니 이것도 천왕봉에 가면  확인해볼 일이다.



. 1877朴致馥東遊記行

 

[829]命僕夫卸擔. 炊飯. 飯訖緣溪拚壁而上至艾田嶺嶺以外湖南界也小憩納涼見群山之自雄於區域者皆斂容屛氣隱然有嚮化拱極之意已覺吾身之占地差高又行十里許踰峻嶺緣崖而西可想山之事已半矣俯見萬脊南流齊烟渺茫霜葉正酣磎壑通明斷雨殘雲起滅於山腰差覺臆間爽然大石陡斷千尺下有煤痕榾頭蓋障儲胥猶存崖面書開雲巖三字許南黎姓名在焉可想前行留宿處撞著歡喜如對眞面

[829] 말몰이꾼에게 명령하여 매단 것을 풀어놓고 점심을 준비하도록 하여, 밥을 먹고 시내를 따라 절벽을 붙잡고 올라가 애전령(艾田嶺)에 도달하였다. 고개의 밖은 호남의 지역이다. 잠시 쉬면서 서늘한 바람을 맞았다. 여러 산들이 각각의 구역에서 웅장하게 솟아 있는데, 모두 용모를 단정히 하고 기운을 엄숙히 하여 이곳을 향하여 공손함을 드러내고 있으니, 내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 상당히 높은 것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10리 정도를 가서 험준한 고개를 넘었다. 절벽을 따라 서쪽으로 가니, 이제 반절은 된 듯싶었다. 아래를 굽어보니, 많은 산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있는데 안개가 높이 끼어 아득했다. 서리 맞은 잎은 참으로 붉고, 시냇가 골짜기는 활짝 열려 밝다. 산허리에는 구름이 약간 피어올라 비가 내렸다 그쳤다 한다. (이런 경치를 바라보노라니) 마음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큰 돌이 우뚝 솟아 뚝 끊어졌는데 그 천 길 아래에 나무 등걸을 그을린 흔적이 있고, 가로막은 울타리가 아직도 남아 있다. 절벽의 면에는 개운암(開雲巖)’ 세 글자가 쓰여 있는데, 허남려(허유)의 이름이 옆에 있다. 앞에 행차하여 머물러 유숙한 곳으로 생각된다. 다가가 만져보니 매우 기뻐 그의 얼굴을 대하는 것 같았다.

 

* 이진상(李震相) [18181886]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여뢰(汝雷), 호는 한주(寒洲).조선 말기의 대유학자.

* 허 유(許 愈) [1833~1904] 자 퇴이(退而), 호 후산(后山) 남려(南黎),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문인.

* 곽종석(郭鍾錫) [1846~1919] 조선말의 주자학자·독립투사. 본관은 현풍. 자는 명원(鳴遠), 호는 면우(俛宇), 유석(幼石) 단성(丹城) 출신. 이진상(李震相)의 문인.

* 하용제(河龍濟) [1854~1919] 자는 은거(殷巨) 호는 약헌(約軒). 곽종석(郭鍾錫)의 문인. 남사마을 출신. 원정구려의 주인

 

마. 1922년 권도용의 방장산부

 

馬巖之幽絶允合升高而歇脚照以畢翁之所記眞境相符而不錯緬前賢之留芬想杖屨而如昨隨太守之指揮敏僧侶之趨作斬松檜而爲蓋藉芳草而爲席比巢皇而已侈一屋構於頃刻運連抱之樟木大(+)火而達昔酌鞄中之和酒夜寒暖其莫覺方星月之明槪而山河之寂寞誦孤雲之玉枕吾亦欲玆焉永託於是

마암(馬巖)에 도착하니 그윽하고 빼어났으며 높이 오르기에 적합하여 올라가 다리를 쉬었다. 필옹(畢翁 *점필재)이 기록한 진경(眞境)에 꼭 들어맞는 곳으로 먼 선현이 남긴 행적과 어긋나지 않아 거닐던 자취를 생각하니 마치 어제인 듯하였다. 태수의 지휘에 따라 민첩한 승려들은 재빨리 소나무 전나무를 베어내고 방초를 깔아 자리를 만들었다. 비유하자면 나무 위에 얽은 새 둥지와 같을 뿐이지만 잠깐 사이에 사치스런 집 한 채를 지은 셈이다. 아름드리 녹나무를 연이어 운반해와 모닥불을 크게 피우고 저녁이 되어 뱃가죽 속으로 술을 부으니 추위와 따뜻함을 느끼지 못하였다. 이윽고 별과 달이 밝게 뜨고 산하가 적막한 가운데 고운의 옥침(玉枕) 1)를 읊조리자 나 또한 이곳에 영원히 몸을 맡기고 싶었다.

 

一蹴而上至顚觀日出立峭巖嚮東溟屢回瞻元氣未判水雲相涵下界群山影祕形潛混淪之中渺不可諳己而紅輪碾上滄海沸盈珥暈煬熿雉膺爛熒色色萬彙各呈其形天下壯觀莫之與京信哉登山而不觀日出譬猶卸錦衣而晝行也覩古蹟而尋問有威肅之舊祠世或稱爲佛母爰詳文愍之辨辭

이윽고 한걸음에 꼭대기에 올라 일출을 구경하였다. 날카로운 바위에 서서 동쪽 바다를 향하여 몇 번이나 쳐다보았다. 아직 원기(元氣 *천지우주의 원래 기운)는 구분되지 않았고 물과 구름이 서로 섞여 있었다. 하계의 뭇 산들은 그림자는 형체에 숨어 있고 형체는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혼돈의 가운데에서 아득하여 내 몸을 알아볼 수 없었다. 붉은 바퀴가 맷돌처럼 떠올라 온 바다가 들끓고 햇무리는 불타는 듯 환하고 꿩의 가슴처럼 찬란하게 번쩍이고, 색색이 만 가지로 빛나 각기 그 형태를 드러내니 천하의 장관으로, 견줄 만한 것이 없으리라. 참으로 산에 올라 일출을 보지 않는다면 비유하자면 비단옷을 벗어 놓고 낮 길을 가는 거와 같다. 고적(古蹟)을 보고 물었더니 위숙왕후의 옛 사당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였다. 세상에서는 혹 불모(佛母)라고도 칭하는데 자세한 것은 문민(文愍 *김일손)공이 변별하여 말하였다.[국역 이재구 선생]

 

바. 1923년 개벽 제 34호 지리산보(1923.04.01)

咸陽郡守 閔麟鎬씨는 空殼名勝古蹟이나마 보존하랴고 保勝會를 조직하고 智異山을 세계에 소개하기 위하야 智異山誌葺輯 중이오, 同郡有志 姜渭秀씨는 遊山하는 의 편리를 키 위하야 山上望海亭을 건축하고 朴魯翊 及 靈源寺僧 一同帝釋堂을 건축하얏스며 李璡雨 及 碧松寺僧 一同馬岩堂을 건축하야(兩處皆 中峯) 本年 陽春佳節開山式하랴 한다.

 

사.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

 

漸漸前進置艾峴路於左便而取右路踰麓則天禮碭也谷深路險加以巨材參天無暇顧眄而所少者霜候未及只是綠陰中而已若到晩霜則紅黃爛漫宛似人在錦繡步障中形影相照而欠此一壯觀也余素昧草木禽獸譜而所識者於木櫲檞檀檜丁公藤靑藜枝之屬於草則芍藥當歸吉更薇蕨之屬而已前路崎嶇或上而騰於半空或下而若墜乎淵谷絶無平坦處從者言前之上山者脫冠巾而抱木挾巖艱辛而進今則賴有保存社之力使山下人伐薪輯險此前則可謂平地矣又慮遊山者之露宿設板屋馬巖上峯帝釋堂等處蔽風雨可謂惠及遊人矣余與乃明俱是困於寒者見路傍草樹之離披曰若梳一谷之薪輸之於家則過冬不難矣聞此從者之言自愧用心之不及社人遠矣盡力到馬巖堂乃下峯初到處也蓋巨巖穹隆壁立者十餘仞而下稍平坦傍有源泉新築數間屋子溫突凉軒略僃而足以歇行者之脚一行方午飯之際文生與細洞數人來到遂匝坐點心

 

점 앞으로 쑥밭재[艾峴애현]로 나아가는데 길은 왼쪽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향했으며 산기슭을 넘자 천례탕(天禮碭 *하늘에 제사지내는 돌)이었다. 골짜기는 깊고 길은 험한데 거기다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을 찔러 눈길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부족한 것은 서리 내릴 계절이 아직 멀어 단지 녹음만 짙은 것뿐이었다. 만약 늦은 서리가 내려 붉고 누런색이 화려하게 펼쳐지면 완연히 사람이 비단휘장 속에 있는 듯 형체와 그림자가 서로 비추겠지만, 그것 없이도 하나의 장관이었다.

 

나는 본디 초목·금수의 계보에 어두워 아는 것이라곤 나무는 녹나무 떡갈나무 박달나무 전나무 마가목 청려목 등이고, 풀은 작약 당귀 도라지 고사리 등속일 뿐이다. 앞길은 극히 험하여 올라갈 때에는 허공으로 오르는 것 같고, 내려갈 때에는 깊은 연못으로 떨어지는 듯하여 결코 평탄한 곳이 없다. 종자들이 말하기를, “전에 산에 오른 자들은 관을 벗고 나무를 끌어안고 바위를 끼고 간신히 나아갔는데 지금은 보존사(保存社 *함양명승고적보존회)의 힘으로 산 아래 사람을 시켜 벌목을 하고 험한 곳을 고르게 한 덕분에 이 앞까지는 평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또 유산자들의 노숙을 생각하여 마암상봉 제석당 등지에 판옥(板屋)을 세우고 풍우를 가리게 하였으니 혜택이 유산인에게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나와 내명은 모두 추위에 곤란을 겪는 자들이므로 길가의 초목이 무성한 것을 보고 말하기를 한 골짜기의 땔나무를 긁어 집으로 보내면 겨울을 나는 데에 어렵지 않겠다.”고 하자, 종자가 듣고 말하기를 “(저의) 마음 씀이 마을사람들에게 멀리 미치지 못하니 스스로 부끄럽습니다.” 하였다.

 

힘을 다하여 마암당(馬巖堂)에 이르렀는데 이는 하봉에서 처음 도착하는 곳이다. 거대한 바위가 둥그렇게 솟아 있는 것이 십여 길이었고 아래 부분은 평탄한데 곁에는 근원이 되는 샘이 있었다. 몇 칸의 집을 새로 지었는데 온돌과 벽 없는 마루가 간략히 갖추어져 있어 길 가는 사람이 다리를 쉴 만하였다. 막 점심을 먹으려 할 때에 문선비와 세동 사람 몇이 도착하여 둘러앉아 점심을 먹었다. [국역 이재구 선생]



♣ 마암과 행랑굴, 개운암에 대한 유람록의 기록

유람록

중봉()

()마암

비고

1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馬巖(마암)

 

 

2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馬巖(마암)

行廊窟(행랑굴)

행랑굴(중식)

3

1825년 김선신의 두류전지

馬巖(마암)

 

 

4

1871년 배찬의 유두류록

中峯山幕

馬巖山幕

마암산막()

5

1877년 허유의 두류록

 

開雲巖(개운암)

개운암()

6

1877년 곽종석과 권규집의 차운시

 

開雲巖(개운암)

곽종석 穹窿(궁륭)

7

1877년 박치복의 동유기행

 

開雲巖(개운암)

 

8

1922년 권도용의 방장산부

馬巖(마암)

 

마암()

9

1923년 개벽 제 34호 지리산보


  馬巖堂(마암당)  

중봉(?)

10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

 

馬巖堂(마암당)

마암당(중식)


         


3. 行廊窟과 마암을 확인하기 위해 지리에 들다.


일 시 : 20170703

코 스 : 윗새재-청이당-마암-말봉(두류봉)-국골사거리-청이당-쑥밭재-윗새재

날 씨 : 종일 비


 

토요일 오후 남사마을 이호신 화백님에게 갓톡을 넣었다. '비도 오는데 바쁘신가요.' '작업 중입니다. 들러 가셔도 좋겠지요. 화집도 드리고...'지난 일주일 옛 산행기를 영신암과 불일암 관련 자료를 발췌하고, 다시 감수재 박여량의 산행기에서 머물러 있는 상태인데 일기예보를 들으니 토요일 지리에 비 소식은 없는데, 대전은 국지성 오후가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한다.

 

玄石(검은돌) 이호신 화백님은 매화의 매력에 빠져 남사마을에 정착한 한국화를 전공하신 전업 작가이다. 최석기 교수님의 지리산 관련 모든 책 표지의 그림도 모두 선생님의 작품이다. 최석기 교수님이 발굴한 德山九曲을 그림으로 재현하셨는데, 이러한 뜻 깊은 활동으로 인하여 최근 대통령 문화포장 받으셨다. 남사마을 안쪽 대숲으로 둘러싸인 곳에 작업실이 있고, 사모님이 지금은 꽃자리라는 찻집을 운영하고 계신다. 나는 선생님께 1472년 점필재의 유두류록을 좇아 산행을 하였는데 '화백님께서 점필재의 길을 그림으로 남기시면 좋겠다.'고 제안했고 흔쾌히 수락을 하셨다. 언제 그리실지는 모르지만 화구를 짊어지고 지리에 들 날이 가까워 오고 있다.

 

침낭과 매트리스를 싣고 워이~ 워이~ 천리마를 타고 대진 고속도로를 달려 남사마을에 도착했고 이호신 화백님과 사모님은 불청객을 반기신다. 염치없이 원지 오리집에서 저녁을 먹고 잠자리까지 신세를 지기로 하고, 달 밝은 밤에 대숲 아래 평상에서 선생님과의 기다렸던 소중한 시간을 가졌으니, 마음에 간절한 생각을 품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어라.

 

 

 

 

 

 

翌日 새벽, 대숲의 바람 소리와 밤새 창가에서 노닐던 달님은 모습을 감추었고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다. 선생님이 깨실까 침구를 정리하고 조용히 나와 泗水를 건너서 한참 동안 尼泗齋(니사재)를 바라보았다. 尼泗齋(니사재)는 이순신 장군이 삭탈관직 되어 백의종군 하실 때 이곳에서 하룻밤 묵어가신 곳이라고 하는데, 난중일기를 보면 분명 農奴의 집에서 묵어갔다고 되어 있으니 호사가들이 꾸며낸 이야기로 유념할 필요가 있다. 感樹齋와 이순신 장군은 국난을 만나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동시대의 인물인데, 두 분이 간접적으로 아는 사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어느 날 하룻밤 저곳에서 하리라는 생각을 굳히며 지리에 들었다.

 

 

泥泗齋

 

철모삼거리에서 시장기를 때우는데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숲은 짙은 안개를 뿜어내고 짙푸른데 비까지 내리니 어둡고 습했다. 청이당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마침 아침을 먹는 고몰고몰한 멧돼지 새끼 가족을 만났다. 방수바지를 입었지만 점차 빗방울이 굵어지는데 상의 비옷을 입을 때를 맞추지 못해 빗물이 등산화 속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청이당 터에 이르러 인공석축을 유심히 살펴 본 후 점필재가 쉬었던 계석에 배낭을 내려놓고 한참을 쉬어갔다. 계석 옆 나무 아래에는 쓰레기 더미가 쌓여있어 비닐봉지를 꺼내어 쓰레기를 담아 배낭 안에 넣었다.

 

 

 

이곳을 1472년 점필재와 1611년 어우당은 청이당, 1871년 배찬(裵瓚)은 천녀당이라고 함.

 

 

점필재 유두류록에 나오는 청이당터 앞 溪石

 

 

지난 5월초 청이당 석축을 지리다방에 올렸으나 탐구산행에 열을 올렸던 지리99 <탐구>팀에서는 정작 냉소적인 무반응으로 청와대의 눈치만 살피고 있으니, 惡木不陰에는 본래 그늘이 없거늘 나 또한 애당초 기대하는 것이 없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公人이 감정을 드러내면 必敗하는 것을, 온라인에서 토론이나 대화 또한 마찬가지가 아닌가이곳을 1871년 배찬의 유산기에는 天女堂으로, 淸伊堂 주변을 天女堂 平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馬巖에 도착했다. 비는 오락가락하고 온몸은 비에 완전히 젖었고 잠시 마암 아래 비를 피했다. 박여량은 바로 비를 피할 수 있는 바위라 行廊窟로 기술한 것이다. 바위 상단이 앞으로 돌출되어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나는 비가 오는 날을 택했고, 그 곳에서 비를 피하며 행랑굴(行廊窟)이라는 의미를 이해했으니 머리가 나쁘면 몸으로 익힐 수밖에....

 

 

 희미한 朱書


 

묵서의 위치 추정

 

 

后山 許愈가 두류록에 기술한 '애전령(艾田嶺)으로 올라갔는데, 고개가 몹시 험준하여 애써서 서로 의지하며 조금씩 조금씩 나아갔다. 산꼭대기에서부터 거의 15(원문 확인 필요)를 기어 내려오니 큰 바위가 있는데 밑의 형세가 넓어서 의지하여 묵을 만하였다.'라는 내용을 보면 국골사거리로 올라가 말봉(두류봉)을 경유하여 馬巖으로 내려온 것 같고, 산꼭대기(말봉)부터 馬巖까지 15리라고 했는데 오역이 있는 것으로 짐작되니 원문 확인이 필요하다.[1.5리가 아닐까]

 

오늘 산행의 가장 큰 목적은 馬巖이 行廊窟이라는 확인과 約軒 河龍濟가 쓴 墨書의 흔적을 확인하는 것인데, 140년인 전 187789后山 許愈가 開雲巖이라고 이름을 짓고 約軒 河龍濟가 써 놓은 墨書는 비로 인해 구분할 수 없었고朱墨으로 적은 듯한 朱書 이름만이 눈에 들어왔다. 墨書에 대한 기록을 접하기 전에 이곳 馬巖에서 먹으로 쓴 글씨의 흔적을 본 기억이 있었기에, 혹시 기대를 하고 갔는데 바위가 젖어 분간되지 않았다.

 

 

 

 

 

馬巖에서 말봉(두류봉) 오르니 잠시 소강상태이던 비가 다시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방은 온통 비안개에 휩싸여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발이 닳도록 다녔던 그리운 永郞臺도 건너다 보지 못하고 결국 하산, 국골사거리에서 쑥밭재를 지나 淸伊堂을 지났다. 淸伊堂 조금 아래에서 산죽 밭으로 트래버스하는 길을 놓쳐 지리 전차군단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계곡으로 내려와 겨우 등산로에 붙었다.

 

 

 

쑥밭재의 사초

 

덕다리 버섯(전차군단길에서)

 

독바위양지 입구

 

아침에 만난 멧돼지 가족을 다시 조우했고, 나는 조용히 등산로를 내려섰다. 山에 들러 南冥을 생각하고 돌아 나오며 南泗를 지나는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으니 南泗(남사에 곽종석 독립기념관이 있음)의 俛宇 郭鍾錫 선생이 자기의 애제자였던 約軒(약헌) 河龍濟 선생이 무장 출신임에도, 儒林을 끌어들여 韓末 乙未년 倡義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현재 南泗 마을이 이렇게 보존되고 남아있는 것은 俛宇의 지혜로운 판단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말의 국난에 임하여 止山 李起璨 선생은 義를 취하여 멸문의 길을 선택했으나, 俛宇 郭鍾錫 선생은 家門의 齋室과 寒州學派의 學脈을 보호하고 그보다 더 먼 미래를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집으로 돌아와 우중 산행을 하며 보고 느꼈던 것을 정리하고 다시 옛 기록들을 살펴보는데, 랑굴(行廊窟)에 대한 이해가 새롭게 생겨났고 馬巖에 대한 이해도 정리가 되었다. 랑굴(行廊窟)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행랑채 처마 아래>라는 의미가 담겨있으니 행랑굴과 마암, 개운암은 한 곳을 두고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이었다. 2년 전 가을 行廊窟(행랑굴)에 대한 話頭를 던진 슬기난 선생님께 전화로 내 생각을 말씀 드렸고 슬기난님은 기쁘게 축하해 주셨다.

 

 

최근 내게 '왜 산에 들어 자꾸 골치 아프게 다른 생각을 하는가.'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산에 가는 것은 먹거리를 가득 담은 배낭이 산에 가는 것이고, 죽자 사자 달리는 것은 등산화가 산을 가는 것이고, 산에 들어 생각하고 사색하는 것은 내가 산에 드는 이유이고 즐거움이다, 따라서 굳이 어느 것이 좋고 나쁘고 따질 일은 아니다. 이제 남은 아까운 시간들은 쉼 없이 소모되고 있나니, 지리에 들어 행복할 수 있으면 그 목적은 완성되는 것이다.




☞ 중봉에 마암당이 있었다는 자료를 보면....(2017.11.11.03:00 작성)

 

 * 개벽 제 34호 지리산보(1923년 4월 1일)

현재 咸陽郡守 閔麟鎬씨는 空殼의 名勝古蹟이나마 보존하랴고 保勝會를 조직하고 智異山을 세계에 소개하기 위하야 智異山誌를 葺輯 중이오, 同郡有志 姜渭秀씨는 遊山하는 人의 편리를 圖키 위하야 山上望海亭을 건축하고, 朴魯翊 及 靈源寺僧 一同은 帝釋堂을 건축하얏스며, 李璡雨 及 碧松寺僧 一同은 馬岩堂을 건축하야 (兩處는 皆 中峯) 本年 陽春佳節에 開山式을 行하랴 한다. 此가 本山의 幸이라 할지....

 山上은 천왕봉을 가리키고 망해정은 천왕봉에 있었다.  處皆中峯(두 곳 모두 중봉)은 제석당과 마암당이 중봉에 있었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兩處는 제석봉과 중봉을 가리킨다. 1923년 지리산보에 제석봉 또한 중봉이라고 하였다. 현재 중봉의 와편 정체가 밝혀졌다.



[개벽 지리산보 원문 : http://db.history.go.kr/id/ma_013_0330_0200]



'同郡有志 姜渭秀씨는 遊山하는 人의 편리를 圖키 위하야 山上望海亭을 건축하고'에 관련된 기록은 1937년 5월18일 조개골을 지나 耟峰(써리봉)과 중봉에서 상봉으로 올라온 김학수의 [유방장산 기행]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1937년 5월18일<김학수>의 [유방장산 기행]

산세가 이곳에서 왔는데 이것이 천왕봉(天王峯)이다. 꼭대기에 올라가니 모두 암석이 반석이 되어 있었으니 일월대(日月臺)이다.<중략> 바위 앞에는 산령사(山靈祠)가 있는데 나뭇조각으로 덮여 있다. 바위 표면에 새겨진 이름은 몇 백 명인지 모르겠는데 혹은 마멸되고 혹은 선명하였다. 바위 사이에는 가옥 하나가 있는데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는데 진주(晉州)의 강위수(姜渭秀)가 세운 것이라고 한다. 마침내 옷을 풀어헤치고 그 가운데에 행장을 풀고서 저녁을 먹을 생각을 하였다.


 山勢自此而來. 此爲天王峰也. 上頂皆岩石盤繞. 有日月臺<중략> 巖前有山靈祠. 覆以木片. 岩面刻名姓者. 不知其幾百. 而或磨滅. 或鲜明. 巖間有一屋. 可容數十人. 而云晋州姜渭秀所築也. 乃卸其衣裝行具於其中. 爲夕飯之計.



바위 사이에는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가옥 한 채가 있는데 진주의 강위수(姜渭秀)가 세웠다. 이것은 곧 개벽 지리산보의 강위수가 세운 망해정(望海亭)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제석봉에 제석당(帝釋堂)과 중봉에 마암당(馬岩堂)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감수재 박여량선생 [두류산일록] 이후 1923년 개벽지에 제석봉을 중봉이라고 하였고, 지금 중봉을 중봉이라고 이라고 하였다. 현재 지명으로 다시 풀이하면 제석당은 제석봉(중봉)에 지었으며, 마암당은 중봉에 지었는데, 당시(1610~1923)의 이름은 두 곳 모두 중봉이다.[兩處皆中峰] 마암당이 중봉에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중봉에 있는 瓦片(와편)의 궁금증도 비로소 풀렸다. 따라서 점필재의 유두류록과 감수재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마암은 현재 중봉샘 옆에 있는 바위의 박터가 마암이다.  현재 마암은 말봉(1618)아래 마암산막(말바우산막)이고, 중봉샘은 본래 점필재와 감수재의 기록대로 마암이 된다. 현재 중봉샘은 김경렬선생이 1980년대 초반에 붙인 이름이다.[다쿠멘타리르포 지리산p32]


* 姜渭秀 : 1885년 출생. 일제강점기 진주지역을 대표하는 자산가이자 친일파.경남일보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부사장과 사장을 역임함. 1910김기태 등과 일본시찰단 일원으로 참가함. 1933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진주 유지들로 구성된 애국비행기 진주호헌납회에 가입하여 1만원을 기부. 19343진주군민의 애국결정체라는 이른바 애국 제214호 연락기를 일제에 헌납 특히 일제로부터 임명된 각종 명예직이나 고문직과 비행기 헌납 수행.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