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불일폭포의 三仙洞 각자와 고령대를 찾아서(170617~18)

도솔산인 2017. 6. 18. 14:48


불일폭포의 三仙洞 각자와 고령대를 찾아서



일 시 : 201706월 17일 ~ 18일

코 스 : 쌍계사-불일평전-백학봉-학연-불일폭포-학담-불일암-청학봉(고령대)-소은산막-고룡대-내원수행처- 쌍계사

▣ 동 행 : 미산선생님

날 씨 : 폭염에 맑음, 맑음



3월 중순과 6월 초 불일협곡을 다녀온 후 학연과 학담에 풍도목이 거꾸로 박혀있던 것이 자꾸 눈에 아른거렸다. 긴 가뭄으로  어서 단비라도 내려주었으면 싶은데, 한편으로는 계곡에 물이 없는 이 갈수기가 그 풍도목을 제거하기에는 최적기라, 다시 협곡의 학연과 학담을 찾는 산행을 실행하였다. 소은산막의 <풀협죽도> 시료를 채취하여 정확한 이름을 밝혀내고, 두번째 다녀온 후 깊이 빠졌었던 고령대에 대한 認知도 다시하고, 삼선동 각자에 대한 위치도 찾아서 확인하고픈 목적들도 덧붙여진 산행이다.  


이번 산행에서는 해야 할 일이 정해졌으므로 별도의 준비물이 필요했다. 학연에서의 풍도목 제거를 위해, 반바지와 물속에서 신는 신발을 챙기고  톱(160mm)도 준비했는데, 아무래도 풍도목의 사이즈를 생각해보니 톱의 크기가 작은 것 같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조금 더 큰 것(210mm)을  하나 더 준비했다. 날이 얼마나 무덥고 건조한지 국민안전처로부터 폭염주의보 문자가 떴지만 사계절 전천후 트래커에게 더운  날씨가 무슨 대수랴 . 짧은 산행거리임에도 소은암에서 하루를 留할 생각인데, 소은암에는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있으니 이번 산행은 유유자적 청학동 한 바퀴 산책에 가깝다. 


 






국사암


쌍계사 금당 앞을 지나 정규 등로를 따라 오르며 국사암에 들러 황하의 수신 거령이 하룻밤 일탈로 도끼를 잘못 휘둘러 쪼개어놓은 느티나무를 확인하고 돌아서서 불일평전으로 향했다. 순한 오솔길에는 계곡물 소리가 제 격인데 가뭄으로 산 중에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호젓한 산길을 걸으니 이 곳에서 세석까지 걸었던 옛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동계의 남부능선을, 여기서부터 세석까지 하루만에 올라가야만, 또한 설악 남교리에서 귀때기청봉까지 하루만에 걸을 수 있어야만,  미산팀의 정예회원으로 인정하던 그 시절의 주력과 패기는 세월 앞에 온데간데 없고, 이제는 이 길도 두 번이나 쉬고서야 밤꽃 향기가 濃익은  불일평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故변규화 선생의소망탑

 


봉명산방의 옛 정취는 지나간 시간만큼이나 퇴락해 있었고 소망탑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평전을 가득 메운 알싸한 밤꽃 향기는 오히려 인간의 天壽에 대한 허무함을 솟아나게 했다. 저 밤나무가 이 터전을 가꾸었던 주인의 命을 앗아갔으니 사람의 운명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변규화 선생은  2007년 어느 봄날  '바람에 쓰러진 밤나무 가지로 군불을 땠다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무하유지향을 꿈꾸며 불일평전에 은거했던 봉명선인의 꿈은 이렇듯 어처구니 없게도, 한낱 하룻밤 따스한 온돌의 꿈으로 인해 한줌의 잿가루가 되고 말았다.  야영장은 안내판 하나 없었지만 풀이 제거된 상태로 잘 정돈되어 있었고, 삼삼오오 산객들이 그늘에 앉아서 점심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봉명산방 앞 한반도 연못에는 물이 말라 바닥을 완전히 드러냈고, 샘물 또한 말라서 옛 취사장 쪽으로 가니, 데크 바닥에 자리를 깔고 누워 있던 젊은 사람 둘이 화들짝 놀라는 것으로 보아 근무 중인 공단 직원인 것 같았다. 공단 직원이 있건 말건 하산하는 분들에게 물을 얻어서 점심을 해먹었는데 어느 곳에도 취사&야영금지의 팻말은 없었다.


 

비로봉(백학봉)

 

 점심을 먹고 백학봉에 올라 숨을 고르는데 밀짚 모자와 竹杖에 승복을 입은 분을 만났다. '남명의 유산기에 나오는 학연에 풍도목 말뚝이 거꾸로 박혀있어 뽑으러간다.'고 하니 기꺼이 학연과 불일폭포까지 동행을 하였다. 쌍계사 선방에 잠시 와 있는데 출가한지 25년 되었고 불교는 종교라기보다 마음의 수양에 가깝다고 하더라. 매일 백학봉에 오른다고 하였고 전국 명찰을 찾아 순례중이라고 하였다. 나는 불교를 잘 몰라서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고, 미산선생님과 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淄俗(치속)의 구분이 어렵다.'는 점필재의 시 내용을 물으니, 조선시대에는 불교의 탄압으로 승려와 무속인들이 생존을 위한 호구지책이었다고 답하였다. '아침에는 목탁을 치면서 염불을 외우고 저녁에는 굿을 하였다는 뜻이냐?'고 물으니 '지금도 그런 암자가 허다하다.'고 하였다. 승려와 무당이 망자를 위한 49재를 지내고 굿을 하며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구하는 협력업체이고 공생관계였던 것이다. 스님께서는 '불교는 신묘하거나 허황된 것이 전혀 없다.'는 말로 매듭을 지었다.


 

학연(170604)







학연


학연으로 내려가 반바지를 갈아입고 풍도목을 톱으로 잘랐는데 거꾸로 박힌 것이 큰 바위에 눌려 빠지지 않아 용을 쓴 후에야 겨우 물 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큰 비가 오면 물에 떠내려 갈 수 있도록 서너 토막으로 잘랐는데, 어떤 나무인지 수종을 모르나 목질이 너무 단단해서 톱질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고 무게 또한 만만치 않았다. 학연은 지난번보다 수량이 더 줄어들었고 고인 물이라 물비린내가 진동하였다. 물은 고여 있으면 썩는다. 4대강만 썩는 것이 아니라 학연 또한 그렇고, 사람도 한 자리에 오래 머물면 악취가 난다. <미산>선생님은 허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거들지 않았고 엉뚱하게 따라나선 스님이 용력을 허비했다.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으니, 그 스님과 내가 함께 저 풍도목을 제거하게 된 것에도 어떤 연유에선 그 인연의 끈이 있지 않았겠는가.



학담(170604)





 남명은 이곳을 학담 아래 소를 학연 성여신은 이곳을 학연 아래 소를 용추로 기록했다.

 

풍도목 정리를 마치고 겹용소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안의 소는 바깥 소에 비해 매우  좁고 깊었으며 그 깊이는 가늠할 수 없었다. 혹여나 안쪽 용소 바위 벽에 삼선동 각자가 있을까 기대해 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고, 이 곳에서 나와 다시 정규 등로로 올라와 불일폭포로 갔다. 백학봉 안부에서 학연까지 오르내리는 길도 협곡안의 길이라 만만치 않은데 풍도목을 제거하느라 용까지 썼더니 한기운이 빠졌지만 불일폭포에 이르러 다시 학담으로 내려섰다. 폭포는 2주 전보다 수량이 훨씬 줄어들었지만, 학담에서 올려다보는 불일의 진풍경은 여전히, 은하수 쏟아지는 항아리 같은 모양으로 멋스럽기 그지없다. 학담에서도 빗장을 지른 풍도목을 여러 토막으로 잘라 물에 떠내려갈 수 있게 쌓아 정리를 해 놓았다. 학담 주변 암벽에서도  三仙洞 각자를 찾았으나  400년 전에도 이끼를 긁어내야 비로소 볼 수 있었다고  하였으니, 이끼를 투시할 수 없는 도솔의 눈에는 이끼는 이끼이고 바위는 그냥 바위일 뿐이었다. 다시 전망대로 올라오니 스님은 이미 가셨고 <미산>선생님이 빨리 가자고 재촉하여 불일암으로 올라왔다.


 

         

하동군수 한형구의 기념비


 

완폭대(추정)


청학봉


백학봉




청학봉(고령대)


고령선인 <미산>선생님




불일암에 배낭을 내려 놓고 불일암 앞에 완폭대로 추정이 되는 평평한 곳에서 불일폭포를 바라보니 폭포가 보이고 아래로는 절벽이 까마득했고 청학봉과 백학봉이 조망되었다. 그곳에서 나무 사이로 실핏줄 같은 불일폭포가 작은 신음소리를 내어 사진은 찍지 않았다. 그곳에는 1965년 4월 세워진 '하동군수 한형구폭 포환경정리기념비'가 있다. 쌍계 석문 뒤에도 한말의 하동부사 知府 權在允의 刻字가 있었는데, 자연 암석에 새기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고 완폭대로 추정되는 곳을 알리는 역할을 하니 후답자들이 찾기에 오히려 용이하다. 이곳은 불일암 바로 앞의 咫尺에 있고 등산로 바로 옆에 있다. 다시 청학봉(고령대)에 올라가 완폭대와 불일암을 바라보니 남명의 기록대로 절벽 위에 완폭대와 불일암이 매달린 것 같았다. 이곳이 바로 성여신과 박태무 시에 나오는 고령대다. 고령은 三仙洞이 있는 중국 복건성 민후현 大帽山으로 道敎의 聖地이니 차후에 자세히 풀어보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아무튼 불일평전은 儒·佛·仙이 공존하는 이상향으로 청학동이라는 사실이다.

 


활인령









 

 

소은암 가는 길에 접어드니 소현로에는 바람 한 점이 없었다. 활인령에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소은암을 오르는데 멧돼지 달아나는 소리가 바위가 구르는 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인기척에 놀란 멧돼지가 무리 지어 계곡 아래로 내닫는데 저렇게 너덜지대를 달리고도 정강이와 무릎이 무사할 런지... 소은 산막 마당 앞 가마솥을 들여다보니 내가 지난 번 갖다놓은 쌀과 두고 간 과자와 포카리스웨트 봉지가 그대로였다. 지난 9일 <소현거사>님이 올라오신다고 하셨는데 아마 몸이 불편하셔서 못올라 오신 것 같다. 샘터로 가니 가뭄인데도 물은 조금씩 흘렀고 우리는 취수를 넉넉히 하였다. 저녁을 먹자마자 8시가 조금 넘어 미산님은 취침 모드에 들어갔고 나는 책이라도 한 권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소은 산막 주변에는 태양전지 붉은 경광등이 밤새 깜박거렸고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든 탓에 일찍 잠에서 깼고 새벽에 젤트 밖으로 나오니 하얀 하현 달이 동산 위에 걸렸더라.










         


끈끈이대나물





금당으로 가는 길


이른 아침을 먹고 호룡대(소은거사님 말씀)를 지나 오록스맵의 신예 기대주 <미산>선생님이 지시하는대로 산길을 가다가 그만 등산로를 이탈하고 말았다. <미산>선생님께서 오룩스맵을 켤 줄은 아시는데, 동서남북을 자유롭게 해석하고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신다. 어찌 어찌하여 내원골로 겨우 내려와서 '실전 독도도 못하시고 지도 또한 볼 줄 모르신다.' 고 하니 '그래! 나는 길치다.'라고 하시며 되려 큰소리를 치신다.  내원 수행처 위에서 신발에 들어간 흙을 털어내고 찢어진 바지를 갈아입고 투덜 투덜 내려와 다시 출발점인 쌍계사에 도착하니 백학봉에서 만났던 스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玉泉은 쌍계사 금당에 있다. 금당이 옛날 옥천사 자리이다. 옥천은 陰水라 물이 뿌옇다." 





옛날과자 생강대공 秀



금당은 6월 초에 왔을 때 하필 그 날부터 하안거에 들어간다고 출입을 금지시켰던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이니, 금당에서의 옥천과의 직접 대면을 위해 하안거가 해제되면 한 번 더 이 곳을 다시 찾아야할 것 같다. 6월 염천 아래 뜨겁게 달구어진 도로를 마저 걸어 내려와  석문 광장 앞 한 식당에서 시원한 냉콩국수를 먹으니 데워진 속과 몸이 한결 시원해졌다. 6,000원의 착한 가격에 맛까지 좋으니 강추한다.(지역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식당).멋대가리 없고 잔소리 많은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시는 미산 선생님께 늘어놓은 지청구가 죄송하여 추억의 과자 '생강대공 秀味' 한 봉지를 사드리고 올라왔다. 옷은 새 옷이 좋으나 산친은 옛 산친이 최고가 아니겠는가.


다른 때보다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번 산행에서 뜻했던 바를 몇 가지는 이루었으나, 여전히 몇 가지는 미궁 속이다. 풀협죽도는 <끈끈이대나물>이었고, 시료는 곧 독성 테스트에 들어갈 것이다. 학연과 학담으로 추정되는 곳에 박혀있던 풍도목은 모두 제거를 했으나, 그 나무들을 좀 더 멀리 산속에 치워뒀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이제사 든다. 비가 많이 와서 쓸려 내려가면서 협곡 이곳 저곳에 쳐박혀서 또 장애물이 되지나 않을까 싶으니 말이다. 삼선동에 대한 각자의 실존 여부와 함께 추정되는 장소도 여러 문헌의 자료들이 지칭하는 곳들의 지명이 상이하여 추정 또한 헷갈리지만, 어느 순간 三仙의 도움으로 내 눈이 환하게 열려 보이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