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계곡 봉산골과 하점골(170610~11)
▣ 일 시 : 2017년 06월 10일 ~ 11일
▣ 코 스 : 봉산골초입-봉산골야철지-합수점-봉산좌골-봉산우골(얼음골)-심마니샘-심마니능선-하점좌골-합수점-야철지-달궁
▣ 동 행 : 미산님, 차황님, 송연목님, 김자준님, 육자님
▣ 날 씨 : 맑음, 새벽비, 맑음
# 1. 철의 계곡에 대한 호기심
지난해 4월 말 하점 좌골 상단부에서 冶鐵의 흔적인 슬러그(slag)를 보고 야철 유적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점좌골 중류 좌측으로 상당한 경사면인데도 불구하고 잘게 깬 철광석 더미가 쌓여있었고, 계곡 이곳 저곳에는 슬러그 덩어리가 흩어져 있었다. 아무런 사전 정보없어 전혀 내용을 몰랐기때문에 슬러그 사진만 찍었고 산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검색해보고야 하점골과 봉산골에 마한과 가야시대의 야철지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야철 유적지에 대한 사실을 세상에 처음 알린 군산대학교 사학과 곽장근 교수는 "삼국시대 이후 기록에 운봉고원의 제철유적이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고려시대 이전(×)에 개발됐을 가능성이 높기때문에,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당시 철산지가 일목요연하게 소개되어 있는데, 운봉고원의 제철유적은 그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슬러그(160430~0501)
철광석 암괴(?)(160430~0501)
♣ 군산대 박물관, 남원 운봉고원서 제철유적 발견[2012-11-13 14:32]
1. 철 슬래그편(일명 쇠똥)이 광범위하게 산재
군산대학교박물관(관장 박영철)이 남원 운봉고원 일대에서 대규모 제철 유적을 발견했다. 군산대 박물관은 13일 지난 8월부터 10월까지 (재)전주문화유산연구원과 함께 “남원 운봉고원 제철 유적 학술조사”를 실시한 결과, 남원 운봉고원 일대에 대규모의 제철유적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확인된 제철유적은 남원시 운봉읍 산덕리 1개소, 운봉읍 고기리 1개소, 산내면 덕동리에 3개소 등 모두 5개소로 백두대간과 지리산 줄기의 계곡부에 입지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또 “이들 지역에서는 철 슬래그편(쇠똥)이 광범위하게 산재하고 있으며 집터와 제련로의 흔적이 일부 확인됐다”고 연구팀은 밝혔다. 특히 남원 산내면에 덕동리에 자리하고 있는 하점골 제철유적은 철 슬래그편 뿐만 아니라, 잘게 부순 철광석 더미, 제련로 등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철을 생산하는 제철공정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운봉고원 제철유적 분포 위성사진(구글)
2. 봉산골 제철유적 제련로 추정지
군산대 박물관 측은 “아직까지 이 제철유적들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조사가 진행되지 않아 그 운영시기와 세력 등을 명확하게 밝히기는 어려운 실정이다”며 “하지만 최근의 고고학적 성과에 의하면 운봉고원 일대에는 백제에 정치적으로 편입되기 이전에 가야문화를 기반으로 발전했던 세력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이 세력의 지배층 묘역으로 알려진 남원 월산리·두락리 고분군에서는 철제 자루솥, 철제 갑옷, 철제 마갑 등 다수의 철제 유물이 출토된 바 있어 이 세력들이 운봉고원의 제철유적을 운영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제철유적 3개소가 밀집되어 있는 남원시 산내면 덕동리 일대는 마한왕이 70년간 피난생활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달궁터가 있는 곳으로, 이곳에 인접해 있는 제철유적들이 마한왕에 의해 개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이와 함께 통일신라시대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실상사 철제여래좌상(보물 41호)은 제철유적이 밀집되어 있는 남원 산내면에 자리하고 있어 상호 관련성도 추정 가능하여 운봉고원 일대에서 확인된 대규모의 제철유적은 삼국시대 이후로 운봉고원에서 전개된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군산뉴스 장인수 기자
야철의 찌꺼기 슬러그
슬러그 가루 및 잿더미
# 2. 봉산골의 야철 유적지
달궁 계곡을 건너 20여분 올라가니 야철 유적지가 나타났다. 등산로 바로 옆에 있기때문에 육안으로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다. 왕릉의 봉분 만큼이나 거대한 야철 노폐물과 숯이 완전 연소된 잿가루가 섞여서 철의 무덤을 이루고 있었다. 나뒹구는 야철 부산물인 슬러그 덩어리도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었고, 주변에는 야철 대장장이들이 기거했던 집터자리가 눈에 띄었다. 2,100년전의 철의 무덤 앞에 술잔이라도 붓고 절을 하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야철을 생산하는 과정을 모르는 나로서는 짐작만 할 뿐,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사학계의 거두 친일 우봉이씨 명문가에서 추종하는 일본제국의 임나일본부설을 받아들이는 사학계에서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한국고대사의 무덤을 살려내는 것이 후손들의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철지를 확인했으니 이제 무념무상으로 걸어가는 길... 이후부터는 등산로는 희미해지고 계곡을 따라 소위 계곡치기를 하면서 올라갔다. 나는 본래 계곡산행은 별로 좋아하지 않거니와 사진을 찍는 재주 또한 없으니 '물은 물이요. 바위는 바위, 이끼는 이끼다.'라는 생각만 들뿐이다. 긴 봄 가뭄으로 계곡에 흐르는 물은 수량이 적었고 곳곳에 풍도목이 쓰러져 있었다. 얼마를 올라가자 직경이 20cm가 넘는 마가목 나무가 베어져 껍데기가 홀랑 벗겨져 있어 裸木이라는 단어가 문득 떠올랐다. 설악산 지킴이 박그림님의 말씀대로 '인간은 자연의 해충일 뿐이다.'라는 말에 공감이 갔고 또한 지리산을 해친 인간의 반열에 서있는 나도 자유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음골과 봉산골 합수점
# 3. 초록 이끼의 나라 봉산 좌골
봉산골 좌우골 함수점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폭포를 올라가 봉산우골(얼음골) 초입을 확인하고 다시 내려와 봉산 죄골로 올라갔다. 물줄기는 점점 가늘어지고 초록 이끼의 향연이 펼쳐졌다. 차마 밟고 올라가기가 민망하고 망설여졌지만 올라갈수록 계곡은 협소해지고 점점 더 하늘을 향해 곧추서 있었다. 수량은 점점 줄어들고 물소리가 들리지 않을 즈음에 산죽 밭을 트레버스하여 작은 능선 하나를 넘어 봉산우골(얼음골)로 넘어갔다.
봉산우골(얼음골)을 조금 올라가니 거대한 바위가 좁은 협곡 사이에 걸려있어 인간의 발길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 우리 일행을 주시하고 있었다. 산길도 물처럼 거대한 장애물을 만나면 반드시 우회하는 길이 있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배낭을 내려 놓고 휴식을 취한 후 보조자일을 꺼내 난공불락의 요새를 향해 비장하게 나아갔다. 당일 배낭이면 큰 무리가 없지만 혹시 모를 안전사고의 상황을 대비해서 배낭을 자일로 끌어올린 후 빈 몸으로 올라갔다. 한 고비를 넘고, 두 고비를 지나 오르니 깎아지른 하늘벽과 하늘이 맞닿아 있었다. 이곳에서는 달궁마을의 자동차와 오토바이 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하늘벽에는 당귀며 땃두릅, 곰취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의 발길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 곳이니 이 정도가 남아있는 것이겠지. 땃두릅의 순은 얼마 전에 꺾어간 듯, 줄기의 상처에는 눈물을 머금고 있었고, 마가목 또한 전문 불법 채취꾼에게 도살을 당해 가죽 옷을 완전히 홀랑 벗고 이곳 저곳에 누워 있었다.
땃두릅
# 4. 반야의 명승 심마니 샘터
능선에 올라서서 얼마되지 않아 오늘의 목적지 심마니 샘터에 닿았다. 반야봉 북쪽 1,600 고지대에 생명의 샘터 있어 산객들과 심마니, 약초꾼들이 머물거나 쉬어가는 곳이다. 샘터에서 부유물을 건져내고 취수를 하였다. 구상나무 사이로 해가 지고 드디어 동쪽 산마루에 달이 떠오르더니 주목의 사이에서 오래도록 노닐었다. 얼마 전에 오도재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 앞으로는 밥 당번을 내가 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삼시 세끼 취사는 내 몫이라. 산에서 부뚜막에 불 때는 즐거움을 다시 찾았으니 산행에서 나에게 즐거움이 한 가지 더 늘어난 셈이다. 우리는 가지고 온 술도 다 마시지 못하였고 술병이 스스로 취해서 먼저 쓰러지자, 젤트에서 나와 달구경을 하였다. 10시가 조금 넘어 잠자리에 들었고 새벽 3시경 빗방울이 떨어져 잠에서 잠시 깬 것 말고는 다섯 시까지 숙면을 취하였다. 점점 날이 밝아오자 주변의 온갖 새들이 도량석을 하며 법구경을 암송하듯 만물을 깨우기 시작했고 나는 젤트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산책하였다. 자욱한 안개가 숲속에 깊숙히 드리우니 몽환적인 풍광에 이른 새벽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다. 박터 북쪽에는 좌선하는 바위가 있고 밤 사이에 내린 안개비가 나뭇잎에 엉기어 타프 위로 또박또박 떨어졌다.
# 5. 봉산골과 하점골의 유래
아침을 먹고 배낭을 꾸려서 심마니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 황장목 장송 군락에서 배낭을 내려 놓고 쉬었다. 봉산골의 유래가 '궁궐의 목재로 쓰이는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해 봉산골이 되었다.'는 글을 읽은 일이 있는데 그 의견에 선뜻 동의가 되지 않는다. 빈 몸으로도 내려가기도 힘든 골짜기를 통해 목재를 운송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야철지로 인해 숯의 원료인 참나무의 남벌을 막기 위해 출입을 禁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 아름드리 소나무는 터를 잘 잡아서 天壽를 누리는 것이다. 나뭇꾼도 벌목꾼도 어찌할 수 없는 곳에 있으니 말이다. 일행들에게 소나무 松字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木과 公(벼슬공, 귀인공)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벼슬을 하는 나무요.' '사람에 비유하면 귀인에 속한다.' '사시사철 푸르고 변하지 않으니 나무 가운데 으뜸이다.' '소나무는 나뭇가지를 뻗어 주변의 소나무를 절대 침범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하며 하늘을 가리켰다. '소나무는 하늘에서도 주변 소나무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니 군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활엽수들은 상대의 영역을 얼기설기 마구잡이로 침범하니 사람에 비하면 만무방이라고 할 수 있다.
* 鐵店 : 조선시대 철광을 제련하던 곳. 당시 철광은 금 ·은 ·동과는 달리, 법의 제재를 받지 않고 자유로이 채굴되었으며 그 생산지도 전국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다. 그 중 세공(歲貢)을 상납하던 철장(鐵場)은 울산을 비롯하여 안동 ·합천 ·용궁(龍宮) ·산음(山陰) ·무주 ·영덕 ·무안 등 17개소였다. 철장에서는 1년 동안 채굴한 철광을 농한기에 제련하여 상납했으며 상납하는 공철(貢鐵)은 대부분 정철(正鐵)이었다. 제련에 사용하던 기구는 풀무와 야로(冶爐) 등이었으며 이곳에서 제련된 생철(生鐵:무쇠)은 농기구 ·가마솥 등의 주조에, 숙철(熟鐵:正鐵 등)은 무기류의 주조에 주로 쓰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
하점골의 유래는 '아랫말 철점'이라는 뜻이다. 하점골 임도를 따라 올라가서 계곡을 건너고 좌골과 우골 합수 점에 마을 터가 있다 마을 터 약간 못 미처 임도 양쪽으로 왼쪽에는 자잘하게 쪼갠 철광석 무더기가 쌓여있고 오른쪽에는 야철의 부산물인 슬러그 가루와 재가 섞인 흙무더기가 쌓여있다. 아마 이곳을 하점이라고 하지 않았을까하는 짐작이 든다. 하점 좌골을 오르다 보면 슬러그 덩어리가 눈에 띄는데 올라갈수록 슬러그 덩이가 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작년 4월 말 계곡을 올라가다가 직경 20cm 정도의 슬러그 덩어리를 발견하였는데, 계곡 좌측 비알에 자잘하게 쪼갠 철광석 무더기를 본 일이 있다. 이번 산행에서 계곡으로 내려오지 않고 희미한 등로로 내려왔기 때문에 이곳의 위치를 놓치고 말았지만, 그곳 야철지가 윗말 철점‘上店’이 아닌가 추측해 보았다. 하점골 좌골은 물론 우골에도 떠내려 온 슬러그를 볼 수 있는데 소규모 야철지가 여러 곳에 있었다고 본다. 계곡 가에는 군데군데 평평한 집터자리와 온돌의 흔적을 보았는데 야철을 하기 위한 연료인 숯을 굽던 사람들의 움막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러그
上店의 집터 자리
하점골에서 가장 큰 야철 유적지
자잘하게 깬 철광석
하점골 야철유적지
# 6. 하점골 야철지를 확인하고 當歸하다
하산을 완료하니 오후 3시에 가깝다. 내려와서 모자에 걸친 오클리를 찾으니 행방이 묘연하다. 기억을 더듬어 마지막 쉬었던 자리에서 머리를 감았으니 이마 그곳에 두고 온 것 같아서 산친들에게 먼저 출발하라고 하고 내려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하점골 야철지를 발견했다. 달궁에서 불과 10분 거리에 있으니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고 온 길을 거슬러 가다보면 분명히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다. 이렇듯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도 뒤돌아보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알기는 쉬워도 깨닫기는 어렵고, 가르치긴 쉬워도 깨우쳐주기는 어렵다. 1년 전 4월 30일 하점골에서 야철의 부산물인 슬러그를 우연히 보았고, 그것이 2,100년 전 역사적 산행의 단초 역할을 했다. 내가 오클리를 찾으러 가는 동안 <미산>선생님께서 기다리셨고, 다시 내려와서 늦은 점심을 먹고 다음 산행을 기약하고 작별을 하였다. 차를 타고 반선을 지나가는데.... 봉산골 마가목녀의 갑옷은 버젓이 상가 앞 뜨거운 갤로퍼 천정 위에서 皮피를 말리고 있더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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