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비내리는 내원골과 청학연(170707~09)

도솔산인 2017. 7. 10. 02:27


비내리는 내원골과 청학연(170707~09)


 

일 시 : 201707월 07일 ~ 09일

코 스 : 사림재-쌍계사-불출암지-내원수행처-소은산막-청학봉(고령대)-불일암-불일평전-백학봉- 학연-불일폭포-불일암-쌍계사

▣ 동 행 : 3명(진정화님, 熊乭) 불일평전합류 : 7명(미산님, 송연목, 김자준, 이용훈, 안청식, 도필락,산수원)

날 씨 : 폭염에 비, 일요일 맑고 폭염

 

 

 

사림재의 돌담


섬진강

 

 

금요일 퇴근을 하고 사림재에 내려와 1숙을 하였다. 사림재는 구례군 용방면 사림마을에 있는 지리매니아의 한 축인 전주 파이오니아 클럽 멤버들의 지리산 롯지이다. 아침 일찍 사림재를 나오자 비는 줄기차게 내리는데, 섬진강 가 조망이 좋은 곳 쉼터에서 빗소리를 들으니 참 생경스럽다. 3주 전 학연에 있는 풍도목을 제거하며 마음 속으로 간절히 염원한 일들이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으니 감회가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배낭을 내려놓고 쌍계사 대웅전 앞에서 추녀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를 기쁜 마음으로 들었다.

 

 

 

금당으로 올라가는 108계단

 


 

 

쌍계석문을 지나 불일암으로 가는 길은, 쌍계사 경내에서 옥천교와 108계단으로 올라가 쌍계사 위로 올라가는 길과, 내원계곡을 따라 불출암지를 지나 계곡을 건너면 바로 영대암 터가 나오고 조금 올라가면 옥소암터를 지나 다시 계곡을 건너서 내원 수행처를 지나 청학봉을 경유하여 불일암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옛 선인들은 대부분 쌍계사 북쪽으로 불일평전을 거쳐 불일암으로 올라 원점회귀 산행을 하였지만, 특이하게 1618년 조위한과 1651년 오두인, 1655년 김지백은 청학봉에서 내원골로 하산을 하고, 옥소암영대암, 불출암이라는 암자의 이름을 기록에 남겼으며, 1743년 정식의 靑鶴洞錄에는 쌍계사에서 내원암을 지나 청학봉으로 올라 불일암과 국사암을 들렀다가 쌍계사로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는 이번 산행에서 선인들의 유산기 기록을 토대로 내원골 폐 삼암자의 위치를 확인하고자한다. 1618년 조위한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불출암에서 또 1 리쯤 가서 쌍계사로 돌아와 묵었다.[自佛出. 又行一里許. 還到雙溪宿焉.]’라는 기록에서 불출암의 위치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스님들이 다니는 내원골의 산길을 따라 얼마간 오르면 烏竹 숲이 나오는데 바로 위에 절터로 추정되는 석축이 육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출입구에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어 佛出庵 터임을 짐작할 수 있다.

 


 


佛出庵址(불출암지)


불출암址 은행나무




 

 


전답과 암자터로 추정

 

 



 

 

 



내원수행처(내원암지추정)



여기에서 몇 발짝 더 나아가면 내원 수행처를 건너는 지점이다. 내원 수행처는 內院庵(내원암)으로 추정된다. 內院庵(내원암)1743년 정식의 청학동록(靑鶴洞錄)에 나오는데 이곳에서 소은암으로 오르는 길이 있고 대은암터를 지나 청학봉으로 직접 오르는 길이 있다. 비는 오락가락하고 일행들과 은암으로 올라가 내원능선을 바라보며 세 시간쯤 머물렀다. 호룡대 옆의 샘도 청소하고 마당에 풀도 뽑다가 삽과 호미를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3주 전에 왔을 때는 살구가 제법 달려있었는데 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에 멧돼지가 장대로 모조리 털어갔는지 흔적조차 없었다.
 




암자터




 


이번에 메고간 쌀 6kg



연화봉(소현거사님은 묘각봉이라고 부른다.)

 


연화봉 아래 개망초가 주인이 되어버린 소은산막에서 비는 왔다 갔다 오락가락하는데, 어떤 산객이 두고간 쌀 4kg에 우리가 가지고 온 쌀 6kg와 지난 번 내가 두고간 것까지 합하니 12kg이다. 짐승들이 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당 한가운데에 가마솥에 넣어 두고 소은암을 떠났다. 



완폭대에서






묵계에서 삼신봉으로 올라와 불일평전으로 내려온 일행들과 밤 늦게까지 산정을 나누었다. 미산 선생님은 기분이 많이 업되어 10년은 젊어지셨고, 그동안 생사불문 산에서 만난 인연들을 되새기는 각별한 계기가 되었다. 이튿날 지리99의 신예 두 분은 일이 있어 국사암으로 일찍 내려갔고, 나머지 일행들은 우리와 헤어져 묵계로 다시 넘어갔다. 우리 일행은 지난 번에 풍도목을 잘라놓은 것이 궁금해서 백학봉에 올라갔다가 鶴淵을 둘러보았고 불일폭포도 내려가 보았다.





비로봉(백학봉)




학연


나는 이곳을 靑鶴淵이라고 확신한다.


남명은 이곳을 학담이라고 하였다.



불일폭포


 

1744년 황도익(黃道翼)의 두류산유행록[頭流山遊行錄] 9월6일에 '大小二隱庵에 찾아가보려고 하였다.'는 내용을 보고 이번 산행에서 소현로 갈림길에서 내원암으로 내려오는 중간에 대은암를 답사하려고 하였으나, 불일암에서 '아주 싸가지 없는 공단직원'을 만나 정규등산로를 거쳐 쌍계사로 내려왔다. 학연을 둘러보고 나오다가 마주쳤는데 눈총을 쏘며 따라다니다가 으름장을 놓고 언행이 오만방자하기에 열심히 근무하는 것은 좋은데 미리 예단하여 스토킹을 하는 것은 불쾌하다.’라고 하고 하도 버릇이 없어 다른 직원들처럼 근무시간에 불일평전 취사장에서 돗자리 깔고 낮잠이나 자라.’고 하니 물러가더라.

 





산행을 마치고 구례에서 소현거사님을 뵙고 올라왔다. 집으로 돌아와 옛 산행기를 확인하니 1600년대 초기부터 옥소암은 존재했고, 1655김지백의 유두류산기의 기록에는 세 개의 암주 중 옥소암만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두 암자는 옥소암보다는 먼저 폐사된 것 같다. 1743년 정식의 청학동록(靑鶴洞錄)에는 세 암자가 전혀 등장하지 않고 내원암이라는 새로운 암자가 기록되어 이 시점에는 세 암자가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사람만 수명이 유한한 것이 아니고 도솔천 내원궁 청학동의 암자 또한 영고성쇠가 있으니 만물은 생성되었다가 소멸되는 것은 자연의 섭리요 이치이다. 살아있는 동안의 갈등 또한 잠시의 현상적인 일이니 무상하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청학연의 논쟁 또한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끝.


 

 


#. 첨부 : 선인들의 유산기에 나오는 불출암 영대암 옥소암 관련 기록

 

1. 1618년 조위한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불일암/옥소암/영대암/불출암]

 

[414] 寺前有臺. 可坐十餘人. 巖面刻翫瀑臺三字. 亦孤雲所自書也. 五人環坐臺上. 洗盞酌酒. 使妓唱歌工吹篴. 響徹雲霄. 崖谷互答. 心魂爽朗. 飄飄然有出塵之想. 怳聞嵒竇間有崔孤雲謦咳也. 臺前有古木羅立. 前度遊人. 削皮刻名者甚多. 至有三十年前陳迹. 宛然猶在焉. 沈君房生. 欲窮探瀑水所落處. 緣壁而下. 房君半途而還. 沈生. 遂至地底. 大觀而來. 相與沈吟翫賞. 不知日之將入也.

 

賦詩數篇. 還向歸路. 而別尋一線鳥道. 穿蘿觸藤. 直下數里. 到玉簫庵. 庵在斷巘絶壁上. 鑿崖凌虛而架棟設檻. 縹渺浮空. 翬飛鳥翼. 有若畫圖之中. 殆非尋常僧房佛屋之比也. 僧云. 此庵. 乃潭陽士人李聖國者入此山修道二十年. 破產傾財. 作大施主. 構之云. 脫衣困臥. 賦詩而還. 乘輿直下. 如墮坑入井. 行數百步. 歷靈臺庵. 又行數百步. 歷佛出庵. 玆二庵俱在絶壑上. 無一點塵垢. 而比玉簫則風斯 下矣. 自佛出. 又行一里許. 還到雙溪宿焉.

 

 

[414] 절 앞에 십여 명 정도 앉을 만한 누대가 있는데 바위에 완폭대(翫瀑臺)’ 세 글자를 새겨놓았으니 역시 고운이 직접 쓴 것이었다. 다섯 사람이 누대 위에 둘러 앉아 잔을 씻어 술을 따르고 기생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고 악공에게 피리를 불게 하니 그 소리가 구름을 뚫고 나가 골짜기에서 메아리로 화답하였다. 가슴 속이 상쾌해져서 훌쩍 세속을 떠나고픈 생각이 들었는데 어슴푸레하게 바위 구멍에서 최 고운의 기침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누대 앞에 고목들이 둘러 서 있는데 앞에 지나다니는 유람객들이 껍질을 벗기고 이름을 새긴 것이 매우 많았으니 심지어 30년 전의 것이 완연하게 남아 있는 것도 있었다. 심생과 방원량(房元亮) 군은 폭포수가 떨어지는 곳을 찾으려고 절벽을 따라 내려갔는데 군은 중도에서 돌아오고 심생은 끝내 바닥까지 가서 다 보고 왔다. 함께 나지막하게 시를 읊고 경치를 감상하면서 해가 지는 줄을 알지 못했다.

 

시 몇 편을 짓고 왔던 길을 되짚어 가다가 한 가닥 좁은 길을 찾아내서 풀을 헤치고 덩굴을 제치며 곧장 몇 리를 내려가 옥소암(玉簫庵)에 닿았다. 암자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있는데 절벽을 뚫고 허공에다가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설치해서 아득하게 허공에 떠서 새가 나래를 펴고 있는 것 같아, 마치 그림 속에 있는 듯해서 일반적인 승방이나 절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 암자는 담양 선비 이성국(李聖國)이 이산에 들어와 이십 년 동안 도를 닦다가 재산을 다 털어 절에 시주해서 지은 것입니다.”라고 한다. 옷을 벗어 놓고 피곤해 누워 시를 짓고 돌아와 가마 타고 곧장 내려가니 마치 구덩이나 우물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수백 걸음 가서 영대암(靈臺庵)에 닿았고 수백 걸음 더 가서 불출암(佛出庵)에 이르렀다. 이 두 암자는 모두 험한 골짜기 위에 있어서 한 점 속세의 먼지가 없었으나 옥소암에 비한다면 풍격이 한참 못 미쳤다. 불출암에서 또 1 리쯤 가서 쌍계로 돌아와 묵었다.[내원골의 암자들]

 

 

2. 1640(인조18) 허목의 지리산 청학동기 [옥소계곡/불일암]

 

[93] 南方之山. 惟智異最深邃杳冥. 號爲神山. 其幽巖絶境. 殆不可數記. 而獨稱靑鶴洞尤奇. 自古記之. 蓋在䨥溪石門上. 過玉簫東壑. 皆深水大石. 人跡不通. 從䨥溪北崖. 隨山曲而上. 攀傅巖壁. 至佛日前臺石壁上. 南向立. 乃俯臨靑鶴洞.

 

[93] 남쪽의 산 중에 지리산이 깊숙할 뿐 아니라 그윽하고 어두워 신산(神山)이라 한다. 기묘한 바위와 뛰어난 경치는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 청학동(靑鶴洞)이 더욱 기이하다고 한다. 옛날부터 그렇게 기록하였다. 대체로 쌍계사 석문(石門) 위에서 옥소암(玉簫庵) 동쪽 계곡까지는 물이 깊고 큰 돌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다. 쌍계사 북쪽 언덕을 따라 암벽을 붙잡고 올라가면 불일전대(佛日前臺) 석벽 위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향하여 서면, 곧 청학동을 굽어볼 수가 있다.

 

 

3. 1651년 오두인의 두류산기(頭流山記) [학연/옥소영대/성불심원]

 

[113] 폭포가 흘러가는 곳에서 시작하여 양봉(兩峯 : 향로봉과 청학봉) 남쪽이 학연(鶴淵)이며, 바로 그곳이 쌍계 좌측 물줄기의 근원이다. 다시 청학봉(비로봉)을 넘어 봉우리 남쪽 기슭에 당도하니 두 세 개의 작은 암자가 있다. 어떤 암자는 남아 있고, 어떤 암자는 허물어져 없다.  옥소암과 영대암(玉簫庵/靈臺庵)은 그 명칭이고, 성불암과 심원암(成佛庵/深院)은 그 터뿐이다. 불일암에는 스님 한 분이, 옥소암과 영대암에는 스님 세 분이 계셨는데 모두 곡기(穀氣)를 끊고 수도에 전념하는 부류의 스님이다.

 

 

4. 1655(을미) 김지백의 유두류산기[불일암/옥소암]

 

[108] 翌日. 遇雨仍畱. 遂待晴. 肩輿而作. 或乘或步. 幾至佛日庵. 石崖呀然中裂. 架木為棧. 纔通人跡. 其下深可萬餘丈. 側身信足. 魂悸髮竪. 乃躋攀到菴菴. 外有小石臺. 所號翫瀑者. 望見天紳數百丈. 掛流香爐之側. 勢若虹起電掣. 直與廬山慱淵上下. 往日龍湫之所賞者. 亦風斯下矣. 飛淙釀寒. 陰谷動爽. 凛乎不可乆畱. 遂煖進山醪數杯. 仍復路憇杖靑鶴峯. 窺鶴巢而下. 題名玉簫菴. 復還䨇溪宿.

 

[108] 다음날 비를 만나 그대로 머물며 날이 개기를 기다렸다가, 견여(肩輿)를 타고 출발하였다. 타다가 걷다가 하면서 불일암(佛日庵)에 거의 다 도착하니, 바위 벼랑이 입을 벌린 듯 가운데가 찢어져 있고, 건너지른 나무架木가 사다리가 되어, 겨우 인적이 통할 만하였다. 아래로는 깊이가 만여 길이나 될 듯한데,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발만 믿고 걸으니, 혼이 떨리고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붙잡고 올라 불일암에 이르니, 암자 밖에 작은 석대(石臺)가 있는데, 완폭대(翫瀑臺)라고 부르는 것이다. 천신(天紳)수백 길이 향로봉(香爐峰)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바라보노라니, 그 형세가 마치 무지개가 일어나고 번개 치는 듯하여, 다만 여산(廬山) 폭포와 박연(博淵) 폭포만이 서로 견줄 수 있다. 전날 용추를 구경했던 사람들 또한 이 완폭대 아래에서 바람을 쐬었다. 날리는 물방울이 찬 기운을 만들어 내고 그늘진 골짜기가 서늘한 기운을 불러일으켜 몹시 추워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산 막걸리를 두어 잔 데워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청학봉(靑鶴峯)[비로봉] 에서 지팡이 잡고 쉬면서 학 둥지를 엿보고, 내려와 옥소암(玉簫菴)에 들어가 이름을 쓰고, 다시 쌍계사로 돌아와 묵었다.

 

 

5. 1743년 정식의 청학동록(靑鶴洞錄) [내원암/청학봉/불일암/국사암]

 

[424] 翌日入內院庵卽靑鶴洞靑鶴峯下也余曾累入洞中謂其陜小等視不探今始入去則絶壑深幽水石非常余顧謂雲甫曰余若早知如此吾行豈今日而已乎入此名區不可無一語君可呼韻雲甫卽呼韻余立應曰

 

[424] 다음날 내원암(內院庵)에 들어가니 곧 청학동으로서, 청학봉(靑鶴峯)의 아래였다. 내가 일찍이 골짜기 가운데로 누차 들어가 그 협소함을 가리키며 등한시하여 찾지 않다가 지금 비로소 들어가니 깎아 세운 듯 골짜기가 깊고 그윽하며 물과 바위도 예사스럽지 않아서 내가 운보를 돌아보며 말하기를,“내가 만일 일찍이 이곳의 장관이 이와 같은 줄 알았더라면 내 행차가 어찌 오늘에야 있었으리요? 이러한 명구(名區)에 들어서 한 마디 말이 없을 수 없으니, 그대가 운을 띄울 만하네.”라고 하자 운보가 즉시 운()을 띄웠고, 내가 선 채로 응하기를,<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