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지리동북부 폐암자 三涅庵(170714~16)

도솔산인 2017. 7. 16. 18:30


지리동북부 폐암자 삼열암(三涅庵)


 

일 시 : 201707월 14일 ~ 16일

코 스 : 오도재-지리산롯지-송대마을-선녀굴-의논대-고열암-독녀암-선열암-안락문-의논대-솔봉-송대마을

▣ 동 행 : 8명(철화님, 아브다비님, 산사람님, 고산님, 하늘바위님, 기하님, 안나님)

날 씨 : 국지성폭우, 주욱~비, 다음날 흐림


* 三涅庵  : 先涅庵, 新涅庵, 古涅庵




지난 5월 27일 지리99 산정무한 행사에서 보령박팀 <무명>님의 산행 제안이 실제로 현실이 되었다. 용기를 내어 산행 공지를 하게 되었고 생애 처음으로 어색한 안내산행의 리딩을 하게 되었으니, 사람의 언어에는 공중에 전파가 흐르듯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살은 섞어도 산은 섞지 않는다.'는 도솔의 箴言(잠언)은 무색하게 되었고, 대한민국 최고의 <보령박팀>과 영광스러운 산행을 하게 되었다.  



宿古涅庵(숙고열암)

 

病骨欲支撑 : 지친 몸 지탱하려고

暫借蒲團宿 : 잠시 포단 빌려 잠을 자는데

松濤沸明月 : 소나무 물결(파도소리) 달빛 아래 들끓으니

誤擬遊句曲 : 국곡선경에 노니는 듯 착각하였네.

浮雲復何意 : 뜬 구름은 또한 무슨 뜻인가?

夜半閉巖谷 : 한밤중 바위 골짜기 닫혀있구나

唯將正直心 : 오직 올곧은 마음을 가진다면

倘得山靈錄 : 혹시 산신령의 살핌을 얻으려나.





학사루



점필재의 木兒




금요일 오후 퇴근하자마자 배낭을 싣고 출발하기도 전에 대전은 한차례 폭우가 휩쓸고 지나갔다. 함양에 도착해서도 비는 계속 그치지 않았고, 함양 터미널에서 <철화>님을 픽업하기 전에 시간이 있어 학사루를 찾았다. 학사루는 통일신라 말기 함양의 태수였던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이 누각에 올라 시를 읊던 유서 깊은 곳으로 1979년 함양 군청 앞으로 옮겼고,  본래의 위치는  학사루 느티나무가 있던 곳에 위치해 있었다. 함양 관아의 자리에는 1911년 함양초등학교가 세워졌으니, 일제의 침략으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함양관아가 사라진 셈이다. 아무튼 545년이 지난 지금도 <점필재>선생이 학사루 앞에 심었다는 느티나무는 먼발치에서 학사루를 지켜보고 있다. 점필재는 1472년 8월 14일 이곳을 출발하여 천왕봉을 향했고 고열암에서 1박을 하였다. 학사루가 지리산 산행의 출발지가 되었으니 그래서 내가 이곳을 찾은 연유이다.


<철화>님과 오도재에서 함께 1박을 하고, 적조암에서 보령박팀을 오전 07:00에 만나기로 하였는데, 새벽부터 천둥과 벼락이 치고 하늘이 요동을 쳐대니, 산행의 여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벽 05:00 <안나>님과 05:49분 <고산>님의 전화를 받고 처음에는 일행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지 못하고 '우천불문 산행합니다.'라고 했다가, 다시 전화를 하여 '오도재로 오시라!'라고 하였고, 얼마 후 일행들이 속속 오도재에 도착했다. 耳順이라는 어휘의 의미는 '귀가 순해진다.'라는 뜻이 아니고, '한 마디만 들어도  전후의 상황을 완전하게 이해하는 나이'라는 뜻이다.


이른 아침 지리산 롯지로 이동, 아침을 먹지 않은 분들이 민생고를 해결하는 사이 날이 점차 개이는 듯, 법화산 구렁의 운무가 조각조각 흩어져 하늘로 승천하더니 푸른 하늘의 민낯을 보여주자, 우리들의 마음도 동요하여 오락가락하다가 급기야 배낭을 다시 꾸려 송대마을로 향했다.




선녀굴



독녀암


미타봉(와불산)




산행을 시작하고 얼마 후 비는 다시 내리기 시작했고, 산행 목적지를 영랑대에서 청이당으로, 청이당에서 새봉으로, 새봉에서 고열암으로, 결국 장대비 속에서 음기가 가득한 고열암의 행랑굴 아래에서 이른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하늘이 결국 우리의 산행을 돕지 않으니 어쩌란 말인가, 비가 잠시 소강상태인 틈을 타서 광거정을 세우고, 일행 8인 전원의 만장일치 의견으로 숙고열암을 하기로 하였으니, 그러나 이것이 나에게는 하늘이 내린 宿古涅庵의 기회가 되었다.


* 행랑굴 : 행랑굴은 1610년 감수재 박여량의 산행기에 유일무이 등장하는 어휘로 이것을 이해하는데 꼬박 2년 가까이 걸렸다. 행랑굴은 처마가 있어 비를 피할 수 있는 바위의 형태를 뜻하니 고유명사가 아니다. 면우 곽종석은 마암을 穹窿(궁륭)으로 표현했다. 바위의 처마(상단)가 활처럼 휘어져 하늘을 가린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행랑굴이나 궁륭을 자전거를 보관하는 천정이 있는 인공 설치물을 생각하면 금방 이해가 된다.  










점심을 먹고 네 분은 폭우 속에서 젤트를 굳게 지켰고, 나머지 세 분과 함께 선열암터와 독녀암과 안락문을 둘러보았다. 처음 선열암을 찾았을 때의 느낌은 말로써 형언할 수가 없었다. 선열암에 있는 거대한 암괴를 점필재는 '구름이 뿌리내린 우뚝 솟은 바위'라고  표현하였으니 시는 글로 그리는 섬세한 문인화로 한 폭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구름이 가득하여 하늘에 '검은 구름이 빗장을 질렀으니' 선열암시를 감상하는데 한편으로 도움이 되었다.




先涅庵(선열암)

  

門掩藤蘿雲半扃 : 문은 등라 덩굴에 가리고 구름은 반쯤 빗장을 질렀는데

雲根矗矗水冷冷 : 구름이 뿌리내린 우뚝 솟은 바위의 석간수는 맑고 시원하구나

高僧結夏還飛錫 : 하안거를 마친 고승은 석장을 날리며 돌아가고

只有林閑猿鶴: 다만 숲은 한가로운데 은거하는 선비놀라는구나







안락문에는 스위치 버튼이 있다.^^


김종직선생의 유두류록과 기행시를 좇아서(170503~06)


덕다리버섯






날씨 덕분에 숙원이었던 宿古涅庵 기회를 가졌으니 인생이 새옹지마이듯 산행 또한 吉과 凶을 예측할 수가 없다. 보령박팀 신예 빅5와의 만남에서 고열암의 산정은 시간이 어찌 흐르는지 모르고  깊은 밤까지 이어졌다. 적당한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고, 숙면을 취하고 잠이 깨니 바람소리는 파도소리로 들렸다. 벌떡 일어나 여명에 의논대에 나가 눈을 감으니 분명 '파도소리'더라. 아침을 먹으며 '지난 밤 파도소리를 듣지 못했는가?'라고 물으니 <안나>님은 '바람 소리'라고 답하였고, <아브다비>님은 '파도 소리'라고 답하였다. 이어서 <고산>님은 '점필재와 김종직이 각각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라고 하며 지난 밤 이야기를 상기시키고 좌중을 희롱하였다. 하산을 하며 의논대에서 다시 점필재의 시를 암송하니 의논대의 천연 에어컨 바람이 겨드랑이로 시원하게 들어오는 듯, 모두 점필재의 의논대 시구의 표현을 공감하며 감탄하였다.    




의논대



議論臺(의논대)


兩箇胡僧衲半肩 : 호로중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선방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에 홀로 서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 가득 가을바람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하네











솔봉에 올라가 그리운 영랑대를 바라보니 까마득하였다. 솔봉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노닐다가 다시 솔봉 아래 조망 바위에서 조망놀이를 하면서 커피도 마시고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솔봉에는 이름과 달리 소나무가 없다. 세상에는 이름과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으니, 선입견 또한 眞(참)과 僞(거짓)이 있다. 송대 마을에 내려와 계곡에 들어가 땀을 씻었으니, 조개골에서도 하지 않았던 알탕의 순정을 송대 계곡에 바쳤다. 지리산 롯지에서 차량을 회수하여 마천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작별을 하였다.


서울에서 오신 <철화>님을 비롯하여 일부러 연가를 내고 참석하신 <아브다비>님과 <산사람>님, 언어의 유희로 산행내내 웃음을 주신 <고산>님, 지리동부 영랑대 동계 숙박권을 당당히 확보하신 <기하>님, [보령박팀]의 차세대 리더이며 보령의 효부 <안나>님, 그리고 나의 지리 산친 <하늘바위>님께 '리마인드 영랑대'를 강추합니다. 모두 악천후에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