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지리동부대학 점필재학과 졸업산행(170810~13)

도솔산인 2017. 8. 14. 11:12

 

지리동부대학 점필재학과 졸업산행(170810~13)

 

일 시 : 201708월 10일 ~ 13일[3박4일]

코 스

  ♣ 1일차 : 적조암 -  노장동마을 - 지장사터 - 환희대 - 선열암 - 독녀암 - 신열암 - 고열암 - 의논대

  ♣ 2일차 : 의논대 - 안락문 - 향로봉 - 곰샘 - 새봉너럭바위 - 독바위 - 청이당 - 마암산막터 - 영랑대

  ♣ 3일차 : 영랑대 - 소년대 - 중봉 - 마암(중봉샘) - 천왕봉 - 장터목 - 촛대봉 - 세석연못 - 시루봉안부

  ♣ 4일차 : 시루봉 - 촛대봉 - 창불대 - 좌고대 - 영신대 - 조망바위(1-39구조목) - 바른재능선 - 백무동

 

 

▣ 동 행 : 4명[이용훈님, 안청식님, 미산님(3, 4일차)]

날 씨 : 흐리고 맑음, 운해

 

 

1. 산행의 개요

 

2008년 10월10일~12일 2박 3일간 점필재 길을 좇아 첫 산행을 한 이후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지난 5월 초 3박 4일간 점필재 길을 걸으며 느꼈던 내용을 기록하고 산행을 복기하면서, 미진한 부분이 많아서 지난 7월과 8월 세 차례에 거쳐 고열암, 영신대와 영랑대를 재 답사하였는데, 마침 점필재 길을 전 구간 완답하고 싶다는 분(이용훈님, 안청식님)이 있어 서투른 안내 산행을 하게 되었다. 아무튼 이번 산행을 통해 지난 산행의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여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 10년 전 첫 산행의 기록을 다시 상기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본래 세사에 관심이 없거니와 어쩌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로 업을 삼았으니, 委巷(위항)의 잡된 일로 시간을 보낼 수도 없어 산을 드난지가 꽤 오래 되었다. 十과 口가 만나 古(최소 10년 전을 말함)가 되었으니 오래(古) 되었다고 해도 허물은 아닐 터, 望六의 나이에 뻘건 배낭에 노란 모자를 쓰고 명산대천을 누빈들, 어찌 조선조 士林 종조의 풍류에 비하랴? 근자에 1472년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천왕봉에 올랐던 '유두류록'을 읽고 선답한 자들이 있다하여 지리 探究 野史家 <가객>님의 산행기를 곁눈질로 흘깃 보고, 2주 전 지장사지에서 상대날등으로 올라가 동부능선으로 이어진 천왕봉 오르는 길을 확인하였다. 부산에 있는 <소혼>에게 전화를 하여 의견을 나누고 의기투합하여 <미산>선생님과 <공교수>님 그리고 <승균>이와 3년 전 덕유산에서 만난 사진을 전공하신 <수평선>님이 함께 하였다.


 

花巖(꽃봉산)

 

2. 화암과 지장암지에 대하여
가. 화암의 열쇠는 산봉우리巖이다.

 

花巖의 巖은 '산봉우리암字'로 꽃봉산을 가리킨다. 화암은 산 모양이 연꽃 모양으로 엄천사가 꽃봉의 맞은 편에 자리잡은 연유이다. 花巖의 花와 華는 同字로 법화산, 엄천사와 함께 동강마을은 佛國土의 트라이앵글이다. 동강마을의 이름은 엄광의 고사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이미 여러 차례 많은 분들이 자세한 유래를 밝혀 설명을 생략한다. 아무튼 시대에 따라 정치적 종교적 이념이 대립하고 갈등하며 공존하였다면, 독녀암을 중심으로 한 민간신앙과 화암과 엄천사, 법화산의 삼각점을 잇는 불국 정토와, 엄광이 은거한 고사가 있는 동강마을과 화산 12곡의 한 가운데를 엄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寂照庵

 

 

 

나. 지장사지에 대하여
지난 산행에서 한 번 짚었던 내용으로 유두류록의 구두점에  오류가 보이는 부분이다. 다시 읽어보니 점필재 일행이 지장사에 들른 것이 아니고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짚신으로 갈아 신은 것이다.  또한 선답자들이 지장암지라고 발표한 곳은 물이 없기 때문에 암자의 입지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亦令導行至地藏寺路岐舍馬著芒鞋策杖而登林壑幽窅已覺勝絶一里許有巖曰歡喜臺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버리고)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이미 경치가 매우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일리를 나아가니 바위가 있는데 환희대라 하였다.


암자나 사찰의 폐사지에 반드시 기와편이 있어야한다는 가설은 모든 암자의 지붕이 기와였다는 논리인데,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선인들의 유산록을 보더라도 '영신사만이 기와지붕이다.'라는 기록을 보더라도, 암자와 기와를 무조건 연결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다. 불일암 산신각은 너와집 불일암법당띠집(茅屋)이었으니, 퇴락한 불일평전의 봉명산방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나는 지장사가 계곡에 물이 흐르고 석축이 있는 곳이라고 추정하며, 지장암에서 하룻밤 묵으며 시를 남긴 노진의 시를 그 근거로 제시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부러 물이 흐르는 계곡가 석축이 있는 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옥계(玉溪) 노진(盧禛)[1518~1578]의 시는 다음과 같다.

 

 

夜宿地藏庵

 
                      노진(盧禛)[1518~1578]

山中無俗物 : 산중이라 세속의 잡된 일 없어
煮茗聊自飮 : 차 끓여 심심찮게 따라 마시며
坐愛佛燈明 : 앉아서 환한 불등 고이 보다가
深宵始成寢 : 깊은 밤 가까스로 잠이 들었지
還有石泉響 : 헌데 또 바위틈의 샘물 소리가
冷然驚曉枕 : 돌연 새벽 단꿈을 놀래 깨우네

                                       <玉溪集>

 

점필재의 유두류록에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올라갔다.'라는 내용을 근거하여 점필재의 지장사 경유설에 동의하지 않는다. 함양 고을의 수령이 암자의 앞을 지나가는데, 지장사 갈림길만 언급하고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암자의 규모나 존재가 미미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장암의 위치는 노진의 시에서 '바위틈의 샘물소리가 새벽 단꿈을 깨우네.'의 구절로 미루어 계곡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노진은 1518(중종 13) 함양군 북덕곡 개평촌에서 태어났으나 처가가 있는 남원에 와서 살았다. 153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6(명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천거로 박사가 되었다.'라는 기록에서 증광문과 급제 이전(1546년)이니, 1472년에서 1546年間에 지장사는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뱀사골 도탄에 띠집으로 桃灘精舍(도탄정사)를 짓고 은거한 변사정(1529~1596)은 盧禛(1518~1578)의 제자이다. 

 

♣  붙임 : 불일암 건물 형태에 대한 유산기의 기록(참조)

 

 

 

 

 

 

 

 

환희대

 

 

 

환희대

 

 

 

배바위

 

 

 

선열암 초입 암굴

 

 

 

선열암

 

 

 

독녀암 石門

 

 

 

신열암

 

 

고열암

 

 

독녀암

 

 

의논대의 일몰

 

 

 

 

미타봉

 

 

독녀암(함양독바위)

 

 

독녀암 石門

 

 

안락문

 

 

오뚝이 바위(향로 모양)

 

상내봉의 유래가 향로봉에서 경상도 사투리로 발음하기 쉽게 상내봉으로 변했다는 논리에는 동의한다.[초성 ㅎ이 ㅑ(ㅣ+ㅏ)를 만나 ㅣ모음 때문에 ㅎ이 ㅅ으로 변하는 음운현상은 표준어가 아니고 사투리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나 '구개음화'현상으로 본다. '로' 앞에 ㅇ받침이 있어 ㄹ이 ㄴ으로 변하는 현상을 '비음동화'라고 함] 내 눈에는 다시 보아도 오뚝이 바위가 향로의 모양으로 보인다. 이것은 바로 선인들의 눈에도 향로로 보였을 것이고, 선인들은 천왕봉을 법왕(부처)으로 이해한 것이다. 따라서 향로봉도 이 오뚝이 바위(석향로)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새봉 石門

 

3. 새봉과 甕巖을 지나 청이당 가는 길

 

1611년 어우당 유몽인 선생은 용유담에서 마적대를 지나 송대마을에서 벽송사 능선을 넘어, 두류암에서 1박을 하고 천왕봉에 올랐다. 어우당은 [두류산록]에서 石門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두류암 승려 혜일에게 주는 시에 石門을 언급하고 있다. 두류암에서 옹암(진주 독바위)으로 올라갔으니, 언뜻 새봉의 바위群이 떠올랐다. 얼음터에서 품개동을 지나 곰샘을 경유하여 새봉으로 오르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는 그의 시에서 石門을 언급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頭流庵贈慧日兼示修師 / 두류암 승려慧日에게 주고 修禪師에게 보이다.

 

선현들이 두류산 선경 찾아 나섰으니 / 그 길은 의탄촌 남쪽을 경유하였었지

내 이제 진경 찾아 두류산에 들어와서 / 우연히 하룻밤 두류암에서 묵었네

두류암은 의탄 마을의 위쪽에 있으니 / 내 산행이 마침 선현들의 유람과 같네

선현의 발자취를 내 따라갈 수 없지만 / 끌고 당기며 천왕봉에 오르려고 하였네

학사가 시를 던져 용유담 신룡이 노하니 / 구름일고 천둥 쳐서 비바람이 몰아쳤네

산신령은내가 마음껏 조망할 수 있도록 / 구름 걷어 한순간 대기를 청명하게 했네

서늘한 바람 불고 상쾌한 소리 일어나 / 나그네 회포는 늦가을인 듯 처량하네

진달래꽃의 두견새는 어디에서 우는가 / 힌밤중에 잠 못 이루고 수심에 잠기네

혜일이 은근히 시를 지어 달라 하여 / 촛불 켜고 일어나서 억지로 지어 보네

시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니.... / 다시 만나 정이 서로 친하기 때문일세

내일 아침 나는 석문으로 떠날 것이고 / 선사는 두류산으로 운수행각 나서겠지

선사는 강남 땅 늙은 태수 생각하리라 / 조계에 가을 달이 뜨면 혹 와서 보려나

 

아직 감수재 박여량 길과 어우당의 길을 완답하지 않았으니 상류암과 함께 석문 또한 풀어야할 과제이다.(석문은 진주독바위 인근으로 밝혀짐) 곰샘에서 취수를 하여 새봉 너럭바위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충분한 휴식을 한 후 독바위로 향했다. 독바위는 글자 그대로 독(항아리옹 甕=瓮) 모양의 거대한 바위 암괴이다. 상류암의 위치를 확인하지 못했으나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을 풀기 위해서는 독바위 아래에서 상류암지를 찾아야한다. 1937김학수의 유방장산 기행록에 '瓮岩人朴亮焕適來此. 爲言上山計劃[옹암마을 사람 박인량이 마침 이곳에 와서 산에 올라갈 계획이라고 말을 하였다]' 는 기록을 보면 그 시기 이전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고, 상류암의 위치는 마을터에서 독바위가 보이는 위치에 있다고 추정된다.  박여량의두류산일록에 상류암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 九月七日戊申晴。
將盥僧請湯水而沃盥。余辭之。乃就水槽水。掬淸注而頮之。菴西有臺頗可觀。臺上有檜三四株。其大僅一掬。其長已三四丈矣。旣以無曲之根。又得養之而無害。其爲他日有用之材可知矣。


○ 9월7일 무신일 맑음. [1610년 양력 10월 23일 土 霜降]
세수를 하려고 하는데 이 암자(상류암)의 승려가 물을 데워 세수물을 준비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사양하고 물통으로 가서 맑은 물을 움켜 낯을 닦았다. 암자 서쪽에는 너럭바위가 있는데, [주위의 경치가 제법 볼만했다.] → [암자 서쪽에는 대가 있는데 자못 볼만했다.] 그 곁에 회나무 서너 그루가 있었는데 이제 겨우 한 움큼 정도의 굵기였고 길이는 서너 장쯤 되었다. 밑둥이 곧기 때문에 해를 입지 않고 잘 자라고 있으니 뒷날 유용한 재목이 되리라는 것을 알겠다.

 

 

 

 

 

새봉

 

 

진주독바위(甕巖)

 

 

 

 

 

 

甕巖

 

 

 

 

 

 

청이당터 : 이곳을 1472년 점필재와 1611년 어우당은 청이당,

1871

년 배찬(裵瓚)은 천녀당이라고 함.

 

청이당터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계곡물에 땀을 씻었다. 계곡물은 졸졸 흐르는 수준으로 본래 알탕은 불가원칙이거니와 날진병에 물을 담아 머리와 몸에 붓고, 옷은 입은 것이 전부이니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옷을 짜서 입을 수 밖에 없었다. 물을 4리터 이상을 취수하여 앞에 걷는 일행들을 보니 안스럽다. 일행들에게 '우리는 오늘 점필재가 되고, 그의 노비 역할도 하니 1인 2역이다.'라는 말로 서로를 격려했다.  

 

 

 

 

 

 

4. 아! 멀고 먼 영랑대

 

신마암 삼거리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마암(?)으로 향했다. 이용훈님은 가기 싫은 표정으로, 지난 겨울 육사시미에 눈꽃이 핀 마암에 현장검증을 나온 죄인처럼 추레한 모습으로 어쩔 수 없이 따라왔다. 마암은 논란이 많은 곳이다. 1472년 김종직 선생과 1610년 박여량 선생은 중봉샘을 마암으로 기록하고 있고, 1610년 박여량 선생은 이곳을 행랑굴로, 1871 배찬(裵瓚)은 [유두류록]에 마암 산막으로 중봉샘을 중봉산막으로 기록하였다.. 여기에서 행랑의 의미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이라는 뜻으로, 오버행 바위 모양의 의미이고 고유명사가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1618봉이 말봉인데에서 이곳의 산막을 마암산막(말봉 아래 산막)이라고 한 것 같다. 천왕봉은 군왕, 중봉과 하봉은 신하, 영랑대는 장수이니 1618봉은 말의 형국으로 말봉이라고 하였고, 巖은 峰의 뜻이니 마암과 말봉은 동의어다. 1871년 이전에 누군가가 마암이라는 각을 하였다고 추정된다. 그리고 馬川의 이름도 말봉(馬山)과 유관하다고 본다.

 

1877년 8월 9일 허유와 곽종석 일행이 대원사에서 출발하여 비가 오자, 이곳에서 1박을 하고 천왕봉으로 올라갔는데, 면우 곽종석 선생이 허유에게 이곳의 이름을 지을 것을 요청하자, 허유가 '구름이 걷히길 바란다.'라는 의미에서 '開雲巖'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면우의 제자 하용제에게 바위벽에 손바닥만한 크기로 '開雲巖 許南黎'라고 쓰게 하였다는 기록이 1877년 <허유>의 [두류록]에 실려 있다. 같은 달 8월 29일 만성 박치복이 한주 이진상과 깉은 코스로 천왕봉에 올랐는데, 하용제가 함께 산행을 하면서 개운암이라는 각자를 새기기로 하였으나, 대원사에서 천왕봉까지 하루만에 올라가 각자를 새기지 못한 것 같다. 한주 이진상과 만성 박치복은 남려 허유와 면우 곽종석의 스승으로 강우학파를 이끈 당대의 석학들이다. 약헌 하용제선생이 개운암 묵서를 어디에 썼을까 궁리하다가 산수담님에게 물으니 바위 한 곳을 가리켜 사진에 담았다. 약헌 하용제는 원정매가 있는 원정구려의 주인이다.

 

 

 

 

 

'開雲巖 許南黎' 묵서 추정 巖面

 

 

 

 

 

 

 

 

 

행랑굴을 출발하여 운무가 자욱한 영랑대에 닿았다. 1744m의 영랑대를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永郞岾 영랑재로 기록하고 있다. 지리산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지도를 만들어 수년간 1618봉 안부를 버젓이 영랑재라고 표기하여, 아직도 지리 매니아들이 혼란을 겪고 있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먹을 갈아 붓에 적신 후 먹물이 다할 때까지 글을 쓰듯, 자신의 모든 힘을 다 소진하고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지리의 구중심처 아란야 영랑대이다. 두 분의 안면을 살피니 편안한 표정이다. 늦은 밤에야 하현 달이 젤트 위로 가문비나무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永郞岾(영랑재)國字(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한자)로 유두류록에 나오고 금강산 楡岾寺(유점사)에서 보이기는 하지만 용례가 아주 드문 漢字로 선조들이 한자어(인명)와 고유어를 결합하여 만든 신조어 지명에 쓰인 한자로 짐작된다. 김종직은 영랑재(), 김선신은 영랑참(), 유몽인은 영랑대(), 양대박은 영랑봉()으로 기록하고 있다.

 

 

5. 점필재 유두류록길 3일차 

 

잠에서 깨니 새벽 4시다. 젤트 문을 여니 오리무중이다. 짐에도 술에도 장사가 없듯, 시간 앞에서는 무더운 더위도 버티지 못하는 것 같다. 기대를 갖는 만큼 실망이 크듯, 오늘 아침의 날씨가 그렇다. 아침의 메뉴는 누룽지다. 식량이 빠듯하여 쌀도 아낄 겸, 장터목으로 지리동부대학 미산 총장님이 올라오시기로 하였으니 가볍게 아침을 먹었다. 출발 직전 브로켄의 조짐이 있어 일행에게 '태양을 등지고 등이 뜨거워지면 브로켄이 나타날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출발을 늦췄다. 운해가 해유령을 넘어가고 상봉과 중봉이 운무의 장막을 벗고 제 모습을 드러내더니, 초암능선 아래로 브로켄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며 산객의 발길을 잡았다. 그런 연유로 한 시간이나 지체하였으나 서두르지 않았다. 인생이 순간이듯, 자연 또한 한 순간의 일어났다 어느 순간 사라지는 현상이 아닌가.  

      

 

 

 

 

 

 

 

 

 

 

 

 

 

 

 

 

 

 

 

 

 

 

 

 

 

 

 

 

 

 

 

 

 

 

 

 

영랑대 포토존 바위에 올랐다가 하봉(소년대)을 찍고, 천상의 화원 해유령 선암에 배낭을 내려놓고 점필재가 船巖이라고 한 四面佛에 잔을 올렸다. 민간 신앙에 대한 믿음은 없지만, 위대한 자연에 대한 경외와 존경의 표시로 자신을 낮추는 산사람들의 행위이다. 겸하여 휴식도 하고 음복을 할 수 있다.  酒, 果, 脯를 갖추었으니 一石三鳥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3박 4일의 산행에서 3일차이니 산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현관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안전을 기원했는데 효험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곳은 지역 주민들이 상봉에 오를 때 술을 한 잔 붓고 안전산행을 기원하던 제단이라고 한다.[추성산장 허상옥사장]

 

 

중봉

 

 

 

 

 

 

 

 

 

 

 

두 분을 마암(중봉샘)에 내려 보내고 기다렸는데 '시원하다.'라는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半浴을 하는 모양이다. 중봉 안부에는 동자꽃을 비롯해서 구절초, 모싯대, 취꽃 등 기화가 만발하고 요초가 무성하다. 숲 특유의 알싸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기온도 한풀 꺾인 듯 가을로 향하고 있었다. 장터목에서 미산님을 만나는 시간에 늦을 것 같아 일행에게 출발을 독촉했다. 천왕봉을 오르는데 운무가 하늘을 뒤 덮고, <미산>선생님께서 소지봉이라고 하시며 늦지 말라는 당부의 전화가 왔다. 상봉에서 두 분의 인증샷을 찍고 성모사터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쉬었다. 장터목에 내려와 미산님을 만나 점심을 먹고 여유 있게 출발하며 秋江의 유산기에서 읽은 소년대와 계족봉의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사진 <김덕영>님

 

 

사진 <김덕영>님

 

 

 

 

 

 

 

 

 

 

 

 

 

금강대(향적대)

 

 

 

 

 

 

 

 

 

 

 

촛대봉에 이르러 휴식을 하고 운무가 오락가락하는 촛대봉 능선을 내려와서 갈림길에 배낭을 내려놓고 세석연못(磧石池) 아래 연수정에서 취수를 하기 위해 내려섰다. 세석고원의 신비한 이 인공연못은 지리 인문학을 입에 달고사는 사람들에 의해 청학연못으로 둔갑하여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세석의 명소가 되었다.  1851 하달홍의 두류기(頭流記)에는 이 인근을 磧石洞으로 기록하였으나 연못의 존재에 대한 기록이 없다가, 1879년 송병선 두류산기(頭流山記)에는 細石坪으로, '臥巖 아래 작은 연못(小池)를 만들었고, 연못 아래에는 연수정(延壽井)이 있다.'라는 기록대로 겨울에도 얼지 않는 샘물이 계곡을 따라 흐르고 있다.

 

 

鶴洞壬의 각자는 하달홍과 송병선의 유산기에 모두 있으니 1851년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磧은 '서덜적'으로 磧石과 細石은 같은 의미이다. 鶴洞壬 각자의 풀이는 거림에 있는 鶴洞임좌병향에 있다는 뜻으로 이해가 되고, 하달홍은 鶴洞美禽洞이라고 하였으니 美禽은 鶴을 가리키고 학동과 미금동은 같은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그리고 연못 위의 거대한 바위 슬랩은  1851년 하달홍은 萬景臺라고 하였으니 이 연못을 굳이 이름 한다면 磧石池細石池가 적합하다고 생각이 든다. 끝으로 촛대봉을 1851 하달홍은 中峯이라고 하였고, 1879년 송병선은 燭峯이라고 하였으니, 지금의 촛대봉으로 이해하면 된다. 연못을 만들게 된 연유는 풍수지리상 촛대봉의 火氣을 누르기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연못으로 진주 단성민란(1862년) 당시 몸을 피해 숨어든 사람들이 조성하지 않았을까하는 추측이 든다. 아무튼 청학연못이라는 이름은 불일폭포와 청학봉 아래 청학연을 차용하여 이름 한 것이다. 우리는 연수정에서 취수하여 다음날 시루봉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적석동(시루봉 안부)에 하룻밤 둥지를 틀었다.

 

 

세석인공연못

 

 

세석인공연못

 

 

 

 

 

 

 

 

 

 

6. 세석의 명소 창불대& 영신대 

 

새벽 4시에 기상을 하였다. 오늘은 점필재길 4일차이고 마지막 날이다. 하늘을 보니 지난 밤 보이던 별들은 옅은 구름에 가려있고, 산 아래에는 운해가 깔려 있다.  아침을 먹고 바위 위 조망 터에 올라서니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의 일출 장면과 사극 '용의 눈물'처럼 운해 위로 검붉은 구름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일행들에게 '와! 이것이 용의 눈물이다!'라고 외치며 一聲을 吐해내고 천왕봉을 응시했다.

 

 뜨거운 태양이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절정에 오른 여인의 하얀 둔부처럼 운무는 몸부림을 쳤고, 용이 머리를 숙인 듯, 꼬리를 치켜든 듯, 굳게 입을 다문 하늘은 붉은 입술이 가늘게 열리더니, 서서히 신음을 吐해내며 마지막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순간 나는 견딜 수 없어 산죽과 잡목의 터널을 뚫고 시루봉으로 내달렸다. 인생의 생로병사가 한 순간이 듯, 일출 장면과 자연의 풍광, 음양의 조화 또한 그러하리라. 서서히 붉게 떠오르는 태양과 만구렁을 깊숙히 파고든 운무가 조화를 부리는 오늘, 산행을 함께한 일행이 없었다면 이러한 풍광을 만날 수 있었던가. 해가 완전히 떠오르고 구름이 흩어진 연후에야 비로소 시루봉에서 내려와서 배낭을 꾸려 일행들과 함께 뜨거운 일출의 열기에 촛농이 녹다가 순간 굳어버린 듯한 거대한 촛대봉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갔다.

 

♣ 박여량선생의 두류산일록의 일출장면

[庚戌年八月六日丁未晴] 晨起整衣冠酌秋露一二盃從者又告曰震方已啓矣余與諸君各占東邊石上以竢賓焉黑雲紫雲桓亘東隅者復如前夕日入之狀焉日輪轉上雲氣漸散一天之下輝暎光明如人君出御燈燭煌煌宮闕森嚴五雲玲瓏千官擁衛百隷執物令人起敬而不敢慢也


[161086일 정미일 맑음]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추로주(秋露酒)를 한두 잔 마셨다. 따라온 사람들이 또 동방이 이미 밝아옵니다라고 하여, 나는 여러 사람들과 동쪽 바위 위에 올라가서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검은 구름과 붉은 구름이 동쪽 하늘가에 드리웠는데, 어제 저녁 해가 질 때의 모양과 같았다. 해가 솟아오를수록 구름 기운이 점차 흩어졌다. 온 하늘 아래는 찬란한 빛이 밝게 퍼져, 마치 임금이 임어할 때 등불이 찬란하고 궁궐이 삼엄하며, 오색구름이 영롱하고 온갖 관리들이 옹립해 오위하며, 아랫사람들이 제자리에 서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거만하지 않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과 같았다.

 

 

 

 

 

 

 

 

 

 

 

 

 

 

 

 

 

 

 

 

 

 

 

 

 

 

 

 

 

 

 

 

 

 

 

 

 

 

 

 

 

 

 

 

 

 

 

 

 

 

 

 

 

 

 

 

 

 

 

 

 

 

 

 

 

 

 

 

 

 

 

 

 

 

 

 

 

 

 

 

세석산장을 하이패스로 통과하고 창불대 들머리에 배낭을 내려놓고 창불대를 찾았다. 희미한 운무 속에 제 모습을 드러낸 창불대는 처음에는 하나의 부처로 보이다가, 점점 그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多佛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多佛有是] 어제는 해유령의 船巖이 四面佛로 보이더니, 오늘 내 눈 앞에 나타난 자연불을 바라보며 선인들이 왜 창불대라고 이름 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일행 중 산수담님은 이 기이한 체험에 경건한 마음으로 西國(釋씨)의 禮를 표하는 것을 사진에 담았다. 이것을 보면 사람의 말이나 글에도 에너지가 있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에도 에너지가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불대를 돌아본 후 좌고대로 이동하며 조망 바위에서 바라본 1625봉1463 8월 <이륙>선생은 [유지리산록]에서 부도 모양으로 문창후 최치원이 여기에 깃들어 살고 있다고 설명하였고,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는 비로봉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비로봉이 오늘은 부처의 형상으로 보이니 선인들이  비로봉이라고 이름 한 연유를 알겠더라. 가섭존자(가섭대)를 내려다보는 비로나자불의 형상이니 풍화작용으로 빚어낸 알몸의 암봉에 이름을 붙여서 생명을 불어넣고 인간과 자연이 서로 존중하며 공존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비로봉의 자물쇠를 열고 드디어 좌고대로 들어갔다.  

 

 

사진 <김덕영>님

 

 

비로봉과 반야봉[사진<조박사>님]

 

 

비로봉

 

 

비로봉

 

좌고대는 이미 지난 주 다녀가면서 보령 <임대장>님과 갓독을 통해 확인을 했기 때문에 직접 올라가서 확인하는 일만이 남았다. 나는 바위 모서리를 잡고 거침없이 올라갔다. 아마 이번 산행에서 화룡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좌고대에 대한 설명은 1463년 8월 청파 <이륙>선생의 [유지리산록]과 1487년 추강 <남효온>선생의 [지리산일과]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지만, 실제 올라가보려고 시도한 이는 추강 남효온으로 그분들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1463년 청파 이륙 선생의 [유지리산록]
靈神寺東壇. 有迦葉石像. 肩臂如火燒然. 諺傳. 燒盡人世當更. 卽有彌勒佛住世. 甚有靈驗云. 後峯有奇石削立如檣. 北臨萬丈. 復戴小石如床. 向般若峯稍低. 人有攀緣而登. 四向拜者. 以爲根性. 然其能之者. 千百僅有一二.


영신사(靈神寺) 동쪽 제단에는 가섭(迦葉)의 석상이 있는데 어깨와 팔에 불에 탄 듯한 자국이 있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이 석상이 다 타면 인간 세상이 변해서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올 것이니 매우 영험함이 있다.”라고 한다. (가섭상)뒤쪽의 봉우리에는 기이한 바위가 돛대처럼 솟아 있는데 북쪽으로 만 길이나 되는 벼랑에 맞닿아 있고 상처럼 생긴 돌을 그 위에 또 이고서 반야봉을 향해 조금 기울어져 있다. 부여잡고 올라 사방을 향해 절하는 자는 근기가 잘 잡혀 있다고 여겨지는데 해낼 수 있는 자는 천 명 중에 한 두 명이 있을까 말까할 정도이다.


1487년 추강 남효온 선생의 [지리산일과]
[1487101] 余從伽葉殿後攀枝仰上一山. 名曰坐高臺. 有上中下三層. 余止上中層. 心神驚悸. 不得加上. 臺後有一危石高於坐高臺. 余登其石. 俯視臺上. 亦奇玩也. 義文坐臺下. 恐懼不得上.


[1487101] 나는 가섭전 뒤쪽에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산의 한 봉우리를 올랐는데, 좌고대(坐高臺)라고 하였다. 거기에는 상, , 3층이 있었는데 나는 중층까지 올라가서 멈추었는데 심신이 놀라고 두근거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었다. 대의 뒤에는 위험한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좌고대보다 더 높았다. 나는 그 바위에 올라 좌고대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기이한 풍경이었다. 의문은 좌고대 아래에 앉아서 두려워하면서 더 이상 올라오지 못하였다.

 

 

 

 

 

 

 

 

 

 

 

 

 

170903

 

 

사진 <김덕영>님


 

좌고대에서 올라간 곳으로 바위 모서리를 잡고 겨우 내려왔는데, 함께 올라간 김덕영님은 그 반대편으로 먼저 내려와 있었다. 좌고대 왼쪽이 좌고대를 오르내리는 통로였다. 추강 남효온의 기록을 좇아 좌고대와 비로봉 사이로 내려섰는데 이길이 영신암에서 좌고대를 오르내리는 지름길이다. 생각보다 완만하고 산에 다닌 분이면 영신대의 옛길임을 금방 알수 있다. 경로를 조금 이탈하여 영신암지 쪽으로 내려왔다. 동쪽으로 가섭대에 비스듬히 운무속으로 보이는 암봉이 바로 비로봉이다.
가섭대의 비밀은 아무도 풀지 못한 난수표였는데, 가섭대를 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옛 산행기이다. 영신대 관련 산행기를 따로 발췌하여, 원문과 국역을 대조하여 오류를 발견 수정하고, 산친들에게 메일로 보내서 함께 읽은 후, 서로 의문이 가는 부분을 토론하고 그분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수용했다. 현재 지리인문학의 종장은 최석기 교수님이다. 다만 현장을 모두 답사하지 않고 국역을 했기때문에,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오류가 조금 있지만, 그것은 매우 미세한 부분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힌트를 얻은 것은 1545년 4월 지리산을 유람하고 유산기 대신 기행시 13제 16수를 남겼는데, 최석기교수님과 강정화 교수님이 초역한 첫 구부터 '질풍처럼 달리는 준마''바람난 말로 바람난 말'로 둔갑시킨 황준량의 유두류산기행편의 장편고시(장단구)에서 225句와 226句이다.
千尋迦葉日邊影 : 천길 가섭대가 햇빛에 그림자 드리웠는데刀斫亦被島夷兇 : 흉악한 섬 오랑캐의 칼날에 상처를 입었네    

황준량의 장편고시를 수십 번 읽고 가섭대의 자연불이 햇빛의 그림자에 따라 절벽으로도 보이고 가섭존자의 형상으로 보이는 것을 읽은 것이니 그리 미워할 일은 아니다. 이런 생각하며 영신대를 나와 하산을 서두르는데 빗방울이 떨어졌다. 일행들은 비라고 하고 나는 안개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비도 아니고 안개도 아니더라.  

 

 

* 황준량의 유두류산기행편 : 176운 352구 2516자의 장편고시로 장단구로 이루어져 있다. 황준량이 1545년 4월 지리산을 유람하고 13제 16수의 시를 남겼고 유산기를 남기지 않았다. 유두류산기행편은 지리산을 유람한 순서대로 쓴 것으로 시로 쓴 유산기라고 할 수 있다. 지리산을 노래한 장편 고시 가운데 가장 긴 유산시이다. 또한 장단구를 섞어서 썼지만 隔句押韻 격구압운의 원칙을 잘 지켰고 叶韻을 하고 있지만 換韻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뛰어난 시인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출처 황준량의 지리산 기행시에 대하여(최석기)]

 

 

비로봉

 

 

石迦葉

 

 

석가섭 제단

 

 

기도터 石門

 

 

靈溪

 

 

玉泉

 

 

영신암지

 

 

영신대 제단

 

 

 

 

 

 

 

 

사진 <조박사>님

 

 

사진 <조박사>님

 

 

 

 

 

 

㗯香木(잣향목)

 

 

 

 

 

 

 

 

 

 

사진 <조박사>님

 

 

 

 

사진 <김덕영>님

 

 

 

 

 

 

 

 下山吟에 나오는 굽은 물가

 

 

사진 <김덕영>님

 

 

 

 

7. 下山吟

 

바른재능선으로 내려와서 下山吟에 나오는 굽은 물가에 앉아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으니 점필재처럼 겨드랑이에서 찬바람이 나왔다. 반바지로 갈아입고 주등로 나와 맥주를 보채는 용훈씨를 뒤로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섰다. 마천으로 나와 점심을 먹으며 마시는 맥주 한 잔의 시원함이 4일간의 피로를 풀었다. 3일 내내 새벽 4시 기상하여 고생한 일행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끝.

 

 

 

♣ 에필로그

 

 

* 노진(盧禛)[1518~1578]

 

 

조선 중기 남원에서 활동한 문신. 옥계(玉溪) 노진(盧禛)[1518~1578]은 조선 중기 명종과 선조 연간에 주로 활약한 문신으로, 30여 년 동안 청현(淸顯)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지례현감과 전주부윤 등 외직에 나가서는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였다. 성리학과 예악에 밝았다. 노진은 1518(중종 13) 함양군 북덕곡 개평촌에서 태어났으나 처가가 있는 남원에 와서 살았다. 효심이 뛰어나 노모를 봉양하느라 지병이 악화되어 1578년 향년 61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자응(子膺), 호는 즉암(則菴옥계(玉溪). 증조부는 예조참판을 지낸 송재(松齋) 노숙동(盧叔仝)이며, 부친은 노우명(盧友明)이다. 모친은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생원(生員) 권시민(權時敏)의 딸이다. 노진은 슬하에 7형제를 두었다. 153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6(명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천거로 박사가 되었다. 1555년에는 지례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아 청백리로 뽑혔다. 1560년 형조참의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는데, 노모의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지원하여 담양부사와 진주목사를 지냈다.

 

1567년 충청도관찰사와 전주부윤을 지낸 후, 다시 내직인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1571년 다시 노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여 곤양군수가 되었고, 이듬해 대사간·이조참의가 되고, 경상도관찰사·대사헌 등을 지냈다. 1575년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사퇴한 후 신병을 이유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평소에 남명(南冥) 조식(曺植),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등의 학자들과 도의(道義)로써 교유하였다. 노진은 대학(大學)을 학문하는 기본으로 삼고 정진하였다. 제자들에게도 논어(論語)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등의 책을 중심으로 가르쳤는데, 이는 사람의 근본 도리를 익히는 공부를 중히 여긴 데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자신을 수양하기 위해 ()’을 공부의 요체로 삼았으며, 이러한 학문 자세를 바탕으로 관직 생활을 하였다. 노진은 고을을 다스릴 때에는 직무를 신중히 이행하였고, 이익을 욕심내거나 치적을 뽐내지 않았다. 노진은 당시의 가장 큰 병폐가 빈부의 격차와 토지 겸병에 있다고 여겨 균전제 시행을 역설하였는데, 이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집으로 목판본 옥계집(玉溪集)74책이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진 [盧禛]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하용제(河龍濟)

 

 1854(철종 5) 6291919118. 조선 말기 무신유학자항일운동가. 자는 은거(殷巨)이고, 호는 약헌(約軒)이다. 본관은 진양(晉陽)이며, 출신지는 경상남도 산청군(山淸郡) 단성면(丹城面)이다. 17세 때 부친의 명으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사서(四書) 및 좌씨전(左氏傳) 등을 배우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1872(고종 9)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1884(고종 21) 의정부공사관(議政府公事官)에 임명된 다음부터 1892(고종 29)까지 훈련원주부판관첨정(訓鍊院主簿判官僉正)선전관총어영초관(宣傳官總禦營哨官)의정부공사관(議政府公事官)대흥군수(大興郡守)삼척진영장(三陟鎭營將)격포진첨사(格浦鎭僉使) 등을 역임하였다.

 

1905(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미망인(未亡人)'으로 자처하며, 생을 마칠 때까지 세상에 나아가지 않을 계책을 세웠다. 1919년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의 유림들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보내 천하의 대의(大義)를 보일 것을 결의할 때 동참하였다. 이 사건으로 진주감옥에 갇혔으나 자신의 뜻을 조금도 굽히지 않고 항의하였다. 향년이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2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하홍규(河弘逵)하상규(河祥逵)이다. 저서로 약헌문집(約軒文集)이 있다.


 

불일암 건물 형태에 대한 유산기의 기록

 

1618<조위한>[遊頭流山錄]

불일암에 도착하니 절은 오래 되었는데 승려는 없고 단청은 떨어져 나가 있으며 빈 감실(龕室)은 고요하고 창문은 영롱(구멍이 뚫리다)하였다.

 

1727<김도수>[남유기] 불일암

암자에 도착해보니, 방 가운데 차가운 바람이 불어 마치 귀신이 휘파람을 부는 것 같았다.[卽之室中. 陰風颯颯. 如鬼物交嘯.]

 

1743, 정식 <청학동록(靑鶴洞錄)>

청학동의 만모(万茅)(?)는 하나의 산수굴(山水窟)인데,

 

1883<전기주>[유쌍계칠불암기]

이것이 바로 불일암(佛日菴)이었다. 그 뒤로는 산신각(山神閣)이 있었는데, 완전히 박달나무 껍질로 기와를 대신했다.

 

1899<하겸진>[유두류록(遊頭流錄)]

암자(불일암)는 폐허가 되어 무성한 잡초만 가득하고 단지 도토리 껍질로 뒤덮인 산제각(山祭閣)만 있었다.

 

1902년 송병순의 유방장록 [용추, 학연]

불일암은 무너졌고, 산신당(山神堂)만 남아 있었다.

 

1909년 정종엽(鄭鍾燁) 유지리산록

불일암(佛日菴)의 옛 터에 이르렀다.

 

1926년 이현욱의 지리산 유람기록

국사암에서 5를 오르면 환학대가 있으며 다시 5를 가면 띠 풀로 지붕을 덮은 암자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불일암이라고 하였다.[菴之上五里. 有喚鶴臺. 又五里有覆茅一庵. 卽佛日也.]

 

1928(무진) 매봉 오정표의 유불일폭기

홀연히 절 하나가 정상에 있는데 꽃과 나무로 둘리어져 있고 흰 띠로 지붕이 덮여있는데, 이름이 불일암(佛日菴)이었다.[忽見有一刹. 出頂上. 環以花木白茅覆之. 是名佛日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