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불일협곡의 청학연과 소은암(170909~10)

도솔산인 2017. 9. 11. 10:35


불일협곡의 청학연과 소은암(170909~10)


일 시 : 201709월 09일 ~ 10일

코 스 : 거림 - 세석 - 촛대봉 - 시루봉 안부 - 영신봉 - 좌고대

▣ 동 행 : 미산님, 이용훈님, 안청식님

날 씨 : 맑음


 

 솔박사 팀과 영랑대와 점필재길에 이어 세 번째 지리산 산행을 하였으니 이것도 하나의 지리산 인연이라고 할 수 있다. 일행들은 용인에서 내려오면서 대전에서 나를 픽업하여 남으로 달려서 아름다운 섬진강 강변길을 지나 화개동천으로 들어갔다. 산행의 제안을 받고 어떤 코스로 안내해야할까 고민하였지만, 선인들의 유산기를 읽고 내원골로 들어가 장원암을 찾아보고, 불일협곡과 청학연과, 백학봉, 청학봉 등의 연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대소이은암에서 대은암과 호룡대와 지장암의 위치를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으로 산행에 임했다.


화개대교

 


쌍계석문

 



불출암 석축


1618년 조위한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불출암의 위치에 대해 '불출암에서 또 1 리쯤 가서 쌍계로 돌아와 묵었다.[自佛出. 又行一里許. 還到雙溪宿焉.]'라고 기록하였다. 불출암터는 쌍계사에서 400m정도의 거리에 烏竹이 있는데 올라가 보니 석축의 상태가 양호하고 수행자가 머물던 움막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수행자의 움막 흔적

 

 

狀元巖이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1651년 오두인의 두류산기(頭流山記)에서 '청학동 하류에 백천당 吳翮(오핵) 이 쓴 장원암이라는 시가 있다.'라고 하여 장원암이 혹시 묵자바위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으나, 오두인과 김지백이 청학봉이라고 한 곳이 실제로는 비로봉이니, 비로봉부터 하산 길을 되짚어 확인해야 할 것 같다.

 

 

[1651년 오두인의 두류산기(頭流山記)]에 나오는 장원암

청학봉(비로봉)을 넘어서 봉우리 남쪽 기슭에 이르니, 두세 개의 작은 암자가 있었다. 어느 것은 남아있고 어느 것은 무너졌다. 남아있는 것은 옥소암과 영대암이고, 성불암과 심원암은 터만 남았다. 불일암에는 한 명의 승려가, 옥소암에는 세 명의 승려가 거쳐하고 있었는데, 모두 곡기를 끊은 자들이었다. 그곳을 내려와 청학동 하류에 이르니 수석(水石)이 모두 기이하여 정신이 상쾌해졌다. 시내 주변을 배회하다가 문득 바위 사이에 시 한수를 보았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靑鶴峯前路 : 청학봉 앞 길

澄潭影翠杉 : 맑은 못에는 푸른 삼나무 비치네

羽仙探勝處 : 우선(羽仙)이 명승지를 찾던 곳

仍號狀元巖 : 장원암(狀元巖)이라고 부른다네

 

이시는 나의 계부(季父 : 吳翮오핵)께서 직접 쓰신 것으로 우선(羽仙 : 吳䎘오숙의 호)이란 내 선친을 말한 것이다. 선친께서 일찍이 숭정 신미년(1631년) 에 남도의 관찰사가 되어 이곳을 유람하신 적이 있다. 계부 또한 병술년(1646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이곳을 둘러보고 가셨다. 그러므로 시의 내용은 이와 같았던 것이다.

 

* 오두인 [吳斗寅](16241689)의 조선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원징(元徵), 호는 양곡(陽谷). 증조부는 병마절도사 오정방(吳定邦)이고, 할아버지는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오사겸(士謙)이며, 아버지는 이조판서 오상(吳翔). 오숙의 양아들(?)

* 오핵 [吳翮](1615~1653) : 본관 해주(海州). 자 일소(逸少). 호 백천당(百千堂). 장유(張維)의 문인. 19세에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1646(인조 2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했다.

* 오숙 [吳䎘][1592(선조 25)-1634(인조12)] 조선의 문신. 자는 숙우(肅羽), 호는 천파(天坡). 본관은 해주(海州). 광해군 때에 병조좌랑을 지냄. 인조반정 후에는 정언 교리 등을 역임함.

 

 

석축의 견고함으로 암자터로 추정된다.


묵자바위를 지나면 곧바로 석축이 있고 계단식 전답과 암자의 흔적이 나타난다. 불일암에서 1974년부터 3년간 불일평전(봉명산방 이전에는 농가)에 거주하였다는 서재덕翁(1947년생)을 만났는데, 이곳은 그 당시 농가가 몇 가구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몇백 보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내원골로 내려가는 작은 실개천이 있는데 나는 이곳을 옥소암으로 추정했다. 와폭의 옥구슬이 흐르는 물소리가 퉁소 소리로 들려서 암자의 이름을 그렇게 하지 않았나 짐작했는데, 김지백과 오두인의 유산기에서 청학봉은 비로봉을 지칭하니 유보해야할 것 같다. 그리고 조금 더 올라가 곧바로 계곡을 건너면 내원암이 있었을 자리에 지금은 서너 채의 집이 있는데, 세속에서는 이곳을 '내원수행처'라고 한다. 



이곳 석축은 불출암터와 너무 흡사하다.

 

옥구슬이 구르는 와폭 



내원수행처


불일협곡 무명소




이곳에도 수행자의 움막 흔적이 있다.



玉泉臺


* 옥천대 : 불일협곡에 거대한 바위 아래에 있으며, 두 개의 외실과 내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통풍이 잘 되고 실폭포쪽으로 통로가 있음.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이곳에서 머물며 수행을 하고 신선이 되었다고 함.





청학연


선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을 청학연(남효온)이라고 하는 데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선인들의 기록마다 학연과 학담 용추가 다르지만, 유산기를 종합해 보면 청학연은 안소와 바깥소 두 개가 있는데, 안소를 용추 또는 용추폭포라고 하고, 바깥소 학연이라고 하였다. 청학봉 아래에 있으니 전체를 청학연 또는 학연이라고 해도 되고 용추라고 해도 무방하다. 기록마다 비슷하기도 하고 상이하기도 하니, 남명의 유산기를 기본으로 삼는 것이 어떠할지가 필자의 생각이다. 




백학봉(비로봉)의 松竹

 

불일폭포(청학폭포)


불일폭포는 오늘따라 청학 한 마리가 하늘로 비상하는 모습이다. 옛 선인(남명)들은 이곳을 청학동폭포라고 하였으니 청학동과 청학연이라는 이름도 이 폭포에서 연유했다고 볼 수 있다. 선인들의 기록 이전에 폭포의 형상이 청학이거늘, 옛 사람들이 이곳에 은거했던 고운 최치원 선생의 발자취를 기리기 위해 불일폭포의 청학 형상에 고운을 흠모하는 사람들이 신비한 이야기로 엮어내 후세에 전한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남명의 기록대로라면 이곳이 학담이다. 그러나 학연과 학담의 의미의 차이가 없으니 청학연의 소 가운데 하나로 보면 된다. 폭포 중간의 소와 폭포에서 직접 떨어지는 곳은 오픈되어 있기 때문에 학담으로써 신비감이 떨어진다. 그러니 이곳이 학담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였다. 어쨌든 학담과 용추, 학연까지 포함해서 청학연으로 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다. 학담과 학연으로 들어가는 신비한 거대한 석문은 巨靈과 蛟龍, 短龜 등의 또다른 태고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학담 아래로 내려가서 바위를 넘어서면 또 다른 소가 하나 더 있고, 소를 지나면 곧바로 용추폭포와 학연이다. 토사가 쌓여 깊지 않지만 수억만년 산류천석(山溜穿石 : 산에서 흐르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하여 초대형 바위 항아리를 만들었으니,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살아있는 동안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부단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생각했다. 중국에서 황하의 수신 거령이 화개동천 내원골로 출장을 나와서 학봉을 도끼로 쪼개어 청학봉과 백학봉으로 나누고 그 사이에 불일폭포와 청학연 불일협곡을 만들었으니, 사실 유무는 논할 바가 없지만, 선인들은 생명이 없는 사물에 이야기를 만들어 자연과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불일폭포에서 오래도록 머물다가 그곳을 떠났고 폭포는 전송이라도 하듯 무지개로 답했다.



鶴潭

 

 


佛日瀑布


鶴潭





하동군수 한형구 환경정리 기념비


이곳은 옛날의 완폭대로 불일전대라고도 한다, 고운이 쓰고 새겨놓았다는 완폭대 입석은 종적을 감추었고 하동군수의 송덕비가 떡 버티어 서있다. 완폭대 입석은 하동군수가 가지고 갔는지, 아니면 계단의 받침돌로 제 몫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완폭대가 폭포 가까이에 있으니 본래의 완폭대는 불일폭포에게 소박을 맞고 방치되어 있다.





70년대에 불일평전에 3년간 살았던 서재덕씨 말에 의하면 불일암은 30년 전쯤 스님들이 다툼이 일어나 방화로 불에 탔고 다시 중건하였다고 한다. 불일암 앞에 서서 불일암에 대한 기록을 상기하니 산신각은 나무껍질로 지붕이 덮였고, 법당은 산죽과 갈대로 지붕을 덮은 모습을 상상했다. 불일암 위의 채마밭 근처에는 수행하는 사람들의 움막(억새나 산죽으로 지붕을 덮음)이 있었고, 당시 상불암터에 변규화옹이 수행을 하였는데, 늘 온화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고 한다. 77년 서재덕씨가 결혼을 하면서 변규화씨에게 30만원을 받고 집(봉명산방)을 팔았다고 한다.



향로봉 청학봉 고령대

* 고령대 : <고령대>라는 지명은 1616년 성여신의 <성여신>선생의 [방장산선유일기]의 유산기와 1636년 박태무의 '登香爐峯古靈臺'기행시에서 언급이 되는데 향로봉을 <고령대>하고 있음. 산행정보방(170621)선인들의 유산기와 기행시에 나오는 三仙洞과 古靈臺 : http://blog.daum.net/lyg4533/?t__nil_login=myblog

 



大隱庵터






小隱庵 蒸米堂


주인이 없는 소은산막에서 하룻밤을 숙하고 출발하기 전에 호룡대라는 바위에서 활인령을 바라보니 활인령에서 백호가 노려보는 형국이다. 소현거사 최병태옹은 이곳을 호룡대라고 하셨는데 최선생님께 전화를 드리니 목수술까지 하셔서 팔다리를 움직이기 어려워 긴 통화를 하기가 어려웠다. 사람의 생로병사는 피해갈 수 없는 자연의 순리이다.



호룡대


* 호룡대 : 호룡대는 소은암에서 전면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300m정도에 샘터가 있고 조금더 가면 뒤편은 흙으로 덮여있고 전면은 노출되어 있는 암괴로 앞을 조망할 수 있는 너럭바위임. 육갑도수로 표현하면 운종룡 雲從龍은 사감수 四坎水의 구름이 병진용 丙辰龍을 따르는 것이고, 풍종호 風從虎는 일손풍 一 巽風의 바람이 병인 丙寅과 임인 壬寅의 범을 따른다. 虎龍에는 周易 八卦의 象이 숨어있다. 靑龍이 昇天할 때에 白虎가 바람을 일으키면, 용이 구름을 타고 승천을 하는 형국이다. 소은암 호룡대는 바위와 맥이 비룡의 형상이다. 호룡대가 불일폭포 주변에 있다면 周易 重乾天 九五의 飛龍在天 즉 운종용 풍종호(雲從龍風從虎)로 虎龍臺로 볼 수밖에 없음.(두류산인 임재욱선생의 설명) 




1974년~1977년 봉명산방(당시는 농가)에서 살았다는 서재덕씨(1947년생)


봉명산방 식수원


불일암에서 쌍계사에 근처에서 차밭을 하시는 서재덕옹을 만났는데 74년~77년간에 봉명산방 옛터에서 음료수 장사를 하셨다고 한다. 위 무명폭포에서 나무에 홈통을 파서 구유에 있는 데까지 물을 끌어 등산객들에게 마시게 하였더니, 음료수가 전혀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꾀를 내어 물이 나오는 홈통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으니 음료수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해서 하루에 네 번씩 쌍계사에서 음료수를 날랐다고 한다. 음료수를 마시고 남겨 놓고 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남긴 것을 모아 마개를 닫아 음료수 맨 앞에 진열하여 먼저 팔았고, 목이 마른 등산객들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하니 그 분의 장사 수완에 감탄을 하였고, 거짓 없는 솔직함이 흥미를 자아냈다..


당시에 진로와 대선 소주 가격 차이가 두 배정도 되었는데, 대선 소주를 진로 병에 넣어 팔아도 마시는 등산객들이 '소주는 역시 진로야!'라고 하며 마셨다고 하니, 겉 다르고 속 다르다고 한들 누가 이것을 구분하겠는가. 하물며 최근 지리산의 일도 이 소주와 같지 않은가? 대선을 진로로 팔다가 들통이 나자 오히려 화를 내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서재덕 선생이 '병 뚜껑이 일그러지지 않게 술병을 따는 방법을 터득했다.'라는 솔직한 말씀에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불일평전에는 복숭아 밭이 있었고 상품성이 없어 등산객들에게 선심을 썼다고 한다. 물이 흐르는 곳의 구유는 40년 전 그대로이고 부엌과 방문 두 개는 옛것과 같고 안방문은 바뀐 것 같다고 하셨다. 변규화옹에 대한 기억은 '말이 없고 점잖으셨으며 신세를 절대 지지 않는 분이었다.'라고 했다.


 이외에도 상불암에서 단식을 하며 용맹정진 수도하던 담양 출신 스님이 비몽사몽간에 '이 산에서 당장 나가라!'라는 고성을 듣고 암자에서 나오자마자 암자가 무너졌고, 스님은 곧바로 불일암으로 내려와 노 보살님에게 '이 산에 인연이 다했다.'라는 말만 남기고 홀연히 떠나셨는데, 서재덕옹은 '새벽에 불일평전 등로에 눈길을 내려간 발자국만 보았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서재덕옹은 결혼을 하고 도회지(부산)로 나가면서 77년 변규화옹에게 집을 팔았다고 한다. 이분은 30년 만에 불일평전에 오셨다고 했다.


 

地藏庵터


1558년 4월19일 남명 조식선생은 불일암에서 나와 이곳을 잠시 들렀다가 쌍계사로 내려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뒤쪽 능선으로 올라가 두루 지장암(地藏菴)을 탐방하니 모란이 활짝 피어있었다. 한 송이가 한 말 정도가 되는 붉은 꽃이었다. 이곳에서 (쌍계사로) 곧바로 내려갔다 [旋登後崗. 歷探地藏菴. 牧丹盛開. 一朶如一斗猩紅. 從此直下.]


지장암터


서재덕옹과 지장암지까지 동행을 하였다. 어른이 불일평전 식수원 무명폭을 안내했지만 지장암터는 전혀 모르고 계셨다. 서재덕옹은 암자터가 신기한 듯 석축 속에서 사기 그릇 하나를 찾아 나에게 건내셨다. 우연한 인연으로 40년 전의 시간 여행에서 돌아와 탁자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등산객들과 이야기하는 사이에 그 어른이 가시는 것도 모르고 감사의 인사도 드리지 못하였다.



喚鶴臺

 

雙磎寺 金堂

 

옥천사 금당




玉泉


玉泉橋


地藏酒


쌍계사로 내려와 옛 옥천사였던 金堂에 참배를 하고 玉泉도 확인하였다. 玉泉은 음수로 물이 뿌옇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러했고, 지금은 사찰의 허드렛물로 쓰는 듯하였다. 쌍계석문 광장 인근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며 지장암에서 가지고 내려온 이빨 빠진 조선 사발에 지장주 한 잔씩을 마시고 산행을 종료하였다. 눈에 잠시 헛보였던 영대암과 옥소암은 문득 사라지고, 꿈속에서 청학동을 다녀온 듯, 다녀온 산길마져 아득하기만 하여라.  끝.



['호룡대'에 대한 두류산인 임재욱 선생의 의견]

虎龍에는 周易 八卦의 象이 숨어있다. 靑龍이 昇天할 때에 白虎가 바람을 일으키면, 용이 구름을 타고 승천을 하는 형국이다. 소은암 호룡대는 바위와 맥이 비룡의 형상이다. 호룡대가 불일폭포 주변에 있다면 周易 重乾天 九五의 飛龍在天 즉 운종용 풍종호(雲從龍風從虎)로 虎龍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은 구오가 병진 丙辰자리이기 때문에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상하가 갈리게 된다. 구름이 용을 따르며 바람이 범을 따른다. , 육갑도수로 표현하면 운종룡 雲從龍은 사감수 四坎水의 구름이 병진용 丙辰龍을 따르는 것이고, 풍종호 風從虎는 일손풍 一 巽風의 바람이 병인 丙寅과 임인 壬寅의 범을 따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