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청권사

圓覺寺 御製 誡文(원각사 어제 계문)

도솔산인 2024. 1. 22. 21:02

圓覺寺 御製 誡文(원각사 어제 계문)

 

 

 

圓覺寺 瑞氣放光 甘露須陀味 雨花現相

원각사에 상서로운 기운이 빛을 발하고,

감로(甘露) 수타미(須陀味)와 우화(雨花)가 나타나니(現相),

 

舍利分身 平等道塲 同叅

사리(舍利)가 분신(分身)된 평등하게 법식을 베푸는 도량(원각사) (重修)에 함께 참여하였다.

 

凡我同契之人 旣生淨信

우리 함께 맺어진 사람들은 이미 청정한 믿음이 생겼으니,

 

勿作妄惑 妄惑生處 皆是緣塵

망령되이 혹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마라.

망령되이 혹하는 마음이 생기는 곳은 모두 속세의 인연(塵緣)이다.

 

緣塵之聚 重濁成山 畢竟限碍 輕淸無日

속세의 인연(塵緣)이 모여 무겁고 탁한 것이 산을 이루면,

마침내 자유롭지 못할(限碍) 것이요, 산뜻하고 맑은 날이 없을 것이다.

 

若欲除之 畚鍤並用

만약 진연(塵緣)의 덩어리를 없애고자 한다면, 삼태기와 삽을 함께 쓰면 되는데,

 

亦如大海 羅蚊 同飲 悉得充足

그것은 마치 큰 바다와 같아서 늘어선 모기들이 함께 마셔도 모두(悉) 충분히 만족할 수 있으니,

 

勿為自棄 欲獨漂沉 菩提結擔 其在兹焉

제풀에 포기하거나 홀로 떠돌다 침몰하려 하지 마라.

보리(菩提:깨달음)가 결박당함(結擔)이 여기(塵緣)에 있다.

 

成化元年 四月 十一日

성화 원년(1465) 4월 11일

 

承天體道烈文英武朝鮮國王

衆首前演慶寺住持大禪師 僧 弘濬

宗首孝寧大君 𥙷

相首輸忠協策靖難同德左翼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領藝文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高靈府院君 申叔舟

將首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上黨府院君兼判兵曹事江原黃海平安咸吉道都體察使 韓明澮

社長進勇校尉趙興珠

趙 安

 

 

【按設】

敦榮 謹按輿地勝覽 圓覺寺 在中部慶幸坊 舊名興福 太祖時 為曹溪宗 後 廢為公廨

돈영(敦榮)이 삼가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살펴보니 원각사는 중부 경행방(慶幸坊)에 있었으며, 옛 이름은 흥복사(興福寺)이다. 태조(太祖) 때 조계종(曹溪宗)이 되었다가 후에 폐사되어 관청 소유의 건물이 되었다.

 

世祖十年 改剙號圓覺

세조 10년(을유. 1465)에 중건(改剙)하여 원각사(圓覺寺)라고 불렀다.

 

金守溫撰碑 又按稗官雜記 光陵朝京城 剙圓覺寺 塑立佛有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이 비문(碑文)을 지었는데, 또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따르면 세조조(世祖朝)에 경성(京城)에 원각사를 창건하였는데 흙으로 만든 서 있는 불상(塑立佛)이 있었다.

 

倭使見之曰 凡佛皆坐 而此佛立焉 是行之象也 寺其不久乎

왜(倭)의 사신(使臣)이 이를 보고 말하기를, “무릇 불상(佛像)은 모두 앉아있는데, 이 불상(佛像)은 서(立) 있다. 이는 걸어가는 형상(形像)이니, 이 절은 아마(其) 오래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其~乎 : 아마 ~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至燕山時 毁是寺 黜佛於外 歷三四寺 行步之言果中矣

연산군(燕山君) 때에 이르러 이 절을 허물고 불상을 밖으로 내쳐서, 서너 곳의 절을 돌아다녔으니, 걸어 다닌다는 말이 과연 맞았다.

 

又按果川邑誌 圓覺寺在縣西十里 廢久有址

또 과천읍지(果川邑誌)에 따르면 원각사는 현(縣)의 서쪽 10리에 있었는데, 폐사된 지 오래되었고 터만 남았다.

 

圓覺興廢則有如是而

원각사(圓覺寺)의 흥망(興廢)은 이와 같을 뿐이다.

 

是本 在陜川海印寺 星州宗人為余言 三數年前 往是寺而得是本

이 문서(本)는 합천 해인사에 있다고, 성주(星州)에 사는 종인(宗人)이 나에게 말해주어 삼 년 전에 절(해인사)에 가서 이 문서를 볼 수 있었다.

 

其紙長不盈尺 其色紅不甚渝 宛然如當日紀實

그 종이의 길이는 한 자(尺)가 채 되지 않고 그 색깔은 붉은데 심하게 변하지 않고 완연(宛然)한 것이 마치 바로 그날 실제 기록한 것 같았다.

 

緇徒 尚知為大球弘璧 丹其櫃而尊閣之 又聞於緇徒 年前是寺之回祿也

無幽不被燒 而此櫃 獨完云

스님들은 아직도 귀중한 보옥(大球弘璧)이라 여기고 그 궤에 붉은 칠(丹漆)을 하여 전각에 모시고 받들었다. 또한 스님들에게 들으니 몇 년 전 이 절에 화재가 있었는데 (절의)깊숙한 곳까지 타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이 궤(櫃)만 유독 온전하였다고 한다.

 

宗人之覩記於是寺 是僧者甚悉

종인이 이 절(원각사)에 대해 보고 기억하는 것은 이 스님들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且是本 從松𤲢外兄而得之

또 이 문서는 개성유수(開城留守)인 외형(外兄)을 따라가 볼 수 있었다.

 

松之甘露寺舊為 光廟願堂 奉有是本

송도(松都)의 감로사(甘露寺)는 옛날 광묘(光廟/세조 묘호) 원당(願堂)으로 이 문서를 봉안했었다.

 

甘露廢 而轉奉於大興寺 亦已久矣

감로사가 폐사되어 대흥사(大興寺)로 옮겨 봉안한 지 또한 이미 오래 되었다.

 

今春繕修山城時 官人 以為不可褻 仍奉於 厚陵齋室云

올봄에 산성(山城)을 보수(補修)할 적에 벼슬아치가, (이 문서를)함부로 할 수 없다고 판단(생각)하여 후릉(厚陵) 재실(齋室)에 봉안했다고 한다.

 

以是文則一本之 所以分在 以是寺則兩基之 何者為是 俱不可考

이 문서가 같은 판본(本)으로 나뉘어 존재하는 까닭은 이 절이 두 곳이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 맞는지 다 상고할 수 없다.

 

惟以得此眞蹟於三百七十年餘之後為幸

생각해 보면 삼백칠십여 년 후에 실제의 유적을 보게 되어 다행이다.

 

玆敢入錄 然才乏 硏覃愧切儚洄

이에 감히 기록하나 재주가 부족하여 연구의 깊이(硏覃)가 어리석음(儚洄)을 매우 부끄럽게(愧切) 생각한다.

 

惟我宗人 其各隨聞而續之

오직 우리 종인(宗人)들은 각기 들은 것에 따라 이어가도록 하라.

 

下方南原宗人 又以躬得於泰安寺者 示之

아래 지방 남원(南原)에 사는 종인(宗人)이 또한 태안사(泰安寺)에서 몸소 얻은 것을 보여주었다.

 

是寺 大君願堂也 有大君署押劃付之田畓·奴婢·藿田·鹽盆 視萬德 尤多者

이 절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원당(願堂)으로, 대군(大君)의 수결(手決)과 나누어 준(劃付) 전답과 노비(奴婢) · 미역밭 · 소금 끓이는 솥이 있으며, 만덕사와 견주어 더욱 많다.

 

與宗親府完文 并藏于寺

더불어 종친부의 인정서(完文)를 함께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寺在谷城縣 一名 桐裏寺也

절은 곡성현(谷城縣)에 있으며, 일명(一名) 동리사(桐裏寺)라고도 한다.

 

非但此寺為然 靈光佛甲寺 亦如是云

(其本不過是記得田在何處 數爲幾許 故今不錄)

비단 이 절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영광 불갑사(佛甲寺) 역시 이와 같다고 한다.

(그 문서에는 다만 구한 전답이 어디에 있는지, 면적은 얼마나 되는지만을 기록했기 때문에, 여기에 기록하지 않는다.)

 

※ 교열 청유회(淸儒會) 신정휴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