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청권사

보은 속리산 복천사기(福泉寺記)

도솔산인 2024. 1. 22. 11:59

보은 속리산 복천사기(福泉寺記)

 

 

 

山之靈 不在於高大 有㝫籃巨刹 擅形勝於其中則靈 寺之名 不由於崇麗 有高流宿德 隆道譽於其間則名

 

산의 신령함은 높고 큰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웅장한 거찰(巨刹)이 있고 그 안에서 지세가 뛰어난곳(形勝)을 차지하면 신령스럽다. 절의 이름은 높고 화려함(崇麗)에서 말미암는 것이 아니고 명망(名望)과 덕망(德望)이 높은 중이 있고 그 사이에서 불도의 명예(道譽)를 높이면 이름이 난다.

 

至若有稀今罕古之偉跡 曠世難逢之奇會 則向所謂㝫籃巨刹之擅勝 高流宿德之廣譽 曾不足爲喻 而其所以流於後世者 爲益無窮矣 俗離山雄跨忠淸慶尙兩道之境 浮屠氏多屋於其間 福泉寺正在山之中

 

고금에 드문 위대한 행적(偉跡)과 세상에 매우 드물고(曠世) 만나기 어려운 기이한 기회가 있음에 이르면 이른바 웅장한 거찰(巨刹)이 명승을 차지하고 명망(名望)과 덕망(德望)이 있는 중이 명예를 넓힘을(廣譽) 향(向)하더라도, 일찍이 족히 깨우치지 못하는데, 후세에 흘러가는 것이 유익함이 무궁(無窮)하기 때문이다. 속리산은 충청과 경상 양도의 지경에 웅장하게 걸터앉아(雄跨) 불도들(浮屠氏)이 그사이에 많이 살았는데 복천사는 바로 산(속리산)의 가운데에 있다.

 

歲庚午 世宗大王不豫 移御孝寧之第 文宗及我主上殿下侍側 醫藥禱祀 尙未得效 於是 招集淨侶 至誠精勤 果獲靈應 聖躬乃安 諸宗室爭出金帛 乃成阿彌陁·觀音·大勢至三像 慧覺尊者眉公 來相是寺 允爲勝地 乃撤舊以新之 層樓傑閣 飛聳山谷 遂邀安三像於此

 

경오년(세종 32년, 1450) 세종대왕께서 옥체가 편치 않아 효령대군댁으로 거처를 옮기셨다.(移御), 문종대왕과 우리 주상(主上) 전하(世祖)께서 곁에서 모시면서 의약(醫藥)으로 치료하고 기도를 하였으나 아직 효과(效果)를 얻지 못하였다. 이에 신미(申眉) 대사를 불러 지극한 정성으로 부지런히 축원(精勤)하니 과연 신령스러운 응당(應當)을 얻었다. 임금의 몸이 편안해지자 임금의 여러 친족들(宗室)이 다투어 금과 비단을 내어 이에 아미타불(阿彌陀佛)·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삼상(三像)을 조성하자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대사가 이 절에 와서 진실로 승지(勝地)가 된 것이다. 이에 옛것을 철거하고 새롭게 하니 거대한 층층 누각이 산골짜기에 날고 솟구쳐 드디어 이곳에 삼 불상(三像)을 맞이하여 모셨다.

 

初世宗大王聞尊者名 自山召至 賜坐從容 談辨迅利 義理精暢 奏對稱旨 自是 寵遇日隆 文宗賜號慧覺尊者禪敎都揔 俾領袖于緇門 及我聖上 自在潛邸 相與知音之至 及卽位 恩顧彌至 以玆寺爲爲世宗所成佛像所在 而尊者又先王所眷遇

 

예전에 세종대왕께서 혜각존자(慧覺尊者)의 명성을 들으시고 산으로부터 불러서 자리를 내주어 조용히 대화해보니, 말하는 것(談辨)이 신속하고 예리하며(迅利) 의리가 정밀하고 막힘이 없어 아뢰고 대답하는 것이 뜻에 맞았다. 이로부터 총애와 대우가 날로 두터워졌다. 문종대왕께서 혜각존자 선교도총(慧覺尊者 禪敎都揔)이라는 호를 내리고(賜號) 영수(領袖)로 하여금 치문(緇門, 불도 佛徒)을 다스리게 하였다. 우리 성상(聖上, 세조)과는 잠저(潛邸)에 계실 때부터 서로 지음(知音)이 지극하였으며 즉위하심에는 은혜로 보살펴줌이 더욱 지극하였다. 이 절은 세종께서 조성한 불상이 있는 곳이요. 혜각존자(慧覺尊者)는 또한 선왕(문종)께서도 특별히 대우하시던 분이다.

 

天順八年春二月 巡狩于忠淸 大駕到淸州留二日 踰皮盤嶺道懷仁

 

천순(天順) 8년(세조 10년 1463) 봄 2월에 충청도에 순수(巡狩)하셨는데, 어가가 청주에 이르러 이틀을 머물고 피반령(皮盤嶺)을 넘어 회인(懷仁)을 지났다.

 

本月二十七日庚戌 駐蹕于報恩之屛風松 越翼日辛亥 留大軍于山下 命獅子衛·控弦衛·壯勇隊·司僕及孝寧大君臣補·臨瀛大君臣璆·永膺大君臣琰·永順君臣溥·永川卿臣定·龜城君臣浚·銀川副正臣徹·領議政府事臣申叔舟·雲城府院君臣朴從愚·河城尉臣鄭顯祖·仁山君臣洪允成·文城君臣柳洙·行上護軍臣李允孫·兵曹判書臣尹子雲·工曹判書臣金守溫·戶曹判書臣金國光·行上護軍臣任元濬·兵曹參判臣宋文琳·都承旨臣盧思愼·右承旨臣李坡·右副承旨臣申㴐·僉知中樞府事臣尹欽·忠淸道觀察使臣辛永孫等扈駕

 

본월 27일 경술 보은의 병풍송(屛風松)에서 잠시 어가를 멈추고 머물렀다. 월익일(越翼日, 2월 그믐) 신해(辛亥) 대군(大軍)을 산 아래에 머물게 하고, 사자위(獅子衛)·공현위(控弦衛)·장용대(壯勇隊)·사복(司僕)과 효령대군 신(臣) 보(補)·임영대군 신(臣) 구(璆)·영흥대군 신(臣) 염(琰)·영천군 신(臣) 부(溥)·영천경 신(臣) 정(定)·구성군 신(臣) 준(浚)·은천부정 신(臣) 철(徹)·영의정부사 신(臣) 신숙주(申叔舟)·운성부원군 신(臣) 박종우(朴從愚)·하성위 신(臣) 정현조(鄭顯祖)·인산군 (臣)신 홍윤성(洪允成)·문성군 신(臣) 유수(柳洙)·행상호군 신(臣) 이윤손(李允孫)·병조판서 신(臣) 윤자운(尹子雲)·공조판서 신(臣) 김수온(金守溫)·호조판서 신(臣) 김국광(金國光)·행상호군 신(臣) 임원준(任元濬)·병조참판 신(臣) 송문림(宋文琳)·도승지 신(臣) 노사신(盧思愼)·우승지 신(臣) 이파(李坡)·우부승지 신(臣) 신면(申㴐)·첨지중추부사 윤흠(尹欽)·충청관찰사 신(臣) 신영손(辛永孫) 등이 어가를 호위(扈衛)하며 따랐다.

 

上與中宮殿下王世子 幸是寺 日正午 上御衮龍袍。詣佛前獻香 且命是日爲起始 定三十三員爲上堂 四事咸備 大設法會 約三日而罷

 

임금께서 중궁전하(中宮殿下)·왕세자(王世子)와 함께 이 절에 거둥(擧動)하신 것은 낮 정오(丁午)였으며, 임금께서 곤룡포를 입으시고 부처님 전에 나아가 향을 올리셨다.(獻香) 또한 이날 법회 시작을 위하여 33명의 인원을 정하여 법당에 오르도록 명하셨고, 사사(四事)를 모두 갖춘 법회를 크게 열고 약 3일 만에야 마쳤다.

 

傳旨于戶曹 給田二百結米三百石 又令刑曹屬藏獲三十口 俾爲常住薌火之資 遂灑宸翰 誕成十行 奎章璧藻 輝映天地 以留鎭于山門 尊者臣信眉·禪德臣斯智·大禪師臣學悅·學祖等 頓首稱謝 願托文臣記于是寺 乃命臣守溫筆之

 

호조(戶曹)에 전지(傳旨)를 내려 밭 200결(結), 쌀 300석(石)을 하사하셨으며, 또한 형조에 속한 노비 30명에게 명하여 상주하면서 향을 올리는 자원(資源)으로 삼게 하였다. 드디어 어필을 휘둘러 십행(十行)을 지으시고(誕成) 임금의 글(奎章)이 옥으로 꾸며지니 빛이 천지(天地)를 비추었다. 산문(山門)에 진영(鎭營)을 머물게 하니 존자(尊者) 신(臣) 신미(信眉)·선덕(善德) 신(臣) 사지(斯智)·대선사(大禪師) 신(臣) 학열(學悅)·학조(學祖) 등이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하였다. 문신들에게 의탁(依託)하여 이 절에 관해 기록할 것을 원하자, 신(臣) 김수온(金守溫)에게 지으라고 명하셨다.

 

臣伏惟 自古帝王之治天下國家也 莫不崇仁義以臻治道之美 亦莫不本淸淨以澄出治之原 昔黃帝之訪具茨 唐堯之接務光 稽諸典謨 帝王之治之學 可見 況佛氏爲三敎之尊 萬德之主乎 故歷代帝王 或崇或信 非徒苟焉而已也

 

신이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천하의 나라를 다스림에 인의(仁義)를 숭상(崇尙)하지 않고 치도(治道)의 아름다움(治道之美)에 이른 적이 없었다. 또한 청정(淸淨)을 근본으로 하지 않고 다스림을 내는 근원을 맑게 한 적이 없었다. 옛날 황제가 구자산(具茨山)을 방문하였으며, 요임금이 무광(務光)을 접견하였는데 여러 전모(典謨)를 상고하여 제왕의 통치학을 알 수 있다. 하물며 부처님은 삼교(三敎, 儒·佛·仙)의 존자이시며 만덕의 주인이다. 그러므로 역대 제왕은 혹은 숭상(崇尙)하고 혹은 신봉(信奉)하면서 다만 구차하게 여기지 않을 따름이었다.

 

惟我主上殿下 聖德神功 卓冠百王 仁文義武 格于上下 卽位以來 中外乂安 風雨順時 以致自有東方未有之大平 尙慮吏治之或未戢 民生之或未裕 巡臨外服 省其耕歛 亦東方未有之盛擧

 

오직 우리 주상전하(主上殿下)께서는 성덕(聖德)과 신공(神功)이 여러 왕들 중에 가장 뛰어나고, 어진 문장과 의로운 무예로 상하를 바로잡으셨다. 즉위 이래로 국내외(中外)가 잘 다스려져 편안하고(乂安) 비바람이 순조롭게 때를 맞추니 동방이 있던 이래로 아직 없었던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오히려 관리들의 다스림이 혹 편안하게 하지 않고, 백성들의 생활이 혹 넉넉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멀리 지방(外服)을 순림(巡臨, 순행)하여 그 경작과 수확을 살피니, 또한 동방에 아직 없었던 훌륭한 일이었다.

 

雖萬機踏臻 潛神大乘 尊禮三寶 屈至尊迎耆德 咨問奧義 求決心要 其所以澄心原 以濬出治之本者 雖具茨之訪 務光之接 何以加之哉

 

임금의 정무(政務)가 밀려와도(踏臻) 대승(大乘, 불교)에 정신을 침잠(沈潛)하여 삼보(三寶 : 佛·法·僧)를 받들어 예로 대하시며, 지존(至尊)에게 굽히시고 나이가 많고 덕(德)이 있는 사람을 맞아 심오(深奧)한 뜻을 자문(諮問)하고, 결심(決心)의 요점(要點)을 구하였다. 심원(心原)을 맑게 하여 다스리는 근본을 소통하신 것은 옛날 황제가 구자산(具茨山)을 방문한 것과 무광(無光)을 접견한 일이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嗚呼至哉 蓋以有此寺故 四方之人 皆知報恩之有俗離山 以有尊者故 四方之人 地無遠近 人無緇素 皆知有此寺 豈非以人輕寺輕 人重寺重 而山亦爲之重歟 況我聖上 至道是崇 宿德是咨

 

아! 지극함이로다. 대개 이 절이 있는 까닭으로 사방의 사람들이 모두 보은에 속리산이 있는 것을 알고, 존자(尊者)가 있는 까닭으로 사방의 사람들이 지역의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승려(僧侶) 속인(俗人) 할 것 없이 모두 이 절이 있음을 알았다. 어찌 사람이 가벼우면 절이 가벼워지고 사람이 무거우면 절도 무거워져서 산도 또한 무거워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지극한 도를 숭상(崇尙)하시고 오래도록 덕망을 쌓은 이에게 자문(諮問)하셨다.

 

親擧玉趾 照臨山谷 風雲爲之動色 洞壑爲之爭輝 昭回乎日月 擁衛乎天龍 實此山此寺千百載 稀有之盛事也 曠世難逢之奇會也 嗚呼 自有天地 不知其幾千萬年 而乃有此寺 自有此寺 不知其幾千百年 而乃有今日 其休聲偉跡 當與天地相蔽 億萬年無疆之勝慶也 豈此山此寺所可得而擬其長短哉

 

(임금께서) 친히 거둥(擧動) 하시어 산골짜기에 조림(照臨)하시니 풍운(風雲)이 이 때문에 놀라 정색을 하고, 큰 골짜기와 구렁이 이 때문에 빛을 다투었다. 해와 달을 비추어 돌고(昭回) 천룡(天龍)을 옹위하니, 참으로 이 산과 이 절이 천백년에 드물게 있는 훌륭한 일이요.(盛事) 세상에서 드물고 만나기 어려운 기이한 기회이다. 아! 천지가 생김으로부터 몇천몇만 년인지 모를 세월이 흐른 후에 이 절이 생겼고, 이 절이 생김으로부터 몇천몇백 년인지 모를 세월이 흐른 후에 오늘이 있도다! 그 아름다운 명성과 위대한 행적은 마땅히 천지와 더불어 서로 뒤덮을 것이니 억만년 끝없이 뛰어난 경사로다! 어찌 이 산과 이 절이 얻는 바가 그 길고 짧음을 견주겠는가?

 

南有馬峴 側石布道 山中古老相傳 昔麗祖嘗幸于此 故爲治御路如此 又未知功德之盛 治學之美 班我聖朝與否矣 幷論之 同以爲山中之乘云 

 

남쪽 마현에는 가에 돌이 깔린 길이 있는데, 산속의 옛날 노인들이 서로 전하기를 ‘옛날 고려 태조가 일찍이 여기에 행차하였다. 그러므로 이같이 어로(御路)를 닦았다고 하는데 또한 공덕의 성대함과 학문을 닦는 아름다움이 우리 성조(聖祖)와 같은 반열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아울러 이것을 논하여 같이 산속의 승(乘:佛法)으로 삼았다고 이른다.

 

是年春二月有日 奉敎謹記

 

같은 해(1464) 2월 봄 어느 날 하교를 받들어 삼가 기록하다.

 

※ 교열 청유회(淸儒會) 신정휴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