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천왕봉 일월대(日月臺) 석각 정태현서
지리산역사문화조사단과 마천면지 편찬위원회에서 마천면 소재 마애 석각 명문과 비문·정려를 조사하였다. 마천면 가흥리 당흥마을 도로 옆 밭 가운데 바위에 새겨진 승지정태현세불망비(承旨鄭泰鉉永世不忘碑)를 답사하였다. 이곳에는 좌우로 정근상시혜불망비(鄭近相施惠不忘碑)와 정은상시혜불망비(鄭殷相施惠不忘碑)가 있다. 『하동정씨 문헌공파 세보』를 확인하니 승지 정태현(鄭泰鉉) 공과 천왕봉 일월대 필획의 주인은 같은 인물이었다. 죽헌(竹軒) 정태현(鄭泰鉉, 1858~1919) 공은 문헌공(文獻公)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선생의 14대손이고, 정근상(鄭近相,1893∼1934)은 16대 종손이다. 석각이 마모되어 판독이 어려운 정은상(鄭殷相, 1896~1957)은 죽헌 정태현 공의 장손자로 추정한다.
지리산 천왕봉 정상석 남쪽 경사진 바위 면에 일월대(日月臺) 정태현서(鄭泰鉉書) 석각이 있다. 일월대(日月臺)는 글자 그대로 일출과 일몰, 월출과 효월(曉月, 새벽달)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상봉(上峯), 천주(天柱)와 더불어 천왕봉을 일컫는 또 다른 이름이다. 일월대(日月臺)는 1643년 박장원의 「유두류산기」에 처음 등장한다. 1719년 신명구의 「유두류일록」, 1724년 조구명의 「유두류산기」, 1724년 정식의 「두류록」에도 보이는데, 지리산 천왕봉 정상을 가리킨다.
1924년 강계형(姜桂馨, 1875-1936)의 두류록에 '봉우리 남쪽은 일월대인데 오르면 일출과 일몰, 월출과 월몰을 볼 수 있는 까닭으로 지어진 이름이며 새로 새긴 대의 이름자는 크기가 팔뚝만한데 정죽헌이 쓴 글씨이다.[峯之南日月臺上可望日月之出入故錫名而新刻臺名字書如腕大乃鄭竹軒所書也]'라고 하였다. 죽헌(竹軒)은 정태현(鄭泰鉉, 1858~1919)의 호이다. 정태현(鄭泰鉉)은 문헌공(文獻公)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14대손으로 대한제국기(1901년) 충북관찰사, 가선대부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만석꾼의 부호로 수해와 흉년이 들면 백성들을 구휼하여 여러 곳(함양 휴천면, 충북 음성) 등에 영세불망비가 있다. 하동정씨 문헌공파 세보와 죽헌집 가장에 따르면 ‘1901년 충북관찰사로 부임하여 해를 이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 죽자 함양 본가에서 수천 석의 곡식을 운반하여 道民들을 구휼하였다.’고 한다.
▶ 하동정씨 문헌공파 세보
신축(1901)년 승진하여 충청관찰사가 되어 민생의 폐단을 제거하고 군덕(君德, 임금의 덕)을 펼쳤다. 해를 이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많이 굶어죽자, 함양 본가에서 곡식 수천 석을 운반하여 한도(一道)의 백성들을 살렸다. 지금까지 칭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辛丑陞爲忠淸觀察使 去民瘼宣君德 連歲饉荒 民多餓死 運穀數千石于咸陽本家 以活一道之民 至今頌聲不衰) <河東鄭氏文獻公派世譜> |
▶ 지리산 천왕봉 일월대 석각
일월대(日月臺)는 한 글자의 세로획이 76cm이다.
▶ 지리산 천왕봉 천주(天柱) 석각
하늘을 받치고 있는 기둥처럼 우뚝하게 솟아 있다는 의미이다. 와황석(媧皇石)이라고도 한다. 와황(媧皇)은 상고 시대 제왕(帝王)인 여와씨(女媧氏)를 가리키는데, 일찍이 공공씨(共工氏)가 축융(祝融)과 싸우다 부러뜨린 천주(天柱)를 “여와씨가 오색의 돌을 구워 보수하고 자라의 발을 잘라 사방을 지탱할 기둥으로 세웠다.〔女媧氏 鍊五色石以補蒼天 斷鰲足以立四極〕”라고 한다. 《淮南子 卷6 覽冥訓》 중국의 오악(五岳)인 형산(衡山)에 천주봉이 있다.
천주(天柱)는 하늘을 받치고 있는 기둥처럼 우뚝하게 솟아 있다는 의미이다. 한유(韓愈)의 謁衡嶽廟遂宿嶽寺題門樓(알형악묘수숙악사제문루) 시에 "자개봉은 길게 뻗어 천주봉에 닿았고, 석름봉은 솟아올라 축륭봉을 쌓았다네.[紫蓋連延接天柱 石廩騰擲堆祝融]"라는 시구에 천주(天柱)가 있다. 김종직은 1472년 8월 14일 천왕봉에서 한가위 달맞이를 천주(천왕봉)의 즐거운 놀이(勝遊天柱)로 표현하고 있다. 추가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일월대와 같은 정태현의 필획일 가능성이 있다.
中秋天王峯不見月[중추절에 천왕봉에서 달을 보지 못하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
抽身簿領陟崔嵬 : 공무에서 잠시 벗어나 높은 산에 올랐는데
剛被良辰造物猜 : 좋은 날 조물주 강한 새암을 받는구나.
霧漲寰區八紘海 : 운무는 천지에 넘쳐서 팔방(팔굉)이 바다이고
風掀巖石萬搥雷 : 바람이 바위에 몰아쳐 뇌성벽력을 치네.
勝遊天柱知難繼 : 천왕봉 달맞이 놀이(승유) 계속되기 어려워
淸夢瓊臺未擬回 : 경대의 맑은 꿈 다시 함을 헤아리지 못하겠네.
時有頑雲暫成罅 : 때때로 무지막지한 구름 잠시 틈을 만들지만
誰能取月滿懷來 : 누가 보름달을 취해 가슴에 품고 올 수 있으리.
지난해 9월 10일 정태현 공의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남계서원을 찾았고, 12월 중순 함양 문화해설사 정효순님과 정순구님의 안내로 죽헌 정태현 선생의 후손 종회장 정천상 님과 종손 정의균 님을 만났다. 『죽헌집』은 숭산정사의 화재로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지 않아 경상대학교 도서관장 기근도 교수님께 도움을 요청하였다. 12월 30일 『죽헌집』에서 일월대의 석각 시기를 확인하기 위해 함양 지곡에 내려갔고, 정천상 종회장님의 안내로 죽헌공의 묘소를 찾았다. 그리고 『죽헌집』의 「가장(家狀)」과 「행장(行狀)」에서 죽헌 정태현 공이 28세 때에 두류산을 유람하고 천왕봉에 석각한 기록을 확인하였다.
▶ 『죽헌집』 권7 「부록 가장」
1886(병술)년 한성부주부 전환국 위원이 되었다. (중략) 다시 두류산과 덕유산을 다시 유람하면서 선조 문헌공께서 유람하신 곳과 지나가신 곳에 대해서 두루 찾아가 감동을 시로 지었다. 두류산 상봉에 이르러 특별히 시를 짓고 바위에 글자를 새긴 것은 '간진천만첩(看盡千萬疊)'이란 선조의 시구에 더욱 감격했기 때문이다.[丙戌 漢城府主簿典圜局委員(중략)再遊頭流德裕 而至於先祖文獻公杖屨所 過之處 莫不周訪感賦 至於頭流上峯 特題詩刻石者 益感看盡千萬疊之句也.]<竹軒集卷之七 附錄 家狀> |
遊頭流到花開縣[두류산을 유람하고 화개현에 이르러]
정여창(鄭汝昌, 1540~1504)
風蒲獵獵弄輕柔 : 바람이 하늘하늘 부들 풀을 부드럽게 희롱하는데
四月花開麥已秋 : 4월 달 화개 고을은 보리 이미 거둘 때였네.
看盡頭流千萬疊 : 두류산 천만 첩을 다 구경하고 나서는
扁舟又下大江流 : 한 척의 돛단배로 또 큰 강 따라 내려간다네.
죽헌공 25세 1883(계미)년 7월 동몽교관에 제수되어 출사한다. 1886(병술)년 한성부 주부(전환국위원)가 된다. 전환국은 지금의 조폐공사이다. 그해 죽헌은 지리산을 유람한다. 죽헌집의 가장에 '간진천만첩지구(看盡千萬疊之句)'는 일두 정여창이 탁영 김일손과 두류산을 유람하고 남긴 '遊頭流到花開縣(유두류도화개현)' 시의 3구를 가리킨다.
석각의 시기는 1886(병술)년으로 죽헌공이 28세 때의 일이다. 죽헌 정태현이 일두의 발자취를 좇아 두류산을 유람하고 상봉에 올라 시를 짓고 각을 하였다.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에 '새로 새겼다.(新刻)'라는 기록은 본래 있던 석각이 마모되어 다시 새로 새겼을 가능성도 있다. 1905년 벼슬에서 물러나 도숭산 아래 숭산정사(崇山精舍)를 짓고 후진을 양성한다. 개평 마을에 관찰사댁이 있는데, 화재로 소실되어 빈터만 남아있다. 이곳이 바로 숭산정사(崇山精舍) 터이다. 죽헌공이 태어난 생가는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지금은 후손인 종손자(從孫子, 하동정씨 문헌공파 종회장) 정천상 님이 살고 있다. 일월대 석각 측면 바위에서 정근상(鄭近相, 1893∼1934)의 인명 석각도 확인하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프랑스어로 "귀족은 의무를 갖는다"라는 의미이다.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회지도층에게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단어이다.
천왕봉 일월대 석각 필획의 주인공 관찰사 죽헌(竹軒) 정태현(鄭泰鉉, 1858~1919) 공은 당시 부와 학문, 권력과 명성을 가진 사회의 지도층으로 한말 격변기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일월대 석각을 조사하며 도움을 주신 하동정씨 문헌공파 종회장 정천상 님과 대대로 일두 고택을 지킨 18대 종손(宗孫) 정의균 님께 감사드린다. 끝.
작성자 지리산역사문화조사단 이 영 규
천왕봉 일월대 석각은 글씨의 길이가 약 2.5m 한 글자의 크기가 76cm이다. 죽헌 정태현이란 인물에 대해 조사하면서 후손들을 만나 하동정씨 세보에서 확인하였고, 『죽헌집』을 경상대학교 고문헌 박물관에서 찾아 석각의 시기와 인물에 대해 조사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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