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항일 의병장 비호장군 석상용 의진과 상원사터

도솔산인 2022. 2. 21. 05:49

항일 의병장 비호장군 석상용 의진과 상원사터

 

 

▣ 일 시 : 2022년 02월 20일(일)

▣ 코 스 : 초암농장-아래마당바위-백두대간늑대님 추모동판-상원사-상원교-옥녀탕-문바위-추성

▣ 인 원 : 2명

▣ 날 씨 : 맑음(영하 10도)

 

 

  허공달골의 석상용 의병장 묘소에 의병장석상용지송공비가 있다. 이 묘비는 그의 셋째 아우 채용(彩龍)씨가 1921년 1월 초에 선생의 공을 기린 33자의 글을 새겨 송공비를 세웠다. 서슬이 퍼런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의병활동 공적비는 전국에서 유일하다. 얼마 전 자료를 통해 석상용의 상원의진이 상원사터에 주둔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석상용의 상원의진은 상원사칠성동두지터장구목백무동으로 이동하여 도마마을에 은신해 있다가, 1908 4 29( 3.29)  일본군이 주둔해 있던 실상사를 공격한다. 5월 11(음 4.12)일 석상용 의진을 도운 도마마을 사람들이 일본군에게 학살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당시 마천면 노지현(1861~1927) 면장이 생명을 무릅쓰고 나서서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였다. 

 

  이런 자료를 머릿속에 정리하고 당시의 일들을 상상하며 추성리에 들었다. 아침 온도 영하 8도 다행스럽게 바람은 없으나 차가운 기운에 코끝이 따가웠다. 초암 염소농원을 지나 옛길을 따라 올라갔다. 군데군데 집터의 흔적이 남아있다. 백두대간 늑대님의 추모비에 술을 한 잔 붓고 묵념의 예를 올렸다. 지리산 골골 발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분이다. 추모 동판(銅版)까지 당사자인 송대장님의 시그널이 길을 안내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작은 지능선을 지나 허리길로 차츰 고도를 높여가니 얼마 후 초암능선에 닿는다. 초암능선길은 상원사와 박회성까지 이어지는데, 우마가 이동할 수 있는 길이다. 능선의 동서에 배암밭골 마을과 칠성동 마을과 안오리 마을터가 있다. 칠성동에는 정귀환씨가 살고있다. 1862년 진주민란 때에 칠성동으로 들어온 진양정씨 후손이다. 능선 좌우로 빨치산 토벌대의 참호가 이어진다. 상원사와 박회성은 전란이 있을 때마다 항전지요. 피난처였던 것이다. 정경운의 《고대일록(1596)》에 "임진왜란 때에 산음에 사는 박회성 성주 송업(宋嶪, 1526~?)이 성을 비우고 거창에 다녀왔다가, 도체찰사 이원익에게 곤장의 징벌을 받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아마 이 당시 박회성까지 우마가 이동할 수 있는 길을 구축한 듯하다.

 

  초암능선 갈림길에서 지근거리에 상원사터가 있다. 상원사터에는 90년대 초 원오스님이 머물렀던 흔적이 남아있다. 상원사터 앞능선의 호매기에도 진지터가 있다고 한다. 상원사골로 올라가면 직선거리 650m에 박회성이 있다. 혹자는 '천왕봉 고성'이라고 하고 구전에 '대궐터성'이라고도 전한다. 성곽 길이가 1410.9m, 면적이 94,101.02㎡(28,565坪)의 자연지형을 이용한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包谷式山城)이다. 해발 1238m, 하봉 아래 초암 능선에 위치(경도 : 127-71814, 위도 : 35-35841)한다. 상원사터에서 칠선계곡으로 내려서는데, 도처에 산막터와 석축 흔적이 산재해있다. 화전민들이 밭을 개간했던 비탈에는 낙엽송 군락이 있다. 백두대간 늑대(송근성)님은 주로 이 주변을 많이 다니셨다. 만날 때마다 초암능선과 박회성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다. 그분의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에 굵직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칠선계곡으로 내려서는 길은 테크와 계단을 설치하고 등산로를 정비하여 산책로 수준이다.

 

  1907년 10월 연곡사에서 패한 호남 의병들은 또 다시 1908년 설날 의신 마을에서 일본군의 기습으로 대부분 궤멸을 당한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에 궁지에 몰린 의병들은 벽소령을 넘어 마천면으로 모였고, 지리산 북록 마천면에는 백무진과 상원(추성)진 연합의진이 편성된다. 이곳의 지리에 밝고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석상용 선생이 총 참모장이 되어 상원사에서 한해 동삼을 보낸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거나 의견이 다른 사람들은 연합 의진을 떠났을 것이다. 당시 실상사(일본군 기록 : 입석 수비대)에는 일본군 토벌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상원사터에서 겨울을 보낸 석상용 상원(추성)의진은 봄이 되자 백무진과 일본군을 기습하기에 이른다. 상원사를 출발하여 칠성동과 두지터를 지나 장구목을 넘는다. 백무동에서 군자리 도마마을에서 작전 계획을 최종 점검하고, 1908년 4월 29일(음 3.29) 그믐 밤을 기해 실상사를 급습한다. 그러나 백무진과 의사소통(시계가 없었다고 함)이 되지 않아 실패하고 퇴각을 하였다.

 

  동년 5월 11일(음력 4월 12일) 일본군이 의병을 색출한다는 구실로 젊은이와 부락민을 도마마을 서당 뜰에 강제로 집합시켜 놓고 문초를 한다. 당흥마을 김학길(金學吉)이 앞줄에서 옆줄로 옮겨 앉았다는 이유로 즉석에서 총살되고, 남은 사람들을 모두 처형하려고 하였다. 마침 마천면장 노지현이 뒤늦게 알고 달려와서 "여기 잡혀온 사람들은 모두 죄가 없는 사람들이니 죽이지 마라."라고 막아서자, 일본군은 발길질과 개머리판으로 노지현 면장을 심하게 구타하였다. 노면장은 이에 굴하지 않고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이 사람들은 죄가 없습니다."라고 일본군을 설득하고 항변하여 처형 직전 도마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였다. 노지현 면장은 일본군 구타의 후유증으로 평생을 다리 저는 불구자로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석상용 선생은 1912년 일본군에게 피체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5년이 지난 후 석방되어 추성마을로 돌아왔다. 선생은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으로 수년 동안 고생하다가 1920(庚申)년 10월 분한 마음을 품고 별세하였다. 마천면 가흥리 도계공원과 도로 건너에는 당시의 일을 기록한 전면장노공지현영은비 의병장석상용선생전적비가 있다. 끝.

 

 

 

추성리 100번지[추성리701번지와 두류암(頭流巖) 바위 사이에 위치함]

 

 

참고자료

 

1. 의병장석상용지송공비

 

  공의 자는 용견(龍見)이다. 세칭 비호장군이라 칭한다. 장군은 용기와 힘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국가가 위망(危亡)에 처한 것을 보고서, 지리산중에서 의병(義旅)을 일으켜 왜병을 참()한 것이 매우 많았다. 마침내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5년이 지난 후 석방되어 돌아왔다. 이로 인하여 질병의 고통으로 수년 동안 고생하다가 마침내 庚申(1920)10월 분한 마음을 품고 별세하였다. 辛酉(1921)년 정월초 10일에 세우다.

 

義兵將石祥龍之頌功碑

  公字龍見世稱飛虎將軍勇力絶人見國家危亡起義旅于智異山中斬倭兵甚多竟被日憲投獄經五年放還因此疾痛數年辛艱庚申十月含憤而別世 辛酉正月初十日竪

 

 

2. 비호장군 석상용 약전

 

  1907년 남원에서 양한규와 고제량이 찾아와서 합세하고 곡성, 장성, 고창, 구례 등지에서 왜병들에게 기습작전을 하면서 싸우다가 쌍계사를 거쳐 마천으로 넘어오던 도중 고려천이 이끄는 일대를 만나 지리산 중턱 상원에서 합세하였다. 그후 문태수 신명선이 이끄는 일대가 추성으로 들어와 상원에서 합세하여 대진을 이루었다. 충북 제천에서 박화선이 일대를 이끌고 백무동으로 들어왔다. 그 후 김동신 홍영대 등이 안의에서 들어와서 지리산에서 의병진이 웅거하였다공은 지리 사정에 밝고 지략도 겸비하였으므로 백무진 상원진의 총참모로 추대되어 수백 대원들의 군량과 군기 화약의 공급과 작전과 정찰까지 맡아서 맹활약을 계속하였다. 비호장군석상용약전(이종인, 1974)

 


3. 의병장석상용선생전적비

 

  1908429(음력 3월 그믐날) 캄캄한 야음을 이용해 약 50여 명의 병력으로 왜군을 습격하였다. 크게 놀란 왜군은 절 뜰에 쌓아둔 나뭇가지에 불을 질러 어둠을 밝히고 반격하였다. 오랜 접전 끝에 의병대는 서쪽 노루목으로 퇴각하였다. 그 후 511(음력 412) 왜군들은 본면 도마리의 서당에다 주민들을 모아놓고 집단 학살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을 당시 본면 면장 노지현(盧址鉉)씨의 끈질긴 설득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의병장석상용선생전적비(최점갑, 1995)

 

 

4. 전면장노공지현영은비

 

  일본이 우리 강토를 탐내고 갖가지 침략을 자행타가  끝내는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맺고 정치에 까지 그들이 마음대로 하는지라. 이에 분노를 참지 못하여 각지에서 봉기하였으니 이것이 의병이었고, 의병을 진압시킨다는 구실로 일본은 자기네의 병력을 끌어들여 전국 각처의 요소에 수비대를 주둔시켰으니 우리 고장의 들머리에 있는 실상사에도 주둔하고 있었는지라. 의병대장 석상용(石祥龍, 1870~1920)이 이를 소탕코자 백여 명의 병력을 모아 서기 1908(戊申) 429일 이 날이 음력 3월 그믐이라 야음을 타서 실상사를 포위하고 화심포 탄환이 다하도록  공격을 하였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으므로 횃불을 절마당에 던졌더니 왜병이 횃불을 주워 인근에 있는 나무더미에 던져 충전하는 화광을 이용하여 조총으로 반격하는지라. 이를 대응하였으나 실탄이 없으므로 약간의 희생을 당하고 후퇴하셨다.

 

  511(음력 412) 왜병들이 의병을 색출한다는 구실로 젊은이와 부락민을 도마마을 서당 뜰에 강제로 집합시켜 그 앞에서 문초를 하는데 잡혀온 당흥마을 김학길(金學吉)이 앞줄에서 옆줄로 옮겨 앉는다고 즉석에서 사살하고 남은 사람을 처형할 즈음에 면장 노지현이 뒤늦게 알고 달려와서 여기 잡혀온 사람들은 모두 죄 없는 사람들이니 죽이지 말라고 외친 즉, 왜병은 발길과 총부리로 심히 구타하나 이에 굴하지 않고 옷깃을 헤쳐 가슴을 내밀며 나를 죽이고 죄없는 자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호통하니 야만적인 왜병들도 공이 너무나 당당한 용기와 기백 그리고 줄기찬 항변과 늠름한 위엄에 감복하여 총부리를 거두고 모두 해산시켰다. 이때의 상처가 끝내는 다리의 불구로 일생을 마쳤다.《전면장노공지현영은비(임명근, 1983

 

 

아래마당 바위
대간늑대 지리 품속으로 들다. 2021 신축년
석문
중사랑바위
상원사 갈림길
상원사터
상원사터
샘터
상원교
칠선계곡에서 유일하게 천왕봉이 보인다.(상원교)
옥녀탕
살아있는 이정목
장구목
문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