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1611년 유몽인 유두류산록 촉도난(蜀道難)의 검각(劒閣)

도솔산인 2022. 2. 28. 07:22

1611년 유몽인 유두류산록 촉도난(蜀道難)의 검각(劒閣)

 

 

▣ 일 시 : 2022년 02월 26일(토)~27일(일)

▣ 코 스 : 의신-유몽인 하산길-도덕봉(검각)-만국기터-파란움막터-원통사 상허리길-두릅/고사리밭-의신

▣ 인 원 : 5명

▣ 날 씨 : 맑음(영하 5도)

 

 

  선인들의 유람록 답사는 하면 할수록 생각이 조금씩 바뀐다. 함께 답사를 하더라도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다. 유람록을 읽지 않고 답사를 한다면 입과 발이 산행하는 것이다. 입과 발이 만족하는 口足산행이다. 유람록을 정독하더라도 몰입하지 않으면 격화소양(隔靴搔癢)이다. 등산화를 신고 발바닥을 긁는 격이다. 함께 답사한 분들과의 의사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6 : 4로 상대방 이야기를 경청해야 한다. 귀가 열여야 비로소 눈이 밝아진다. 귀를 닫고 입을 열면 결국 자기 함정에 빠진다. 필자는 이미 그런 선례를 많이 보았다.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도,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수정할 줄 아는 것도 실력이다. 그래서 지리산 모든 능선과 골짜기를 답사한 분들의 견해를 듣고자 합동 산행에 나섰다. 

 

  마천면 소재 선유정 상량문에도 촉도(蜀道) 관련 기록이 있다. 지리산의 험한 산길을 촉도(蜀道)의 험난함에 비유하였다. "전국시대 진(秦)나라 혜문공(惠文公)이 촉나라를 치기 위해 돌로 다섯 마리의 소를 만들어 항문에 금을 넣어 놓고는 촉도에 갖다 놓았다. 사람들은 돌소가 금 똥을 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문을 듣고 황금에 눈이 먼 촉왕(蜀王)이 1천 명의 군사와 다섯 명의 力士를 동원하여 촉도를 내어 금우(金牛)를 성도(成都)로 운반해 갔다. 이 때문에 촉()으로 가는 길이 뚫렸고 촉나라는 결국 진나라에게 망한다. 이 길을 금우도(金牛道)라고 한다."  

 

  이백의 〈촉도난(蜀道難)은 고악부의 제목을 따온 것으로 이백의 나이 31(731) 때, 장안에 오기 전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백의 명편으로 꼽히지만 수많은 평자들에 의해 해석이 분분한 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파른 검각(劍閣)과 촉()의 험한 지형을 묘사하면서 상상력을 한껏 발휘한 작품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에 “검각이 험난하게 우뚝 솟아 버티고 있으니, 사내 한 명이 관문을 지키면 만 명이 공격해도 열지 못할 것이다.〔劍閣崢嶸崔嵬 一夫當關 萬夫莫開〕”라고 하였다. 지세가 험난해서 소수의 병력으로도 굳게 지킬 수 있는 요새를 말한다. 중국 역사상 전국시대 이래로 촉도의 검문관 쟁탈전이 95차례나 벌어진 곳이다.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검각(釰閣, 劒=劍)이 등장한다. 유몽인의 하산길에 접근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다. 유몽인의 하산길은 덕평봉 선비샘과 도덕봉을 지나서 의신마을 뒤 등달길을 따라서 내려오다가 중허리길을 지나서 의신사로 떨어지는 최단거리 길이다. 유몽인이 검각이라고 기술한 도덕봉 주변에는 망루 역할을 하였던 암봉과 사람들이 머물렀던 석굴이 산재해 있다. 또한 1,137m 고도에 사계절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 배후에는 천우동(天羽洞, 덕평마을)이 있다. 검각이라는 어휘에 주목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대성골 초입 한말 항일 의병의 무덤이다. 1908년 설날(양력 1908.02.02)을 앞두고 도덕봉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들은 명절을 쇠기 위해 의신마을로 내려간다. 마을로 내려간 의병부대는 일본군의 매복 기습을 받고 전멸당한다. 의신에서 대성골로 들어가는 초입 30인 의병총이 당시의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하동의 향토사학자 김동곤 선생이 쓴 '화개면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907년 초겨울 연곡사에서 일본군의 기습으로 고광순(高光洵, 1848~1907) 의병장을 잃고 흩어진 의병들의 일부는 이듬해(1908년)에도 화개동의 의신 부락에 거점을 마련하고 계속 활동하였다. <중략> 소철굴암터(용화정사)에서 숙영을 하던 의병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군에게 화승총으로 대항했으나 달걀로 바위 치기였다. 신형무기로 무장한 정예 일본군에 농민·의병들은 적수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형세는 흩어지고 계곡으로 도망치는 의병들은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지금 의신마을에서 원대성 마을로 들어가는 논들 위 도로변에 30여 의병의 원혼이 묻혀있다.」

 

  1907년 10월 17일(음력 09.11) 새벽, 연곡사를 포위한 채 일제 군경은 공격을 개시하였다. 일제 군경은 총공격을 가하며 피아골을 유린한 끝에 의병들을 연곡사 구석으로 몰아갔다. 의병장 고광순(高光洵)과 부장 고제량(高濟亮, 1849~1907) 이하 25~6명의 의병이 연곡사 일대에서 장렬히 전사 순국하였다. 연곡사에서 패한 고광순 부대 의병들은 외당재와 내당재를 넘어 의신으로 들어온다. 도덕봉 주변 검각을 거점으로 활동하다가 의신마을로 내려가 무신(1908)년 정월 초하루 떡국 한 그릇과 목숨을 바꾼 것이다. 도덕봉 아래 샘터 주변 군데군데 석축은 한말 항일 의병들의 주둔지로 추정된다. 도덕봉 아래 샘터 부근의 바위 암벽에는 탄흔 자국이 남아있다. 사람들이 왜 이곳을 염소막터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끝. 

 

 

※ 참고자료 :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하산길

 

○ 1611년 4월 5일, (향적암을 출발하여) 영신암에서 40리쯤 내려갔는데 산세가 검각(劍閣)보다 더 험하였다. 108번 굽이친 형세가 아니라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탈길이었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은 마치 푸른 하늘에서 황천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넝쿨을 부여잡고 끈을 잡아당기며 이른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걷고 또 걸었다. 푸른 나무숲 틈새로 내려다보았는데, 어두컴컴하여 아래가 보이지 않아 이맛살을 찌푸리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손가락을 깨물며 정신을 차린 뒤에 내려가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대나무 숲을 헤치고 의신사(義神寺)를 찾아 들어가 묵었다.[自靈神行四十里許 山之嶄絶 過於釰閣 而風磴直下 不作百八盤之勢 緣而下者 如自靑天落黃泉 牽蘿引繩 自卯至申 而俯瞰繁綠之隙 猶黯黯然不見底 深矉太息 幾乎齰指而垂戒矣 然後下入幽谷 披高竹㝷義神寺而宿]

 

 

注 1. 검각(劍閣) 중국 삼국 시대 이래의 요해지. 장안(長安)으로부터 촉(蜀)으로 가는 대검산(大劍山) •소검산(小劍山) 사이에 있는 요해지로, 현재의 지명으로는 사천성(四川省) 검각 현에 있음. 산 벼랑에 판자 따위를 엮어서 선반을 걸듯이 길을 낸 각도(閣道)가 통해 있으므로 이렇게 부름. 전하여 험난한 곳을 지칭함. [네이버 지식백과] 검각[劍閣] (한국고전용어사전)

注 2. 고광순(高光洵, 1848년~1907년)은 조선 말기의 을미·정미 의병장이다. 자는 서백(瑞白). 호는 녹천(鹿川). 본관은 장흥, 전라남도 담양 출신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고경명의 후손이다. 기우만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구례의 연곡사에서 전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 주의 : 위 내용은 주관적인 생각으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숙부인달성서씨지묘
원숭이 형상 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