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1611년 유몽인의 촉도난 검각과 덕평마을 천우동 석각

도솔산인 2022. 1. 30. 22:47

1611년 유몽인의 촉도난 검각과 덕평마을 천우동 석각

 

 

▣ 일 시 : 2022년 01월 29일(토)~30일(일)

▣ 코 스 : 의신-당산나무-숙부인달성서씨묘-능선-도덕봉-덕평마을(천우동)-파란움막터-상철굴암-중철굴암-하철굴암

▣ 인 원 : 3명

▣ 날 씨 : 맑음, 영하 5도

 

 

1611년 유몽인의 하산길 촉도난의 검각

 

영신암에서 40리쯤 내려갔는데 산세가 검각(劍閣)보다 더 험하였다108번 굽이친 형세가 아니라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탈길이었다이 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은 마치 푸른 하늘에서 황천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넝쿨을 부여잡고 끈을 잡아당기며 이른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걷고 또 걸었다푸른 나무숲 틈새로 내려다보았는데어두컴컴하여 아래가 보이지 않아 이맛살을 찌푸리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손가락을 깨물며 정신을 차린 뒤에 내려가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대나무 숲을 헤치고 의신사(義神寺)를 찾아 들어가 묵었다.(自靈神行四十里許山之嶄絶過於釰閣而風磴直下不作百八盤之勢緣而下者如自靑天落黃泉牽蘿引繩自卯至申而俯瞰繁綠之隙猶黯黯然不見底深矉太息幾乎齰指而垂戒矣然後下入幽谷披高竹㝷義神寺而宿.)

 

 지난해 10월 9일~10일 영신대에서 1박을 하고 유몽인의 하산길에 집중하였다.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검각(釰閣, 劒=劍)이라는 어휘가 등장하는데, 유몽인의 하산길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다. 검각은 중국 삼국시대의 촉나라로 들어가는 난공불락의 유명한 요새이다.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에 “검각이 험난하게 우뚝 솟아 버티고 있으니, 사내 한 명이 관문을 지키면 만 명이 공격해도 열지 못할 것이다.〔劍閣崢嶸崔嵬 一夫當關 萬夫莫開〕”라고 하였다. 지세가 험난해서 소수의 병력으로도 굳게 지킬 수 있는 요새임을 말한다. 유몽인이 검각이라고 기술한 도덕봉 주변에는 망루 역할을 하였던 암봉과 사람이 머물렀던 석굴산재해 있고, 1,100m 고도에 사계절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 

 

  앞서 여러 차례 도덕봉 주변을 답사하였다. 도덕봉에서 내려다보면 겹겹이 성곽으로 에워싼 듯 암봉은 망루가 되어 의신마을과 안당재를 내려다보고 있다. 도덕봉 자체가 난공불락의 요새이다. 화개에서 칠불사 삼정마을 벽소령으로 이어지는 소금길도 눈에 들어온다. 도덕봉 아래를 왜 염소막 터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군데군데 석축은 한말 의병들의 주둔지로 추정된다. 바위 암벽에 탄흔 자국도 남아있다. 1908년 설날(양력 1908.02.02)을 앞두고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들은 명절을 쇠기 위해 의신마을로 내려간다. 마을로 내려간 의병부대는 일본군의 매복 기습을 받고 전멸당한다. 의신에서 대성골로 들어가는 초입 30인 의병총이 당시의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하동의 향토사학자 김동곤 선생이 쓴 '화개면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907년 초겨울 연곡사에서 일본군의 기습으로 고광순(高光洵, 1848년~1907년) 의병장을 잃고 흩어진 의병들의 일부는 이듬해(1908년)에도 화개동의 의신 부락에 거점을 마련하고 계속 활동하였다. <중략> 소철굴암터(용화정사)에서 숙영을 하던 의병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군에게 화승총으로 대항했으나 달걀로 바위 치기였다. 신형무기로 무장한 정예 일본군에 농민·의병들은 적수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형세는 흩어지고 계곡으로 도망치는 의병들은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지금 의신마을에서 원대성 마을로 들어가는 논들 위 도로변에 30여 의병의 원혼이 묻혀있다.」 한말 항일 의병들은 무신(1908)년 정월 초하루 떡국 한 그릇과 목숨을 바꾼 것이다. 

 

注 고광순(高光洵, 1848년~1907년)은 조선 말기의 을미·정미 의병장이다. 자는 서백(瑞白). 호는 녹천(鹿川). 본관은 장흥, 전라남도 담양 출신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고경명의 후손이다. 기우만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구례의 연곡사에서 전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천우동 경태임오춘 이청련서(天羽洞 景泰壬午春 李靑蓮書) 석각

 

천우동 경태임오춘 이청련서(天羽洞 景泰壬午春 李靑蓮書)

 

 다음날 옛 덕평마을 움막터에 있는 천우동 석각을 다시 확인하였다. 움막터 샘터 뒤의 바위에 천우동 경태임오춘 이청련서(天羽洞 景泰壬午春 李靑蓮書) 석각이 세로로 새겨져 있다. 이번에는 육안으로 이청련서(李靑蓮書)가 보였다. 경태(景泰)는 명나라 대종(代宗)의 연호이다. 경태제(景泰帝)는 중국 명나라 7대 황제(재위 1449~1457)이다. 경태제(景泰帝)는 명나라 황제 영종(英宗, 정통제正統帝/天順帝)의 이복 아우이다. 정통제(正統帝)가 몽골의 포로로 잡혀갔을 때, 잠시 왕위에 올랐다. 영종(英宗)이 풀려나면서 왕위에서 쫓겨났다. 임오년(壬午年)은 대종(代宗)의 재위하였을 때가 아니고, 영종이 복위한 천순(天順) 6년으로 1462(세조 8년)년이다.

 

 이청련(李靑蓮)은 촛대봉의 고려낙운거사 이청련서 석각과 「청학 동결(靑鶴洞訣)」을 남긴 인물이다. 천우동 석각의 주인 이청련이 지리산 속에서 중국의 황제가 바뀐 것을 모르고 경태제(景泰帝)의 연호를 새긴 것은 아닐는지. 청련(靑蓮)은 이백(李白, 701~762)의 고향으로 이백의 별호이다. 이백을 흠모하는 인물이 이백의 별호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중기 이후백[李後白, 1520년(중종 15)~1578년(선조 11)]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호가 청련(靑蓮)이고 그의 문집이 청련집(靑蓮集)이다. '후백(後白)은 뒤에 태어난 이백(李白)'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천우동 석각 이청련(李靑蓮)과는 다른 인물로 보인다.

 

 注 우화등선(羽化登仙) : 소동파(蘇東坡, 소식蘇軾, 1037~1101)는 송(宋) 나라 신종(神宗) 때 소식은 호북(湖北) 황주(黃州)로 좌천되었다. 그는 틈나는 대로 주변의 명승지를 유람하였는데, 적벽을 찾아 〈적벽부〉 2수를 지었다. 〈전적벽부〉에서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이 나온다. ‘우화(羽化)’는 원래 번데기가 날개 달린 나방으로 변하는 것을 말한다.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르다. 번잡한 세상일을 떠나 마음이 평온하고 즐거운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천우동(天羽洞)은 번잡한 세상일을 떠나 마음이 평온하고 즐거운 신선의 세계인 덕평동천(德平洞天)을 일컫는 의미이다.

 

 

▶ 답사후 요약

 

1. 도덕봉에서 의신사까지 옛길을 확인함.

   (당산나무-두릅밭-고사리밭-능선길-도덕봉)

2. 도덕봉에서 덕평마을 천우동 옛길을 연결함. 

  (검각 박터-무덤-1288.8봉-등고선 허리길-천우동)

3. 설산 토굴에서 등고선으로 상철굴암 옛길을 확인함.

4. 답사길  의신사에서 상철굴암 최단거리 옛길을 확인함.

  (근대에 만든 농수로 길보다 50미터 위에 허리길이 있음)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답사를 시작한 지 2년이 지났다. 환희령과 갈월령을 넘었고, 기담과 여공대를 찾았다. 와룡정과 숙성치도 만났다. 이미 밝혀진 곳도 있지만 늘 새로운 문제를 풀어야 했다. 어떤 일이든 혼자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없다. 선인들의 유람록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과 소통하였다. 촉도난의 검각과 천우동 석각은 혼자서 풀기 어려운 문제였다. 답사를 반복하면서 퍼즐을 맞추고 함께한 분들과 의견을 나누었다. 귀를 열어야 비로소 눈이 보인다. 세상에 나만 못한 사람은 없다. 도덕봉에 검각을 세우고 유몽인의 하산길은 풀었지만, 삼철굴암에 대한 의문은 아직 남아있다. 구정을 이틀 앞두고 114년 전 한말 항일 의병 전적지를 답사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아무튼 이번 답사가 유몽인 길 검각의 마침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박 2일 함께하신 두 분 趙·曺박사님께 감사드린다. 끝.

 

 

 

당산나무
숙부인 달성서씨묘
촉도난의 검각/여그도(?)
도덕봉(1161.9봉)

유몽인의 하산길 능선
안당재는 칠불사에서 벽소령을 잇는 소금길이다.
천우동 석각바위
파란움막터
상철굴암
상철굴암
숯가마터
우측 설산습지 토굴 방향
암자터A
암자터B
토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