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벽소령 소금길과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220202~06)

도솔산인 2022. 2. 6. 15:37

벽소령 소금길과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220202~06)

 

 

▣ 일 시 : 2022년 02월 02일(수)~06일(일)

▣ 코 스 : 하정마을-벽소령-선유정-구시쏘-영원사-도솔암-황석산 봉전산방-축령산 휴휴산방

▣ 인 원 : 1~2일차(3명), 3~5일차(2명)

▣ 날 씨 : 맑음, 영하 5도

 

 

 선유정기와 선유정 유래의 내용은 약간 상이하다. 선유정기는 한문, 선유정 유래는 한글로 쓴 문장이다. 글쓴이도 다르다. 전설은 글을 쓰는 사람에 따라 살이 붙기도 하고 각색이 되기도 한다. 전설은 입에서 풀려나오는 비단같은 구라(口螺)가 아니던가. 전설이니까 그건 그렇다고 치자... 선유정과 석문암, 구시쏘와 부자암, 벽소령은 실물을 보았지만, 벽소명월과 무지개 다리(홍예교, 虹霓橋)도 미확인이다.

 

「옛날 선녀 몇 사람이 내려와서 목욕하는 움푹 패인 못(槽沼, 구시쏘)을 살폈다. 한 장부가 있어 이름을 인걸(人傑)이라고 하였는데, 선녀들이 목욕하는 것을 엿보다가 몰래 그중의 아미(阿美) 선녀의 날개옷을 훔쳤다. 선녀는 옷을 찾다가 끝내 옷을 찾지 못하고 인간 세상에서 사람(人傑)과 동거하면서 두 아들을 얻었다. 아들이 이미 장성하여 하루는 달밤에 부부가 즐거워하다가 날개옷을 주었더니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부자(父子)가 벽소령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면서 애절하게 울부짖다가 마침내 화석(化石)이 되었으니 세상에서 말하는 부자바위(父子岩)가 이것이다.

 

昔仙女數人降 監沐浴槽沼也 有一丈夫名曰人傑 竊覸其沐浴 私竊其中阿美仙女羽衣 仙女尋衣 終不得 遂爲世間之人 而與之同居 生於二男 男已長成 一日月夜 夫婦樂樂羽衣給 則乘雲上天遙遠 父子相望而絶叫 竟爲化石 世云所稱父子岩是也)」<선유정기>

 

 벽소령 가는 길에 삼정리(三丁里) 즉, 양정(陽丁), 음정(陰丁), 하정(下丁) 마을이 있다. 삼정을 토박이 말로 정장(丁莊)이, 또는 정쟁이라고 한다. 인부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인 듯하다. 삼정리가 영원사의 사하촌으로 벽소령에 짐을 올리는 인부들이 사는 마을로 이해가 되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소금길은 벽소령에서 소금쟁이 능선을 지나 광암동과 하정마을로 이어진다. 지금은 소금쟁이 능선 대신 작전도로를 이용한다. 1969년 1207건설공병단이 공사를 착공하여 1971년 11월 30일 3년만에 지리산 신설도로를 완공한 길이다.

 

 형제봉의 유래는 화개면 대성리 의신마을에 구전으로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의신마을에 사는 형제가 약초를 캐러 갔다가 길을 잃어 돌아오지 못하였다. 다음날 마을 사람들이 찾아나서게 되었는데, 형제가 형제봉에서 죽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완폭대님) 완폭대님은 85년~92년까지 벽소령에서 음료수 장사를 하였던 조봉문(1959년생) 씨 형제 중 한 사람이다. 벽소령에서 봉산정계 금표를 확인하고 목책을 넘어 소금길로 접어들었다. 길의 폭은 약 2m로 우마가 교행할 수 있는 2차선 도로이다. 소금길은 구벽소령 헬기장 소금쟁이 능선으로 완만하게 이어진다.

 

 하정마을로 내려와서 선유정과 구시쏘를 둘러보았다. 구시쏘 직전 거대한 바위가 있는데 인걸이 숨어서 선녀가 목욕하는 것을 훔쳐본 바위이다. 집주인 말에 따르면 홍수가 나면 물이 집으로 달려들지 못하게 하는 복바위라고 하였다. 옆에 제단이 있는데 합천에 계신 스님이 11월이 되면 1년에 한 번씩 제를 지내러 온다고 한다. 구시쏘에서 올려다보면 형제봉의 부자바위가 정면으로 보인다. 동행한 조용헌 박사의 말을 빌리면 형제봉은 백학이 나는 형상이라고 한다. 매촌(梅村) 정복현(鄭復顯, 1521~1591) 선생의 매헌집에 "남쪽은 청학동이요 북쪽은 백학동이다."라는 문구가 문득 떠올랐다.

 

「운학정은 매촌 정복현선생의 휴게지소로 경남 함양군 마천면에 있으니 백두산 일맥이 남단으로 뻗어내려와 지리산에서 우뚝 솟아났으니 남쪽은 청학동이요 북쪽은 백학동이다. 산수가 수려하고 경치가 절경이라. 고로 선생이 이곳에 살 만한 땅을 가려서 정사를 지어 도와 예를 강론하니 고장 사람들이 이곳을 영남의 추로지향이라고 일컬었다.

 

雲鶴亭 梅村公鄭先生休憩之所 在於慶南咸陽郡馬川面 白頭山一脈 蔓延於南端 聳出智異山 南則靑鶴洞 北則白鶴洞 山水秀麗 景致絶勝故 先生 卜築精舍於此 講論道禮 鄕人 稱之嶠南鄒魯也」<매촌집>

 

 注 南則靑鶴洞 北則白鶴洞 : 옛말에 '雙磎靑鶴實相白鶴'이라는 말이 있다. 鄒魯之鄕(추로지향) :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고향이란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을 말함. 

 

☞ 정복현(鄭復顯, 15211591)의 자는 수초(遂初)이고 호는 매촌(梅村)이며본관은 서산(瑞山)으로 함양(咸陽)에 거주하였다그는 1521(중종 16) 4월 18일에 아버지 신()의 아들로 거창(居昌무등리(無等里죽곡(竹谷)에서 태어났다그는 당곡(唐谷鄭希輔)선생의 문인(門人)이기도 하며그가 남긴 자료는 매촌실기(梅村實紀)』 2권 1책이 전한다. 정복현은 31(1552)에 강익노관(盧祼), 임희무박승임(朴承任등과 더불어 일두선생의 서원을 창립하였다. 41(1561)에는 마천동(馬川洞)에 운학정(雲鶴亭)을 지었다강익과 더불어 원원상종(源源相從)하였고, 도의로 강마하였다.

 

 

1980년대 도솔암을 중창하신 청매암 정견 스님의 배려로 도솔암에서 하루밤을 묵었다. 도솔암에서 동안거 중이신 적능(寂能) 스님이 불청객을 반갑게 맞았다. 적능 스님께서 요사체에 미리 물을 길어다 데워놓으시고 샤워를 권하셨으나 세수만 하였다. 도솔암에서의 밤은 적막하기만 하다.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도솔암에 대한 기록이 있다. 도솔암에서 옛제석당 터를 가늠해 보았으나 장터목 산장만 눈에 들어왔다. 다음날 아침 가는 눈발이 내리기 시작했다. 끝.

 

「○ 九月四日 <중략> 비로소 옛 제석당(帝釋堂)터에 도착하였다. 올라서 좌우의 바위와 골짜기를 조망하고, 산과 내의 형세를 가리키며 둘러보았다. 온 산에 보이는 것이라곤 푸른 회나무가 아니면 붉게 물든 나무였으며, 붉게 물든 나무가 아니면 저절로 말라죽은 나무였다. 푸르고 붉고 희고 검은 색깔이 뒤섞여 서로 비추어서 마치 비단에 수를 놓은 것 같았다. 서쪽으로 1백여 리쯤 되는 곳을 바라보니 새로 지은 두 절이 있는데, 무주암 서쪽에 있는 절을 ‘영원암(靈源庵)’이라 하고, 직령(直嶺, 곧은재) 서쪽에 있는 절을 ‘도솔암(兜率庵)’이라 하였다. 도솔암은 승려들이 수행하는 집으로 인오(印悟)가 지어 살고 있는 곳이다. 인오는 우리 유가의 글을 세속의 문장으로 여겨, 단지 불경(佛經)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여러 승려를 위하여 암자 앞에 붉은 깃발을 세워두었고, 발자취가 동구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

 

九月四日 <중략> 始達古帝釋堂舊基 登眺左右巖壑 指點山川形勢 滿山所見 非蒼檜則紅樹也 非紅樹則自枯木也 靑紫白黑 參錯相暎 如錦繡然 西望百里餘 有新刱蘭若二 在無住之西曰靈源 在直嶺之西曰兜率 率乃僧舍印悟所築而自居者也 悟以吾儒書爲世俗文 只以識佛經 爲諸僧立赤幟 足跡不出洞門云」<1611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注 옛 제석당터는 소나무 군락이 있는 바위 전망대이다. 직령(直嶺)은 곧을직 재령으로 글자 그대로 곧은재이다.

 

 

 

▼ 벽소령 가는 길

 

 

 

▼ 벽소령 봉산정계 금표

 

부자바위

 

 

▼ 벽소령 작전도로 준공 기념비(사진 완폭대님)

 

벽소령 작전도로 준공 기념비(사진 완폭대님)

 

 

▼ 벽소령 소금길

 

 

 

▼ 형제봉 부자암

 

 

 

▼ 마천면 삼정리 하정마을 선유정

 

 

 

선유정의 유래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호랑이가 담배 피우고 토끼가 용궁에 드나들던  옛날의 이야기입니다. 이 마을에는 아직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 「인걸」이라는 홀아비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외로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산에서 산짐승을 사냥하고 나무 열매와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아 아무런 부족 없는 생활을 해가고 있었는데, 하루 꼭 세 차례씩  무지개가 섰다가 꺼지면서 그때마다 기이한 음악소리가 들리곤 하는 기이한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어느 날 「인걸」이는 사냥터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무지개가 서는 현장엘 갔다가,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옥황상제의  밥을 지어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곤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이곳을 찾아간 「인걸」이는 더위를 못 이겨 밥 짓던 선녀들이 매미 날개처럼 얄팍한 그들의 날개옷을 벗어놓고 물에서 목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위 뒤에서 보고 있던 「인걸」이가 이 날개 옷을 빌려 입고 옥황상제에게 가서 홀어머니의 비단옷 한 벌만 얻어올 생각으로 물가에 벗어둔 선녀의 옷을 훔쳐오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날개 옷이 찢기고 말았습니다. 그때 옷이 찢어지는 소리에 놀란 선녀들은 각자 옷을 챙겼습니다만, 그중 아미라는 선녀는 날개옷이 찢기어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인걸이와 같이 개울가에 정자를 짓고 살았더랍니다.  그 후 옥황상제께서는 비단옷 세벌씩과 하루 세 차례씩 쌀이 나오는 쌀바위 하나를 내려보내 「인걸」이와 「아미」를 부부로 정해주셨습니다. 그로부터 십 년여에 「인걸」이와 「아미」는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아 하늘나라에서 못지않는 단단한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밤 개울가에서 달구경을 하던 「인걸」이가 전에 입던 찢어진 날개옷을 가져다가 기워서 입혀봤더니, 어느새 「아미」의 몸은 공중으로 떠올라 자꾸만 멀어졌습니다. 「아미」와 「인걸」이는 서로 목메어 불러봤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거리는 멀어지기만 했습니다. 석문암 바위 위에서 「아미」를 부르다가 기다림에 지친 「인걸」이와 세자매는 그후 죽고 말았는데, 다음날 벽소령에는 오부자 바위가 솟아났습니다. 이 다섯개의 바위는 「아미」를 따라 「인걸」이가 세 자매를 거느리고 하늘나라로 가는 형상이랍니다. 그리고 「인걸」이 부부가 살던 정자를 세인들은 선유정이라고 불렀으나 허물어진 것을 석문암 계원들이 경향각지의 성원을 얻어 재건하였는데, 그때의 쌀 바위는 최근 도로공사에 묻혀버렸으며 석문암 일부도 파괴되었습니다. 그때 옥황상제의 밥을 짓던 곳은 「가마소」, 설거지하던 곳은 「구시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976년 8월 일

 

글지은이 지산 최점갑

글 쓴 이           

글새긴이       임명근

 

 

 

 

선유정중건기

 

 백두 산맥이 남으로 흘러 소백을 거쳐 우뚝 멈추었으므로 두류산이라 칭하고, 진시황이 중국 천지를 통일하고 영웅심에서 장생불사를 꿈꾸고 동남동녀 500인을 모아 서시로 하여금 인솔케 하여 동국 아방에 파견하여 불사 영약을 캐오게 한 산이라 하여 칭도 하고, 여말 이성계가 삼천리강토의 패권을 도모하고 전국 명산대천에 기도하였으나 정의에 거슬리는 행위에 불응한 지리 영신이 계신다 하여 지리산이라 칭하였는데, 이태조 등극 후 불응한 죄로 전라도 지리산이라 칭케 하였다.

 

 이 영산 서북방 줄기 벽소령 아래 아버지와 아들 함께 등천치 못한 천만년의 한을 품고 화석으로 변하여 우뚝 멈추어서 있는 부자 바위 아래 아미 선녀가 천상에서 내려와 목욕하고 옥황상제의 진지를 지어 올렸다고 한 전설이 담긴 靈區에 선인들이 지기 상통한 향우 수십 인이 결사하여 정자를 짓고 선유정이라 명명하고 봄 여름철에 영시와 음송으로 풍류를 즐기시었다.

 

 이 정자는 세구년심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점 퇴락하여 붕폐의 위기에 있어 계원의 후손들이 선인들의 유지를 받들어 각 염출 하여 새로이 아담한 현 모습으로 재건하게 되었다. 본 누정은 선인들의 고귀한 뜻과 행적의 얼이 담긴 곳이요 문화의 유산으로서 잘 보존하고 가꾸어 후세에 길이 지켜나가기를 염원하는 바이다. 특히 본 유물은 영남의 건축대가요 수명장인 휴천 동강 거주한 석경태의 심혈을 기울여 애쓴 노고에 깊이 치하하는 바이다.

 

서기 1999년 기묘 10월

 

선유정 계원 후손 일동

 

 

 

仙遊亭上梁文

 

孝公→惠文公之欲通蜀道而詭置金牛於塞邊 五力士之餘斧劈開三丁

始皇之謾求靈藥而遙遣徐巿於方外 三神山之仙都優勝五岳

仍羽人之秘境 尋塵士之福庭

惟此仙遊亭

樹中天之華構 廣特地之敞軒

體象乎天地 據坤靈之正位

經緯於陰陽 則星紀之圓方

因美材而究奇 抗應龍之虹梁

列芬橑而布翼 荷翬之雲駕

實列仙之攸館 非吾人之所寧

靈草冬榮 神木春茁

山阜相屬 含谿懷谷

和假道於峻嶺 岡巒絆

吳剛回影乎高標 觸石吐雲

王喬駕鶴而乘緱 應眞飛錫而躡虛

跨穹隆之懸磴 臨萬丈之絶壁

如有乎鳳簫 蕭史下於月夜

近於鸞笙 王子返乎緱山

疏煩想乎淸流 蕩遺

覲蓬萊月 爰飽方丈霞

賡頌己謠 六偉齊唱

東 天王峰頭日輪紅 丹丘宛在霱雲中 誰識惺惺服氣者

抛梁西 般讓高頭低 爲供通家王母西 蟠桃消息曾無

抛梁南 碧高迸老星南 點頭頑父率多 化石千秋難換骨

抛梁北 天馬跨天星拱北 水抱兩儀山太極 花田春色別人間

抛梁上 上摘星辰咫尺强 列子御風幾頡頏 雲牎日月隔腥靈

抛梁下 鰲背三山立極跨 琦樹璇風白霧罷 來人無禁攝仙遊

伏願 上梁之後 棟宇永安 靈區莫掩

非遺世玩道絶粒茹芝 烏能輕擧而宅之乎

寄冥搜駕信通神 何肯遙想而存之

立脩莖之仙掌 承雲表之淸露

屑瓊藥以朝飱 必性命之可延

美往昔之松喬 要羨門乎天路

想升龍於湖 豈時俗之足慕

 

檀紀四三(서기 1976)年 丙辰 九月   光山 金貴鉉 記

 

 

선유정 상량문(仙遊亭上梁文)

 

효공(孝公)→진(秦)나라 혜문공(惠文公)이 촉도(蜀道)를 뚫으려고 거짓으로 금우(金牛)를 변경에 설치했으니 그 당시 다섯 역사(力士)가 쓰던 도끼가 三丁 마을을 개척하였네. 진시황(秦始皇)은 부질없이 영약(靈藥)을 구하려고 방외(方外)로 서불(徐市)을 멀리 파견했으니, 삼신산의 선도(仙都)가 중국 오악(五嶽)보다 더 빼어나게 되었네. 이 산은 신선이 사는 비경으로 인하여, 속세의 사람들이 복을 구해 찾아오는 장소가 되었네. 이 선유정은 허공에 화려하게 솟구쳤고, 확 트인 특별한 곳이 드넓네. 형체는 천지를 형상하였고, 곤령(坤靈)의 정위(正位)에 근거하였네, 음양을 경위(經緯)하고 성기(星紀)의 원방(圓方)을 본떴네. 아름다운 재목을 써서 기이함을 궁구하여, 응룡(應龍) 같은 굽은 들보를 들어 올렸네. 아름다운 서까래를 벌여 날개를 펴니, 구름을 타고 날아갈 듯이 뻗었구나. 이곳은 실로 신선들이 머물던 곳이니, 우리 인간이 편안히 할 곳은 아니로세. 신령스런 약초가 겨울에도 나고, 신기한 나무들이 봄에 쑥쑥 자라네. 산언덕은 서로 이어지며 산골짜기를 품고 있네.

희씨(羲氏)와 화씨(和氏)가 준령에서 길을 빌리자 언덕과 봉우리가 얼키설키 이어졌고, 오강(吳剛)이 높은 달에서 그림자를 돌리자 바위에 부딪혀 구름이 일어나네. 왕교(王喬)는 학을 타고 구산(緱山)에 올랐고, 응진(應眞)은 주장자를 날리며 허공을 밟았다네. 하늘에 걸린 돌길을 밟고, 만 길의 절벽에 임하네. 마치 봉소(鳳簫)를 듣는 듯하기도 하고, 소사(蕭史)가 달밤에 내려오는 듯하기도 하네. 혹 난새를 타고 생황을 부는 신선세계에 가까이 한 듯하기도 하고, 왕자교(王子喬)가 구산(緱山)에서 인사를 하고 떠나가는 듯하기도 하네. 맑은 시냇가에서 번잡한 상상을 씻어내고, 깊숙하고 어두운 곳에서 남아 있는 혼령을 소탕하네. 봉래산의 달을 익숙히 보았고, 방장산의 노을 실컷 맛보았네. 이어 나의 노래를 부르니, 육위송(六偉頌)을 일제히 부르네.

들보를 동쪽으로 던지니, 천왕봉 머리에 태양이 붉도다. 신선세계가 완연히 상서로운 구름 속에 있으니, 슬기로운 기를 받을 자 누구인지 알겠네.

들보를 서쪽으로 던지니, 반야봉이 겸양하여 머리를 낮추려 하네. 오랫동안 세교가 있는 西王母에게 바치려 하는데, 서왕모의 반도(蟠桃) 소식 일찍이 막힌 적 없네.

들보를 남쪽으로 던지니, 벽소령 높이 솟아 남극성인 노인성에 닿았네. 모진 아비가 여러 아들 거느리는 것은 이해되지만, 아비와 자식이 화석이 된 것 천추에 변하기 어렵네.

들보를 북쪽으로 던지니, 천마가 하늘에 걸터앉아 별들이 북극성을 향하네. 물줄기 음양을 포괄하고 산은 태극 모양 되었으며, 꽃핀 들녘 봄빛은 세상과 떨어진 별천지로세.

들보를 위로 던지니, 위로는 별을 답을 듯 지척처럼 가깝네. 열자(列子)가 바람을 몰고 누차 오르내리듯, 구름 낀 창의 세월은 속세와 신령스런 세상 갈라놓았네.

들보를 아래로 던지니, 자라 등의 세 산이 자리하여 극을 세웠네. 기이한 나무와 바람에 흰 안개가 걷히니, 선계 유람 찾아오는 이 금함이 없네.

삼가 바라건대, 상량한 뒤에는 이 정자가 영원히 보전되고 신선 세계가 막힘이 없기를.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버려져 도를 완미하며 곡식을 끊고 신선초를 먹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능히 가벼이 발걸음을 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겠는가. 세속에서 멀리 몸을 맡기고 아득히 깊은 곳을 찾아 서신을 싣고 신과 통함이 없는 사람이라면 어찌 요원한 상상을 하여 그곳을 보존하려 하겠는가. 긴 줄기의 선인장이 서 있어, 구름 끝의 맑은 이슬을 받네. 선약(仙藥)을 가루 내어 아침 식사를 하니, 반드시 타고난 본성을 연장할 수 있으리라. 옛날 장수한 신선 적송자(赤松子)와 왕자교(王子喬)를 찬미하며, 천로에서 선인 선문자고(羨門子高)를 찾네. 승천하는 용이 호수에서 오르기를 생각하니, 어찌 시속을 족히 사모하리.

 

檀紀 四三○九(서기 1976)年 丙辰 九月  日

 

光山 金貴鉉 記(광산인 김귀현 짓다.)

 

[注] 금우도(金牛道) : 전국 시대 나라 惠文公을 치려고 했으나 길을 알지 못하므로 돌을 깎아 다섯 마리의 소를 만들어서 항문 근처에 금을 넣어 놓고는 이것을 촉도에 갖다 놓았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는 돌소가 금똥을 눈다고 하자, 이 소문을 들은 蜀王1천여 명의 군사와 5명의 力士를 동원하여 成都로 운반해 갔다. 이 때문에 길이 뚫려 나라는 마침내 이 길을 따라 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그러므로 이 길을 金牛道라고 하였다.

 

 

 

 

선유정제방중수기

 

 한국의 8 경이요 국립공원인 지리산 입구 마천면 삼정리 하정 석문 도원경에 뜻있는 동지의 협찬으로 선유정을 창건하였나니 기 산고수려하고 기암괴석이 준엄하여 송풍생슬하고 청계주곡은 수많은 관광객의 절찬을 받는 유일의 휴식지 이온 바 그 자연경관을 매년 거듭하는 풍수해로부터 길이 보호해야 한다는 간점에서 본군 군수 여주환(呂鉒煥)씨 본면 면장 임현철(林顯哲) 씨의 특별한 배려로 막대한 군비를 투입하여 정자 주변 일대의 제방을 구축하였으니 이 뜻깊은 백년대계 사업의 공적을 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이에 각현하였노라.

 

1980년 경인 1월   일

 

선유정계원 일동

 

 

 

▼ 영원사(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953번지)

 

 

 

▼ 도솔암(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954번지)

 

 

 

▼ 황석산 봉전산막

 

봉전산방

 

▼ 축령산 휴휴산방(전남 장성군 서삼면 추암리 707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