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점필재의 아홉모랭이길로 청이당 가는 길(220114~0115)

도솔산인 2022. 1. 15. 19:39

점필재의 아홉모랭이길로 청이당 가는 길(220114~0115)

 

 

▣ 일 시 : 2022년 01월 14일(금)~15일(토)

▣ 코 스 : 송대-선녀굴-의논대-노장대-고열암-일강-미타봉-향로봉-방장문-청이당-방장문-석상용장군묘-광점동

▣ 인 원 : 2명(와일드지리산님)

▣ 날 씨 : 영하 5도(맑음)

 

 

 본래는 눈이 내린 영랑대에 가려고 했지만, 방향을 바꿔 미타봉으로 향했다. 송대마을 박영남 할머니 댁에서 오미자차 한 잔을 마시고 점심때가 다되어 출발하였다. 배낭 무게 16kg, 이제는 극지용 침낭(2.4kg) 대신 940g 간절기용으로 겨울을 난다. 그 흔한 에어매트도 우모복도 없다. 모자가 달린 콜핑 패딩 하나가 여벌 옷의 전부이다. 취사도구도 코펠 하나뿐이다. 버닝칸 배낭을 메면 중량이 15kg 이내가 된다. 그래도 폼을 잡아보겠다고 그레고리 데날리 신형이다. 등산화는 눈도 없는데, 라스포티바 네팔 큐브를 신었다. 1년을 신지 않으면 밑창이 떨어지기때문이다. 박산행의 급수는 배낭의 중량에 따라 달라진다. 무거울수록 중량급이다.

 

  지난 신년 산행에서 일행들과 재미로 산행 등급의 고수, 중수, 하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하수에 대해 잠정적인 정리를 하였다. 하수의 삼요소는 ① 빨리 달리는 사람, 등산화가 산행을 한다. ② 시그널을 다는 사람, 개인정보와 흔적을 흘리고 다닌다. ③ 사진을 찍는 사람, 일몰과 일출에 집착한다. 새해 첫날 지리산 일출을 폰에 담지 않는 사람이 최고수라는 결론을 얻었다. 나는 ②번과 ③번의 항목에 해당된다.

 

  구롱길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는 무궁무진하다. 구롱길을 구롱길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미타봉을 미타봉이라고 부르지 못한다. 향로봉(상내봉)은 아예 입을 봉금(封噤)했다. 구롱길은 반들반들한데 산행기를 남기면 역린(逆鱗)이 된다. 《김종직의 유두록탐구》의 구롱길과 코스가 다르기 때문이다. 상내봉을 미타봉이라고 하면 경기(驚氣)를 한다고 들었다. 아직도 지리산 인문학을 울궈 먹으며 공명을 탐한다. 지리산깨나 다녔다는 사람들이 좌고우면하면서 눈치를 본다. 엉겅퀴님은 구롱길을 여러 번 답사한 사실이 알려지자,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들에게는 보은의 글을, 상내봉에 대해서는 본질을 흐리는 글을 남긴 듯하다. 선수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데, 검둥개가 돼지편을 든다.

 

 

 

隱屛岩 姜時永(위치 :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1204번지)

 

1. 송대 계곡 옛 마을터 은병암(隱屛岩) 석각

 

  은병암(隱屛岩)은 중국산이다. 주자(朱子, 1130~1200)의 이름은 희(熹), 자는 원회(元晦), 호는 회암(晦庵)이다. 중국 송대의 유학자로 주자학을 집대성하였다. 54살 되던 1183년에 무이구곡(武夷九曲) 중 다섯 번째 구비에 해당하는 은병암(隱屛) 밑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세우고 제자를 가르쳤다. 그가 터를 잡고 신진들을 가르친 무이구곡(武夷九曲)은 예전부터 중국에서 신선이 살았던 곳으로 이름난 명승지이다. 중국 복건성 숭안현에 있다. 강시영(姜時永)이라는 인물이 은병암 아래 초막을 짓고 독서하였던 곳으로 추정된다. 송대 마을에 진주 강씨 소유의 토지가 많이 남아있다. 은병대의 필획 강시영(姜時永)과 동일 인물인지는 추가 조사와 문헌(진주강씨 세보)의 확인이 필요하다.

 

  ※ 강시영[姜時永, 1788년(정조 12)-미상)] :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여량(汝亮, 汝良)이다. 1819년(순조 19)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수찬을 지내고, 1829년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으로 정사 이광문(李光文)과 부사 한기유(韓耆裕)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8년(헌종 4) 부수찬을 거쳐 1843년 충청도관찰사, 1846년 행호군(行護軍), 1848년 한성부판윤·형조판서, 1854년(철종 5) 대사헌을 지냈으며, 1859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1866년(고종 3) 조대비가 수렴 섭정(垂簾攝政)을 철회하고,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아 인사배치를 할 때 남인으로 기용되어 홍문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로 승진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선녀굴
의논대
독녀암(노장대)
곽재용 교수님이 보내온 사진을 현장에서 확인하였다.

 

2. 함양독바위는 독녀암(노장대)이다.

 

  함양독바위는 근래에 호사가들이 고증 없이 임의로 붙인 이름이다. 어떤 연유에서 붙인 이름인지는 모르겠다. 이 바위에 오르면 함양 읍내가 보인다. 그래서 함양독바위라고 했다는 주장이다.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는 독녀암(獨女巖)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말 마적동에 은거했던 적은(跡隱강지주(姜趾周, 1856~1939)의 〈세진대기(洗塵臺記)〉와 문정동에 살았던 강계형(姜桂馨, 1875-1936)의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노장대(老將臺)라고 하였다.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서는 상투바위라고 한다. 독녀암은 상대날등에서 바라보면 하늘로 올라가는 여인의 형상이다. 진주교대 곽재용 교수님이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을 담은 위치에 서니 바위가 영락없는 독녀의 형상이다.

 

 

상대날등에서 바라본 독녀암(노장대)

 

 

가.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독녀암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암(獨女巖)이라는 바위 다섯 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자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바위 중턱에 잣나무가 서 있는데, 그 바위를 올라가려면 나무를 건너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 잡고 바위틈을 돌아 등과 배가 바위에 부딪힌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니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었는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숙하게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다. 지금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이 송연하여 정신이 멍하고 내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나. 강지주(姜趾周, 1856~1909)의 〈세진대기(洗塵臺記)

 

  방장산은 바다 가운데 삼산의 하나로 크고 깊고 넓기가 인간 세상에서 으뜸이다. 거기서 가장 높은 곳을 천왕봉이라 하며, 천왕봉에서 시작된 높고 가파른 산이 동쪽으로 우뚝 솟아 노장대(老將臺)가 되었고, 그 한 가지가 다시 북쪽으로 십여 리를 달려 불룩하게 솟았으니 각산(角山)‧배산(背山)이라 한다. 마을이 있고 마적동(馬跡洞)이라 하는데 내가 사는 곳이다.

 

다. 강계형(姜桂馨, 1875-1936)의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

 

  봉우리(향로봉)에서 곧장 뻗어 내린 것은 노장대(老將臺)(*독바위)가 되었고, 노장대(老將臺)의 왼편 어깨에서 한 줄기가 서쪽으로 거슬러 나아가 문필봉(*솔봉)이 되었으며, 그것은 문수사의 주봉을 이루고 문헌동의 바깥 안산(案山)이 되었다. 노장대(老將臺)의 가운데 줄기는 비스듬히 ○里쯤을 나아가서는 굽이돌아 북쪽으로 나아가 문헌동의 안산인 채봉(釵峯 *비녀봉. 양화대 정남의 524m봉)이 되었고, 얼굴을 내밀고 머리를 드리워 양화대를 안으로 감싸는 형세[砂]가 되었다. 노장대(老將臺)의 오른편 옆구리에서 흩어져 내린 여러 줄기는 봉우리와 봉우리가 중첩되고 지맥(*곁다리)이 널리 퍼져 물을 거슬러 서쪽으로 나아가 양화대를 바깥에서 감싸는 형세가 되었다.(국역 : 이재구 선생)

 

 

3. 독녀암(노장대)의 또 다른 이름 독녀성(獨女城)

 

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제31권 경상도, 산음현〉

 

  【고적】 개품부곡(皆品部曲) 다른 이름은 장계(長溪)이다. 현 서북쪽 25리 지점에 있으며 옛날에는 단계(丹溪)에 예속되었던 것이다. 송곡소(松谷所) 현 북쪽 13리 지점에 있다. 고산성(古山城) 현 남쪽 2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가 천 3백 46척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독녀성(獨女城) 현 서쪽 27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가 천 7백30척이고, 시냇물과 샘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別集 제17권 〈변어전고(邊圉典故)〉의 폐지된 산성

 

   산음 고산성 :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독녀성(獨女城) : 현의 남쪽 27리에 있다.

 

다. 山陰十二詠 중 제8수 獨女尋仙[독녀암에서 신선을 찾다.]

 

烏石岡西有石城址 俗稱獨女岩 古有獨女 鍊道冲空

[오석강(烏石岡) 서쪽 석성터가 있는데 속칭 독녀암이다. 옛날 독녀가 도를 연마하여 하늘로 올라갔다.]

 

                               어득강(魚得江, 1470~1550)

 

三峯森戟削 : 세 봉우리 창을 깎은 듯 뾰족한데

獨女露城稜 : 독녀암이 성곽 모서리를 드러냈네.

日日樓中望 : 날마다 누각 안에서 바라보았으니

躋攀記我曾 : 올라가면 일찍이 나를 기억하리라.

 

注 어득강(魚得江, 1470~1550) : 조선 전기의 문신. 독녀심선(獨女尋仙) : 『관포선생시집(灌圃先生詩集)』의 山陰十二詠 중 제8수이다.

 

 

라. 산음팔영(山陰八詠) 중 제 7수 獨女尋仙[독녀암에서 신선을 찾다.]

 

                               이민구(李敏求, 1589~1670)

 

獨女最高峯 : 가장 높은 봉우리 독녀암은

蒼蒼但煙霧 : 푸르고 푸르러 연무만 자욱하네.

寧知果州仙 : 어찌 알랴 과주의 신선

不在鍊丹處 : 단약 굽는 곳에 있지 않음을.

 

 이민구(李敏求, 1589~1670) : 조선시대 부제학, 대사성, 도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시(子時), 호는 동주(東州)·관해(觀海)로 지봉유설을 지은 이수광(李晬光, 1563~1628)의 아들이다. 독녀심선(獨女尋仙)은 『東州先生前集』 卷之三 「嶺南錄」에 나오는 산음팔영(山陰八詠) 중 제 7수이다. 과주선(果州仙) : 당나라 때 과주(果州)에 살았던 여자 신선 謝自然(사자연)을 가리킨다.

 

  이민구(李敏求)의 '독녀심선(獨女尋仙)' 3구에 '과주선(果州仙)'이 나오는데, 독녀암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시어에 나오는 과주선(果州仙)은 당나라 정원(貞元) 연간에 과주(果州)에 살았던 여도사(女道士) 사자연(謝自然)을 가리킨다. 그녀는 본래 과주(果州) 남충현(南充縣)의 한녀(寒女)였다. 『촉중광기(蜀中廣記)』 권28 「광안주(廣安州)」에 "당나라 정원 10년 갑술년에 과주의 여자 사자연이 대낮에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자사 이견(李堅)이 장계로 보고하였다. [唐貞元十年. 歲在甲戌 果州女子謝自然 白日昇仙 刺史李堅以狀聞]"라는 고사에서 독녀암이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열암
고열암
미타봉 일강샘(케른에서 50m)
일강바위(아기를 안고있는 여인의 형상이다.)
보현보살의 코끼리 바위
소림선방(소림굴)
향로 형상의 바위(오뚝이바위)

 

 

4. 문헌에 나오는 미타봉과 향로봉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미타봉과 향로봉에 대한 기록이 있다. "나 혼자 지팡이를 짚고 삼반석(三盤石)에 올랐다.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발 아래 있었다."라는 문제의 문구이다. 유두류록에 있어서 유일한 오류로 보인다. 안내한 승려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적은 듯하다. 결과적으로 점필재의 기록은 혼란을 주고 있다. 안개비 내리는 안개낀 어느날 오후 오뚝이 바위가 내 눈에 향로의 형상으로 보였다. 송대에서 바라보면 와불의 가슴에 위치한다. 현재 지리산길 지도의 상내봉은 송대마을 박영남 할머니의 이야기를 따른 것이다. 그래서 미타봉이 교주고슬(膠柱鼓瑟) 상내봉(향로봉)이 되었다. 이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오류를 인정하고 수정하는 것도 실력이다.

 

 

 

  고열암 터 아래 의논대에서 정면(직선 거리 600m)으로 보이는 미타봉(彌陀峰, 1164.9m)의 송대 마을 쪽에 석굴이 있다. 석실 내부에 바닥을 평탄(平坦)하게 하기 위해 축대를 쌓았다. 그리고 상 허리길이 고열암에서 미타봉으로 연결이 되는데, 삼열암의 승려들이 이 길로 왕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강계형(姜桂馨, 1875-1936)의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에 향로봉(香爐峰)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있다. 또한 동시대에 의탄 의중마을에 살았던 탄수(灘叟) 이종식(李鐘植, 1871~1945)의 〈탄수 이종식 선생 비결명문논집〉에는 상로봉(霜老峰)으로 기록하고 있다, 향로봉(香爐峰)을 경상도 방언으로 상내봉이라고 한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상내봉은 경상도 사투리에서 향로봉의 구개음화 현상이다. 와불 형상을 한 불두(佛頭)에서 발끝까지 전체가 와불산이다. 와불산의 주봉인 1213.9m봉이 향로봉(상로봉, 상내봉), 불두의 형상인 1164.9m 봉이 미타봉이다. 소림굴(선방)은 미타봉의 부처님 입속에 있다.

 

 

가. 1472년 김종직(金宗直)유두류록과 기행시 의논대(議論臺

 

○ 1472년 8월 14일 서쪽 능선을 따라 조금 가서 고열암(古涅庵)에 다다르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의론대(議論臺)가 서쪽 봉우리에 있었다. 유호인 등이 뒤에 처져 있어 나 혼자 지팡이를 짚고 삼반석(三盤石)에 올랐다.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발 아래 있었다. 

 

의논대(議論臺) - 김종직(金宗直, 1431~1492)

 

兩箇胡僧衲半肩 : 참선승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선방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서 홀로 서 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 가득 천풍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 하네.

 

 

나. 강계형(姜桂馨, 1875-1936)의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

 

산의 여세가 잘게 나눠지고 흩어져 천 봉우리 만 골짜기가 되었고, 힘을 쏟아 큰 줄기가 되어 멀리 아득히 치달리고 뛰어 올라 그 기교를 다하였다. 사립재에 이르렀다가 향로봉(*지금의 상내봉 3거리 옆 봉우리인 듯)이 되었고 정수를 뽑아 우뚝 솟았으니, 이는 군 남쪽 엄천 남녘의 조산(祖山)이 된다.(이재구 선생 譯)

 

 

다. 이종식(李鐘植, 1871~1945)의 비결명문 논집 

 

金鷄避亂豫標點 : 금계가 피난처라고 미리 표점하니 

一姓一步遠傳昊 : 한 성씨 한 걸음씩 널리 전해졌네.

同胞戰亂自足殺 : 동포들은 전란에서 스스로 죽일 수 있다고

灘叟未來秘訣布 : 탄수 공이 앞으로의 일을 비결로 퍼트렸네.

晨明早日霜老峯 : 동이 트면 해가 일찍 뜨는 상로봉

陽色眺會避難處 : 양기가 빠르게 모여드는 피난처네.

洞民功德追尊碑 : 동민들은 추존비를 세워 공덕을 기리고

灘叟創始金鷄洞 : 탄수 공은 이곳에 금계동을 창시하였네

 

김종직의 '의논대' 시 2구에 나오는 문제의 '소림선방'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다. 그동안 의논대 시를 읽으며 막연하게 '바위 사이 한 곳'을 부처님 얼굴의 바위 사이라고 생각했다. 유두류기행시 의논대를 처음 읽은 것은 두류님(지리산 마실 조용섭님) 블로그에서 2006년 쯤이다. 2020년 3월 28일 석굴을 찾았고, 직접 석굴 내부로 들어가 확인을 하였다. 미타봉에 일부 남아 있는 담장 석축은 수행하는 공간에 외부인의 접근을 막는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한다. 미타봉은 아미타불(Amitabha, 阿彌陀佛)의 형상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미타봉의 석실은 아미타불이 되기 위한 참선승(胡僧)들의 수행 공간으로, 김종직의 유두류기행시 '의논대'에서 '소림선방'의 시어로 표현하고 있다. '소림굴'은 중국 숭산(崇山)의 소림사(小林寺)에 있는 한 동굴로 달마대사(達磨大師)가 9년간 면벽참선 수행을 했다는 소림굴(小林窟)을 말한다. 고열암에서는 허리길로 연결이 되고 선녀굴에서 올라오는 길도 있다. 소림선방은 나의 주관적인 해석이다.

 

☞ 아미타불(Amitabha, 阿彌陀佛) : 서방정토에 머물면서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부처다. 다섯 구원불 가운데 하나로 '무한한 수명'이라는 뜻을 가졌다. 아미타불을 믿고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모두 정토에 태어나 복을 누리며 산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아미타불 신앙으로 650년경부터 중국에서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한국에는 선덕여왕 때 자장이 〈아미타경소〉를 계기로 정토신앙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불교신앙의 일반적인 형태로 정착되었다. 동의어 무량광불(無量光佛), 무량수불(無量壽佛) 출처 : 다음 백과

 

 

와일드지리산 백감독님이 석각의 흔적을 확인하고 폰에 담고 있다.

 

5. 바위 한가운데 이름을 새겼다.(題名于巖腹)

 

내가 지팡이로 계곡의 돌을 두드리면서 유극기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아,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隱遁)하기를 기약하고 이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고는, 그에게 바위의 한가운데에 이끼를 긁어내고 이름을 쓰도록(새기게) 하였다.〈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또 하나는 점필재의 유두류록에 '유극기로 하여금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 한가운데에 이름을 새기게 하였다.(使之刮苔蘚。題名于巖腹)'라는 문구이다. 국역본마다 해석이 다른데, 내 생각은 '유극기로 하여금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의 전면(복판 腹板)에 이름을 새기게 하였다.'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그러나 석각을 새겼다고 해도 550년의 오랜 세월에 풍화되어 남아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세 모롱이 사립재 갈림길을 지나 네 모롱이 초입에 짐작이 가는 바위가 있다. 내 눈에는 석각의 흔적이 보인다.

 

 

집터(주막터)
점필재길 아홉 모랭이 주막터(1968년까지 이곳에 주막이 있었다고 함)

 

6. 진주독바위 아래 문바위골의 주막터

 

이곳은 실제로 주막터였다. 광점동에 살았던 故 이봉덕(대략 51년생)씨 선대부터 1968년까지 이곳에서 주막을 운영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골짜기마다 화전민들이 많이 살았다. 이 집터는 천왕봉을 오르는 아홉 모롱이 길과 얼음터에서 새재로 넘어가는 교차점 4거리에 위치해 있다. 1968년 김신조와 울진 삼척 무장공비 사태로 화전민이 소개되면서 정부에서 화전민들에게 벽송사 입구에 주택을 지어주었다. 지금도 그 집들이 남아있다.(조사자 : 문호성 회장님)

 

 

☞ [조용헌 살롱] [1247] 지리산 형제봉 주막... 아홉모랭이 사거리 주막터'

 

지리산 동북부의 산청군 유평리 새재 마을. 여기도 해발 700~800m는 된다. 새재에서 출발하여 함양군 마천 추성리로 넘어가는 산길도 대략 40리가 넘는다. 1000m가 넘는 고갯길을 넘어야 한다. 중간에 옛날 주막집 터가 하나 있었다. '아홉 모랭이 사거리 주막터'이다. 해발 1100m 높이. 옛날에는 이 지점이 사거리로 불렸다니 흥미롭기만 하다. 그만큼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는 이야기 아닌가. 지금은 빈터의 녹색 신록 속에서 온통 새소리와 계곡 물소리만 들린다. 주막집이 아니라 신선이 거처했던 곳 같은 정취이다. 여기에서 1시간 정도 숲길을 더 걸어가니 청이당 터가 나온다. 여기는 물이 많아서 주막에서 샤워를 하고 탁족을 하기가 좋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고 계곡 물소리만 들린다. [조선일보 2020.06.01]

 

 

일곱모랭이
방장문
방장문 석각

 

 

7. 천왕봉을 오르는 관문 방장문(方丈門)

 

방장문을 찾은 것은 하늘바위 김자준님이고 방장문 석각을 발견한 분은 지리산국립공원 조봉근 팀장이다. 방장문 석각을 찾기 전까지는 구롱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 조봉근 주무관은 완폭대와 은정대 석각을 찾았고, 최근에는 벽소령에서 봉산정계 석각을 발견하였다. 구롱길은 청이당에서 사립재골로 구롱길을 역으로 찾아들어갔다. 지형도와 인공위성 지도를 보고 답사전에 예상로를 미리 그리고, 숯가마터와 샘터, 돌포장과 이정목, 집터를 이어나갔다. 방장문의 석각의 발견은 아홉모랭이 길의 마침표가 되었다. 나는 오룩스맵을 사용할 줄 모른다.

 

- 일   시 : 2020년 5월 16일(토) 12:00경

- 장   소 :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구롱 길 중 여덟 모롱이)

- 좌   표 : E 127.741100, N 35.378400 고도, 1,097m

- 답사자 : 8명(조용헌 박사 외 역사문화조사단 7명)

 

 

가. 방장문(方丈門)에서 丈(장)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구롱길 여덟 모롱이에 있는 석각 방장문(方丈門)에서 丈(장)의 오른쪽 상단에 丶(점주)가 더해진 글자는 이체자이다. 서예대자전에서 명나라 때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의 행서와 서자불명(書者不明)의 예서에 보인다. 

 

나. 方丈의 어휘에 대한 문헌의 기록

 

1)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 본기〉

시황 28년(기원전 219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미 일을 마치자 제나라 사람 서불(徐市) 등이 글을 올려 ‘바다 가운데에 삼신산三神山이 있는데 그 이름이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이고 신선들이 거처한다’며 재계齋戒하고 동남동녀들과 함께 이를 구하길 청했다. 이에 서불을 보내 동남동녀 수천 명을 선발해 바다로 들어가 신선을 찾게 했다."

 

☞ 徐市(徐福) : 중국 진(秦)나라 때의 사람(?~?). 진시황의 명으로 동남(童男), 동녀(童女) 3천 명을 데리고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러 바다 끝 신산(神山)으로 배를 타고 떠났으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 · 봉래산(蓬萊山)은 금강산, 방장산(方丈山)은 지리산, 영주산(瀛洲山)은 한라산을 가리킴.

 

2)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지리지〉

"杜甫詩所謂方丈三韓外註及《通鑑輯覽》云: "方丈在帶方郡之南。是也。(두보의 시에서 말한 '방장산은 삼한 외지에 있다'라는 구절과 《통감집람》의 '방장산은 대방군의 남쪽에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3)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五山說林)》

"杜詩有方丈三韓外之句。說者以爲三神山皆在我國。方丈卽智異山。瀛洲卽漢挐山。蓬萊卽金剛山也。"(두보의 시에 있는 '방장은 삼한의 외지에 있다'는 구절을 해설하는 사람들은 '삼신산은 모두 우리나라(조선)에 있다. 방장산은 지리산이며, 영주산은 한라산, 봉래산은 금강산이다.'라고 한다.)"

 

 

다. 방장문 석각의 필획과 시기

 

1) 1923년 개벽 제34호 지리산보(1923.04.01)

함양 군수 민인호가 함양명승고적보존회(보승회)를 조직하여 동군 유지 강위수(姜渭秀)는 등산객들의 편리를 위하여 天王峯에 망해정(望海亭)을 짓고, 박노익(朴魯翊)과 영원사승(靈源寺僧) 일동은 제석당(帝釋堂)을 건축하였으며, 이진우(李璡雨)와 벽송사승(碧松寺僧) 일동은 마암당(馬岩堂)을 건축 하였는데 두 곳이 모두 중봉이다.(兩處는 皆 中峯)

 

2)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

종자들이 말하기를, “전에 산에 오른 자들은 관을 벗고 나무를 끌어안고 바위를 끼고 간신히 나아갔는데 지금은 보존사(保存社 *함양명승고적보존회)의 힘으로 산아래 사람을 시켜 벌목을 하고 험한 곳을 고르게 한 덕분에 이 앞까지는 평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또 유산자들의 노숙을 생각하여 마암과 상봉 및 제석당 등지에 판옥(板屋)을 세우고 풍우를 가리게 하였으니 혜택이 유산인에게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 출처 : 지리99 이재구님

 

3) 방장문 석각의 필획과 시기

① 書者不明, 석각 시기 미상, 석각의 상태가 깊고 양호함.

② 방장문(方丈門)에서 丈(장)의 오른쪽 상단에 丶(점주)가 더해진 이체자.(왕양명 체)

③ 1922년 함양명승고적보존회에서 마암과 같은 시기에 李璡雨(1897~1954) 선생이 새긴 것으로 추정함.

 

☞ 李璡雨(1897~1954) : 본관은 경주 자는 성유(性悠) 호는 은계(隱溪) 마천면 의탄리 의중마을 출신. 천석꾼의 부호. 의탄초등학교를 설립하는데 재산을 희사함. 1922년 함양명승고적보존회에서 이진우와 벽송사 僧이 마암에 마암당을 건축하고 벽송사에서 마암까지 등산로를 정비함. 도계공원에 마천면민이 세운 송덕비가 있음.

 

 

 

8. 고문헌에 나오는 쑥밭재의 어원

가. 고문헌에 나타난 쑥밭재의 명칭

 

쑥밭재의 명칭은 1871년 배찬의 유듀류록에는 애현(艾峴), 1877년 박치복 남유기행과 허유의 두류록, 1937년 김학수의 유방장산기행에는 애전령(艾田嶺), 1887년 정재규의 두류록과 1956년 함양군지에는 봉전령(蓬田嶺)으로 1933년 석전(石顚) 박한영의 석전사문에는 봉전치(蓬田峙)로 나타난다. 애현, 애전령, 봉전령, 봉전치는 쑥밭재를 한역한 명칭이나 쑥과는 연관이 없는 듯하다. 쑥은 1,000m가 넘는 고지대에서 자라지 않는다. 

 

 

쑥밭재/애전령(艾田嶺)

 

 

나. 쑥밭재, 일명 애전령(艾田嶺), 초령(草嶺)

 

경남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쑥밭의 '쑥'은 원시어소 [슬/sur]의 변이음이고 '밭'은 [불/bru]의 변이음이다. 기슭을 가리키는 [슬/sur]도 대광상고(大廣上高)의 뜻을 지니고 있다. '쑥밭재'는 크고 높은 뜻의 지명이다. 초령(草嶺)의 한자 草는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새(사이/사)]음을 차자(借字)할 때 많이 썼는데. [풀/불/블] 음을 차자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여지도 있어 일단 설명을 보류한다.

 

출처 : 슭마노르님의 블로그 [슭/sur] 유전자가 들어있는 지명 : http://blog.daum.net/pance73/10068

 

 

천례탕

 

 

9.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에 나오는 천례탕

 

청이당→천녀당→천례탕은 천예당(天禮堂, 하늘에 제사지내는 집)과 같은 의미인 듯하다. 禮(례)는 귀신(示)+豆(제기)+曲(제기에 담은 음식)으로 二(上=)는 하늘(天)을 뜻하고 小는 해와 달과 별로 천신(天神)을 상징한다. 豊는 제기에 제사음식을 차려 놓은 굽높은그릇례(풍성할풍)이다. 결국 청이당은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전쟁의 승리,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신성한 장소를 의미한다. 제(祭) 또한 고기(月=肉)을 신(示)에게 바치는(又 오른손우) 제례 의식을 표현한 한자이다. 강호의 동양학자 조용헌 교수는 청이당을 화랑들이 하늘에 제를 지낸 곳으로 추정한다.

○ 1924년 8월 18일(송대 출발)점점 앞으로 쑥밭재(艾峴애현)로 나아가는데 길은 왼쪽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향했으며 산기슭을 넘자 천례탕(天禮碭 *하늘에 제사지내는 바위)이었다.(漸漸前進置艾峴 路於左便而取右 路踰麓 則天禮碭也) [출처 지리99, 국역 이재구 선생]

 

 

청이당터 석축
청이당터
김종직이 쉬어간 청이당터 앞 계석(溪石)

 

10. 淸伊堂(청이당)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

 

청이당에 대한 유람록의 기록은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과 1611년 유몽인 선생의 〈유두류산록〉에 청이당(淸伊堂)과 청이당(淸夷堂)으로, 1871년 배찬 선생의 〈유두류록〉에는 천녀당(天女堂)으로 기록하고 있다. 1472년 김종직 선생이 쉬어간 계석은 청이당터 석축 앞 약 20m 지점에 위치해 있고, 1711년 배찬 선생은 이곳에서 '계곡 옆의 바위 위(澗邊石上)에 빙 둘러 앉아서 밥을 먹었다' 라고 한 장소는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 선답자들이 추정하는 청이당터(숙밭재 아래 평평한 곳)는 이곳에서 약100m 아래에 있다. 물이 범람하는 곳에 당집이 있었다는 황당한 주장이다. 특이한 사항은 군계능선이 동부능선이 아니고 하봉 옛길이 산청과 함양의 경계이다. 청이당 터는 행정구역상 함양 땅이다.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100번지이다. 청이당은 함양 사람이 운영했던 당집이다. 〈〉

 

 

가.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 1472년 8월 15일,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시내 바위(위에서)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抵淸伊堂 以板爲屋 四人各占堂前溪石上 小憩 )

 

注 占堂 : 청이당

 

나.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 1611년 4월 4일, 계유일. 새벽에 길을 떠나 옹암(甕巖)을 지나 청이당(淸夷堂)에 들어갔다. 숲을 헤치고 돌무더기를 가로질러 영랑대(永郞臺)에 이르렀다.(癸酉 侵晨而行掠甕巖 入淸夷堂 穿森木亂石叢 至永郎臺)

 

다. 1871년 배찬의 〈유두류록

 

○ 1871년 9월 5일, 산마루 위에서 잠시 쉬었다가 애현(艾峴)을 지나 천녀당평전(天女堂平田)에 이르렀다. 시종(侍從)들이 점심을 내와서 마침내 모두 계곡 옆의 바위 위에 빙 둘러 앉아서 각자 바가지 그릇을 잡고 나무를 꺾어 젓가락을 만들어 밥을 먹으니 배고픔을 면할 만하였다. 각자 평전의 ‘전(田)’ 자를 끄집어내어 시 한 수씩을 읊었다.(小憇于嶺上 過艾峴 到天女堂平田 從者進午飯 遂環坐於澗邊石上 各執匏器 折木爲匙 足爲免飢 各吟一律拈平田之田字)

 

라.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

○ 1924년 8월 18일(송대 출발) 점점 앞으로 쑥밭재[艾峴애현]로 나아가는데 길은 왼쪽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향했으며 산기슭을 넘자 천례탕(天禮碭 *하늘에 제사지내는 바위)이었다. (漸漸前進置艾峴 路於左便而取右 路踰麓 則天禮碭也)[출처 지리99, 국역 이재구 선생]

 

* 참고자료 :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선인들의 지리산 기행시(최석기외)

 

 

 

 

11. 의병장석상용지송공비(義兵將石祥龍之頌功碑)

 

해주석씨세보

 

소재지 :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 6번지 두류암(頭流巖)

행적자 : 의병장 석상용  연대 : 일제강점기   입석시기 : 1921년 1월 10일 세움

[개요]

일체 치하에서 그의 셋째 아우 채용(彩龍)씨가 대담하게도 장군의 공을 기린 33자의 글을 써서 비를 세웠다.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의병활동 공적비는 전국에서 하나뿐이라고 史學家들은 말하고 있다.

 

의병장 석상용지송공비

 

공의 자는 용견(龍見)이다. 세칭 비호장군이라 칭한다. 장군은 용기와 힘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 국가가 위망(危亡)에 처한 것을 보고서, 지리산 중에서 의병(義旅)을 일으켜 왜병을 참(斬)한 것이 매우 많았다. 마침내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5년이 지난 후 석방되어 돌아왔다. 이로 인하여 질병의 고통으로 수년 동안 고생하다가 마침내 庚申(1920)년 10월 분한 마음을 품고 별세하였다. 辛酉(1921)년 정월 초 10일에 세우다.

 

義兵將 石祥龍之頌功碑

 

公字龍見 世稱飛虎將軍 勇力絶人 見國家危亡 起義旅于智異山中 斬倭兵甚多 竟被日憲投獄 經五年放還 因此疾痛 數年辛艱 庚申十月 含憤而別世 辛酉正月初十日竪

 

 

☞ 석상용(石詳龍, 1870~1920) : 공(公)의 관향은 해주(海州), 휘는 상용(詳龍), 아명(兒名)과 자(字)는 용견(龍見)이다. 1870(庚午)년 10월 29일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에서 부친 준옥(俊玉) 공과 모친 강화노씨(江華魯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 준옥(俊玉) 공은 통사랑(通士郞)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 벼슬을 하였고, 가산(家産)은 천석군 부자집이었다.

 

일본은 1907년 강제로 정미 7 조약을 맺고 조선 관군을 해산시키고 일본군이 전국 각지에 주둔하고 있었다. 실상사에 주둔하고 있던 왜병을 석상용(石祥龍) 장군이 의병과 화전민을 규합하여 1908년 음력 3월 그믐 어두움을 타고 기습하였고, 지리산을 은신처로 하며 쑥밭재 전투, 벽소령 전투, 성삼재 등에서 기습작전을 하였다. 1912년 일본군에게 잡혀 5년간 수형 옥고를 치르고 고문의 여독(餘毒)으로 고생하다가 50세의 아까운 나이로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