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휴정(休靜) 서산대사의 유허지 三철굴암을 찾아서

도솔산인 2021. 12. 27. 00:15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유허지 三철굴암을 찾아서

 

 

▣ 일 시 : 2021년 12월 26일(일)

▣ 코 스 : 용화정사-중철굴암-상철굴암-파란움막터-만국기터-도덕봉-의신

▣ 인 원 : 3명(曺교수님, 지리산마실 양민호님)

▣ 날 씨 : 맑음(영하14도)

 

 

  불교에 까막눈이 삼철굴암을 두 번 다녀오고, 뭔가 있나 싶어서 다시 3차 답사를 하였다. 절집에 대한 인연은 86년 대전 동구 가오동에 있는 자광사 실내 공사를 하였다. 대학에서 대불련 활동을 하였던 집사람이 대학을 갓 졸업하고 잠시 절집에 와있었다. 절에서 만난 인연으로 결혼을 하였다. 그런 연유로 절에 몇 년을 다녔지만 초파일에 등이나 켜는 사이비 불자였다. 그것도 오래되지 않아 발길을 끊었으니, 물고기를 얻고 통발의 고마움을 잊은 격이다. 필자는 그동안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암자터 몇 곳을 둘러본 것이 전부이다. 별로 아는 것이 없고 폐사지에 문외한이다. 영신암, 지장사, 상류암, 두류암, 서동고암, 묘적암, 중무주, 하무주 등은 유람록의 기록을 좇은 것이지, 본래 암자터를 찾을 목적이 아니었다.

 

「선문강요집(禪門綱要集)」 고려 후기 승려 진정(眞靜) 천책(天頙)이 저술한 불교 교리서이다. 선문강요집(禪門綱要集) 해제(解題)에 '1531년(중종 26) 지리산 철굴암(鐵窟庵)에서 간행된 판본이 전한다.' 해제 말미에 '이 책의 사상은 조선 중기의 고승인 휴정(休靜, 1520~1604)을 비롯하여 19세기의 고승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라는 내용이다. 철굴암에서 간행된 선문강요집(禪門綱要集)의 사상을 서산대사 휴정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철굴암이 있는 계곡의 이름인 철골 또한 철굴암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청허당집(淸虛堂集)에 철굴암(鐵窟庵)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번 답사는 지난번에 이어 의신사에서 용화정사→토굴→중철굴암→상철굴암을 연결하는 것이다. 중철굴암 위에 있는 숯가마터에서 상철굴암 아래 숯가마터까지 다시 확인을 하고 용화정사로 내려섰다. 

 

  칠불사를 중창하신 통광스님(1940~2013)께서 삼철굴암을 복원하고자 노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청허당집에 철굴암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복원하지 못하였고 원통암만 복원했다고 들었다. 진양지에 의신사 주변에 31개의 암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三철굴암과 서산대사 스토리는 기록과 구전의 퍼즐을 맞추면서 리모델링된 이야기인 듯하다. 본래 용화정사터는 논이었다고 한다. 암자터가 후에 논이 되었을 수도 있다. 무속인이 축대를 쌓고 창고로 허가를 내어 건축을 한 후 용화정사라는 간판을 달았지만, 국립공원에서 행정 처벌받아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현재는 거주하는 사람이 없고 폐가가 되었다. 폐암자터를 도나캐나 명당터라고 하는 데 그것은 좀 그렇다. 첩첩산중의 척박한 환경에서 최소의 인원이 수행을 하며 생존할 수 있는 작은 공간으로 이해한다. 수행자들에게도 한 글자로 된 집, 방, 물, 불, 장, 술, 국, 밥이 필요했을 것이다. 

 

  용화정사 건물에서 약 50m 정도 진행하면 높은 암벽 아래에 석축을 쌓아 조성된 하철굴암터 추정지가 있다. 이곳에서 더 진행하면 계곡이 나오는데, 계곡의 풍광이 예사스럽지 않다. 삼철굴암 중에서 가장 좋은 여건(與件)이다. 나는 차에 남아 있었고 이번에 동행한 두 분은 하철굴암터를 확인하였다. 어떤 일이든 혼자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없다. 선답한 분들의 자료를 읽었고 참고가 되었다. 한 때 의신사가 번창했고 주변에 암자가 많았다는 것은 하동과 함양의 소금길을 통해 물류가 이동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오리정골과 대성골에 사금광이 있었던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교통의 발달로 소금길은 완전히 사라졌고, 도시에 일자리가 많아지자 사금쟁이들도 떠났다. 다시 말하면 경제력이 없으면 암자도 없어진다. 옛 사람이 떠난 의신동천을 다시 찾아야 할 이유를 남겨 놓고 조용히 내려왔다. 혹한의 날씨에 함께하신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끝.

 

 

注 1. 선문강요집(禪門綱要集) : 고려후기 진정(眞靜) 천책(天頙, 생몰년 미상)이 선문의 핵심 내용을 발췌하여 저술한 교리서. 불교 교리서이다. 1권 1 책, 목판본으로 1531년(중종 26) 지리산 철굴암(鐵窟庵)에서 간행된 판본이 전한다. <중략> 이 책의 사상은 조선 중기의 고승인 휴정(休靜)을 비롯하여 19세기의 고승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2. 천책(天頙) 진정국사(眞靜國師) : 생몰년 미상, 성은 신씨(申氏). 자는 몽저(蒙且). 소년에 급제하여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나, 무상을 느끼고 강진 만덕산(萬德山)백련사(白蓮社)로 출가하여 천태종장(天台宗匠) 원묘국사(圓妙國師)의 제자가 되었다. 원묘국사는 천태종 수행법의 하나인 보현도량(普賢道場)을 창설하고 보현보살의 참회법을 수행하였는데, 그 법을 이어받은 뒤 백련사의 제4세가 되어 천태종풍을 떨쳤다. 만년에는 용혈사(龍穴寺)에 거주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용혈존숙(龍穴尊宿)’이라 불렀다. 시호는 진정국사(眞靜國師)이며, 저서로는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등이 있다. 

 

 

  상··하 철굴암에 대한 최근 기록은 최화수 선생의 지리산 365일이다. 故 최화수 선생이 문헌의 기록을 옮긴 것인지, 구전을 각색한 것인지 아무 말이 없다. 하동의 향토사학자 김동곤 선생의 '화개의 역사II'에 용화정사터를 소철굴암으로 기록하고 있다. 「1907년 초겨울 연곡사에서 일본군의 기습으로 고광순 의병장을 잃고 흩어진 의병들의 일부는 이듬해(1908년)에도 화개동의 의신부락에  거점을 마련하고 계속 활동하였다. <중략> 소철굴암터(용화정사)에 숙영하던 의병들은 들어닥친 일본군에게 화승총으로 대항했으나 달걀로 바위치기였다. 신형무기로 무장한 정예 일본군에 농민·의병들은 적수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형세는 흩어지고 계곡으로 도망치는 의병들은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지금 의신마을에서 원대성 마을로 들어가는 논들 위 도로변에 30여 의병의 원혼이 묻혀있다.」

 

  하동의 김동곤 선생은 하동군지와 화개면지를 집필하신 분이다. 이 자료는 김동곤 선생의 「화개의 역사II」 초고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현재 상·중·하 철굴암 추정터는 판본을 간행할 만한 여건이 안된다. 그렇다면 1531년 선문강요집 목판을 서각하고 판본을 간행한 철굴암은 어디일까. 처음으로 돌아가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지리산 용화정사 철굴암
토굴터A 석축
토굴터A
토굴터A
토굴터B(중철굴암터 추정)
토굴터B 와편
토굴터B 정자(?)
토굴터 B 위 숯가마터
상철굴암터 아래 계곡 건너 숯가마터
상철굴암터
상철굴암터 석축
상철굴암터 전면
상철굴암터 계곡횡단 지점 케른(조박사님)

 

▼ 하철굴암(용화정사)-사진 「지리산마실」 사무국장 양민호님

 

건물 뒷편에 있음.
하철굴암터 석축
하철굴암 추정터 석축
하철굴암터
하철굴암터에서 50여m 길을 따라 들어가면 거대한 바위와 아름다운 계곡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