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김종직의 유두류록 아홉모랭이길과 영랑대

도솔산인 2021. 12. 8. 00:52

김종직의 유두류록 아홉모랭이길과 영랑대 

 

 

▣ 일 시 : 2021년 12월 08일(수)~09일(목)

▣ 코 스 : 광점동-구롱길 일곱모랭이-방장문-청이당-영랑대-쑥밭재-방장문-일강-고열암-은병암-송대마을

▣ 인 원 : 3명

▣ 날 씨 : 맑음(영하 1도)

 

 

  금년 봄 광주의 ○○님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리구구 운영진(?)을 만났는데, 왜 도솔산인과 산행을 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누군지 짐작이 가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나는 함께 산행하는 분들이 있지만 떼산을 좋아하지 않으니 산행 인원은 항상 3~4명으로 제한한다. 개인 산행이기 때문에 산행 후 다음 산행을 기약하지 않는다. 내일을 모르니 늘 오늘이 마지막 산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광주 ○○님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산행기에 동행한 이의 이름을 공개하는 것이 꺼려진다.

 

  세상에 지리구구의 인문산행 공적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지리산의 산행 정보가 목마르던 시절 지리산 인문학 자료를 공유하고, 지속적으로 공급한다는 자체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김종직에 대해서 국사 시간에 배웠던 무갑기을과 부관참시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지리구구가 아니면 김종직의 유두류록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남들이 알아줄 텐데, 자기들의 인문학 업적(業績)을 과장하고 자화자찬하며 당동벌이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더더욱 지리구구가 지리산 인문학에 대한 기득권을 내세우며, 남들이 답사하는 것을 시샘하는 태도는 참으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이다. 다시 말하지만 아무리 공이 있을지라도 지리산은 지리구구 운영진의 산이 아니다. 

 

  금년에만 연초부터 15회 정도 점필재길 답사를 하였다. 구롱길만 정확히 13번이다지난 5월 9일에는 누군가 구롱길 집터(주막터)의 여섯모랭이 초입 케른을 무너뜨려놓아 일행들이 다시 쌓았다. 5월 22일에는 사립재골 아홉모랭이길에서 이재구님과 지리구구 운영진을 만났다. 그동안 산행을 하면서 한 번도 지리구구 운영진을 만난 일이 없다. 그즈음 구롱길을 답사하는 사람들이 길을 놓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6월 7일 확인해보니 집터(주막터)에서 방장문까지 표지기를 모두 떼었더라오비이락이라고 생각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미타봉 아래 일강샘터 초입에 ‘나돌아갈곳' 시그널 뒤에 샘터라고 써서 붙여 놓았다. 꼭대님이 직접 붙인 것인지, 대리 부착 시그널인지 의문이 든다. 남의 시그널을 떼고 자기 시그널을 붙이는 것은 그 사람의 소양(素養)이다.

 

 

박준현씨와 지리산아님(210509)
여섯모랭이에 제거된 표지기(210607)
샘터를 안내하는 차칸 표지기(210606)
나돌아갈곳(210606)


  구롱길에 대해 맨 처음 一丁 민병태 선생이 '등고선 산행'이라는 의견을 냈다. 힌트를 줬지만 당시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 후 구롱길 추정 루트를 지도 밖으로 꺼낸 사람은 이재구 선생과 이용훈(솔레이) 박사이다. 후에 답사를 하고 퍼즐 조각을 맞추어 보니, 비로소 그분들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 구롱길은 아직도 미완성이다. 구롱길이 완성되려면 많은 분들이 답사를 하고, 납득을 하고 공감을 해야 한다. 후답자를 위해 부득이(不得已) 케른을 쌓고 표지기를 붙였다. 지리99처럼 대중들의 관심과 공치사를 받기 위해 복원한 길이 아니다. 관심이 있는 분은 답사를 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나는 그분들의 의견을 귀담아들을 준비가 되어있다. 점필재의 구롱길은 현재 진행형이다.

 

  현재 지리구구의 구롱길과 내가 답사한 길의 유일한 교집합이 집터(주막터)이다. 이 지점에서 사천 ○○팀도 대구 ○○팀, 진주 ○○팀 등 여러 팀이 길을 놓쳤다고 한다. 최근(11.17)에는 광주분들이 모롱이마다 숫자를 써서 붙여놓은 시그널도 누군가 제거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렇게까지 수고할 필요가 있을까. 끝.

 

 

제한정(蹄閑亭, 211207)
방장문
선암I
선암II
청이당터 앞 계석
청이당터
방장문
세모롱이 바위
두모롱이 이정목
코끼리바위
일강바위
일강샘터 초입 케른
일강샘터 초입(211209)
나돌아갈곳(211209)
미타봉 조망터
고열암
노장대(독녀암)
샘터의 확
隱屛巖 姜時永(위치 :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1204번지)

 

은병암(隱屛岩) : 주자(朱子, 1130~1200)의 이름은 희(), 자는 원회(元晦), 호는 회암(晦庵).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학을 집대성함. 54살 되던 1183년에 무이구곡(武夷九曲) 중 다섯 번째 구비에 해당하는 은병암(隱屛) 밑에 무이정사(武夷精舍) 세우고 제자를 가르쳤다. 그가 터를 잡고 신진들을 가르친 무이구곡(武夷九曲)은 예전부터 중국에서 신선이 살았던 곳으로 이름난 명승지이다. 중국 복건성 숭안현에 있다.

 

강시영[姜時永, 1788년(정조 12)-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여량(汝亮, 汝良). 1819(순조 19)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수찬을 지내고, 1829년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으로 정사 이광문(李光文)과 부사 한기유(韓耆裕)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8(헌종 4) 부수찬을 거쳐 1843년 충청도관찰사, 1846년 행호군(行護軍), 1848년 한성부판윤·형조판서, 1854(철종 5) 대사헌을 지냈으며, 1859년 예조판서가 되었다.1866(고종 3) 조대비가 수렴섭정(垂簾攝政)을 철회하고,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아 인사배치를 할 때 남인으로 기용되어 홍문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로 승진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헌종실록(憲宗實錄)철종실록(哲宗實錄)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국조방목(國朝榜目)

집필자집필(1996) 오성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은병암 석각 바위

강시영[姜時永, 1788년(정조 12)-미상]이라는 인물은 마적동에 살았던 적은(跡隱) 강지주 (姜趾周 1856∼1939) 선생의 선대로 추정하는데, 석각의 이름과 동일 인물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은병암 석각은 송대에서 선녀굴로 올라가는 마을터(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1204번지) 등산로 가까이에 있다. 마적동과 송대마을은 한말 진주강씨가 세거했던 곳으로 송대마을에는 아직도 진주강씨 소유의 토지가 남아있다.

 

 

지도 : 토요산속 칠성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