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촉도난(蜀道難)의 검각(劒閣)

도솔산인 2021. 11. 23. 16:35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촉도난(蜀道難)의 검각(劒閣)

 

 

▣ 일 시 : 2021년 11월 20일~21일

▣ 코 스 : 의신-우남사-도덕봉(검각산)-만국기 기도터-석굴-박터-도덕봉-우남사-의신

▣ 인 원 : 3명

▣ 날 씨 : 맑음

 

 

선인들의 유람록은 답사하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같은 사람이라도 답사할 때마다 생각이 바뀐다. 유람록을 정독하지 않고 답사를 한다면 발과 입이 산행하는 것이다. 口足산행이다. 유람록을 정독하고 답사를 하더라도 몰입하지 않으면 격화소양(隔靴搔癢)이다. 신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 것과 같다. 함께 답사한 사람과 의사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혼자만의 생각은 대통으로 하늘을 보는 격이다. 귀를 열어야 눈이 비로소 보인다. 백번의 누여야 실이 하얗게 되듯 에너지가 응축이 되었을 때 막힌 것이 폭발하는 통연(洞然)의 희열을 느낄 수 있다. 

 

영신암에서 40리쯤 내려갔는데 산세가 검각(劒閣)보다 더 험하였다. 108번 굽이친 형세가 아니라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탈길이었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은 마치 푸른 하늘에서 황천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넝쿨을 부여잡고 끈을 잡아당기며 이른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걷고 또 걸었다. 푸른 나무숲 틈새로 내려다보았는데, 어두컴컴하여 아래가 보이지 않아 이맛살을 찌푸리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손가락을 깨물며 정신을 차린 뒤에 내려가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대나무 숲을 헤치고 의신사(義神寺)를 찾아 들어가 묵었다. 밤에 두견새 우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개울물 소리가 베갯머리에 맴돌았다. 그제야 우리의 유람이 인간 세상에 가까워졌음을 알았다.

自靈神行四十里許. 山之嶄絶. 過於釰閣. 而風磴直下. 不作百八盤之勢. 緣而下者. 如自靑天落黃泉. 牽蘿引繩. 自卯至申. 而俯瞰繁綠之隙. 猶黯黯然不見底. 深矉太息. 幾乎齰指而垂戒矣. 然後下入幽谷. 披高竹㝷義神寺而宿. 夜聞杜宇亂啼. 溪聲繞榻. 始覺吾遊逸乎人間世矣.<1611년 4월 5일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지난 10월 9일~10일 영신암에서 의신사까지 답사를 하였다. 덕평 마을에서 의신사의 하산 길을 1489년 탁영은 오솔길로, 1611년 어우당 황천길로 기록하고 있다. 덕평(天羽洞, 천우동)에서 의신으로 내려오는 길은 갈림길이 많아서 어느 길이라고 특정하기 어렵다. 답사 후 다시 유두류산록을 읽게 되었고 '영신암에서 40리쯤 내려갔는데 검각(劒閣)보다 더 험하였다.'라는 문구에서 검각(劒閣)에 주목하였다. 먼저 답사한 산영님이 '지세가 험하여 천혜의 요새다.'라고 하여 지도를 확인해보니 도덕봉을 가리키는 듯하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조용헌 박사도 도덕봉을 지리산의 요새로 표현하고 있다. 조박사는 의신사는 당취들의 본부로, 도덕봉은 촉도난(蜀道難)의 요새로 덕평 마을을 당취(승병)들의 훈련장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덕봉은 두 개의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몽인은 하산길에 도덕봉을 대검산(大劍山)과 소검산(小劍山)으로 보고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 詩에 나오는 검각(劒閣)을 인용하였다.

 

☞ 촉도난(蜀道難)-촉(蜀)으로 가는 길의 험난함이여! (daum.net)

 

注 釰閣 :  중국 장안(長安)에서 촉(蜀)으로 가는 길에 있는 대검(大劍)ㆍ소검(小劍)의 두 산의 요해처(要害處)임. 지세가 험난해서 소수의 병력으로도 굳게 지킬 수 있는 요새를 말한다.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에 “검각이 험난하게 우뚝 솟아 버티고 있으니, 한 사나이가 관문을 지키면 만 명이 공격해도 열지 못할 것이다.〔劍閣崢嶸崔嵬 一夫當關 萬夫莫開〕”라는 표현이 나온다. 

 

 

[조용헌의 영지 순례] 당취 총대장 서산대사 키운 지리산 요새의 수수께끼

지리산 의신사(義神寺)에 소속된 암자가 31개쯤 있었다고 한다. 그 암자 중의 하나가 원통암(圓通庵)이다. 해발 700m에 있는 원통암은 의신사에서 30~40분쯤 올라가면 나타난다. 청학이 알을 품는다는 청학포란(靑鶴抱卵)의 명당이라고 알려진 곳이었다. 원통암 뒤의 봉우리가 도덕봉인데, 이 도덕봉의 꼭대기 부분이 바위로 되어 있다. 멀리서 보면 이 도덕봉 꼭대기의 바위 부분이 청학의 머리에 해당하고, 도덕봉 양옆의 봉우리 형태가 청학이 적당하게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둥그런 형태의 봉우리 꼭대기에 날카로운 바위가 있으면 매나 독수리, 학으로 간주하고, 바위가 없이 그냥 둥그런 형태면 닭이나 봉황으로 본다. 도덕봉은 매나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바위는 아니고 그보다는 뭉툭한 바위에 해당하므로 청학으로 본 것 같다. 거기에다가 원통암은 좌청룡과 우백호가 서너 겹으로 거듭 둘러싸고 있다. 여러 겹으로 둘러쌀수록 좋은 것으로 본다. 두껍다는 이야기이다. 암자 터를 좌우에서 봉우리들이 겹겹이 쌓아줄수록 기운이 밖으로 새지 않고 보존된다. 이러한 명당의 조건을 갖춘 원통암에는 당시에 숭인장로(崇仁長老)가 머물고 있었다.

 

촉도난(蜀道難)과 검각(釰閣)의 키워드를 가지고 답사에 나섰다. 답사팀은 사전에 답사 코스와 자료를 공유하였다.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①산세가 검각보다 험하고, ②108번 굽이친 형세가 아니라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탈길, ③푸른 하늘에서 황천으로 떨어지는 느낌'으로 요약된다. 산길에서 험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을까만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에 나오는 검각(釰閣)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의신사터에서 운암골로 들어가 우남사(?) 터를 다녀온 후 계곡을 건너 유몽인의 하산길로 추정되는 능선을 따라 올라갔다. 경작지 상단에는 과거 염소막터(고사리밭) 울타리를 넘어 능선에 붙었다. 도덕봉은 두 개의 암봉이다. 유몽인은 도덕봉을 검각산의 대검산 소검산으로 이해하고 험한 산길을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에 비유한 듯하다. 

 

도덕봉에 오르니 영신사→덕평(천우동)→도덕봉(검각산)→하산한 능선(108번 굽이친 형세가 아니라 직으로 떨어지는 비탈길로 황천으로 떨어지는 느낌)→의신사 코스가 눈에 들어왔다. 도덕봉에 BC를 구축하고 요해처를 확인하기 위해 주변의 탐색에 나섰다. 케른과 석축, 석굴과 샘터를 샅샅이 살폈다. 박회성(朴回城)처럼 자연 망루 위에 투석을 위해 모아놓은 돌도 있었다. 도덕봉 주변은 한마디로 촉도난(蜀道難)에 나오는 검각(釰閣)의 요새(釰閣)였다. 먼저 대성골 초입 의병총이 떠올랐다. 덕평고원과 도덕봉은 임진·정유재란 당시 서산대사의 승병들과 한말 하동지역 항일 의병들의 뜨거운 기운이 남아있는 곳으로 이해가 되었다. 아! 높고도 높도다! 촉으로 가는 길의 험난함이여! 푸른 하늘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려워라!<중략> 검각산 우뚝 높이 솟아 있어 한 사람이 관문을 막으면 만 사람도 열 수 없다네.<이백의 촉도난에서> 끝.

 

 

 

운암사 터인지 우남사 터인지(?)
터(?)
유몽인이 이백의 촉도난을 인용한 검각산
오암(㹳巖, 원숭이바위)을 닮았네.
검각산의 대검과 소검
도덕봉(검각산)에서 의신사 하산 추정능선
석굴 샘터
원통암 가는 길
지도 : 박성섭님(형광펜 유몽인 하산길 추정)

의탄리 금계마을 탄수(灘叟) 이종식(李鐘植, 1871~1945)선생 집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