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염두고도(鹽豆古道) 벽소령 소금길
▣ 일 시 : 2021년 12월 04일~05일
▣ 코 스 : 삼정-오리정골-벽소령-부자암-형제봉-벽소령-덕평(천우동 석각)-상철굴암-설산토굴터-설산습지-삼정
▣ 인 원 : 3명
▣ 날 씨 : 맑음
1472년 함양군수 김종직선생은 4박 5일간 두류산 유람을 마치고 등구재를 넘어 관아로 돌아온다. 김종직은 실택리(실덕리)를 지나 군자사 입구 임천에서 일행들과 헤어진다. 해공은 군자사로 가고, 법종은 묘정사로 가고, 조태허 유극기 한백원은 용유담(龍游潭)으로 유람하러 간다. 처음에는 김종직이 의탄 방향이 아닌 실상사 방향으로 산내면 백일리→중황리(상황마을)→등구재→창원마을→소리목재(약초길)→구양리(물레방아산장)→오도재→지안재→함양관아로 돌아온 것으로 추정해 보았다. 만약 마천→의탄→창원마을→등구재→산내→인월을 경유하여 팔랑치를 넘었다면 너무 멀리 돌아가기 때문이다.
지리산 역사문화조사단 답사팀은 유두류록 코스 지도를 작성하면서 등구재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余則 踰登龜岾 徑還郡齋[나는 등구재(登龜岾)를 넘어 곧바로 군재(郡齋, 관아)로 돌아왔다.]'라는 문구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 시점에 함양 지곡면 개평마을 출신 송장섭 교장 선생님께서 마천면 창원리와 산내면 중황리에서 등구재를 직접 답사하시고 하동과 함양을 잇는 소금길에 대한 의견을 주셨다. 답사팀은 김종직 선생이 무슨 이유로 마천에서 남원 산내면 중황리를 거쳐 등구재를 넘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벽소령 소금길 답사에 나섰다.
삼정마을을 출발→설산 습지 초입 마을터에서 오리정골로 진입하여 벽소령 옛길을 따랐다. 벽소령 옛길은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오리정골 바위에 묵서로 쓴 남원(南原)이라는 글자가 눈에 크게 들어왔다. '지리산소금길 염두고도(鹽豆古道, 소금과 콩의 물류가 이동하는 옛길, 2020)'를 보고 혹시 남원의 상인들이 소금 길인 오리정골 바위에 묵서를 남긴 것은 아닌지 상상을 하였다. 오리정골 소금길은 완만하게 이어진다. 너덜지대에는 가축이 이동할 수 있도록 돌 포장을 하였다. 이정목도 남아있다. 사면 길은 흙이 흘러내려 길폭이 좁아지기도 하지만 이내 다시 넓어진다. 임도와 만나는 지점에 이르면 당시 도로공사로 옛길의 흔적이 묻혔지만, 옛 벽소령 샘터로 오르는 길은 등산로가 아닌 양지쪽으로 옛길의 흔적이 남아있다. 샘터(집터 : 표지목 12-14)에서 벽소령까지는 우마길의 원형이 확연하다. 벽소령에서 소금길은 곧바로 구벽소령 헬기장과 소금쟁이 능선으로 이어진다.
첫 번째 의문은 오도재를 넘었다면 왜 오도재를 기록하지 않은 것일까.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오도봉에 대한 기록은 있다. 오도재에 대한 문헌의 기록은 영정조시대에 살았던 권뢰의 문집에 보인다. 조선후기 학자 권뢰(權土+耒)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권뢰의 증손인 권오영(權五永)이 1909년에 간행한 龍耳窩集(용이와집, 1909년 간행) 卷之三(권지삼) 雜著(잡저) 遊德裕山錄(유덕유산록)에 오도치에 대한 기록이 있다
1.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경상도>함양군
【산천】 ‘오도봉(悟道峯) 군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불우】 ’등구사(登龜寺) 오도봉(悟道峯)에 있다.
2. 권뢰(權?, 1800~1873)의 용이와집(龍耳窩集) 잡저(雜著) 유덕유산록(遊德裕山錄, 1852)
○ 壬子三月二十九日。過栢淵書院。卽孤雲,?齋兩先生入享之所。十餘里蹄閒驛踰悟道峙。
○ 임자(1852)년 29일 백연서원을 지났다. (백연서원은) 고운과 점필재 선생께 제향을 드리는 곳이다. 십여리 제한역에서 오도치(悟道峙)를 넘었다. <遊德裕山錄(유덕유산록)>
☞ 권뢰(權?, 1800~1873) : 자 경중(景中)호 용이와(龍耳窩), 죽담(竹潭), 본관 안동(安東) 허전(許傳)의 문인. 이원우(李源祐), 강윤제(姜允齊), 허임(許恁) 등과 교유, 1828년(순조 28) 진사시 합격, 1852년 덕유산 일대를 유람함.
3. 오도재의 유래에 대하여
최석기 교수님의 '지리산 백무동(2020)'을 인용하면 「오도재는 본래 마천에서는 등구재로 불렀으며 제한역에서 넘어가기 때문에 함양에서는 제한재라고도 불렀다. 이 고개는 제한마을에서 등구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 16세기 이후 오도재로 불리기 시작했다. 오도재라고 불린 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남명 조식의 문인인 개암(介菴) 강익(姜翼, 1523~1567))이 이 고개에서 도를 깨달았다고 하여 붙였다는 설이고, 하나는 서산대사의 제자인 청매(靑梅) 인오(印悟, 1548~1623)가 이 고개를 오르내리다가 도를 깨달아 붙였다는 설이다.」
4. 1489년 탁영 김일손의 두류산기행록
○ 14일, 임인일. 드디어 천령의 남쪽 성곽의 문에서 출발하였다. 서쪽으로 10리 쯤 가서 시내 하나를 건너 객사에 이르렀는데, 제한(蹄閑)이라고 하였다. 제한에서 서남쪽으로 가서 산등성이를 10리 쯤 오르내렸다. 양쪽으로 산이 마주하고 있고 그 가운데 한줄기 샘이 흐르는 곳이 있었는데, 점점 들어갈수록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몇 리를 가서 한 고개를 오르니, 따르는 자가 말하기를, “말에서 내려 절을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누구에게 절을 하느냐고 묻자 그가 답하기를,“천왕(天王)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천왕이 무엇인지 살피지 않고 말을 달려 지나쳤다. 이 날 비가 물을 대듯이 내렸고 안개는 온 산을 감고 있었다. 따르는 자는 모두 도롱이를 입고 삿갓을 썼다. 진흙길이 미끄럽고 질퍽하여 서로 잃어서 뒤처졌다. 十四日壬寅. 遂自天嶺南郭門而出. 西行可一十里. 渡一溪水. 抵一逆旅. 名曰蹄閑. 自蹄閑西南行. 上下岡隴可十里. 兩山對峙. 一泉中注. 漸入佳境矣. 行數里陟一岾. 從者曰當下馬拜. 余問所拜. 答曰天王. 余不省天王是何物. 策馬而過. 是日雨下如注. 嵐霧渾山. 從者皆蓑笠. 泥滑路澁. 相失在後.<1489년 탁영 김일손의 두류산기행록> |
1489년 4월 김일손이 정여창과 함께 제한역에서 오도재를 넘어 등구사에 이른다. 김일손은 고개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으나 내용으로 미루어 지금의 오도재임을 알 수 있다. 김종직이 지리산 유람을 마치고 등구재를 넘어 함양관아로 돌아왔는데, 여기에서 등구재는 지금의 오도재로 이해가 된다. 마천 사람들이 흔히 '등구&마천'이라고 하는 것은 등구재(오도재)를 넘어 마천으로 온다는 말이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오도봉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개암 선생과 청매선사 관련 오도재 유래 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 화개에서 벽소령-함양 소금길 답사를 요약하면
① 오리정골 바위에 남원(南原)이라는 묵서가 있음.
② 벽소령에서 구헬기장으로 연결되는 옛길을 확인함.
③ 덕평마을 초막터에서 천우동(天羽洞) 각자를 확인함.
④ 상철굴암에 대한 다른 의견이 있는데 추가 답사가 필요함.
⑤ 일제시대 오리정골의 사금 토취장과 사금장(사금비중 선별 시설물)을 발견함.
⑥ 김종직은 마천→등구재(오도재)→제한역을 잇는 소금길을 따라 함양관아로 돌아옴.
☞ 아영 가야고분의 소금길 지리산의 염두고도(鹽豆古道 소금과 콩)
지리산 소금길은 장수군 번암면에서 남원 운봉읍과 지리산을 넘는 경남 함양 벽소령을 지나 경남 하동군 화개장터까지 125리(약 50㎞)에 걸쳐 있다. 소금길은 1500여년 전 첩첩산중 요새에 터 잡은 ‘철의 왕국’ 가야 기문국에서 주민들이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소금을 구하기 위해 오갔던 데서 유래했다. 지금의 전북 남동부 소맥산맥 자락인 운봉고원에 든 가야인들이 외부 세계와도 소통이 쉽지 않은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생활의 모든 것을 자급자족했으나 소금만은 예외였다. 지리산에서 소금나무라고 불리는 붉나무 열매껍질에서 억은 짠 성분을 소금 대용으로 사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에 가야인들은 소금을 구하기 위해 서리태(콩)를 짊어지고 굽이굽이 고갯길을 수없이 넘어 50㎞가량 떨어진 하동 화개장터까지 찾아 소금과 맞교환했다. 지리산 소금 길은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콩과 소금의 교역 거점은 언제부터인가 벽소령이 됐다. 지리산 북서쪽 장수군 번암면과 남원시 아영면에서 콩을 짊어진 짐꾼들이 인월·산내면과 함양군 마천면을 거쳐 벽소령에 도착해 지리산 남부 화개장터에서 소금을 메고 온 짐꾼들을 만나 콩과 소금을 맞바꿈으로써 물물교환이 성사됐기 때문이다. 이 길은 소금과 콩의 이름을 따 ‘염두고도(鹽豆古道)’로도 불렸다.
출처 : 아영 가야고분의 소금길 지리산의 염두고도(鹽豆古道 소금과 콩) 남원뉴스 news@namwonnews.com
오리정골에는 집터와 전혀 다른 형태의 축대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일제시대 오리정골에서 사금(砂金)을 채취했다고 하는데 물을 끌어들인 수로의 흔적도 있다. 물을 이용하여 사금(砂金)을 비중선별하는 사금장(砂金場)으로 추정된다. 인근의 집터는 사금쟁이 막사터로 보인다.
注 우화등선(羽化登仙) : 송(宋)나라 신종(神宗) 때 소식은 호북(湖北) 황주(黃州)로 좌천되었다. 그는 틈나는 대로 주변의 명승지를 유람하였는데, 적벽을 찾아 〈적벽부〉 2수를 지었다. 〈전적벽부〉에서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이 나온다. ‘우화’는 원래 번데기가 날개 달린 나방으로 변하는 것을 말한다.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르다. 번잡한 세상일을 떠나 마음이 평온하고 즐거운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 주의 : 개인적인 생각으로 오류가 있습니다.(작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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