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설국으로의 초대 숙영랑대(211113~14)

도솔산인 2021. 11. 14. 19:01

설국으로의 초대 숙영랑대(211113~14)

 

 

▣ 일 시 : 2021년 10월 13일(토)~14일(일)

▣ 코 스 : 광점동-일곱모롱이-방장문-청이당-영랑대-청이당-진주독바위(옹암)-집터-석상용장군묘-광점동

▣ 인 원 : 3명

▣ 날 씨 : 맑음

 

 

  평일에 영랑대를 가볼 요량으로 목요일 마천에 내려가 토요일에야 산에 들었다. 전 같으면 우천불문 생사불문이지만, 일기예보 눈치를 보고 있으니 점점 소심해진다. 금요일 지리산 둘레길 함양센터에서 눈 덮인 천왕봉과, 중봉 영랑대를 바라보다가 비 소식에 슬그머니 뒤로 빼고 말았다. 이번 답사는 지산대와 석상용 장군 묘소의 지번을 확인하는 것이지만, 본래 목적은 영랑대 산행이다. 영랑대에서 만난 분들이 1618봉 안부를 영랑재로 잘못 알고 있더라. 그래서 글을 쓰는 일은 무한 책임이 뒤따른다. 수락석출(水落石出)이 아니던가. 물이 빠지면 바닥이 드러난다. 청이당이 여기면 어떻고 저기면 어떠리. 상내봉이 세 개라도 상관없는 일이다. 영랑대에 들어 달빛 아래 '그림 속의 학'을 노래하며 파도소리나 들어야지. 11월 중순에 때아닌 신설산행을 하였다. 

 

 

 

畵鶴(화학) - 그림속의 학

 

                                    蓀穀손곡) 李達(이달)

   

獨鶴望遙空(독학망요공) : 외로운 학 한 마리 먼 허공을 바라보며

夜寒擧一足(야한거일족) : 밤이 차가운지 다리 하나를 들고 있네.

西風苦竹叢(서풍고죽총) : 서풍이 불어와 대숲은 괴로워하는데 

滿身秋露滴(만신추로적) : 나는 온몸 가득 추로(秋露)에 젖었다오.

 

 

☞ 李達(이달, 1539~1618) : 조선(朝鮮) 시대(時代)의 시인(詩人). 자(字)는 益之(익지). 號(호)는 蓀谷(손곡), 東里(동리). 서얼 출신(出身)이며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은 허균(許筠)과 허균(許筠)의 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에게 詩(시)를 가르친 스승이다. 허균(許筠)은 스승인 이달이 훌륭한 재능(才能)을 지녔으나 서얼이기 때문에 불우(不遇)하게 사는 것을 가슴 아파하여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었다고 한다. 문집(文集)에 蓀谷集(손곡집)이 있다. (몰년이 1609년의 기록이 있음.)

 

 

 

지리산둘레길함양센터(구의탄초교)에서
방장문
청이당석축
사진 순천산님
사진 순천산님
진주독바위(옹암)
1611년 유몽인은 석문, 1924년 강계형은 통천문, 주민(임대봉씨)들은 문바위라고 함.
일곱모롱이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 100번지(1921년 1월 10일 세움)

義兵將石祥龍之頌功碑

公字龍見世稱飛虎將軍勇力絶人見國家危亡起義旅于智異山中斬倭兵甚多竟被日憲投獄經五年放還因此疾痛數年辛艱庚申十月含憤而別世 辛酉正月初十日竪

 

의병장석상용지송공비

공의 자는 용(龍見)이다. 세칭 비호장군이라 칭한다. 장군 용기와 힘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 국가가 위망(危亡)에 처한 것을 보고서, 지리산 중에서 의병(義旅)을 일으켜 왜병을 참(斬)한 것이 매우 많았다. 마침내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5년이 지난 후 석방되어 돌아왔다. 이로 인하여 질병의 고통으로 수년 동안 고생하다가 마침내 庚申(1920)년 10월 분한 마음을 품고 별세하였다. 辛酉(1921)년 정월 초 10일 세우다.

 

※ 일체 치하에서 석상용 선생의 셋째 아우 채용(彩龍)씨가 대담하게도 장군의 공을 기린 33자의 글을 써서 비를 세웠다.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의병활동 공적비는 전국에서 유일하다. 해주석씨세보에 묘소의 위치를 두류암(頭流巖)으로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