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영신사-의신사)

도솔산인 2021. 10. 11. 05:54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영신사-의신사)

 

 

▣ 일 시 : 2021년 10월 09일(토)~10일(일)

▣ 코 스 : 의신-대성마을-대승암터-대성폭포-영신대-칠선봉-선비샘-덕평마을터(천우동)-의신사

▣ 인 원 : 3명(일정 민병태님, 정혜종님)

▣ 날 씨 : 맑음

 

 

1611년 4월 5일 향적암을 출발하여 영신암에서 의신사에 이르는 유몽인의 일정이다. 10여 년 전 선비샘에서 의신으로 하산한 일이 있으나, 당시는 유람록을 모르고 발이 산행하던 시절이라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얼마전 '조용섭의 지리산이야기(한국농어민신문, 2021.08.24 18:22)'를 읽고 하산길에 의문이 있어 답사를 하게 되었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탈길’, ‘마치 푸른 하늘에서 황천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라는 길의 묘사를 보아 큰세개골로 내려섰던 것 같다.」라는 내용이다. 

 

 

▶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영신암(靈神菴)에서 40리쯤 내려갔는데 산세가 검각(劍閣)보다 더 험하였다. 108번 굽이친 형세가 아니라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탈길이었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은 마치 푸른 하늘에서 황천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넝쿨을 부여잡고 끈을 잡아당기며 이른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걷고 또 걸었다. 푸른 나무숲 틈새로 내려다보았는데, 어두컴컴하여 아래가 보이지 않아 이맛살을 찌푸리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손가락을 깨물며 정신을 차린 뒤에 내려가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대나무 숲을 헤치고 의신사(義神寺)를 찾아 들어가 묵었다.
自靈神行四十里許. 山之嶄絶. 過於釰閣. 而風磴直下. 不作百八盤之勢. 緣而下者. 如自靑天落黃泉. 牽蘿引繩. 自卯至申. 而俯瞰繁綠之隙. 猶黯黯然不見底. 深矉太息. 幾乎齰指而垂戒矣. 然後下入幽谷. 披高竹㝷義神寺而宿.

 

이번 답사는 큰세개골에서 영신대로 올라가 덕평봉에서 의신사로 내려오는 코스이다. 큰세개골 초입에서 계곡이 아닌 옛길(산죽길)을 따랐다. 약초꾼의 산막터에서 산길이 끝나고 협곡으로 진입하였다. 얼마쯤 가면 창불대에서 내려오는 골짜기를 만난다. 김종직의 영신암 시에 나오는 거상곡(車箱谷, 창불대골)의 초입이다. 이 계곡으로 올라가 산막터에서 좌골을 따르면 창불대 바로 아래에서 음양수에서 영신대를 잇는 상허리길을 만난다. 일명 '토산 전람회 길'이다. 전괄(箭筈)은 화살 끝처럼 섬찟한 창불대를 가리키고, 거상(車箱)은 한번 들어서면 깊이를 가늠할 수 없고 돌아갈 길이 없는 골짜기이다. 두보(杜甫)의 망악시(望岳詩)에 전괄령(箭筈嶺)은 하늘로 통하는 문이다.[靈神菴(영신암)-김종직 箭筈車箱散策回 : 전괄(창불대)와 거상을 산책하고 돌아오니/老禪方丈石門開 : 노선사의 방장(영신암)은 석문이 열려있네]

 

* 전괄(箭筈)과 거상(車箱) : 전괄은 화살 끝처럼 좁은 산마루를 말하고, 거상은 마치 수레의 짐칸처럼 우묵한 골짜기로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음. 또는 전괄령(箭筈嶺)과 거상곡(車箱谷)의 명칭으로도 쓰는바, 두보(杜甫)의 망악시(望岳詩)에 “거상의 골짝에 들어서니 돌아갈 길이 없고 전괄로 하늘을 통하는 문 하나가 있구려[車箱入谷無歸路 箭筈通天有一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六》 

 

 

 

거상곡(창불대골)에서 바라본 전괄령(창불대)

 

 

거상곡(車箱谷, 창불대골) 초입을 지나 영신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요즘 지리산 비등로의 산행도 시들해진 듯 빛바랜 시그널만이 가끔 눈에 띈다. 대성폭포를 지나자 협곡 사면의 습기를 머금은 바위에 당귀가 즐비하다. 체력을 다 소진하고야 겨우 영신대에 닿았다. 영신대에 이르니 석가섭상이 석양의 따스한 햇살을 받고 있다. 시간이 없어서 비로봉에 오르는 것도, 제3봉에 올라 좌고대와 석가섭을 확인하는 것도 접어야 했다. 지난주 영랑대와 금대산에서 바라본 좌고대로 위안을 삼았다. 좌고대는 단사천님의 '坐高臺(좌고대)' 시로 대신했다. 석양에 창불대에서 영신대로 내려오는 길목의 제3봉에 오르면 영신대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등로 조망바위에서 비로봉
제3봉에서 바라본 좌고대와 석가섭
좌고대(사진 순천산님)
추강암에서 바라본 좌고대

 

 

坐高臺(좌고대)에 오른다.

 

                                丹砂泉(단사천)

 

어느 태고적부터 여기와 머물렀을까

하얀 아기 코끼리 한 마리, 반야를 향해 화석이 되어 있네

슬프지도 않은지 내리 감은 선한 눈빛 희미한 미소마저 머금었다

해가 뜨고 별이 지고 달이 스러지기를 몇 겁

 

얼마나 기다렸을까

굳어져 움직일 수 없는 작은 다리를 만져 주고

늘어지다만 부러진 상아의 아픔을 매만져 주며

말 걸어와 그 세월 헤아려 줄 이 찾아와 주기를

 

추강암에 올라 좌고대를 내려다본다

 

기쁨에 찬 커다란 코끼리 한 마리 

천왕을 바라보며 긴 코를 치켜들고 파안대소를 하고 있네

입은 꼬리가 되고 꼬리는 기다란 코가 되어 환희에 찬 미소를 지었구나

 

설의계산(雪衣鷄山) 가파른 산길 아래 어디쯤 

반야를 바라보며 숨 죽은 수행을 하던 어린 아기 코끼리 한 마리

억겁의 세월을 견디며 스러지는 별빛과 달빛을 벗 삼아

마침내 다 자라 천왕을 향한 득도의 해탈을 이룬 채 서 있나니

 

고요히 합장하고 올라선 좌고대 

나는 오늘 보현의 마음을 얻었구나!

탁 트인 사방 천지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나니

저 하늘은 바로 도솔천(兜率天)이 아니런가

 

반야 위로 鶴雲이 나르고

천왕 위로 燕雲이 떼를 지어 나르는데 

華雲은 꽃길을 만들어 환한 서방 정토로 인도하네

 

세상사 모든 일들 깃털처럼 가벼워라

잊고 잊혀지고 떠 오르지 않으니

마음속 온갖 미진 허공 속 먼지 되어 흩어진다네 

 

빈발(賓鉢)은 어느 곳에 머무시는고

저 멀리 빈발봉 엎드린 사자 위에 주무시는가

저 아래 영신대 아늑한 석가섭에 깃들어 계신가

 

속세를 멀리하고 마음의 때를 벗어

천추에 썩지 않고 후세에 전한다 하시더니

좌고도 좋고 비로도 좋고 영신도 좋아라

탐심이 절로 사라지니 마음 또한 저 홀로 한가롭다네

 

 

* 추강암 : 추강 남효온이 오른 좌고대 옆 더 높은 바위

* 설의계산(雪衣鷄山) : 비해당의 찬에 등장하는 눈 덮인 영신봉 (계족봉 또는 계족산)

* 빈발(賓鉢) : 영신대 석가섭에 깃든 가섭존자. 가섭의 인도식 이름(핏발라야나)을 한글로 표기

* 빈발봉 : 좌고대에서 바라보는 촛대봉. 엎드린 사자의 형상

 

 

선인들의 유람록은 답사하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 유람록을 정독하지 않고 답사를 한다면 발과 입이 산행하는 것이다. 입이 만족하는 口足산행이다. 유람록을 정독하고 답사를 하더라도 몰입하지 않으면 격화소양(隔靴搔癢)이다. 신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 것과 같다. 함께 답사한 사람의 의견이 다르더라도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혼자만의 생각은 대통으로 하늘을 보는 격이다. 상대방의 의견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가섭전과 빈발암, 석가섭과 계족봉, 좌고대와 비로봉, 가섭대와 창불대, 전괄령과 거상곡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영신대의 밤은 깊어만 갔다. 

 

1489년 4월 25일 김일손은 영신사에서 의신사로 내려오면서 두류산기행록에 '등성이의 북쪽은 함양 땅이고 남쪽은 진양(晉陽) 땅이다. 한 가닥의 오솔길이 함양과 진양을 나눠놓았다. 오랫동안 방황하며 조망하다가 다시 그늘진 숲속으로 갔다. 그러나 모두 산이 흙으로 덮여서 길을 찾을 수 있었고 매를 잡는 사람들이 많아서 오솔길이 나 있어서, 상원사(上元寺)와 법계사로 오르던 길만큼 심하지 않았다. 산 정상에서 서둘러 내려와 정오에 의신사(義神寺)에 이르렀는데 절은 평지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탁영은 '오솔길로 산길이 험하지 않다.'라고 하였고, 어우당은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탈길, 하늘에서 황천으로 떨어지는 느낌'이라고 하였으니, 같은 길을 걷고도 어찌 이렇게도 다른 것인지. 

 

다음날 아침 칠선봉 능선을 따라 선비샘을 향했다. 곧은재 능선 전망바위에서 빛을 거슬러 영신대의 아리왕탑 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김종직의 하산길 '徑由直旨而下'의 분기점이다. 김종직은 곧은재 능선을 '直旨'라고 하였으나, 곧은재 능선은 호사가들에 의해 한신능선으로 둔갑하였다. 그러나 이제 알만한 사람은 '곧은재 능선'으로 부르고 있다. 주민들은 칠선봉도 칠성봉이라고 한다. 이 능선을 금대암에서 바라보면 좌고대에서 일곱 개의 봉우리로 이어져 있다. 높낮이가 크게 없어 일자문성(一字文星)으로 보인다. 선비샘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길이다. 선비샘 전망대를 지나고 선비샘에서  500m정도 내려서면 덕평습지가 나온다. 

 

덕평봉 습지를 지나고도 산길은 평탄하게 이어진다. 조림한 낙엽송과 산죽밭을 지난다. 풍도목이 갈길을 막지만 김일손이 '산이 흙으로 덮여있다.'라는 기록과 일치한다. 이곳이 옛날 덕평마을이다. 조봉근님의 석각 사진 천우동(天羽洞) 마을이 인근에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덕평마을은 산죽밭으로 변했다. 고도 1050m 지점에서 능선으로 접어들어 957봉에서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유몽인은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탈길, 하늘에서 황천으로 떨어지는 느낌'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향적암을 출발하여 이른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산길을 걸었으니 많이 지쳤을 것이다. 황천길 같은 비탈길을 내려가 계곡을 건널 때까지도 산죽길이 이어진다. 상수원 시설이 있는 곳에서 비로소 넓은 길을 만난다. 의신사터를 지나 의신마을로 내려섰다.

 

산길은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다. 산은 하나이지만 느낌은 사람마다 다르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탈길과 하늘에서 황천으로 떨어지는 느낌'에서 나 또한 언듯 큰세개골을 생각하였지만, 대성폭포와 능인사, 대승암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대성폭포를 지나며 유몽인의 하산길이 덕평마을 천우동(天羽洞)을 경유했다는 생각을 하였다. 말하자면 탁영은 덕평의 오솔길을 기록하였고, 어우당은 1050m에서 해발 350m 의신마을까지 700m 급경사길을 기록한 것이다. 탁영은 정오에 오솔길을 내려와 의신사를 지났고, 어우당은 어둠이 내린 비탈길을 더듬어 의신사에 겨우 닿은 것이다. 오솔길황천길은 같은 공간이지만 시간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니 느낌 또한 달랐을 것이다. 끝.

 

 

 

1917년 제작된 조선의 지형도
대성주막
대승암 샘터
샘터 옆 확
창불대골(거상곡) 입구
1463년 이륙은 유지리산록에서 이곳을 부도 모양, 1611년 유몽인은 유두류산록에서 비로봉이라고 기록함.
영신대
1463년 이륙은 부도 모양, 1611년 유몽인은 비로봉이라고 함.
칠선봉
선비샘
덕평마을 습지
天羽洞 居秦壬午春(?) [사진 조봉근님] 
의신사지 법해당 승탑(180428)

 

 

▶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향적암-의신사] 

 

5일 갑술일. 일찍 향적암을 떠났다. 높이 솟은 고목 밑으로 나와 빙판 길을 밟으며 허공에 매달린 사다리를 타고서 곧장 남쪽으로 내려갔다. 앞서 가는 사람은 아래에 있고 뒤에 오는 사람은 위에 있어, 벼슬아치와 선비는 낮은 곳에 있고 종들은 높은 곳에 처하게 되었다. 공경할 만한 사람인데 내 신발이 그의 상투를 밟고, 업신여길 만한 자인데 내 머리가 그의 발을 떠받들고 있으니, 또한 세간의 일이 이 행차와 같구나. 길가에 지붕처럼 우뚝솟은 바위가 있는 것을 보고서 일제히 달려 올라갔다. 이 봉우리가 바로 사자봉(獅子峯)이다. 전날 아래서 바라볼 때 우뚝솟아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그 봉우리가 아닐까? 아래를 내려다보니 평지는 없고 온통 산비탈뿐이었다참으로 천왕봉에 버금가는 장관이었다. 이 봉우리를 거쳐 내려가니 무릎 정도 높이의 솜대綿竹〕가 언덕에 가득 널려 있었다. 이를 깔고 앉아 쉬니, 털방석을 대신할 수 있었다.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靈神菴)에 이르렀는데, 여러 봉우리가 안쪽을 향해 빙 둘러서 있는 것이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솟아 있고,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서쪽에 서 있고, 가섭대(迦葉臺)는 뒤에 있었다. 지팡이를 내려놓고 기다시피 비로봉 위로 올라갔지만 추워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암자에는 차솥향로 등이 있었지만 살고 있는 승려는 보이지 않았다. 흰 구름 속으로 나무를 하러 가서인가? 아니면 속세 사람을 싫어하여 수많은 봉우리 속에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인가? 청명하고 온화한 계절이어서 두견화가 반쯤 핀 것을 비로소 보았고 산 속의 기후도 천왕봉보다는 조금 따뜻하게 느껴졌다. 영신암에서 40리쯤 내려갔는데 산세가 검각(劍閣)보다 더 험하였다. 108번 굽이친 형세가 아니라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탈길이었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은 마치 푸른 하늘에서 황천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넝쿨을 부여잡고 끈을 잡아당기며 이른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걷고 또 걸었다. 푸른 나무숲 틈새로 내려다보았는데, 어두컴컴하여 아래가 보이지 않아 이맛살을 찌푸리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손가락을 깨물며 정신을 차린 뒤에 내려가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대나무 숲을 헤치고 의신사(義神寺)를 찾아 들어가 묵었다. 밤에 두견새 우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개울물 소리가 베갯머리에 맴돌았다. 그제야 우리의 유람이 인간 세상에 가까워졌음을 알았다. 이 절에는 의신사 주지 옥정(玉井)과 태승암(太乘菴)에서 온 각성(覺性)이 있었는데, 모두 시로 이름이 있는 승려들이었다. 그들의 시는 모두 율격이 있어 읊조릴 만하였다. 각성은 필법이 왕희지(王羲之)의 체를 본받아 매우 맑고 가늘며 법도가 많았다. 내가 두 승려에게 말하기를,그대들은 모두 속세를 떠난 사람들인데 어찌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지 않소? 내가 지나온 것과 비교해볼 때 그대들은 속세를 떠난 것이 아니오. 그대들이 외진 곳에 사는 것은 사실이지만 푸른 솔을 벗하고 흰 사슴과 함께하는 것에 지나지 않소. 생각해보면 나의 발자취는 푸른 솔과 흰 사슴이 사는 세상 밖으로 나갔다가 온 것이니 내가 그대들에 비해 낫소” 라고 하자 두 승려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놀다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원문] 甲戌. 早辭香積. 出昂藏老樹下. 踏氷雪凌飛梯. 直南而下. 先行者在下. 後行者在上. 官士處卑. 僮僕處高. 可敬者履加其髻. 可慢者頭戴其足. 又間事類是行哉. 見路傍有石如屋危. 一踴而登. 卽獅子峯也. 昔日從下望之. 峭峭然揷雲漢者非耶. 下睇無地. 萬山陂陀. 眞壯觀亞於天王峯者也. 歷玆以降. 綿竹不過膝者. 布濩陵岊. 遂藉而坐歇. 可以替氍毹. 仍降萬丈蒼壁. 抵靈神菴. 諸峯環拱面内. 如相向而揖. 毗盧峰在其東. 坐高臺峙其北. 阿里王塔樹其西. 迦葉臺壓其後. 遂投杖. 手足行陟毗盧峯. 凜乎不可久留也. 菴有茶鼎. 香爐. 而不見居僧. 將樵蘇白雲而不知處耶. 抑厭避塵人而潛跡亂峯間耶. 節屆淸和. 始見杜鵑花半綻. 亦知山候稍暖於上峯也. 自靈神行四十里許. 山之嶄絶. 過於釰閣. 而風磴直下. 不作百八盤之勢. 緣而下者. 如自靑天落黃泉. 牽蘿引繩. 自卯至申. 而俯瞰繁綠之隙. 猶黯黯然不見底. 深矉太息. 幾乎齰指而垂戒矣. 然後下入幽谷. 披高竹㝷義神寺而宿. 夜聞杜宇亂啼. 溪聲繞榻. 始覺吾遊逸乎人間世矣. 於是有僧玉井住義神覺性者. 自太乘菴雨至. 皆以詩名. 其詩皆有格律可諷者. 覺性則筆法臨羲之. 甚淸瘦多法度. 余謂兩僧曰. 爾輩皆以離俗絶世. 惡入林之不密. 而比吾所履歷. 曾不離於阬穽. 爾之居僻則僻矣. 而不過友靑松群白鹿而止耳. 思吾蹤跡. 出靑松白鹿之外而來. 吾於爾多矣夫. 兩僧抵掌而笑. 遂相與更唱迭酬. 到夜䦨而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