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벽소령 봉산정계 금표 석각과 소금쟁이 능선

도솔산인 2022. 1. 8. 15:15

벽소령 봉산정계 금표 석각과 소금쟁이 능선

 

 

▣ 일 시 : 2022년 01월 07일(금)

▣ 코 스 : 벽소령 작전도로-벽소령-봉산정계 금표-소금쟁이능선-지리산자연휴양림-진평왕 왕자 태실지 금표석각

▣ 인 원 : 3명(선과 임병기님, 자유기고가 김희태님)

▣ 날 씨 : 맑고 쾌청함

 

 

봉산금표(封山禁標)와 태실지, 승탑을 연구하시는 분들과 만남은 서로 일정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이번 답사는 벽소령 봉산정계 금표 석각과 마천면 가흥리 소재 진평왕 왕자 태실지 금표 석각을 조사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덤으로 추가한 것은 벽소령에서 지리산 자연휴양림이 있는 광암동까지 소금길을 확인하는 것이다. 지난 12월 31일 2박 3일 산행을 하고 5일 대전에 올라왔다가 답사 전날(6일) 다시 마천으로 내려가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한 분은 수원에서 또 한 분은 대구에서 불원천리하고 달려왔다. 벽소령 봉산정계 금표는 두 분이 미답이다. 어떤 한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 의견을 나누고 자료를 공유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선과님은 3,000여개의 승탑과 불적을 답사하여 집대성하셨고, 역사문화연구소 김희태 소장은 전국에 있는 태실지와 봉산금표를 모두 답사한 분이다.

 

 

조선시대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봉산금송(封山禁松) 조를 보면 송림 벌목을 매우 엄하게 다스렸다. 송금(松禁)이란 국가가 필요한 목재를 확보하기 위해 소나무가 자라는 곳을 선정해 보호하고 벌목을 금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비슷한 용어로 금산(禁山)과 봉산(封山)이 있다. 이 둘 다 삼림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벌목을 금지한 제도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인구가 증가하고 개간이 진행되어 삼림자원이 황폐되자, 국용재(國用材조선재(造船材궁용재(宮用材) 등을 위해서 소나무 숲 보호에 적극성을 보였고, 법령으로써 송목금양(松木禁養)에 대처해나갔다. 이러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금산(禁山) 제도였다. , 금산(禁山)이라는 것은 땔감 채취·모경(冒耕화전(火田토석(土石) 채취 등을 금하는 것이었다.

 

모경(冒耕) : 주인의 승낙 없이 남의 땅에 함부로 경작하거나 금지된 구역에 농사를 짓는 것.

 

1734년(영조 10)에는 봉산에 대한 그간의 교령(敎令)을 정리, <신보수교집록 新補受敎輯錄>을 편찬하였는데, 봉산지역의 산허리 위로는 화전 개간을 못하도록 강조하고 있으며, 벌채 금지·화기 금지 등을 밝혀두고 있다. <속대전(1746년)>에서도 금산·봉산·의송산(宜松山, 소나무가 잘 자라는 산)·송전(松田)·영액(嶺阨) 등 봉산에 관한 금제 조항이 보이며, 그 위반에 대하여는 엄벌주의가 규정되고 있다. 한편, 황장봉산의 실태는 <속대전>과 <만기요람>에 부분적으로 보인다. 속대전에 따르면 1746년 당시 황장봉산이 경상도에 7개소, 전라도에 3개소, 강원도에 2개소이며, <만기요람(1808년)>에는 경상도 14개소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봉산의 수가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도벌·남벌 때문에 자원 확보의 필요상 늘어난 것이다.

 

注 영액(嶺阨, 嶺阨禁養山) : 조선 시대 국방상의 요지로, 군대의 주둔이나 수원함양(水源涵養), 혹은 토사 유출 방지 따위를 위한 목적으로 설정된 산림.

 

지리산에는 벽소령의 봉산정계 이외에도 피아골의 율목봉산(栗木封山)과 진목봉산(眞木封山) 금표가 있다. 율목봉산(栗木封山)은 왕실에서 종묘의 신주(神主) 신주를 담는 궤를 만들 밤나무를 심고 사람이 드나들지 못하게 금지하던 금표이다. 진목봉산(眞木封山)은 참나무를 베지 못하게 일반 백성의 출입을 금하는 금표이다. 피아골의 봉산금표는 율목(밤나무)과 진목(참나무)이라는 봉산의 목적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벽소령의 봉산정계는 봉산의 경계라는 의미로 봉산의 대상을 명시하고 있지않다. 지리산 국립공원내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봉산동계, 봉산서계 등의 석각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봉산 정계는 어떠한 목적으로 봉산으로 지정되었는지는 추가적인 문헌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 다만 봉산정계(封山定界) 석각의 존재는 지리산 벽소령 일대가 봉산(封山)으로 지정되었고, 그 경계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

 

 

▶ 지리산의 염두고도(鹽豆古道) 벽소령 소금길(211204~05)

 

삼정마을을 출발→설산 습지 초입 마을터에서 오리정골로 진입하여 벽소령 옛길을 따랐다. 벽소령 옛길은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오리정골 바위에 묵서로 쓴 남원(南原)이라는 글자가 눈에 크게 들어왔다. '지리산소금길 염두고도(鹽豆古道소금과 콩의 물류가 이동하는 옛길, 2020)'를 보고 혹시 남원의 상인들이 소금 길인 오리정골 바위에 묵서를 남긴 것은 아닌지 상상을 하였다. 오리정골 소금길은 완만하게 이어진다. 너덜지대에는 가축이 이동할 수 있도록 돌 포장을 하였다. 이정목도 남아있다. 사면 길은 흙이 흘러내려 길폭이 좁아지기도 하지만 이내 다시 넓어진다. 임도와 만나는 지점에 이르면 당시 도로공사로 옛길의 흔적이 묻혔지만, 옛 벽소령 샘터로 오르는 길은 등산로가 아닌 양지쪽으로 옛길의 흔적이 남아있다. 샘터(집터 : 표지목 12-14)에서 벽소령까지는 우마길의 원형이 확연하다. 벽소령에서 소금길은 일직선으로 구벽소령 헬기장으로 이어진다.

 

지난해 12월초 삼정에서 오리정골로 벽소령까지 소금길 일부 구간을 답사하였다. 섬진강을 통해 화개까지 운반된 소금은 육로를 통해 지리산을 넘어 내륙으로 이동한다. 하나는 칠불사에서 화개재를 넘어 남원시 산내로 들어오는 길이고, 또다른 하나는 안당재를 지나 오리정골에서 벽소령을 넘어 함양군 마천을 연결하는 소금쟁이 능선길이다. 지난 답사에서 벽소령 대피소에서 소금쟁이 능선으로 진입하는 사면 길 초입을 확인하였다. 답사팀은 봉산정계를 확인한 후, 벽소령 대피소 앞 목책을 넘어 소금길로 진입하였다. 무거운 소금을 인력으로 운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소를 이용하지 않고는 운반할 수 없다. 마소가 이동하려면 토목공사로 길을 구축해야 하고, 마소가 지나간 길은 발굽으로 인해 골이 깊게 파여있다. 그래서 옛길의 흔적이 남아있다. 길의 폭이 약 2m로 완만하게 구벽소령 헬기장으로 이어진다. 능선길의 대부분은 완만하고 길의 폭이 넓고 간간이 이정목도 남아있다. 마지막 부분에서 휴양림으로 내려가는 급경사길은 최근에 만들어진 등산로이다. 완만한 능선 길에서 비린내골로 비스듬히 내려가는 흔적을 보았지만, 마지막 구간의 소금길 전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끝.

 

 

 

소금길이 보이네

 

▼ 벽소령 봉산정계 석각

 

사진 지리산역사문화조사단 조봉근님(211123)
사진 지리산역사문화조사단 조봉근님(211123)

 

소재지 :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산 161번지

행적자 : 없음     연대 :  미상     석각시기 : 미상

[개요]

봉산(封山)은 금산(禁山)보다 더 특수한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봉산에는 왕이나 왕비의 능묘를 보호하고 포의(胞衣)를 묻기 위하여 정해진 태봉봉산(胎封封山), 황장목을 생산하기 위한 황장봉산(黃腸封山), 밤나무 재목을 생산하기 위한 율목봉산(栗木封山) 참나무를 생산하기 위한 진목봉산(眞木封山) 등이 있다. 봉산(封山)이란 어떠한 목적에 의해 나무의 벌채를 금지한 산을 의미하는데, 조선시대에 이러한 봉산제도를 운영했다. 목적에 따라 왕실에서 쓰일 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과 왕릉, 태실, 제단처럼 신성한 장소에 금표를 세운 사례가 있다. 어떠한 목적으로 봉산으로 지정되었는지는 추가적인 문헌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 다만 봉산정계(封山定界) 명 암각의 존재는 지리산 벽소령 일대가 봉산(封山)으로 지정되었고, 그 경계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김희태 님
가로 43cm
세로 17cm

 

▼ 소금길의 흔적(벽소령~구헬기장~소금쟁이능선)

 

 

▼ 진평왕 왕자 추정 태실지 석각

 

 

古諺傳眞平王入此山時聽封次占此而其后居人皆以噤地云

 

옛날이야기에 전하기를 '신라 진평왕이 이산에 들어왔을 때에 봉지(封地)를 허락한 다음에 이곳을 차지하여 그 후 주민들이 모두 땅에 대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라고 한다.

 

소재지 :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391번지

행적자 : 진평왕    연대 : 조선 후기    석각시기 : 미상

[개요] : 진평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군자사에 와 있을 때 태자를 낳아 태를 묻었다는 태실지에 있는 금표 석각이다. 태실지로 추정되는 곳에 지금은 진주강씨 부인 나주임씨 묘가 있는데 무덤을 쓸 때 태실지에서 금동불상이 나왔다고 구전으로 전한다. 금대산 아래 가흥리 당벌 마을 위에 있다. 예전에는 태실지 주변에 마을이 있었으나 봄에 화전놀이를 할 때 폭력으로 인한 인사 사고가 많이 나자, 마을의 어른들이 향계에서 논의하여 마을을 아래로 옮겼다고 한다. 태실지 주변에는 우물과 석축 등 마을의 흔적이 있다. 석각의 형태로 보아 각이 선명하고 날카롭다. 개인적인 의견은 한말에서 일제 초기에 당흥 마을에 흉사가 이어지자, 마을을 아래로 이전하고 향촌 질서의 안정을 위해 유향소나 향계에서 금표를 설치한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注 진평왕(567~632)은 신라 제26대 임금으로 진흥왕(540~576)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고 진흥왕의 장손자이다. 576년 진흥왕이 서거하자 차자(次子) 진지왕(眞智王,?~579)이 25대 왕으로 즉위한다. 태자인 동륜(銅輪)이 572년(진흥왕 33)에 죽었기 때문에 태자의 아들(당시 10세)이 있었지만, 거칠부의 세력에 힘입어 왕위에 오른다. 진평왕은 함양 마천 영정사(군자사)로 피신한다. 진평왕이 영정사에서 왕자를 낳아서 579년 잠저시 별궁을 군자사(君子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진지왕(眞智王)은 정란과 황음으로 인해 폐위되었다고 한다. 재위 기간은 576년~579년이다. 579년 진평왕은 경주로 돌아가 왕위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