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지리산 천왕봉 일월대 가는 길(211231~220102)

도솔산인 2022. 1. 3. 04:08

지리산 천왕봉 일월대(日月臺) 가는 길(211231~220102)

 

 

▣ 일 시 : 2021년 12월 31일(금)~2011년 01월 02일(일)

▣ 코 스 : 광점동-구롱길 일곱모랭이-방장문-청이당-영랑대-중봉-천왕봉(일월대)-제석당-백무동

▣ 날 씨 : 첫날 영하 17도, 둘째날 셋째날 영하 10도

 

 

지난해 마천면지 편찬위원회에서 함양군 마천면 소재 마애 석각 명문과 비문& 정려에 대한 전수 조사를 하였다. 이 과정에서 마천면 가흥리 도로 옆 밭에서 반쯤 묻힌 승지정태현세불망비(承旨鄭泰鉉永世不忘碑)를 발견하였다. 이곳에는 좌우로 鄭近相施惠不忘碑(정근상시혜불망비)와 鄭殷相施惠不忘碑(정은상시혜불망비)가 있다. 정태현(鄭泰鉉)은 천왕봉 일월대의 필획과 같은 이름이고, 鉉과 相은 하동정씨 문헌공파 항렬자이다. 이런 연유로 남계 서원을 찾게 되었고, 문화해설사 정효순님에게 하동정씨 문헌공파 세보를 확인하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이렇게 해서 만난 분이 문헌공파 종회장 정천상님이다. 죽헌 정태현(鄭泰鉉, 1858~1919) 공은 정천상 님의 큰할아버지이다. 세보를 확인하니 정근상(鄭近相,1893∼1934)은 하동정씨 문헌공파 16대 종손이고, 정은상(鄭殷相, 1896~1957)은 죽헌 정태현공의 장손자이다. 

 

지리산 천왕봉 정상석 남쪽 경사진 바위 면에 일월대(日月臺) 석각이 있다. 일월대(日月臺)는 일출과 일몰, 월출을 완상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상봉(上峯), 천주(天柱)와 더불어 천왕봉의 다른 이름이다. 선인들의 유람록에 일월대(日月臺)의 기록은 1643년 박장원의 유두류산기에 처음 등장한다. 1719년 신명구의 유두류일록, 1724년 조구명의 유두류산기, 1724년 정식의 두류록에도 보이는데, 지리산 천왕봉 정상을 가리킨다. 일월대 석각은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에 '봉우리 남쪽은 일월대인데, 오르면 일월(日月)의 출입을 볼 수 있는 까닭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새로 새긴 대의 이름자는 크기가 팔뚝 만한데 정죽헌이 쓴 글씨이다.(峯之南日月臺上可望日月之出入故錫名而新刻臺名字書如腕大乃鄭竹軒所書也)'라고 기록하고 있다. 죽헌(竹軒)은 정태현(鄭泰鉉, 1858~1919)의 호이다. 정태현(鄭泰鉉)은 일두 정여창의 14대 후손으로 대한제국기(1901년) 충북관찰사, 가선대부 등을 역임한 관료이다.

 

 

 

지리산 천왕봉 일월대(日月臺) 석각

소재지 :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 100번지(천왕봉)/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 208번지

행적자 : 정태현(鄭泰鉉, 1858~1919)   연대 : 한말&일제강점기    석각시기 : 고종23년 병술(1886년)

 

 

 

▶ 지리산 천왕봉 천주(天柱) 석각

 

지리산 천왕봉 천주(天柱) 석각

 

소재지 :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 100번지(천왕봉)/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 208번지

행적자 : 미상   연대 : 미상    석각시기 : 미상

[개요]

하늘을 받치고 있는 기둥처럼 우뚝하게 솟아 있다는 의미이다. 와황석(媧皇石)이라고도 한다. 와황(媧皇)은 상고 시대 제왕(帝王)인 여와씨(女媧氏)를 가리키는데, 일찍이 공공씨(共工氏)가 축융(祝融)과 싸우다 부러뜨린 천주(天柱)를 “여와씨가 오색의 돌을 구워 보수하고 자라의 발을 잘라 사방을 지탱할 기둥으로 세웠다.〔女媧氏 鍊五色石以補蒼天 斷鰲足以立四極〕”라고 한다. 《淮南子 卷6 覽冥訓》 중국의 오악(五岳)인 형산(衡山)에 천주봉이 있다. 한유(韓愈)의 謁衡嶽廟遂宿嶽寺題門樓(형악묘에 배알하고 드디어 형산의 절에서 묵으며 문루에 제하다.) 시에 "자개봉은 길게 뻗어 천주봉에 닿았고, 석름봉은 솟아올라 축륭봉을 쌓았다네.(紫蓋連延接天柱 石廩騰擲堆祝融)"라는 시구에 천주(天柱)가 있다. 김종직은 1472년 8월 14일 천왕봉에서 한가위 달맞이를 천주(천왕봉)의 즐거운 놀이(勝遊天柱)로 표현하고 있다. 추가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일월대와 같은 정태현의 필획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中秋天王峯不見月[중추절에 천왕봉에서 달을 보지 못하다.]

 

                               金宗直(김종직)

 

抽身簿領陟崔嵬 : 공무에서 잠시 벗어나 높은 산에 올랐는데

剛被良辰造物猜 : 좋은 날 조물주 강한 새암을 받는구나.

霧漲寰區八紘海 : 운무는 천지에 넘쳐서 팔방(팔굉)이 바다이고

風掀巖石萬搥雷 : 바람이 바위에 몰아쳐 뇌성벽력을 치네.

勝遊天柱知難繼 : 천왕봉 달맞이 놀이(승유) 계속되기 어려워

淸夢瓊臺未擬回 : 경대의 맑은 꿈 다시 함을 헤아리지 못하겠네.

時有頑雲暫成罅 : 때때로 무지막지한 구름 잠시 틈을 만들지만

誰能取月滿懷來 : 누가 보름달을 취해 가슴에 품고 올 수 있으리.

 

 

注 簿領 장부부, 기록할령. 장부에 기록함, 공무. 寰 : 기내환, 천하환, 하늘아래, 인간세상 천하 세계 寰區 : 천하 천지 八紘 : 팔굉 넑은굉 팔방 천지, 掀 :치켜들흔 높은모양, 흔 掀轟 : 바람이 몰아치는 굉음, 搥 : 칠추, 던질퇴 萬 : 클만. 瓊臺 : 천태산(天台山)의 서북쪽에 위치한 산봉우리의 이름. 擬 : 헤아릴의 비길의, 본뜰의, 향할의. 의심할의. 頑雲 : 흉악한 구름. 무지막지한구름 罅 : 틈하

 

 

▶ 승지정태현영세불망비(承㫖鄭泰鉉永世不忘碑)

 

승지정태현영세불망비(承㫖鄭泰鉉永世不忘碑 , 1906)

 

소재지 :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1215번지

행적자 : 승지 정태현(鄭泰鉉, 1858~1919)  연대 : 한말과 일제강점기    석각시기 : 光武 丙午(광무 병오) 1906년

[개요] 

승지정태현영세불망비(承㫖鄭泰鉉永世不忘碑) 승지(비서원승) 정태현을 긴 세대 동안 잊지 않는 비. 光武 丙午(광무 병오, 1906년)에 새김. 밭 가운데 바위에 마애석각 비가 세 개 있는데 가운데 있는 비다. 좌우로 정근상시혜비(鄭近相施惠碑, 문헌공 정여창의 16대 종손)와 정은상시혜비(鄭殷相施惠碑, 죽헌 정태현의 장손자)가 있다. 새로 도로를 내면서 밭보다 높게 건설하였는데 산사태가 나서 비문이 땅속에 반쯤 파묻혔다.

 

由來功德 : 유래가 있는 가문의 공덕

家頌戶吟 : 가가호호 칭송을 하는구나.

此山幷屹 : 이 두류산과 나란히 우뚝하고

觀海同深 : 바다를 본 사람 같이 깊도다.

非徒介石 : 지조가 바위 같을 뿐만 아니니

宜以鏤金 : 금석문에 새기에 마땅하도다.

猶難盡紀 : 오히려 다 기록하기 어려우니

印口銘心 : 사람들 입과 마음에 새겨졌네.

 

注 개석(介石) : 절개가 돌같이 단단하다는 뜻. 곧 굳게 절의를 지킴을 이르는 말. 을사보호조약(1905년)이 체결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함.

 

 

 

▶ 관찰정태현영세불망비(觀察鄭泰鉉永世不忘碑)

 

관찰정태현영세불망비(觀察鄭泰鉉永世不忘碑 , 1904) 병곡면에 있던 비석을 상림공원으로 옮겨옴.

 

소재지 : 함양군 함양읍 상림공원

행적자 : 승지 정태현(鄭泰鉉, 1858~1919)  연대 : 한말과 일제강점기   

석각시기 : 1904년(甲辰) 4월

 

[개요]

정태현 관찰사는 어른을 공경하고 예를 중시하여 오랜 폐습을 고쳐 대여 곡 이율을 감하였으며, 학문을 권장하는 규정을 정하여 스스로 본을 보였으므로 이 고을 사람들이 이를 기리기 위하여 1904년(광무 8년) 4월 영세불망비를 세웠다.(상림공원 안내판에 1844년 4월(헌종 10년)은 오류로 보임)

 

 

 

합양읍 상림공원에 관찰정태현영세불망비(觀察鄭泰鉉永世不忘碑, 1904)와 마천면 가흥리에 자연 암석에 새긴 승지정태현영세불망비(承㫖鄭泰鉉永世不忘碑, 1906)가 있다. 만석꾼의 부호로 수해와 흉년이 들면 백성들을 구휼하여 여러 곳(함양 휴천면, 충북 음성)에 영세불망비가 있다. 1901년 충청관찰사로 부임하여 해를 이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 죽자 함양 본가에서 수천 석의 곡식을 운반하여 道民을 구휼하였다.(하동정씨 문헌공파세보) 

 

注 하동정씨 문헌공파 세보 : 신축(1901)년 승진하여 충청 관찰사가 되어 민생의 폐단을 제거하고 군덕(君德)을 펼쳤다. 해를 이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많이 굶어 죽자, 함양 본가에서 곡식 수천 석을 운반하여 한도(一道)의 백성들을 살렸다. 지금까지 칭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辛丑陞爲忠淸觀察使 去民瘼宣君德 連歲饉荒 民多餓死 運穀數千石于咸陽本家 以活一道之民 至今頌聲不衰)

 

지난해 9월 10일 일월대(日月臺) 정태현공의 자료 수집을 위해 남계서원을 찾았고, 12월 중순 문화해설사 정효순님과 정순구님의 안내로 죽헌 정태현 선생의 후손분들을 만났다. 죽헌집은 숭산정사의 화재로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지 않아 경상대학교 도서관장 기근도 교수님께 도움을 요청하였다. 기근도 교수님께서 죽헌집 영인본 2권을 하동정씨 문헌공파 종회장 정천상님에게 보내주셨다. 12월 30일 죽헌집에서 일월대의 석각 시기를 확인하기 위해 함양 지곡에 내려왔고, 정천상 종회장님의 안내로 죽헌공의 묘소를 찾았다. 그리고 죽헌집의 가장(家狀)과 행장(行狀)에서 죽헌 정태현공이 28세때에 두류산을 유람하고 천왕봉에 석각을 한 기록을 확인하였다.

 

죽헌공 25세 1883(계미)년 7월 동몽교관에 제수되어 출사 한다. 1886(병술)년 한성부 주부(전환국위원)가 된다. 전환국은 지금의 조폐공사이다. 그해 죽헌은 지리산을 유람한다. 가장과 행장에 그 기록이 있는데 글자 몇자만 다르고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看盡千萬疊之句'는 일두 정여창이 탁영 김일손과 두류산을 유람하고 남긴 '遊頭流到花開縣[두류산을 유람하고 화개현에 이르러]'의 3구를 가리키는 듯하다.

 

※ 죽헌집 권지칠 부록 가장(竹軒集卷之七 附錄 家狀)

 

1886(병술)년 한성부주부 전환국 위원이 되었다. (중략) 다시 두류산과 덕유산을 다시 유람하면서 선조 문헌공께서 유람하신 곳과 지나가신 곳에 대해서는 두루 찾아가 감개하며 시를 짓지 않음이 없었다. 두류산 상봉에 이르러 특별히 시를 짓고 바위에 글자를 새긴 것은 '간진천만첩(看盡千萬疊)'이란 선조의 시구에 더욱 감격했기 때문이다.

 

丙戌 漢城府主簿典圜局委員(중략)再遊頭流德裕 而至於先祖文獻公杖屨所 過之處 莫不周訪感賦 至於頭流上峯 特題詩刻石者 益感看盡千萬疊之句也.<竹軒集卷之七 附錄 家狀>

 

注 至於 : ~에 관해서, ~에 대하여

 

 

遊頭流到花開縣[두류산을 유람하고 화개현에 이르러]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540~1504)

 

風蒲獵獵弄輕柔 : 바람이 하늘하늘 부들 풀을 부드럽게 희롱하는데
四月花開麥已秋 : 4월 달 화개 고을은 보리 이미 거둘 때였네.
看盡頭流千萬疊 : 두류산 천만 첩을 다 구경하고 나서는
扁舟又下大江流 : 한 척의 돛단배로 또 큰 강 따라 내려간다네.

 

 

12월 31일 광점동에서 방장문을 지나 영랑대로 향했다. 청이당터에서 영하 10도, 영랑대에 오르니 영하 17도로 기온이 곤두박질쳤다. 날씨는 쾌청했지만 바람이 매서웠다. 차가운 공기가 기도로 들어갈 때의 느낌은 머리가 아프고 숨이 막혔다. 콧물이 국수 가닥처럼 흘러내렸다. 동공이 얼어붙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광점동에서 영랑대까지 8시간이 넘게 걸렸다. 어둠이 내리자 밤새도록 바람이 몰아쳤다. 지리 동부의 정령들이 포효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날 아침 바람이 잦아들고 고요한 새해가 밝았다. 본래 세석연못까지 가기로 하였으나, 영랑대에서 새해의 일출과 조망을 여유있게 즐겼다. 어떤 일이든 포기를 하면 마음이 금방 편해진다. 사람도 그렇다. 중봉으로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눈이 적었다. 오늘의 목적지를 바꾸었으니 급할 것이 없었다. 상봉에서 칠선계곡 방향의 미륵 바위를 폰에 담았다. 어느 해 겨울 여기에 단사천님이 막걸리 한 병을 묻어놓았었지. 그 이후로는 천왕봉에서 그분의 종적(蹤迹)을 찾을 수 없다.

 

일월대(日月臺) 석각에 이르러 주변에 있는 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술을 한 잔 올렸다. 석각의 시기는 1886년 병술년으로 죽헌공이 28세 때의 일이다. 일두의 14대 후손 죽헌 정태현이 일두의 발자취를 좇아 두류산을 유람하고 상봉에 올라 시를 짓고 각을 하였다. 일월대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지만 가장(家狀)에 있는대로 받아들이면 그렇다. 강계형의 유두류록에 '새로 새겼다.(新刻)'라는 기록은 본래 있던 석각이 마모되어 다시 새로 새겼을 가능성도 있다. 1891년(신묘)에 부친(양부)상을 당하고, 1893년(계사)에는 친부상을 당한다. 정태현공은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지만, 이런 연유로 사직소를 올리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1901년 충북관찰사로 나갔다가 1905년 벼슬에서 물러나 도숭산 아래 숭산정사(崇山精舍)를 짓고 후진을 양성한다. 개평 마을에 관찰사댁이 있는데, 화재로 소실되어 빈터만 남아있다. 이곳이 숭산정사(崇山精舍)이다. 죽헌공이 태어난 생가는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지금은 후손인 종손자(從孫子, 하동정씨 문헌공파 종회장) 정천상님이 살고 있다. 일월대 석각 측면 암벽에 있는 참봉 정근상(鄭近相,18931934 하동정씨 문헌공파 16대 종손)의 인명 석각도 확인하였다. 정근상(鄭近相)은 1926년 문헌공 일두 정여창 선생 신도비를 중건(重建)한 인물이다. 

 

 

정근상(鄭近相,1893~1934) 하동정씨 문헌공파 16대 종손[사진 박성섭님]
정근상(鄭近相,1893~1934) 하동정씨 문헌공파 16대 종손 [사진 박성섭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프랑스어로 "귀족은 의무를 갖는다"라는 의미이다.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회지도층에게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단어이다. 천왕봉 일월대 석각 필획의 주인공 관찰사 죽헌(竹軒) 정태현(鄭泰鉉, 1858~1919) 공은 당시 부와 학문, 권력과 명성을 가진 사회의 지도층으로 한말 격변기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끝.

 

 

▶ 죽헌(竹軒) 정태현(鄭泰鉉)의 생가와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선생 신도비

 

죽헌 정태현공의 생가
죽헌 정태현공의 생가
솔송주 문화관
문헌공일두정선생신도비각[16代孫近相謹追錄 丙寅(1926년)7月 日重建]

 

☞ 정태현 鄭泰鉉[1858년(철종 9)~1919년]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여칠(汝七). 호는 죽헌(竹軒), 아버지는 현감(縣監) 정재범(鄭在範)이며, 어머니는 나주임씨(羅州林氏) 임병조(林炳祖)의 딸이다. 백부인 감역(監役) 정재행(鄭在行)에게 입양되었다. 1883년(고종 20) 천거로 동몽교관(童夢敎官)이 되고, 1886년 한성부주부(漢城府主簿)가 되었다. 1894년 동학난이 일어나자 두동(杜洞)으로 들어가 살면서 어려운 친척들에게 토지를 떼어주고 동리의 어려운 자들을 모두 도와주니 목비(木碑)와 석비(石碑)가 많이 세워졌다.

 

관찰사(觀察使)와 어사(御史)가 포계(褒啓)하였고, 이듬해 홍능(洪陵)의 역사에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진전감동관(眞殿監董官)에 임명되었으나 또 나가지 않았다. 1897년 이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비서원비서승(秘書院秘書承)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고, 1901년 충북관찰사(忠北觀察使)에 임명되었는데, 민영환(閔泳煥)은 국가가 좋은 사람을 등용했다고 정태현의 등용을 기뻐했다.

 

취임 후 선정(善政)을 베풀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으며,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모방하고 이이(李珥)의 규례(規例)를 참작하여 도향약(道鄕約)을 만들었는데 얼마 안되어 면소(面所)에까지 시행되었다. 백성들은 생사당(生祠堂)을 세우려 하였고, 임금은 그의 공명 정대하고 용왕매진(勇往邁進)하는 것을 크게 칭찬했다. 1905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뒤에 벼슬에서 물러나 도숭산(道崇山) 남쪽에 숭산정사(崇山精舍)를 세우고 책을 구입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정태현이 죽은 후 유림들에 의해 향교장(鄕校葬)을 거행했으며 숭양정(崇陽亭)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죽헌집(竹軒集)』 3책이 있다. [출처] 다음백과

 

 

관찰사 죽헌 정태현 공의 묘소
하동정씨 문헌공파 세보

 

辛丑陞爲忠淸觀察使 去民瘼宣君德 連歲饉荒 民多死 運穀數千石于咸陽本家 以活一道之民 至今聲不衰

 

신축(1901)년 승진하여 충청관찰사가 되어 민생의 폐단을 제거하고 군덕(君德, 임금의 덕)을 펼쳤다. 해를 이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많이 굶어죽자, 함양 본가에서 곡식 수천 석을 운반하여 한도(一道)의 백성들을 살렸다. 지금까지 칭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注 오자로 보여서 수정하여 국역함(餞→餓, 領→頌)

 

죽헌집권지칠 부록 가장(竹軒集卷之七 附錄 家狀)

 

「1886(병술)년 한성부주부 전환국 위원이 되었다. (중략) 두류산과 지리산을 다시 유람하면서 선조 문헌공께서 유람하신곳과 지나가신 곳에 대해서는, 두루 찾아가 감개하여 시를 짓지 않음이 없었다. 두류산 상봉에 이르러 특별히 시를 짓고  바위에 글자를 새긴 것은 '간진천만첩[看盡千萬疊(두류 천만 첩을 다 구경하고)]이란 문헌공의 시구'에 더욱 감격했기 때문이다.<죽헌집권지칠 부록 가장>」

 

丙戌 漢城府主簿典圜局委員(중략) 再遊頭流德裕 而至於先祖文獻公杖屨所 過之處 莫不周訪 感賦至於頭流上峯 特題詩刻石者 益感看盡千萬疊之句也.<竹軒集卷之七 附錄 家狀>

 

일곱 모랭이
방장문
하봉 무덤
사진 미산님
선암(船巖)
선암(船巖)
미륵바위
일월대 정태현서
제석당(帝釋堂) 박노익건옥(朴魯翊建屋) 임술(壬戌 1922년) 7월○일
탁본 출처 : 지리산역사문화조사단

 

소재지 :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산 100번지

행적자 : 박노익  연대 : 일제강점기  석각시기 : 1922년

[개요] :

면암 최익현 선생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전라북도 태인에서 제자 임병찬(林炳瓚, 1851~1916)과 창의를 한다. 그 준비 과정에서 병오년(1906) 윤4월 10일 113명에 달하는 지사들의 연명부인 동맹록(同盟錄)을 작성한다. 박노익(朴魯翊) 선생이 면암집 동맹록에 이름이 올라있다. 박노익(朴魯翊, 1875~?) 선생은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마천면 창원 마을에 살았던 인물이다. 본관은 밀양, 字는 성순(性舜), 號는 춘파(春坡), 벼슬은 참봉(參奉) 乙亥(1875년)생이다. 1906년 면암 최익현 선생의 창의에 참여하였고, 한일 강제 합병의 시점에 2대 마천면장을 지낸 인물이다. 면장의 임기를 마치고 1922년 함양군수 민인호가 주관하는 함양고적보존회 사업에 참여하여 영원사 승려들과 제석봉에 제석당 건물을 지었다. 제석당의 바위에 그의 마애 석각 명문이 남아 있다.

 

 

제석당터
옛제석당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