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선열암에서 아홉모롱이길로 청이당까지(210612~13)

도솔산인 2021. 6. 14. 12:26

선열암에서 아홉모롱이길로 청이당까지(210612~13)

 

 

▣ 일 시 : 2021년 06월 12일(토)~13(일)

▣ 코 스 : 송대-선녀굴-선열암-독녀암(노장대)-신열암-의논대-고열암-미타봉(소림선방)-아홉모롱이길(방장문)-청이당-승탑터-얼음터-광점동

▣ 인 원 : 1일차 3명(버들피리님, 정대장님), 2일차 4명(유목민님, 통영 쉬불링님, 진주 솔길님, 광주 장골님)

▣ 날 씨 : 맑음

 

 

점필재 김종직은 함양 군수로 5년간(1470~1475)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거쳐 지리산 천왕봉을 유람한다. 첫 번째 유람은 1472년 8월 14일 문인 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 매계(梅溪) 조위(曺偉), 회헌(晦軒) 임정숙(林貞叔), 한인효(韓仁孝, 字 百源) 등과 함께 함양 관아를 출발하여 고열암과 성모사, 향적암, 영신사에서 숙박을 하며 4박 5일간 유람하고 유두류록을 남긴다. 두 번째는 1475년 4월 문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신정지(申挺之) 등과 함께 성모사에서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천왕봉에 오른다.

 

김종직의 유두류록 길을 답사하면서 오랫동안 구롱(九隴)과 동부(洞府)를 풀지 못하였는데, 지난해 2월 초 남명(南冥)의 13대 후손인 산영(山影) 曺교수님과 남사마을 니사재 송월당(松月堂)의 18대 후손인 칠성(七星)님을 만나 구롱(九隴) 길과 동부(洞府)를 찾게 되었다. 칠성님은 故 마등자 님의 장례식장에서 처음 만났다. 두 분은 상류암 터에서 초령 루트를 잇는 과정에서 외육촌 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유람록이 혈연을 만나게 하는 희연(喜緣)이 되었다. 이렇게 선인들의 유람록이 과거와의 인연을 잇기도 하지만, 척(隻)을 지는 악연(惡緣)이 되기도 한다. 두 분과 함께 상류암에서 초령(사립재)를 연결하였으며, 구롱(九隴, 아홉 모롱이) 길도 완성하였다. 지금은 그분들과 유몽인 길을 함께 걷고 있다.

 

지난해 가을 가객님이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구'를 발간한다는 소식을 듣고 고민을 많이 하였다. 어떻게든 이 시점에서 매듭을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회를 놓치면 다시 오지 않기 때문이다. 일정(一丁) 민선생님과 송연(松然) 백교수님께 상의를 드리니 두 분이 모두 공감을 하셨다. 그러나 가객님 주변 사람들은 그조차도 곡해(曲解)를 많이 하고 있는 듯하다. 어찌 되었든 가객님의 유두류록 탐구 과정에서 삼열암의 발견은 신유두류록 복원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가객님의 동강설(洞江說)은 김경렬 선생의 의탄설(義呑說)을 뒤집는 대반전이었다. 의탄설(義呑說)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린 사건이었다. 오랜 기간 어려운 과정을 거쳐 지난해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구' 발간은 지리산 인문학에서 유람록 복원이라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함양군도 학계도 점필재의 후손들도 손을 대지 못한 일이다. 유두류록 복원이라는 유일무이한 첫걸음을 떼어놓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비용과 에너지, 그리고 개인적으로 많은 희생이 뒤따랐을 것으로 생각한다.

 

한말(1896년) 우리 문중은 사람들을 모아 김산(金泉) 의병을 일으켰다가 폭도가 되었고, 나는 학창 시절에 친구들을 모아 일찍 사회 공부를 하다가 관심받는 학생이 되어 고등학교를 4년 다녔다. 그래서 나는 사람 모으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이 많은 곳에도 가지 않는다. 떼박도 떼산도 하지 않는다. 얼마 전 5월 22일 아홉 모롱이길 사립재골에서 지리 99 운영진을 만났다. 그중에 이재구 선생도 있었는데, 문득 '점필재의 향로봉이 목젖봉이다.'라는 황설(荒說)이 떠올랐다. 또한 그분의 얼굴에서 '내가 소림 선방의 색다른 해석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라는 말이 교차되었다. 당동벌이와 자화자찬을 모토(motto)로 하는 지리99에서, 해박한 고전과 유려(流麗)한 필력으로 운영진과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 자가 함부로 이런 말을 하고도 감당할 수 있는지. 운영진이 구롱길을 답사하고도 기록을 남기지 않는지.  

 

그래도 아홉 모랭이 구롱 길을 맨 처음 추론한 사람은 엉겅퀴 이재구 선생이다. 그는 문바위골 주막터에서 사립재까지 실선으로 표기된 지리산길 지도를 밖으로 꺼냈다. 그 시점에 솔레이 이용훈 박사도 지도에 형광펜으로 선을 그려 보내왔다. 구롱 길의 일부 구간이지만, 공교롭게 두 분의 의견이 일치했다. 그때 유람록 답사는 체력과 지구력이 아닌 지력(智力)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2020년 2월부터 작정을 하고 상류암터와 옹암(진주 독바위)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박여량의 초령 길(상류암→사립재)과 청이당에서 구롱을 지나 방장문에서 문바위골 주막터까지 확인하였다. 다시 주막터에서 1박을 하고 사립재골 습지까지 이어나갔다. 다음은 고열암에서 자고 일강을 넘어 미타봉에서 사립재골 습지를 연결하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산친들이 나를 도왔다. 작년에 점필재 길을 30여 회 답사를 하였고, 지금도 답사는 계속 진행 중이다.

 

유람록 답사를 하며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은 꼭대님이다. 유람록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독산 능력도 의문이다. 과거에 얼마나 어떻게 언제까지 치열한 산행을 했는지 몰라도 산행 이력(履歷)이 의심스럽다. 입에 거품을 물고 나에게 '병풍에 그린 닭'도 모자라, '북두재 소나무를 고사시킨 병충해', '모든 구간을 끼워 맞추기 위하여 억지', '독불장군식', '자신의 한문 실력을 과시',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욕심', '진정성 없는 탐구 의견은 오히려 혹세무민', '겉멋만 부리지 말고, 제대로 배우고'... 거기에다가, 지난해에는 '해커', '소림 선방 날조', '야합'까지 그림 속의 닭을 보고 도끼를 휘둘렀다. 옆에서 거드는 악플러들도 적의(敵意)가 만만치 않았다. 나는 '자네'라는 호칭을 누구에게도 쓰지 않는다. 학교 선생을 해서 그런지 '자네'라는 말을 들어본 일도 없다. 가정과 사회에서 나름대로 위치가 있는데, 거꾸로 상대방이 초면에 꼭대님에게 '자네'라고 해도 괜찮은지. 말과 글은 자신의 인격이다. 하나 더, 꼭대님의 대리 부착 시그널에 대해서는 할 말을 잊었다. 이것이 바로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는 탐진치(貪瞋癡)가 아닌지.

 

최근 답사를 하면서 등산로 개방에 따른 주민들의 우려를 읽을 수 있었다. 산을 생활 터전으로 사는 주민들 대부분은 등산로 개방에 찬성하지 않는다. 유두류록 탐방로가 개방되면 좁은 도로가 확장될 것이라는 기대감은 있지만, 등산객들이 한번 지나가면 두릅, 엄나무, 오가피, 옻순, 겨우살이, 산청목, 잣, 마가목, 오미자, 다래, 머루, 제피, 산채, 더덕, 당귀, 곰취, 작약, 버섯 등이 남아나지 않는다. 나 또한 그 유혹을 떨쳐버리기는 어렵다. 특히 산속에 산양삼을 재배하는 분들은 큰 걱정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리산 동북쪽의 두릅 최상품은 kg당 50,000원을 호가하는데, 제 철이면 한 사람이 하루에 10kg를 채취한다고 한다. 이렇듯 등산로 개방이 주민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지리 99에서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방로를 천왕봉까지 개방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인지. 하루에 적조암에서 천왕봉까지 올라가서 하산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되는지. 아홉 모랭이 길의 사립재골과 문바위골, 방장문골은 생태계의 보고이다. 세 모랭이, 네 모랭이, 다섯 모랭이의 새봉 지능선에는 반달곰이 활동하는 지역이다. 1,000m 이상의 고원 지대에 습지도 발달되어 있다. 지리산에서 유일하게 환경부 멸종위기 야생생물 Ⅱ급 나도승마가 자생하는 지역이다. 유두류록 길을 학술적으로 복원하는 일은 공감하지만, 전면적인 개방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또 하나는 유두류록 탐방로 하산길(벽송사)에 대한 시비이다. 적조암을 출발하여 독녀암을 지나 향로봉과 미타봉까지 산행을 하고 다시 적조암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주장은 한마디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내가 보기에는 오로지 공명에만 눈이 어두워 자기들을 알아달라고 생떼를 쓰는 목소리로 들린다. 7월 초면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방로의 개방이 확정된다고 한다. 가객님의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구'에 오류는 없는지 다시 확인하고 수정할 필요가 있다. 기록은 책으로 내는 순간부터 무한 책임이 뒤따른다. 끝.

 

 

선녀굴
선녀굴에서 미타봉으로 가는 석문
선열암
독녀암(노장대)
신열암
의논대에서 독녀암(노장대)
의논대에서 바라본 미타봉
고열암
나는 상내봉이 아니라 미타봉이다.
미타봉 샘
목젖봉이 내 눈에는 코끼리 형상으로 보인다.
미타봉 소림선방 정원
와불산 향로봉
채토장(?)
도솔의 정원
두 모롱이 이정목
세 모롱이 가는 길
세 모롱이 이정표 바위(이곳이 사립재로 가는 갈림길)
만약 유극기가 석각을 새겼다면 이 바위가 아닐까.(바위를 살피는 유목민 팀)
'유극기로 하여금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 전면(한복판)에 이름을 새기게 하였다.'
네 모롱이 이정표 바위
풍도목 제거
일곱 모롱이 이정목
여덟 모롱이 이정목과 쉼터 바위
여덟 모롱이의 방장문과 방장문 석각
쑥밭재에서 청이당으로 진입하는 길
천례탕(?)
점필재가 쉬어간 청이당터 앞 계석(溪石)
청이당 터와 석축
석상용 선생 墓碑(1921년)

석상용(1870~1920) 선생이 1920년 망국의 한을 간직한 채 세상을 떠나자, 석상용 선생의 동생 채용(彩龍)씨가 1921(신유)년 1월 이 묘비를 세웠다. 일제강점기 유일하게 세워진 의병장의 비석이다. 해주 석씨 세보에 석상용 선생의 묘소 위치가 두류암(頭流巖)으로 기록되어 있다.

 

 

석상용(1870~1920) : 마천면 추성리 출신 의병장. 일본은 1907년 강제로 정미 7 조약을 맺고 조선 관군을 해산시켰다. 일본군이 전국 각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실상사에 주둔하고 있던 왜병을 석상용(石祥龍) 장군이 의병과 화전민을 규합하여 1908년 음력 327일 그믐 어두움을 타고 기습하였다. 지리산을 은신처로 하며 쑥밭재 전투, 벽소령 전투, 성삼재 등에서 기습작전을 하였다. 1912년 왜군에게 잡혀 진주형무소에서 5년간 옥고를 치르고, 고문의 여독(餘毒)으로 고생하다가 50세의 아까운 나이로 순국하였다.

 

 

두류암(頭流巖)으로 추정되는 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