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타봉에서 아홉모롱이길로 청이당까지II(210606~07)
▣ 일 시 : 2021년 06월 06일(일)~07(월)
▣ 코 스 : 광점동-얼음터-사립재골 습지-일강-미타봉-향로봉-미타봉-아홉모롱이길(방장문)-청이당-승탑터-얼음터-광점동
▣ 인 원 : 4명(문호성님, 정삼승님, 박준현님)
▣ 날 씨 : 맑음
두 주일 만에 다시 점필재의 아홉 모롱이 길을 걸었다. 지난해 3월 曺박사님과 칠성님의 도움으로 점필재의 아홉 모롱이 길을 완성했을 때, 발견의 기쁨은 말로는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우천불문 매주 산친들과 공동으로 집중적인 답사를 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다시 확인 답사를 계속하면서 지난해 5월 16일에는 방장문 석각을 발견하였다. 이후에도 답사를 멈추지 않았고, 아홉 모롱이 길에 대한 확신이 들면서 케른으로 길 표시를 시작하였다. 대개 사립재 습지와 주막터 이후, 방장문을 지나 마지막 아홉 모롱이에서 길을 놓친다. 길이 뚜렷하지 않은 곳에 붉은 비표를 부착했는데, 이번 산행에서 대부분 수거하였다. 결자해지(結者解之)가 아니던가. 그런데 누군가 고맙게도 주막터에서 방장문까지 나보다 먼저 수거를 했더라.
또 하나는 점필재의 유두류록에 '유극기로 하여금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 한가운데에 이름을 새기게 하였다.(使之刮苔蘚。題名于巖腹)'라는 문구이다. 국역본마다 해석이 다른데, 내 생각은 '유극기로 하여금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의 전면(복판 腹板)에 이름을 새기게 하였다.'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그러나 석각을 새겼다고 해도 550년의 오랜 세월에 풍화되어 남아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래도 마지막 퍼즐을 맞춰보려고 하였으나, 일행 중에 구롱(九隴) 길을 처음 걷는 분이 있어 석각에 대한 조사는 다음으로 미루었다. 한 가지 별일(別事)은 미타봉 샘 입구에 친절하게 후답자를 위해 전면에 손글씨로 쓴 '샘터 화살표시'와, 뒷면에는 '나 돌아갈 곳'이 인쇄된 샛노란 치마를 입은 시그널이 바람에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내가 길눈이 어두워 샘터를 찾지 못하는 것을 알고, 참으로 갸륵하고도 고마운 배려가 아닌가. 끝.
이곳은 실제로 주막터였다. 광점동에 살았던 故 이봉덕(대략 51년생)씨 선대부터 1968년까지 이곳에서 주막을 운영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골짜기마다 화전민들이 많이 살았다. 이 집터는 아홉 모롱이 길과 얼음터에서 새재로 넘어가는 교차점 4거리에 위치해 있다. 1968년 김신조와 울진 삼척 무장공비 사태로 화전민이 소개되면서 정부에서 화전민들에게 벽송사 입구에 주택을 지어주었다. 지금도 그 집들이 남아있다.(조사자 : 문호성 회장님) 曺박사님이 이곳을 주막터라고 추정한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지리산 역사문화 조사단과 이곳을 한번 답사한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조용헌 박사는 '아홉모랭이 사거리 주막터'에 대한 글을 썼다.
[조용헌 살롱] [1247] 지리산 형제봉 주막... 아홉모랭이 사거리 주막터'
지리산 동북부의 산청군 유평리 새재 마을. 여기도 해발 700~800m는 된다. 새재에서 출발하여 함양군 마천 추성리로 넘어가는 산길도 대략 40리가 넘는다. 1000m가 넘는 고갯길을 넘어야 한다. 중간에 옛날 주막집 터가 하나 있었다. '아홉 모랭이 사거리 주막터'이다. 해발 1100m 높이. 옛날에는 이 지점이 사거리로 불렸다니 흥미롭기만 하다. 그만큼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는 이야기 아닌가. 왜정 때까지 주막집이 유지되다가 6·25를 전후하여 철거되었다고 한다.(1968년 철거됨) 지금은 빈터의 녹색 신록 속에서 온통 새소리와 계곡 물소리만 들린다. 주막집이 아니라 신선이 거처했던 곳 같은 정취이다. 여기에서 1시간 정도 숲길을 더 걸어가니 청이당 터가 나온다. 여기는 물이 많아서 주막에서 샤워를 하고 탁족을 하기가 좋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고 계곡 물소리만 들린다. [조선일보 2020.06.01]
이곳은 암자터는 맞지만 선인들의 유람록과 천령지에 나오는 두류암(頭流庵)은 아니다. 천령지는 1656년 정수민이 사찬(私撰)하고, 1888년 그의 후손 정환주가 간행한 읍지이다. 천령지에 '두류암 동쪽에 송대 마을이 있다. 지금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서 송대 마을은 서북쪽에 위치한다. 해주 석씨 세보를 확인하니 석상용 선생의 묘소 위치가 두류암(頭流巖)이다. 한자가 다르다. 이곳이 두류암(頭流庵)이면 해주 석씨 세보에 두류암(頭流庵) 북쪽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승탑은 본래 1975년경까지 2기가 있었으나, ○○○씨가 복장품 때문에 넘어뜨렸다고 주민들이 말하고 있다. 1975년 이후에 1기는 반출되었다. 1994년 마천 향토지 편찬을 위해 자료를 조사할 당시 탑신이 넘어져 있었다. 이후 벽송사 스님이 남은 1기를 수습하여 세워놓았다고 한다.(조사자 : 서복회 문호성 회장님)
▶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발췌)
세 번째, 네 번째 언덕(모롱이)을 지나 한 동부(洞府)를 만났다. 지경이 넓고 조용하고 깊고 그윽하였다. 수목들이 태양을 가리고 등나무 덩굴이 덮이고 얽힌 가운데 계곡 물이 돌에 부딪혀 굽이굽이 소리가 들렸다. 그 동쪽은 산등성이인데 그리 험준하지 않았고, 그 서쪽으로는 지세가 점점 내려가는데 여기서 20리를 더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일 닭과 개, 소나 송아지를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벼, 삼,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도원(武陵桃源) 보다(武陵桃源) 그리 못하지는 않을 듯했다. 그래서 내가 지팡이로 계곡의 돌을 두드리면서 유극기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아,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隱遁)하기를 기약하고 이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고는, 그에게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 한복판에 이름을 새기게 하였다.
連度三四。得一洞府。寬閑奧邃。樹木蔽日。蘿薜蒙絡。溪流觸石。曲折有聲。其東。山之脊也。而不甚峭峻。其西。地勢漸下。行二十里。達于義呑村也。若携鷄犬牛犢以入。刊木墾田。以種黍稌麻菽。則武陵桃源。亦不多讓也。余以杖叩澗石。顧謂克己曰。嗟乎。安得與君結契隱遁。盤旋於此耶。使之刮苔蘚。題名于巖腹。
'♣ 六友堂記 > 산행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두육성이 조림한 삼정산을 찾아서(210614~15) (0) | 2021.06.16 |
---|---|
선열암에서 아홉모롱이길로 청이당까지(210612~13) (0) | 2021.06.14 |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백장사→와운마을) (0) | 2021.06.01 |
영랑대에서 부르는 호연재의 야음(210521~22) (0) | 2021.05.25 |
불일폭포와 주변의 폐암자 터를 찾아서(210514~15) (0) | 2021.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