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백장사→와운마을)

도솔산인 2021. 6. 1. 06:19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백장사→와운마을)

 

 

▣ 일 시 : 2021년 05월 29일(토)~30일

▣ 코 스 : 백장암-소동폭포-도탄-환희령-부운마을-반선-정룡암-대암-북두재-천년송

▣ 인 원 : 4명(일정 민선생님, 하림 조박사님, 지리산아님)

▣ 날 씨 : 맑음

 

 

지난주 5월 23일 쌍계사에서 남원 관아까지 유몽인 길을 연결하였다. 숙성치용담은 지리산아님이 도와주셨고, 와룡정은 순천산님 부부가, 남창은 지리산 마실 조용섭 이사장님께서 풀어주셨다. 옛 지명을 고증하는 일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반복해야 한다. 무엇보다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매우 중요하다. 답사를 전후하여 카톡으로 자료를 주고받으며 토론을 한다.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비로소 사물을 보는 눈이 열린다.

 

남원의 지리산아님이 백장사에서 와운까지 답사를 원하셔서, 토요일 칠선계곡 초암 농원에서 야영을 하고, 일요일 유몽인 길 답사 일정을 잡았다. 산내면람천교를 넘어 소동폭포반선까지는 차량으로, 반선에서 와운마을까지는 도보로 답사를 하였다. 내령 마을을 지나 옛길로 진입하려고 하였으나, 전기 철조망과 출입금지 경고판이 길을 막았다. 외부인 출입을 막는 데는 그 이유가 있다. 산에 의지하여 사는 주민들의 생활 터전이기 때문이다. 끝.

 

 

화암 마을 화심정
화장산과 화암마을
꽃봉산과 동강마을
영남판소리 문화교육원

 

1. 1611년 어우당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유람 일정(4/1~4/2)

 

• 4/1 : 백장사→황계→영대촌→흑담→환희령→내원→정룡암(1박)

• 4/2 : 정룡암→월락동→황혼동→와곡→갈월령→영원암→장정동→실덕리→군자사(1박)

 

 

2. 1917년 조선의 지형도

 

1917년 조선의 지형도

 

3. 답사 사진(소동폭포→도탄→흑담→황계폭포→환희령→반선→와운→대암백장사)

 

소동폭포
소동폭포
소동폭포 아래 沼
의은대
습자암
조암
朴相湖외 6인(임술 7월)
도탄변선생유대(桃灘邊先生遺䑓)
영대(靈臺, 산신령 바위)
도탄
수월대를 흑담으로 추정함
황계폭포(?)
북두재 소나무
대암(?)

 

낭떠러지에 가까이 있는 바위가 자연스럽게 대()를 이루었는데 그 바위를 대암(臺巖)이라 하였다. 그 아래에 시퍼렇게 보이는 깊은 연못이 있었지만 겁이 나 내려다볼 수 없었다. 그 연못에 사는 물고기를 가사어(袈裟魚)라 부르는데, 조각조각 붙은 논 혹은 한 조각씩 기워 만든 가사(袈裟) 같은 모양의 비늘이 있다고 하였다. 이 세상에 다시없는 물고기로, 오직 이 못에서만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른다고 한다. 이에 어부를 시켜 그물로 잡게 하였으나, 수심이 깊어 새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백장암

 

▶ 1611년 어우당 유몽인의 유두류산록(백장암→와운)

 

41일 경오일. 동행한 사람들은 각자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고 새끼로 동여매고서 남쪽으로 하산하였다. 물가 밭두둑을 따라 굽이굽이 난 길을 가니 큰 냇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바로 황계(黃溪)의 하류였다. 동네가 넓게 열리고, 돌이 구를 정도로 물이 세차게 흘렀다. 북쪽은 폭포이고 아래쪽은 못인데, 못 위의 폭포수는 노하여 부르짖는 듯 쏟아져 내리며 벼락이 번갈아 치는 듯한 광경이었다. ! 얼마나 장대한 모습인가. 길을 가다 보니 푸른 소나무는 그늘을 드리우고 철쭉은 불타듯이 붉게 피어 있었다. 남여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 서서 쉬었다. 골짜기에 두세 집이 있는데 영대촌(嬴代村)이라 하였다. 닭이 울고 개가 짖는 마을로, 깊은 골짜기와 많은 봉우리들 사이에 있었다. 참으로 하나의 무릉도원이었다. 이 마을이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구나.

 

☞ 영대촌(嬴代村) : 진나라 시대 학정을 피해 숨어 사는 사람들의 마을. 영대(靈臺)와는 전혀 무관한 무릉도원을 뜻한다. 현재의 지명인 내령(內靈), 외령(外靈)과도 한자가 다르다. 유몽인이 모르고 영대촌(靈臺村)을 영대촌(嬴代村)으로 쓴 것은 아닌 것 같다.

 

한 곳에 이르니 높은 언덕에 가파른 협곡이 나타났다. 양쪽 언덕으로 길을 내놓았는데 협곡이 매우 깊었다. 그 협곡 안은 모두 돌이었다. 시냇가에도 큰 돌이 수없이 널려 있었다. 이곳의 이름을 흑담(黑潭)이라 하였다. 나는 웃으며 말하기를, 세상에 단청(丹靑)의 그림을 좋아하여 자신의 솜씨를 최대한 발휘해 화려하게 꾸며놓은 사람이 있었다네. 지금 이곳을 보니, 돌이 희면 이끼가 어찌 그리 푸르며 물이 푸르면 꽃이 어찌 그리도 붉은가? 조물주도 한껏 화려함을 뽐냈으니 그 화려함을 누리는 자는 산신령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녹복(祿福)은 비파를 타게 하고, 생이(生伊)는 젓대로, 종수(從壽)청구(靑丘)태평소(太平蕭)로 산유화(山有花)의 곡을 불게 하였다. 음악이 산골짜기에 울려 메아리치고, 시냇물 소리와 서로 어우러지니 즐거워할 만하였다. 어린아이에게 통을 열어 먹과 붓을 준비하게 하고, 암석 위에서 시를 지었다.

 

황계 폭포(黃溪瀑布)를 지나 환희령(歡喜嶺)을 넘어 이어진 30리 길이 모두 푸른 노송나무와 단풍나무였으며, 비단 같은 날개를 가진 새들이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날아다녔다. 내원(內院)에 이르니 두 줄기 시냇물이 합쳐지고, 꽃과 나무가 산을 이룬 곳에 절이 세워져 있었다. 마치 수를 놓은 비단 속으로 들어가는 듯하였다. 소나무 주변의 단()은 숫돌처럼 평평하였고, 금빛푸른빛의 단청이 숲 속 골짜기에 비추었다. 또. 천 번이나 두드려 만든 종이에 누런 기름을 먹여 겹겹이 바른 장판은 마치 노란 유리를 깔아놓은 듯, 한 점 티끌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 허연 늙은 선사(禪師)가 승복을 입고 앉아 불경을 펴놓고 있었다. 그의 생애가 맑고 깨끗하리라 여겨졌다. 이에 머무는 대신 시를 지어놓고 떠났다. 동쪽 시내를 따라 오르니 산은 깊고 물은 세차게 흘러내렸다. 한걸음 한 걸음씩 올라 정룡암(頂龍菴)에 이르렀다.

 

앞에 큰 시내가 가로막고 있는데 냇물이 불어 건널 수 없었다. 건장한 승려를 뽑아 그의 등에 업혀서 돌을 뛰어넘으며 건넜다. 낭떠러지에 가까이 있는 바위가 자연스럽게 대()를 이루었는데 그 바위를 대암(臺巖)이라 하였다. 그 아래에 시퍼렇게 보이는 깊은 연못이 있었지만 겁이 나 내려다볼 수 없었다. 그 연못에 사는 물고기를 가사어(袈裟魚)라 부르는데, 조각조각 붙은 논 혹은 한 조각씩 기워 만든 가사(袈裟) 같은 모양의 비늘이 있다고 하였다. 이 세상에 다시없는 물고기로, 오직 이 못에서만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른다고 한다. 이에 어부를 시켜 그물로 잡게 하였으나, 수심이 깊어 새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이 날 저녁 伯蘇(백소)[雲峰 수령李復生(이복생)]가 하직하고 돌아가다가 내원에서 묵었다. 나는 내원이 깨끗하고 고요한 것을 사랑하여 처음에는 그곳으로 돌아가 자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룡암에 이르자 지쳐서 그럴 수 없었다. 심하구나! 나의 쇠함이여. 정룡암. 북쪽에 한 채의 집이 있었는데. 이 암자의 승려가 말하기를,이곳이 바로 판서(判書) 노진(盧禛) 의 서재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옛날 옥계(玉溪) 노진(盧禛) 선생이 자손들을 위해 지은 것이다. 선생도 봄날의 꽃구경과 가을날의 단풍놀이를 하러 왔으며, 흥이 나면 찾은 것이 여러 번이었다. !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 깊은 산속 외딴곳에 자제들을 위해 집을 짓고 살게 했으니, 선생의 깨끗한 지취는 후학을 흥기시킬 수 있겠구나.

 

노진(盧禛)[1518~1578] 조선 중기 남원에서 활동한 문신. 옥계(玉溪) 노진(盧禛)[1518~1578]은 조선 중기 명종과 선조 연간에 주로 활약한 문신으로, 30여 년 동안 청현(淸顯)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지례 현감과 전주부윤 등 외직에 나가서는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였다. 성리학과 예악에 밝았다. 노진은 1518(중종 13) 함양군 북덕곡 개평촌에서 태어났으나 처가가 있는 남원에 와서 살았다.

 

○ 4월 2일 신미일. 새벽밥을 먹고 월락동(月落洞)을 거쳐 황혼동(黃昏洞)을 지났다. 고목이 하늘에 빽빽이 치솟아 올려다봐도 해와 달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밝은 대낮일지라도 어두컴컴하기 때문에 월락동․황혼동이라고 부른다. 와곡(臥谷)으로 돌아들자 수목이 울창하고 돌길이 험하여 더욱 걷기 힘들었다. 천 년이나 됨직한 고목들이 저절로 자라났다 저절로 죽어, 가지는 꺾이고 뿌리는 뽑혀 가파른 돌길을 가로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