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미타봉에서 아홉모롱이 길로 청이당까지I(210509)

도솔산인 2021. 5. 10. 09:16

미타봉에서 아홉모롱이 길로 청이당까지I(210509)

 

 

▣ 일 시 : 2021년 05월 09일(일)

▣ 코 스 : 얼음터-장구목-석굴A-석굴B-미타봉-일강-동부-방장문-구롱-청이당-석상용장군묘-얼음터

▣ 인 원 : 3명(김주사님, 박준현님)

▣ 날 씨 : 맑음

 

 

지리 동부는 선인들이 함양에서 천왕봉을 오르는 중요한 루트였다. 김종직의 유두류록 길을 복원하기 위한 선답자들의 노력으로 점필재 길이 비로소 세상에 이름을 드러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급(性急)한 판단과 무리한 고증(考證)으로 지리 동부 대부분의 지명이 혼란을 겪고 있다. 최근 미타봉의 '날조된 소림선방'이라는 비방(誹謗)과 '상내봉에 대한 색다른 주장'이 있었다. 이렇듯 고증하는 과정에서 지리 동부의 지명이 문헌의 기록과 다른 곳이 스무 군데에 가깝다. 화암, 지장사터, 점필재의 진지밭골 진입, 독녀암, 미타봉, 향로봉(상내봉), 동부(洞府), 일강(一岡), 구롱 길 전 구간, 옹암(진주독바위), 청이당, 박여량의 행랑굴, 김종직의 마암, 영랑재, 소년대, 두류봉, 말봉, 그 외에 상류암, 두류암, 마적사의 위치가 그렇다. 독녀암(노장대)과 옹암(진주독바위)은 아예 이름을 바꾸어 놓았고, 문헌과 일치하는 곳은 삼열암과 의논대뿐이다.

 

나는 유람록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도 없거니와 오룩스 맵 치(癡)이니 산길에 대한 감각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유람록에 대한 나의 견해는 지리 동부를 자주 들여다보니 어쩌다가 얻어진 것이다. 아직도 고리타분한 선인들의 유람록보다 영랑대에 들어 사계절의 풍광을 즐기는 것이 좋다. 지명의 혼란은 선답자들의 유람록에 대한 해석을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이다. 누군가가 눈을 뜨고 유람록 길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오류의 양산(量産)을 막았을 것이다. 그 책임은 후답자에게도 있다.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복원은 우리의 소중한 역사문화 자원이기에, 이제는 몇 사람의 전횡(專橫)과 농단(壟斷)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리산 인문학을 개척한 공로는 인정하지만, 그분들의 결과물을 여과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지리산의 지명 바로잡기는 인문학의 새로운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목요일 지리산을 향했다. 작년과 바뀐 것이 있다면 평일에도 산행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계획된 백수의 자유를 줄여서 계백(計白)이라고 한다. 2박 3일 산행을 하고 내려와 4일째 산행이니 그래서 발이 무거운 건지. 등산화가 무거운 것인지. 고열암에서 아홉 모롱이 길로 영랑대까지, 다시 영랑대에서 구롱을 지나 방장문을 거쳐 일곱 모롱이에서 하산을 하였으니, 오늘 산행은 미타봉에서 청이당까지 하기로 한다. 얼음터에서 장구목을 지나 미타봉 앞 소나무 전망대 아래에 있는 석굴 A와  석굴 B를 확인하였다. 미타봉 소림 선방의 좌선대에 오르니 한 폭의 그림 같은 조망이 발목을 잡는다. 김주사님의 산에 대한 설명은 장수의 장안산을 비롯하여 남원의 고남산까지 거침이 없다. 나는 아는 것이 없으니 그냥 고개만 끄덕인다.

 

일강(一岡)을 내려서니 사면길이 반들반들하다. 누가 다녀간 것일까. 날조된 소림선방에 맞장구를 친 지리 99의 문객도 다녀갔을 것이다. 두 모롱이를 지나 사립재골 고래 바위 옆에 자리를 편다. 잠이 부족한 박준현 씨는 낙엽 위에 눕는다. 점심을 먹고 지나는 길목에 케른을 쌓는다. 아직은 나뭇잎이 성글어 나아갈 길이 보인다. 송대 마을 박영남(朴英南, 1938년생, 현 84세) 할머니께서 청이당과 하봉 인근에서 산나물을 뜯어서 송대마을로 귀가하는 길이기도 하다. 세 모롱이에서 길은 오봉에서 오는 사립재길과 연결된다. 이 길은 오봉리 사람들이 이용했던 길이다. 모롱이에서 모롱이 사이에는 작은 실개천이 흐른다. 길목마다 남아 있는 거목과 쓰러진 나무가 이정표이다. 길은 샘에서 샘으로 이어진다. 커다란 바위도 이정표 역할을 한다. 숯가마터 인근에는 반드시 물이 있다. 새봉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지능선을 가로질러 네 모롱이 길이 이어진다. 길은 대체로 고저의 차이가 없이 등고선을 따른다.

 

다섯 모롱이를 지나 집터에서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길을 정리한다. 아마 후답하는 분들이 집터에서 길을 놓치는 것 같다.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좌측 윗길을 따른 듯하다. 김주사님과 박처사가 이곳에 다시 케른을 쌓아 길을 표시하였다. 말라죽은 다래 덩굴과 오미자 덩굴을 걷어내고 터널 길을 열어놓았다. 위로 올라가면 방장문을 지날 수가 없다. 삼천포로 빠진다. 집터 좌측으로 석문과 옹암으로 오르는 길이 숨어 있다. 산죽밭에 거목이 쓰러진 여섯 모롱이를 지난다. 일곱 모롱이(허공달골~옹암) 바로 아래에는 샘이 흐른다. 여덟 모롱이 초입에는 거대한 바위와 거목이 어우러져 유람객들의 쉼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여덟 모롱이를 지나면 드디어 방장문(方丈門)이 나타난다. 방장문 석각은 1922년 함양고적보존회 이진우(李璡雨. 1897~1954) 선생이 벽송사에서 천왕봉까지 등산로를 정비할 때 각(刻)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현지 주민들 중 방장문(方丈門) 석각을 아는 분은 송대 마을 박영남 할머니뿐이다.

 

☞ 李璡雨(1897~1954) : 본관은 경주 자는 성유(性悠) 호는 은계(隱溪) 마천면 의탄리 의중마을 출신. 향토교육 사업가. 천석꾼의 부호로 1929년 마천초등학교를 설립하는데 재산(100두락)을 희사함. 1922년 함양명승고적보존회 이진우와 벽송사 僧 일동이 중봉 마암에 마암당을 건축하고 벽송사에서 천왕봉까지 등산로를 정비함. 마천면 도계 공원에 마천 면민이 세운 송덕비가 있음.

 

방장문(方丈門)을 지나 마지막 구롱을 향했다. 이곳에서 쑥밭재까지는 고도를 높여야 한다. 구롱은 허공달골에서 청이당으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지점에서 쑥밭재까지를 가리키는 듯하다. 유두류록에 「구롱을 다 지나서는 문득 산등성이를 타고 가는데, 가는 구름이 나직하게 삿갓을 스치고, 초목들은 비를 맞지 않았는데도 축축이 젖어 있으므로, 그제야 하늘과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알았다. 이로부터 몇 리 가지 않아 등성이를 돌아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 땅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쑥밭재에서 청이당으로 내려가는 길은 현재의 등산로가 아닌 사면으로 비스듬하게 청이당터까지 길이 이어진다. 현재 지리산길 지도에 표기된 청이당터는 비가 오면 물이 모이는 곳이다. 점필재가 쉬어간 당터 앞 계석 건너편 아래에 있는 석축을 두 눈을 부릅뜨고 확인할 필요가 있다. 청이당은 과거에도 현재도 함양 땅이다. 옛날에는 하봉 옛길이 진주와 함양의 경계이고, 현재는 산청과 함양의 경계이다. 끝.

 

 

석굴A
석굴B
소림선방 조망터에서
코끼리 형상 바위
일강암
이종 연리지
세 모롱이 바위
집터(마천에서 덕산을 넘는 길목에 있다)
왼쪽 나무로 막은 길로 올라가면 삼천포로 빠집니다.
방장문
방장문
방장문 탁본
천례탕으로 추정함.
청이당터 계석
청이당터와 석축

 

 

1. 문헌에 나타난 청이당의 명칭

 

이당에 대한 유람록의 기록은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에는 청이당(淸伊堂), 1611년 유몽인 선생의 두류산록에 청이당(淸夷堂)으로, 1871년 배찬 선생의 유두류록에는 천녀당(天女堂)으로 각각 기록하고 있다. 1472년 김종직 선생이 쉬어간 계석은 청이당터 석축 앞 약 2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1871년 배찬 선생은 이곳에서 '계곡 옆의 바위 위(澗邊石上)에 빙 둘러 앉아서 밥을 먹었다' 라고 한 장소는 같은 바위로 추정된다. 참고로 함양과 산청의 군계는 하봉 옛길로 지금도 청이당터는 함양 땅이다. 전국 방방곡곡의 영지를 순례한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조용헌 박사는 화랑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천례탕(天禮碭,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을 청이당(김종직, 유몽인)과 천녀당(배찬), 천예당(임대봉 구전)의 어원으로 보고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천례탕(天禮碭)에서 '碭(탕)'은 고금이체자 자전에는 唐(당)의 이체자로 나와 있다. 碭(탕)을 당으로 읽으면. 임대봉씨의 '천예당'은 1924년 강계형의 '천례탕'과 일치한다.

[조용헌의 영지 순례] : 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9&nNewsNumb=002610100021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원문] 淸伊堂以板爲屋四人各占堂前溪石上小憩

1472년 8월 15일,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시내 바위(위에서)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占堂 : 청이당

 

2) 1611년 유몽인 선생의 두류산록

 

[원문] 癸酉. 侵晨而行掠甕巖. 淸夷堂. 穿森木亂石叢. 至永郎臺.

1611년 4월 4일, 계유일. 새벽에 길을 떠나 옹암(甕巖)을 지나 청이당(淸夷堂)에 들어갔다. 숲을 헤치고 돌무더기를 가로질러 영랑대(永郞臺)에 이르렀다.

 

3) 1871년 배찬 선생의 유두류록

 

[원문] 小憇于嶺上. 艾峴. 天女堂平田. 從者進午飯. 遂環坐於澗邊石上. 各執匏器. 折木爲匙. 足爲免飢. 各吟一律拈平田之田字.

1871년 95일, 산마루 위에서 잠시 쉬었다가 애현(艾峴)을 지나 천녀당평전(天女堂平田) 이르렀다. 시종(侍從)들이 점심을 내와서 마침내 모두 계곡 옆의 바위 위에 빙 둘러앉아서 각자 바가지 그릇을 잡고 나무를 꺾어 젓가락을 만들어 밥을 먹으니 배고픔을 면할 만하였다. 각자 평전의 ()’ 자를 끄집어내어 시 한 수씩을 읊었다.

 

4)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

 

[원문] 漸漸前進置艾峴. 路於左便而取右. 路踰麓. 則天禮碭也.

1924818(송대 출발) 점점 앞으로 쑥밭재[艾峴애현]로 나아가는데 길은 왼쪽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향했으며 산기슭을 넘자 천례탕(天禮碭 *하늘에 제사지내는 돌)이었다. [출처 지리 99, 국역 이재구 선생]

 

 

 

쑥밭재

 

2. 문헌에 나타난 쑥밭재의 명칭

 

쑥밭재의 명칭은 1871년 배찬의 유듀류록에는 애현(艾峴), 1877년 박치복 남유기행과 허유의 두류록, 1937년 김학수의 유방장산기행에는 애전령(艾田嶺), 1887년 정재규의 두류록과 1956년 함양군지에는 봉전령(蓬田嶺)으로 1933년 석전(石顚) 박한영의 석전사문에는 봉전치(蓬田峙)로 나타난다. 애현, 애전령, 봉전령, 봉전치는 쑥밭재를 한역한 명칭이나 쑥과는 연관이 없는 듯하다. 쑥은 1,000m가 넘는 고지대에서 자라지 않는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쑥밭재를 숙박재에서 유래한 어원으로 알고 있다.

 

 

☞ 쑥밭재, 일명 애전령(艾田嶺), 초령(草嶺)

 

경남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쑥밭의 '쑥'은 원시어소 [슬/sur]의 변이음이고 '밭'은 [불/bru]의 변이음이다. 기슭을 가리키는 [슬/sur]도 대광상고(大廣上高)의 뜻을 지니고 있다. '쑥밭재'는 크고 높은 뜻의 지명이다. 초령(草嶺)의 한자 草는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새(사이/사)]음을 차자(借字)할 때 많이 썼는데. [풀/불/블] 음을 차자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여지도 있어 일단 설명을 보류한다.

 

출처 : 슭마노르님의 블로그 [슭/sur] 유전자가 들어있는 지명 : http://blog.daum.net/pance73/10068

 

 

얼음터 독가 박준현 씨
집터에서 통천문-옹암 유몽인이 오른 길로 추정함.(지도 자료 : 카리스마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