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영랑대에서 부르는 호연재의 야음(210521~22)

도솔산인 2021. 5. 25. 06:47

영랑대에서 부르는 호연재의 야음(210521~22)

 

 

▣ 일 시 : 2021년 05월 21일(금)~22(토)

▣ 코 스 : 광점동-얼음터-칠롱(七隴, 일곱모롱이)-방장문-청이당-영랑대-청이당-아홉모롱이길-미타봉-광점동

▣ 인 원 : 4명(미산님, 조박사님, 정대장)

▣ 날 씨 : 흐리고, 맑음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은 독서를 많이 하지 않은 것, 후회하지 않는 일은 지리산에 원 없이 다닌 것이다. 당분간 영랑대에 오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두 주일만에 다시 영랑대를 찾았다. 구롱(九隴, 아홉모롱이)을 지나서 쑥밭재로 나아가는데 구름이 눈 앞에서 산죽을 스치고 지나갔다. 문득 점필재의 유두류록에 「구롱을 다 지나서는 문득 산등성이를 타고 가는데, 가는 구름이 나직하게 삿갓을 스치고, 초목들은 비를 맞지 않았는데도 축축이 젖어 있으므로, 그제야 하늘과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알았다.」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동부 능선의 만개한 철쭉꽃에도 비이슬이 맺혀있다. 영랑대에 오르니 사위는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갯속이다. 작정을 하고 큰 조개골로 미역 덩굴을 뚫고 내려가 영랑샘을 찾았다. 얼마나 영랑대에 오려고 샘을 찾았는가. 오늘도 내 귀에는 영랑대의 바람소리가 파도소리로 들린다. 그대는 파도소리가 들리는가. 일행에게 물으니 그냥 바람소리라고 하네. 자정 무렵에 운무가 걷히더니, 달이 중천에 떠있고 뭇별들이 나뭇잎마다 초롱초롱 걸려있다.

 

 

夜 吟(야음)

 

                  浩然齋 金氏(1681~1722)

 

月沈千嶂靜 : 달빛 잠기어 온 산이 고요한데

泉暎數星澄 : 샘에 비친 별빛 맑은 밤

竹葉風煙拂 : 안개 바람은 댓잎에 스치고

梅花雨露凝 : 비이슬 매화에 엉긴다

生涯三尺劍 : 삶이란 석자의 시린 칼인 것을 

心事一懸燈 : 내 마음은 한점 등불이어라

惆悵年光暮 : 서러워라 한 해는 또 저물거늘

衰毛歲又增 : 흰머리에 나이만 더하는구나

 

 

  이 시는 조선 중기에 살다 간 호연재 김씨(1681~1722)의 시이다. 그녀는 동춘당 송준길의 증손자인 소대헌 송요화와 결혼해 살다가 42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호연재의 자경 편을 보면 결혼생활이 순탄치 못했던 듯... "지아비가 나를 버린다면 구태여 매달리지 않겠다"라고 할 만큼 당시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언사이다. 참으로 당찬 여인이다. 그러나 얼마나 외롭고 삶이 고단했으면 '삶을 석자의 시린 칼'로 표현했을까. 

 

 

▶ 浩然齋 안동 김 씨

호연재의 고조부 김상용(1561~1637)은 병자호란 때에 강화도에서 소현세자를 지키기 위해 청나라 군대에 항거하다 화약고를 폭파 순절하였고 김상용(고조부)의 동생 김상헌(1570~1652)은 병자호란 때 주전파로 6년 동안 청나라에 억류되기도 하였음. 호연재의 시댁 동춘당 송준길(1606~1672) 선생은 북벌론의 주역이었음. 호연재는 김상용의 증손녀, 송준길의 증손부이다. 홍성 갈산 출신인 백야 김좌진(1889~1930) 장군이 문충공 김상용의 11대 후손이니, 가문의 혈통과 기질이 무관한 것은 아닌 듯하다.

 

▶ 浩然齋(1681~1722) 연보 소략

홍성 갈산 오두리에서 안동인 김성달 연안이 씨 사이 6남 4녀 중 여덟째로 태어남(1681년), 19세에 소대헌 송요화와 결혼함(1699년 10월 16일), 큰오빠 김시택이 동생들과 주고받은 시를 모아 <연주록>을 엮음[162수 중 31수](1703년 3월), 혼인한 지 9년 만에 아들 익흠을 낳음(1708년 1월 18일), 아들을 둔지 9년 만에 딸을 낳음(1717년 1월), 42세에 세상을 떠남(아들 5세, 딸 9세) 아들에게 <付家兒>로 유언을 대신함(1722년 5월 15일), 소대헌의 9대손 송용억이 <호연재시집>간행[72제 91수](1997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