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두육성이 조림한 삼정산의 묘적암과 서동고암을 찾아서 II
▣ 일 시 : 2021년 06월 19일(토)~20일(일)
▣ 코 스 : 영원사-상무주암-서동고암-회암당 승탑-서동고암-상무주암 동대-서동고암-회암당 승탑-영원봉-벌바위-영원재-영원사
▣ 인 원 : 2명(박준현님) 지리산아님(첫날 당일)
▣ 날 씨 : 맑고 더움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의 산중일기(1686년)는 우담(愚潭) 이 62세 때인 1686년(숙종 12) 3월부터 1688년(숙종 14) 9월까지 총 4차에 걸쳐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일대의 명산 고찰 및 서원 등을 여행하면서 기록한 유람기이다.
- 1차 : 1686년 3월 13일부터 1687년 1월 23일까지 10개월간 속리산, 지리산, 덕유산 일대를 유람함.
- 2차 : 1687년 3월 8일부터 3월 17일까지 8일간 치악산 일대를 유람함.
- 3차 : 1687년 8월 2일부터 10월 20일까지 2개월여 동안 금강산 일대를 유람함.
- 4차 : 1688년 4월 10일부터 9월 19일까지 5개월간 경상도 안동, 의성, 청송 등지의 서원 및 팔공산 일대를 유람함.
정시한(丁時翰)은 3년(22개월, 총 600일) 동안 전국의 명산 고찰을 유람하면서 매일매일 그날의 일과 자신의 감상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여행기간 동안 총 300여 사찰에 들러 주위 환경과 감상, 만난 승려들의 이름과 성품까지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특히, 지리산에서 170여 일의 기록은 지리산 인문학의 보고(寶庫)이다. 산중일기는 17세기 지리산의 사찰현황과 인물에 대한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된다. 그동안 선답자들의 오랜 노력으로 산중일기에 나오는 무주암과 천인암, 무량굴, 견성암, 상고대암 등의 위치가 밝혀졌다. 그러나 묘적암(妙寂菴)과, 서동고암(西洞古菴)의 위치는 아직도 묘연(杳然)하다.
정시한의 산중일기는 지리산 마실 조용섭 이사장님을 통해 처음 알았다. 몇년 전 회암당 부도를 찾아보려고 했던 날, 공교롭게 지리 99 탐구팀과 마주쳤고, 이후 '정시한의 산중일기'는 들여다보지 않았다. 지난주 상무주암을 다녀온 후, 모처럼 다시 산중일기를 꺼냈다. 솔레이 이용훈 박사에게 메일로 받은 자료를 정독하고, 단톡 방에 산중일기의 무주암 부분을 발췌하여 올렸다. 산친들과의 카톡 중에 曺박사님이 지도에 암자터의 위치를 형광펜으로 표기하여 보내왔다. 답사 전에 추정한 서동고암(西洞古菴)의 위치는 이렇다. 상무주암 보다 높은 고도, 상무주암과 같은 남향, 서동(西洞)은 상무주암에서 서쪽 구렁(골), 서대(西臺)는 상무주암 기준 서쪽 대↔동대(東臺), 서동고암(西洞古菴)은 상무주암 서쪽 구렁(골짜기)에 있는 오래된 암자터... 묘적암(妙寂菴)과 서동고암(西洞古菴)의 열쇠는 산중일기에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서동고암터를 찾은 감회를 어떻게 표현할지. 인문학을 한답시고 시기(猜忌)와 질투(嫉妬), 명예욕에 눈이 먼 사람들이 먼저 떠올랐다. 남들이 대단하게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자기들은 정작 사람을 개무시하고 얕잡아본다.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지 못하니, 그릇에 비유하면 물을 담을 수 없는 접시이다. 세상에 나보다 못난 사람은 없다... 박준현씨는 대화를 해보니 겉모습과는 전혀 다른 명석한 친구이다. 인산가 김윤세 회장이 국역한 '동사열전(東師列傳)'을 꿰고 있었고, 오랜 산 생활로 산을 읽는 문리가 트였다. 그리고 수목(樹木)의 식생과 산약초에 대해서도 해박하다. 이번에 준현씨가 서동고암에서 회암당 부도로 내려가는 길을 찾았고, 놀랍게도 회암당 부도터를 묘적암터로 추정했다. 찰나(刹那)의 순간에 내 마음속을 꿰뚫어 보았다. 이렇듯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 벗은 없다. 하산길에 준현씨와 다시 회암당 승탑을 둘러본 후, 빗기재를 지나 영원봉→벌바위→영원령에서 유몽인 길을 따라 영원사로 내려왔다. 끝.
☞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1625∼1707) :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군익(君翊), 호는 우담(愚潭), 부 정언황(丁彦璜)과 모 횡성조씨(橫城趙氏) 사이에서 태어남. 1649년 겨울 부모를 따라 강원도 원주 법천(法泉)에 내려가 평생을 지냄. 1650년 생원시에 합격함. 40대 이후 열여섯 차례에 걸쳐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사양함. 1649년 금강산을 시작으로 전국의 명산대천을 유람함. 사후 도동서원(道東書院)에 제향됨. 저술로는 우담집(愚潭集)을 남김.
※ 제 주관적인 생각으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 1686년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나오는 묘적암과 서동고암
○ 4월 20일 맑음 바람이 불어 추웠다(함양 묘적암)
아침 식사 뒤 묘적암(妙寂菴)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마침 (묘적암 수좌) 사철 스님이 오셔서 같이 갔다. 절터는 비록 무주암(無住庵)에 미치지 못하나 이곳 역시 매우 밝고 산뜻하다. 다만 초막만 있어서 지내기에 마땅하지가 않았다.
○ 윤4월 9일 흐린 뒤에 맑음(함양 상무주암)
아침식사 뒤 삼응(三應) 스님과 함께 묘적암(妙寂菴)에 가서 잠시 앉아 있다가 사철·삼응 스님과 함께 서동고암(西洞古菴)에 갔다. 암자는 석대 위에 자리 잡았는데 좌우의 입석이 기괴하다. 동쪽 가에는 석천(石泉)도 있다. 산세가 휘감아 돌아 바람도 많지 않으니 가히 몇 칸짜리 집을 지을 만하다. 더군다나 맑은 기운마저 서려 있으니 정말로 이 곳은 도인이 수련할 만한 곳이다. 신순 수좌를 무주암으로 오라 해서 집을 짓고 샘을 파면 어떠한지 헤아려보게 했다. 샘을 두 곳 파는 것은 샘물이 부족한 게 흠이기 때문이다.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경숙이가 군자사에서 잣을 구해왔다. 군자사 스님이 미나리 두 단을 보내왔다. 저녁식사 뒤 다시 지자대(止慈臺)의 동대(東臺)에 갔다 온 다음 사철 수좌와 함께 잤다.
○ 윤4월 10일 흐린 뒤 맑음, 바람이 불었다.(함양 상무주암)
아침식사 뒤에 신순 스님과 함께 지자대(止慈臺)에 갔고, 또 사철 스님을 데리고 서대(西臺)에 갔다. 이 터에 우물을 파면 좋을 듯하다. 오랫동안 앉아 있다가 무주암으로 돌아왔다. 저녁식사 뒤 설청 스님과 지자대(止慈臺)에 다녀온 다음 사철 스님과 함께 잤다.
출처 : 산중일기 신현대 번역/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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