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사에서 군자사까지 유몽인 길을 잇다(210406)
▣ 일 시 : 2021년 04월 06일(화)
▣ 코 스 : 영원사-승탑군-사자항-산판임도-뇌전마을(장정동)-고담사-절골-매암마을-내마마을-외마마을-군자마을
▣ 인 원 : 3명(문회장님, 김산님)
▣ 날 씨 : 맑음
영원사에서 군자마을까지의 길 안내는 함양 서복연구회 문호성 회장님이 하셨다. 영원사에서 옛길을 따르다가 태영당대일대선사(太靈堂大日大禪師) 승탑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두 번째 모롱이를 돌아 함양 영원사 승탑군에서 세 사람은 삼배를 올렸다. 승탑은 모두 5기로 부도의 주인을 밝혀주는 승려의 호가 탑신에 새겨져 있다. 유일하게 생몰 연대를 알 수 있는 설파당탑(雪坡堂塔)은 덕유산 영각사를 창건한 설파상언(雪坡尙彦, 1707~1791) 대사의 부도이다. 사면으로 내려서면 '함양 영원사 승탑군' 팻말과 도로를 만난다. 도로를 따라 고개를 넘으면서 사자항(獅子項)이 아닐까. 생각을 멈추고 상무주암 초입에서 230m를 내려서서 뇌전마을로 내려가는 옛길로 진입하였다.
☞ 高巖挾路 僅通二人行 謂之獅子項 : 높은 바위에 좁은 협로로 겨우 2명 정도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을 사자항이라고 함. 현재의 도로로 옛길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곳의 옛길이 좁고 험하여 사자항(獅子項)으로 부른 것으로 추정한다. 사자항(獅子項)은 노루목보다 더 좁고 험하고 사나운 길을 뜻한다.
산판길은 차량이 오르내릴 수 있는 넓이로 옛길이 그대로 살아있다. 몇 굽이를 돌고 돌아가는 길은 소나무 숲으로 이어진다. 이곳 소나무 숲에 황톳길을 생각하다가 그만 길을 놓쳤다. 무덤에서 경로를 이탈한 것을 알았지만 계속 진행했다. 다리를 건너 목적한 길과 합류하고 내려서니 뇌전마을이다. 유몽인이 장정동에서 실덕리로 내려갔으니 뇌전마을이 장정동이 혹 아닐까. 우리는 지름길(?)로 무덤군과 고사리밭을 지나서 매암 소류지로 내려섰다. 고담사에서 마음에 점을 찍고, 절골 덕봉사 터에서 마을 할머니께서 내주시는 커피를 마셨다. 이곳에서 상봉과 중봉을 바라보니 영랑대가 멀게만 느껴진다. 매암 마을을 지나 내마마을 이장님께 옛길을 물으니 마을 위로 옛길이 오래 묵었다고 한다. 외마마을 도로를 따라 가파른 고개를 넘어 마침내 군자마을로 들어섰다. 일부는 경로를 이탈하였고, 길이 오래 묵어 우회하기도 하였지만 유람록에 나오는 지명은 대략 感이 온듯하다. 미진한 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막걸리 한 잔으로 피로를 달랜다. 끝.
※ 답사 복기 및 요약
1. 사자항은 승탑군에서 상무주암 초입으로 넘어오는 가파른 고개
2. 장정동은 옛날 여행자들의 쉼터(정자)가 있는 휴게소로 뇌전마을
3. 뇌전마을(장정동)에서 실덕리-내마마을(윗길)-외마마을-군자마을
4. 뇌전마을에서 군자마을까지는 도보와 자동차로도 답사가 가능함.
○ 4월 2일 신미일. 새벽밥을 먹고 월락동(月落洞)을 거쳐 황혼동(黃昏洞)을 지났다. 고목이 하늘에 빽빽이 치솟아 올려다봐도 해와 달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밝은 대낮일지라도 어두컴컴하기 때문에 월락동․황혼동이라고 부른다. 와곡(臥谷)으로 돌아들자 수목이 울창하고 돌길이 험하여 더욱 걷기 힘들었다. 천 년이나 됨직한 고목들이 저절로 자라났다 저절로 죽어, 가지는 꺾이고 뿌리는 뽑혀 가파른 돌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곳을 지날 때는, 그 가지를 베어내고 문을 드나들 듯이 구부리고서 그 아래로 빠져나오기도 하고, 문지방을 넘듯이 걸터앉아 넘기도 하고, 사다리를 밟고 오르듯이 밟고서 지나기도 하였다. 그 외에 공중에 선 채로 말라죽어 반쯤 꺽이거나 썩은 것도 있고, 가느다란 줄기가 우뚝 위로 천 자나 솟구쳐 다른 나무에 기대어 쓰러지지 않은 것도 있고, 푸른 등나무가 오랜 세월 뻗어나가 가지를 드리우고 잎을 늘어뜨리고서 장막처럼 펼쳐져 있는 것도 있었다. 수십 리에 걸쳐 굽이굽이 뻗은 시내는 높은 언덕이 없어 맑은 바람이 항상 가득하고 상쾌한 기운이 흩어지지 않았다. 함께 유람온 사람들이 봄옷을 입은 지 한 달 남짓 되는데, 이곳에 이르러 모두 두터운 솜옷을 껴입었다. 해가 뜰 때부터 등산을 시작하여 정오 무렵에 비로소 갈월령(葛越嶺)을 넘었다. 갈월령은 반야봉(般若峯)의 세번째 기슭이다. 가느다란 대나무가 밭을 이루고 몇 리나 펼쳐져 있었지만, 그 사이에 다른 나무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사람이 개간하여 대나무를 심어놓은 듯하였다. 다시 지친 걸음을 옮겨 영원암(靈源菴)에 이르렀는데 영원암은 고요한 곳이면서 시원하게 탁 트인 높은 터에 있어서, 눈앞에 펼쳐진 나무숲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왕대나무를 잘라다 샘물을 끌어왔는데, 옥 구르는 소리를 내며 나무통 속으로 흘러들었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갈증을 풀 수 있었다. 암자는 자그마하여 기둥이 서너 개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깨끗하고 외진 것이 사랑할 만하였다. 이곳은 남쪽으로는 마이봉(馬耳峯)을 마주하고, 동쪽으로는 천왕봉을 바라보고, 북쪽으로는 상무주암을 등지고 있다.이 암자에 사는 이름난 승려 선수(善修)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불경을 풀어내어 사방의 승려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는 순지와 퍽 친한 사이여서 우리에게 송편과 인삼떡, 팔미다탕(八味茶湯)을 대접하였다. 이 산에는 대나무 열매와 감과 밤 등이 많이 나서 매년 가을 이런 과실을 따다 빻아 식량을 만든다고 한다.해가 기울자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오고, 앞산 봉우리에 구름이 모여들어 비가 올 징조가 보였다. 우리는 서둘러 떠나 사자항(獅子項)을 돌아 장정동(長亭洞)으로 내려갔다. 긴 넝쿨을 잡고서 가파른 돌길을 곧장 내려가 실덕리(實德里)를 지났다. 그제야 들녘의 논이 보였는데 처음으로 물을 대는 도랑에 맑은 물이 콸콸 흘러내렸다.저물녘에 군자사(君子寺)로 들어가 잤다. 이 절은 들판에 있는 사찰이어서 흙먼지가 마루에 가득하였고 선방(禪房) 앞에 모란꽃이 한창 탐스럽게 피어 있어 구경할 만하였다. 절 앞에 옛날 영정(靈井)이 있어 영정사(靈井寺)라 불렀다. 지금은 이름을 바꿔 군자사라 하는데, 가져온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며칠 동안 세상 밖에서 청량한 유람을 하여 신선의 세계에 오른 듯하였는데, 갑자기 하루 저녁에 속세로 떨어지니 사랑의 정신을 답답하게 하여 밤에 마귀에 시달리는 꿈을 꾸었다. 공자께서 “군자가 살면 어찌 비루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신 말씀은 늘 가슴속에 새기기 어려운 듯하다.
※ 군자사(君子寺) : 지리산(智異山)에 있는데 세속에 전하기를, “진평왕(眞平王 579년∼632년)이 왕위를 피하여 여기에서 살다가 태자를 낳고 환국할 때에 집을 회사하여 절을 만들었다.” 하였으나, 사서(史書)에는 다 보이지 않는다. [《여지승람》에 함양(咸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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