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거꾸로 걷는 유몽인 길 영원사에서 내원(반선)

도솔산인 2021. 4. 8. 20:34

거꾸로 걷는 유몽인 길 영원사에서 내원(반선)

 

 

▣ 일 시 : 2021년 04월 05일(월)

▣ 코 스 : 영원사-갈월령(영원령)-964.1봉-윗보살골-와곡(황혼동 월락동)-북두재-참샘-정룡암터(배암사터)-내원(반선)

▣ 인 원 : 4명(문회장님, 조박사님, 김산)

▣ 날 씨 : 맑음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 1559~1623) 선생은 1611년(광해군 3년) 2월 초 남원부사로 부임하여,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3월 29일부터 4월 8일까지 지리산을 유람하고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을 남겼다. 남원 관아에서 출발하여 남원 산동면 목동마을 진사 김화(金澕)의 재간당(在澗堂)에서 하루를 묵고, 요천-반암-황산 비전-백장사(박)-흑담-환희령-내원-정룡암(박)-영원사-군자사(박)-마천-용유담을 거쳐 마적사-두류암(박)-옹암-청이당-영랑대-소년대-천왕봉-향적암(박)-영신사를 구경하고,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의 의신마을로 내려가 의신사(박)-신흥사-쌍계사(박)-불일암 등지를 두루 유람하고 남원으로 돌아갔다. 그의 일정은 다음과 같다.

 

• 2월 초 유몽인(柳夢寅)이 용성(남원) 부사로 부임함

• 2/23(한식) : 한식 무렵, 승주(昇州, 순천) 수령 순지(詢之) 유영순(柳永詢)과 목동 재간당에서 두류산 유람 약속.
• 3/27 : 승주(순천) 수령 순지(詢之) 유영순(柳永詢) 만남
• 3/28 : 남원 관아를 출발→남원 산동 목동 김화의 재간당(1박)
3/29 : 재간당반암운봉 황산 비전→인월→백장사(1박)

4/1 : 백장사→황계→영대촌→흑담→환희령→내원→정룡암(1박)

• 4/2 : 정룡암→월락동→황혼동→와곡→갈월령→영원암→장정동→실덕리→군자사(1박)

4/3 : 군자사→의탄촌→원정동→용유담→마적암→송대→두류암(1박)

4/4 : 두류암→석문→옹암→청이당→영랑대→소년대→천왕봉→향적암(1박)

4/5 : 향적암영신암의신사(1)

4/6 : 의신사홍류동신흥사만월암여공대쌍계사(1)

4/7 : 쌍계사불일암화개동섬진강와룡정남원 남창(1)

4/8 : 남창숙성령남원부 관아

 

▶ 동행 : 龍城 수령 於于堂 柳夢寅, 承州 수령 詢之(순지) 柳永詢, 在澗堂(재간당) 進士 金澕(김화), 생질(申尙淵, 申濟) 雲峰 수령 伯蘇(백소) 李復生(이복생) 운봉 수령 이복생은 정룡암까지 동행함. 

 

유몽인(柳夢寅)은 1611년 2월 초에 용성(龍城, 남원) 군수로 부임한다. 한식(2.23) 무렵 용성(남원) 목동 선영에 성묘를 온 승주(昇州, 순천) 군수 순지(詢之) 유영순(柳永詢)을 재간당에서 만나 두류산 유람을 약속한다. 3월 27일(양 5.월 9일) 유영순을 만나 28일 진사 김화(金澕)의 재간당(在澗堂)에서 1박을 한다. 29일 재간당을 출발하여 요천을 거슬러 반암(磻巖)과 황산 비전(碑殿)을 거쳐 백장사에서 하루를 묵는다. 유람에 동행한 사람은 용성(龍城) 수령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 승주(承州) 수령 순지(詢之) 유영순(柳永詢), 재간당(在澗堂) 진사 김화(金澕), 생질 신상연(申尙淵), 신제(申濟) 운봉(雲峰) 수령 백소(伯蘇) 이복생(李復生)으로 모두 6명이다. 유두류산록에 4명의 악공의 이름[녹복(祿福), 생이(生伊), 종수(從壽), 청구(靑丘)]이 나온다. 재간당에서 수레를 타고 출발했으나 인월을 지나서 길이 거칠어지자 남여로 옮겨 타고 백장사로 들어간다. 백장사에서 1박을 한 후 4월 1일 내원(內院)을 지나 정룡암(頂龍菴)에서 1박을 하고 4월 2일 갈월령(葛越嶺)을 넘어 군자사(君子寺)에서 묵는다.

 

이번 답사는 거꾸로 영원사에서 출발하여 갈월령(영원령)을 넘어 와운을 지나 내원(반선)까지 연결하였다. 영원령에서 계곡을 내려서서 오른쪽으로 트래버스하여 세 모롱이를 돌아 964.1봉에서 내려서면 윗보살골로 이어지고 와운마을이 나타난다. 갈월령(영원령)은 경상도 함양의 마천과 전라도 남원의 산내 부운을 잇는 고개였으나 도로가 나면서 옛길은 완전하게 잊혀진듯하다. 일제가 만든 1917년 지도에 등고선은 정확하지는 않으나 길을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김종직의 아홉모롱이길과 마찬가지로 너덜지대의 돌포장, 이정표 나무와 고사목, 샘터와 샘터, 고개에서 고개로 길이 이어졌다. 영원령부터 반선까지는 초행길이다. 북두재에서 고사한 소나무를 보니 꼭대님이 솔바우님의 산행기 댓글에서 나를 빗대 소나무를 죽인 병충해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2020년 1월 7일 산내에 사는 신강님에게 과외를 받아 한결 수월한 답사를 하였다. 도움을 주신 신강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유몽인은 와곡에서 영원암까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와곡(臥谷)으로 돌아들자 수목이 울창하고 돌길이 험하여 더욱 걷기 힘들었다.(윗보살골) 년이나 됨직한 고목들이 저절로 자라났다 저절로 죽어, 가지는 꺾이고 뿌리는 뽑혀 가파른 돌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곳을 지날 때는, 그 가지를 베어내고 문을 드나들 듯이 구부리고서 그 아래로 빠져나오기도 하고, 문지방을 넘듯이 걸터앉아 넘기도 하고, 사다리를 밟고 오르듯이 밟고서 지나기도 하였다. <중략>해가 뜰 때부터 등산을 시작하여 정오 무렵에 비로소 갈월령(葛越嶺)을 넘었다. 갈월령은 반야봉(般若峯)의 세 번째 기슭이다. 가느다란 대나무가 밭을 이루고 몇 리나 펼쳐져 있었지만, 그 사이에 다른 나무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사람이 개간하여 대나무를 심어놓은 듯하였다. 다시 지친 걸음을 옮겨 영원암(靈源菴)에 이르렀다.」 지난해 점필재 길과 감수재 길을 마무리 하면서 산길에 대한 이해가 밝아진 듯하다. 끝.

 

1. 소동폭포 위로 우회하여 계곡으로 접근하는 산길 確認.

2. 수월대 흑담(黑潭)의 7언절구 마애 석각 탁본이 필요함.

3. 월락동(月落洞)황혼동(黃昏洞)은 위아래 와운마을로 추정됨. 

4. 윗보살골-영원령을 잇는 연결 포인트 964.1봉에서 영원령이 보임.

5. 영원사-무너진 산판길-영원령-계곡-오른쪽 사면 트래버스-세모롱이-964.1봉-윗보살골-와운

 

 

 

영원사
산판 도로 흔적
이정표 나무
이정표 고사목
샘터
영원령(갈월령)
이정표 고사목
샘터
964.1봉에서 바라본 영원령
천년송
북두재
참샘
노진의 서재(?)
대암
군대 막사 흔적
와편
정룡암 터
샘터
반선 야영장

 

 

수월대
흑담(?)
칠언절구 시 석각
제일강산
황계폭포(?)
도탄
솔 숲에서 허리길로 소동폭포 우회길이 보인다.
지도 : 산영님

 

▶ 참고 자료 :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

 

4월 1일 (백장암을 출발하여) 내원(內院)에 이르니 두 줄기 시냇물이 합쳐지고, 꽃과 나무가 산을 이룬 곳에 절이 세워져 있었다. 마치 수를 놓은 비단 속으로 들어가는 듯하였다. 소나무 주변의 단()은 숫돌처럼 평평하였고, 금빛푸른빛의 단청이 숲 속 골짜기에 비추었다. 또 천 번이나 두드려 만든 종이에 누런 기름을 먹여 겹겹이 바른 장판은 마치 노란 유리를 깔아놓은 듯, 한 점 티끌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 허연 늙은 선사(禪師)가 승복을 입고 앉아 불경을 펴놓고 있었다. 그의 생애가 맑고 깨끗하리라 여겨졌다. 이에 머무는 대신 시를 지어놓고 떠났다. 동쪽 시내를 따라 오르니 산은 깊고 물은 세차게 흘러내렸다. 한걸음 한 걸음씩 올라 정룡암(頂龍菴)에 이르렀다. 앞에 큰 시내가 가로막고 있는데 냇물이 불어 건널 수 없었다. 건장한 승려를 뽑아 그의 등에 업혀서 돌을 뛰어넘으며 건넜다. 낭떠러지에 가까이 있는 바위가 자연스럽게 대()를 이루었는데 그 바위를 대암(臺巖)이라 하였다. 그 아래에 시퍼렇게 보이는 깊은 연못이 있었지만 겁이 나 내려다볼 수 없었다. 그 연못에 사는 물고기를 가사어(袈裟魚)라 부르는데, 조각조각 붙은 논 혹은 한 조각씩 기워 만든 가사(袈裟) 같은 모양의 비늘이 있다고 하였다. 이 세상에 다시없는 물고기로, 오직 이 못에서만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른다고 한다. 이에 어부를 시켜 그물로 잡게 하였으나, 수심이 깊어 새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이 날 저녁 伯蘇(백소)[雲峰 수령李復生(이복생)]가 하직하고 돌아가다가 내원에서 묵었다. 나는 내원이 깨끗하고 고요한 것을 사랑하여 처음에는 그곳으로 돌아가 자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룡암에 이르자 지쳐서 그럴 수 없었다. 심하구나! 나의 쇠함이여. 정룡암 북쪽에 한 채의 집이 있었는데. 이 암자의 승려가 말하기를,이곳이 바로 판서(判書) 노진(盧禛)의 서재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옛날 옥계(玉溪) 노진(盧禛) 선생이 자손들을 위해 지은 것이다. 선생도 봄날의 꽃구경과 가을날의 단풍놀이를 하러 왔으며, 흥이 나면 찾은 것이 여러 번이었다. !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 깊은 산속 외딴곳에 자제들을 위해 집을 짓고 살게 했으니, 선생의 깨끗한 지취는 후학을 흥기 시킬 수 있겠구나.

 

노진(盧禛)[1518~1578] 조선 중기 남원에서 활동한 문신. 옥계(玉溪) 노진(盧禛)[1518~1578]은 조선 중기 명종과 선조 연간에 주로 활약한 문신으로, 30여 년 동안 청현(淸顯)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지례 현감과 전주부윤 등 외직에 나가서는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였다. 성리학과 예악에 밝았다. 노진은 1518(중종 13) 함양군 북덕곡 개평촌에서 태어났으나 처가가 있는 남원에 와서 살았다.

 

 

4월 2 신미일. 새벽밥을 먹고 월락동(月落洞)을 거쳐 황혼동(黃昏洞)을 지났다. 고목이 하늘에 빽빽이 치솟아 올려다봐도 해와 달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밝은 대낮일지라도 어두컴컴하기 때문에 월락동․황혼동이라고 부른다. 와곡(臥谷)으로 돌아들자 수목이 울창하고 돌길이 험하여 더욱 걷기 힘들었다.(윗보살골) 천 년이나 됨직한 고목들이 저절로 자라났다 저절로 죽어, 가지는 꺾이고 뿌리는 뽑혀 가파른 돌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곳을 지날 때는, 그 가지를 베어내고 문을 드나들 듯이 구부리고서 그 아래로 빠져나오기도 하고, 문지방을 넘듯이 걸터앉아 넘기도 하고, 사다리를 밟고 오르듯이 밟고서 지나기도 하였다. 그 외에 공중에 선 채로 말라죽어 반쯤 꺽이거나 썩은 것도 있고, 가느다란 줄기가 우뚝 위로 천 자나 솟구쳐 다른 나무에 기대어 쓰러지지 않은 것도 있고, 푸른 등나무가 오랜 세월 뻗어나가 가지를 드리우고 잎을 늘어뜨리고서 장막처럼 펼쳐져 있는 것도 있었다. 수십 리에 걸쳐 굽이굽이 뻗은 시내는 높은 언덕이 없어 맑은 바람이 항상 가득하고 상쾌한 기운이 흩어지지 않았다. 함께 유람온 사람들이 봄옷을 입은 지 한 달 남짓 되는데, 이곳에 이르러 모두 두터운 솜옷을 껴입었다. 해가 뜰 때부터 등산을 시작하여 정오 무렵에 비로소 갈월령(葛越嶺)을 넘었다. 갈월령은 반야봉(般若峯)의 세번째 기슭이다. 가느다란 대나무가 밭을 이루고 몇 리나 펼쳐져 있었지만, 그 사이에 다른 나무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사람이 개간하여 대나무를 심어놓은 듯하였다. 다시 지친 걸음을 옮겨 영원암(靈源菴)에 이르렀는데 영원암은 고요한 곳이면서 시원하게 탁 트인 높은 터에 있어서, 눈앞에 펼쳐진 나무숲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왕대나무를 잘라다 샘물을 끌어왔는데, 옥 구르는 소리를 내며 나무통 속으로 흘러들었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갈증을 풀 수 있었다. 암자는 자그마하여 기둥이 서너 개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깨끗하고 외진 것이 사랑할 만하였다. 이곳은 남쪽으로는 마이봉(馬耳峯)을 마주하고, 동쪽으로는 천왕봉을 바라보고, 북쪽으로는 상무주암을 등지고 있다. 이 암자에 사는 이름난 승려 선수(善修)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불경을 풀어내어 사방의 승려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는 순지와 퍽 친한 사이여서 우리에게 송편과 인삼 떡, 팔미다탕(八味茶湯)을 대접하였다. 이 산에는 대나무 열매와 감과 밤 등이 많이 나서 매년 가을 이런 과실을 따다 빻아 식량을 만든다고 한다. 해가 기울자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오고, 앞산 봉우리에 구름이 모여들어 비가 올 징조가 보였다. 우리는 서둘러 떠나 사자항(獅子項)을 돌아 장정동(長亭洞)으로 내려갔다. 긴 넝쿨을 잡고서 가파른 돌길을 곧장 내려가 실덕리(實德里)를 지났다. 그제야 들녘의 논이 보였는데 처음으로 물을 대는 도랑에 맑은 물이 콸콸 흘러내렸다. 저물녘에 군자(君子寺)로 들어가 잤다. 이 절은 들판에 있는 사찰이어서 흙먼지가 마루에 가득하였고 선방(禪房) 앞에 모란꽃이 한창 탐스럽게 피어 있어 구경할 만하였다. 절 앞에 옛날 영정(靈井)이 있어 영정사(靈井寺)라 불렀다. 지금은 이름을 바꿔 군자사라 하는데, 가져온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며칠 동안 세상 밖에서 청량한 유람을 하여 신선의 세계에 오른 듯하였는데, 갑자기 하루 저녁에 속세로 떨어지니 사랑의 정신을 답답하게 하여 밤에 마귀에 시달리는 꿈을 꾸었다. 공자께서 군자가 살면 어찌 비루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신 말씀은 늘 가슴속에 새기기 어려운 듯하다.

 

※ 군자사(君子寺) : 지리산(智異山)에 있는데 세속에 전하기를, “진평왕(眞平王 579년∼632년)이 왕위를 피하여 여기에서 살다가 태자를 낳고 환국할 때에 집을 회사하여 절을 만들었다.” 하였으나, 사서(史書)에는 다 보이지 않는다. [여지승람에 함양(咸陽)]

 

 

 

▶ 유몽인(柳夢寅, 1559~1623) : 유몽인의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간재(艮齋)·묵호자(默好子),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아버지는 유충관(柳忠寬)이고, 어머니는 민씨이다. 성혼(成渾)[1535~1598]과 신호(申濩)에게서 수학하였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9년(선조 22) 증광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 명나라에 질정관으로 다녀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를 평양까지 호종하였다. 임진왜란 중 명나라 사신의 접대를 담당하였으며, 세자를 호종하기도 하였다. 병조참의와 황해감사 등을 지냈으며, 1609년(광해군 1) 성절사 겸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은거하다가 다시 남원부사로 나갔으며, 뒤에 한성부좌윤과 대사간 등을 지냈다.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유몽인은 가담하지 않고 은거하며 성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 때 화를 면하였다. 그러나 광해군 정권에 출사한 경력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방랑 생활을 하다가 유응강(柳應崗)의 무고로 반역 죄인이 되어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들이 중북파(中北派)라 하여 몰아 죽인 것이다.

유몽인은 조선 후기 문장가와 외교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글씨도 뛰어난 인물로, 전라도 유생들이 ‘문청(文淸)’이라는 사시(私諡)를 올리고 운곡사(雲谷祠)에 봉향하였다. 신원이 된 뒤에는 조정에서 ‘의정(義貞)’이란 시호를 내리고 운곡사를 공인하였다. 고산(高山) 삼현영당(三賢影堂)에도 제향되었으며, 저술로 야담을 집대성한 『어우야담(於于野譚)』과 시문집인 『어우집』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불일암」[유몽인] [佛日菴-柳夢寅-]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