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창불대와 영신대 옛길을 찾아서(210226~27)

도솔산인 2021. 2. 27. 21:15

창불대와 영신대 옛길을 찾아서(210226~27)

 

 

▣ 일 시 : 2021년 02월 26일~27일

▣ 코 스 : 거림-음양수-창불대 허리길-영신대-창불대-음양수-거림

▣ 인 원 : 3명

▣ 날 씨 : 맑고 포근함, 영하 3도

 

 

1472년 8월 16일 김종직은 향적사에서 1박을 한 후, 다음날 영신사에서 머문다. 유두류록의 창불대 관련 기록은 자못 상세하다. 김종직은 해가 저물 무렵 창불대를 산책하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긴다. '17일, 신사일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너무 높아서 그 아래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躑躅〕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두원곶(荳原串), 여수곶(麗水串), 섬진강(蟾津江)의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이한 광경이었다.' 김종직의 유두류 기행시 영신암에 '箭筈車箱散策回 : 전괄(창불대)거상(창불대골)을 산책하고 돌아오니, 老禪方丈石門開 : 노선사의 방장에 석문이 열려있네.'라는 시구가 있다. 김종직은 해질 무렵에 영신암에서 석문을 통과하여 이길로 창불대를 다녀온 것이다.

 

지난번 산행에서 영신대에서 창불대로 오르는 옛길의 초입을 확인했지만 미답 구간이다. 제일봉 전망대에 오르니 좌고대와 추강암 아래로 기암괴석과 고사목이 장관이다. 이곳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석가섭의 형상은 불두의 형상이다. 내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제일봉 전망대 안부는 옛길의 흔적이 뚜렷하다. 점필재는 아마도 이곳을 지나 창불대를 다녀왔을 것이다. 이번 산행에서 음양수에서 능선을 넘어 창불대골(거상곡, 車箱谷)을 가로질러 영신대에 닿았다. 전괄(창불대)의 아래 거상곡(車箱谷)을 거침없이 횡단한 것이다. 거상(車箱)은 한번 내려가면 돌아올 수 없는 험준(險峻)한 계곡을 뜻한다. 정월 대보름 영신대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창불대 옛길을 확인한 후, 음양수를 지나 거림으로 내려왔다. 좌고대, 석가섭, 비로봉에 대한 설명은 유람록의 기록으로 대신한다. 끝.

 

 

1. 창불대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과 기행시

 

가.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 17일, 신사일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너무 높아서 그 아래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躑躅〕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두원곶(荳原串), 여수곶(麗水串), 섬진강(蟾津江)의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이한 광경이었다. 해공이 여러 산골짜기가 모인 곳을 가리키면서 신흥사동(新興寺洞)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절도사(節度使) 이극균(李克均)이 호남(湖南)의 도적 장영기(張永己)와 여기에서 싸웠는데, 장영기는 개나 쥐 같은 자라서 험준한 곳을 이용했기 때문에 이공(李公) 같은 지략과 용맹으로도 그가 달아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끝내 장흥 부사(長興府使)에게로 공(功)이 돌아갔으니, 탄식할 일이다.

 

해공이 또 악양현(岳陽縣)의 북쪽을 가리키면서 청학사동(靑鶴寺洞)이라고 하였다. 아! 이곳이 옛날에 신선(神仙)이 산다는 곳인가. 인간의 세계와 그리 서로 멀지도 않은데, 미수(眉叟) 이인로(李仁老)는 어찌하여 이 곳을 찾다가 못 찾았던가? 그렇다면 호사가가 그 이름을 사모하여 절을 짓고서 그 이름을 기록한 것인가? 해공이 또 그 동쪽을 가리키면서 쌍계사동(雙溪寺洞)이라고 하였다. 세속에 얽매이지 않았던 고운 최치원이 일찍이 노닐었던 곳으로 각석(刻石)이 남아 있었다. 기개를 지닌 데다 난세를 만났으므로, 중국에서 불우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내 고고하게 속세 밖에 은둔함으로써 깊고 그윽한 산천은 모두 그가 노닐며 거쳐 간 곳이었으니, 세상에서 그를 신선이라 칭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겠다.

 

暮登唱佛臺. 巉巉斗絶. 其下無底. 其上無草木. 但有躑躅數叢. 羚羊遺矢焉. 俯望荳原串,麗水串蟾津之委. 山海相重. 益爲奇也. 空指衆壑之會曰. 新興寺洞也. 李節度克均. 與湖南賊張永己戰于此. 永己. 狗鼠也. 以負險故. 李公之智勇. 而不能禁遏其奔逬. 卒爲長興守之功. 可嘆已.

 

又指岳陽縣之北曰. 靑鶴寺洞也. 噫. 此古所謂神仙之區歟. 其與人境. 不甚相遠. 李眉叟何以尋之而不得歟. 無乃好事者慕其名. 構寺而識之歟. 又指其東曰. 雙溪寺洞也. 崔孤雲嘗遊于此. 刻石在焉. 孤雲. 不羈人也. 負氣槩. 遭世亂. 非惟不偶於中國. 而又不容於東土. 遂嘉遯物外. 溪山幽闃之地. 皆其所遊歷. 世稱神仙. 無愧矣.

 

 

靈神菴(영신암)

 

箭筈車箱散策回 : 전괄(箭筈)와 거상을 산책하고 돌아오니

老禪方丈石門開 : 노선사의 방장(方丈)은 석문이 열려있네

明朝更踏紅塵路 : 내일 아침이면 속세의 길 다시 밟으리니

須喚山都沽酒來 : 모름지기 촌장을 불러 술이나 받아 오게

 

영신암 주변을 산책하며 '창불대는 하늘로 통하는 석문으로 올라가고, 창불대골은 험해서 한번 내려가면 올라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두보의 '望嶽詩망악시' [車箱入谷無歸路 箭筈通天有一門]“거상의 골짝에 들어서니 돌아갈 길이 없고 전괄로 하늘을 통하는 문 하나가 있구려"의 전괄과 거상 시어를 인용함.

 

 

나. 1489년 김일손 선생의 속두류록(續頭流錄)

 

1489년 4월 24일, 임자일. 영신사(靈神寺)에서 묵었는데, 이 절 앞에는 창불대가 있고 뒤에는 좌고대가 있는데, 천 길이나 솟아 있어 올라가면 눈으로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二)十四日壬子. 宿靈神. 前有唱佛臺. 後有坐高臺. 突起千仞. 登而目可及遠. 得以久留也.

 

 

다. 1543년 황준량의 기행시

 

唱佛臺(창불대)

 

靑山起層雲 : 청산에는 뭉게구름 층층이 일어나고

嵌竇瀉急瀨 : 깊은 골엔 세찬 물이 쏟아져 흐르네.

一徑入窈窕 : 오솔길 따라서 깊은 곳에 들어가니

寒翠飛晻蕩 : 비취빛 차가운 기운 자욱이 서렸네.

有臺自天成 : 태초에 절로 만들어진 대가 있는데

聳立出空外 : 허공 위로 우뚝하게 솟아 있구나.

滄溟擬盃潦 : 넓은 바다는 술잔 속에 물인 듯하고

積皺如曹鄶 : 겹겹의 산줄기는 조나 회처럼 작네.

眼盡杳不窮 : 아득히 멀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山氣此交會 : 산의 기운은 여기에서 서로 모였네.

天王自無對 : 천왕봉은 상대할 다른 산이 없나니

萬絶靑丘最 :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고 우뚝하구나.

巖前千仗壁 : 바위 앞에 펼쳐진 천 길의 절벽은

水墨訝新繪 : 수묵화를 새로 그려놓았나 의아했네.

氷雪蟄花木 : 눈과 얼음 속에선 꽃나무들 꿈틀대고

嵐霧困松檜 : 운무 속에선 솔과 전나무가 고생하네.

輕風動衣袂 : 가벼운 바람이 옷소매를 흩날리는데

鶴羽時翽翽 : 학이 마침 날개 짓하며 날아오르는 듯

遺矢認羚羊 : 배설물을 보아 영양이 사는 줄 알았고

有草類書帶 : 서대초 비슷한 약초도 자생하고 있네.

登臨盪塵胸 : 산에 올라 세속의 찌든 마음 씻어내고

淸嘯起靈籟 : 맑게 읊조리니 신령한 소리 일어나네.

自慙管仲小 : 관중처럼 국량이 작아 부끄러우나

猶嫌伯夷隘 : 백이처럼 속 좁은 것도 싫어한다네.

府歎人宸卑 : 굽어보며 인간세상 비천함을 탄식하고

未信天地大 : 천지가 얼마나 큰지는 믿지 못하겠네.

逸興躡飛仙 : 호방한 흥취 일어나는 신선을 따르고

吟思濕靑靄 : 시상을 떠올리다 구름에 흠뻑 젖었네.

累號自緇流 : 누차 부르는 소리는 승려가 날 찾는 것

胡僧語荒昧 : 승려들 황당하고 어리석은 말을 하였네.

遊人幾古今 : 고금에 이곳을 찾은 이가 몇이나 되는지

懷舊愁無奈 : 옛일을 생각하니 수심을 어쩔 수 없네.

浮生足優游 : 뜬 구름 같은 인생 여유 있게 살아야지

吉凶誰卜蔡 : 길흉을 뉘라서 미리 알 수가 있겠는가.

 

출처 : 선인들의 기행시 1권 창불대 (32~34면)

 

 

2. 석가섭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과 기행시

 

가. 1463년 8월 이륙 선생의 유지리산록

 

영신사(靈神寺) 동쪽 제단에는 가섭(迦葉)의 석상이 있는데 어깨와 팔에 불에 탄 듯한 자국이 있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이 석상이 다 타면 인간 세상이 변해서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올 것이니 매우 영험함이 있다.”라고 한다.

 

靈神寺東壇. 有迦葉石像. 肩臂如火燒然. 諺傳. 燒盡人世當更. 卽有彌勒佛住世. 甚有靈驗云.

 

 

나.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과 비해당 贊

 

영신사(靈神寺)에서 머물렀는데 여기는 승려가 한 사람뿐이었고, 절 북쪽 비탈에는 석가섭(石迦葉) 한 구(軀)가 있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 때에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香)을 내렸는데, 그 석가섭의 목에도 갈라진 곳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倭寇)가 찍은 자국이라고 했다. 아! 왜구는 참으로 도적이로다. 산 사람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는데, 성모와 가섭의 머리까지 또 칼로 베는 화를 입혔으니, 어찌 비록 아무런 감각이 없는 돌일지라도 사람의 형상을 닮은 까닭에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오른쪽 팔뚝에는 마치 불에 탄 듯한 흉터가 있는데, 이 또한 “겁화(劫火)에 불탄 것인데 조금만 더 타면 미륵(彌勒)의 세대가 된다.”고 한다.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황당하고 괴이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내세(來世)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서로 다투어 돈과 베를 보시(布施)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라는 것이다. <중략>법당(法堂)에는 몽산 화상(蒙山和尙)의 그림 족자가 있는데, 그 위에 쓴 찬(贊)에,

 

宿靈神寺. 但有一僧. 寺之北崖. 有石迦葉一軀. 世祖大王時. 每遣中使行香. 其項有缺. 亦云爲倭所斫. 噫. 倭眞殘寇哉. 屠剝生人無餘. 聖母與迦葉之頭. 又被斷斬. 豈非雖頑然之石. 以象人形而遭患歟. 其右肱有瘢. 似燃燒. 亦云劫火所焚. 稍加焚. 則爲彌勒世. 夫石痕本如是. 而乃以荒怪之語誑愚民. 使邀來世利益者. 爭施錢布. 誠可憎也. 迦葉殿之北峯. 有二巖突立. 所謂坐高臺也. <중략> 法堂有蒙山畫幀. 其上有贊. 云.

 

 

蒙山畫幀迦葉圖贊

 

匪懈堂 李瑢

 

頭陁第一。是爲抖擻。: 마하가사파존자께서는 두타 수행인 두수를 바르게 실천하시어

外已遠塵。內已離垢。: 밖으로 이미 번뇌를 떨치시고, 안으로 離垢의 경지에 오르셨네

得道居先。入滅於後。: 앞서 道(아라한과)를 깨달으시고 뒤에 적멸의 경지에 드셨으니

雪衣雞山。千秋不朽。: 눈 덮인 계족산에 깃들어 천추에 사라지지 않고 길이 전하리라

 

 

하였고, 그 곁의 인장(印章)은 청지(淸之)라는 소전(小篆)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비해당(匪懈堂)의 삼절(三絶)이었다.

 

傍印淸之小篆. 乃匪懈堂之三絶也.

 

 

다. 1487년 남효온 선생의 지리산일과

 

시월 정묘일 1일 쌀 한 말을 남겨두고 일경과 작별하였다. 향적암을 출발하여 소년대(少年臺)에 올랐다. 솜대〔綿竹〕를 뚫고 계족봉(雜足峰)을 지나 산길로 30리를 걸어 빈발암(貧鉢庵)에 이르렀다. 그 아래에는(암자 아래에) 영신암(靈神庵)이, 암자 뒤에는 가섭전(迦葉殿)이 있었는데 세속에서 영험이 있다고 하였다. 내가 그곳을 자세히 보니 한 덩이의 돌이 완연히 있을 뿐이었다. 나는 가섭전 뒤쪽에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산의 한 봉우리를 올랐는데, 좌고대(坐高臺)라고 하였다.

 

十月丁卯朔. 留米一斗別一囧. 發香積. 登少年臺. 穿綿竹度鷄足. 山行三十里. 抵貧鉢庵. 庵下有霛神庵. 庵後有迦葉殿. 世俗所謂有霛驗者. 余詳視之. 一石頑然. 余從伽葉殿後攀枝仰上一山. 名曰坐高臺. 有上中下三層. 余止上中層. 心神驚悸. 不得加上. 臺後有一危石高於坐高臺.

 

 

라. 1489년 김일손 선생의 속두류록(續頭流錄)

 

○ 4월 24일, 임자일. 영신사(靈神寺)에서 묵었는데, 이 절 앞에는 창불대가 있고 뒤에는 좌고대가 있는데, 천 길이나 솟아 있어 올라가면 눈으로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동쪽에는 영계(靈溪)가 있는데, 대나무 홈통을 따라 물이 흘러들었고 서쪽에는 옥청수(玉淸水)가 있는데, 매가 마시는 물이라고 승려가 말하였다. 북쪽에는 석가섭상이 있었다. 당 안에는 찬(贊)이 적힌 가섭도(伽葉圖)가 있는데, 비해당의 삼절(三絶)이었다. 연기에 그을리고 비에 젖은 흔적이 있으나 이 진귀한 보물이 빈 산에 버려진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가져가려 하였다. 그러자 백욱이 말하기를, “사가(私家)에 사사로이 소장하는 것이, (어찌)명산에 공적으로 보관해두고 안목을 갖춘 사람들이 유람하며 감상하게 하는 것만 하겠습니까?”라고 하여 가져가지 않았다. 백성들이 시주하여 가섭상에 복을 비는 것이 천왕봉의 성모상에게 비는 것과 같았다. 밤에 법당에서 묵었는데 안개가 자욱하고 바람이 휘몰아쳐 문짝을 후려쳤다. 사람을 엄습하는 찬 기운이 매우 사나워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二)十四日壬子. 宿靈神. 前有唱佛臺. 後有坐高臺. 突起千仞. 登而目可及遠. 東有靈溪. 注於剖竹之中. 西有玉淸水. 僧云鷹所飮也. 北有石迦葉像. 堂中有畫迦葉圖贊. 匪懈堂三絶也. 煙煤雨淋. 惜其奇寶之見棄於空山. 欲取之. 伯勖曰. 私於一家. 曷若公於名山. 以備具眼者之遊賞也. 遂不取. 百姓施財. 邀福於迦葉與天王等. 夜宿法堂. 昏霧顚風. 敲戶排窓. 氣襲人甚惡. 不可得以久留也.

 

 

마. 1545년 황준량 선생의 遊頭流山紀行篇(유두류산기행편)

 

* 乙巳夏四月 遊山川(225구~228구)

 

千尋迦葉日邊影 : 천 길의 가섭대가 햇빛에 그림자 드리웠는데

刃斫亦被島夷兇 : 흉악한 섬 오랑캐의 칼날에 상처를 입었구나

民生血肉不堪說 : 백성들이 당한 피해는 말로 감당할 수 없지만

石木胡然逢鞠詾 : 바위와 나무도 어찌 그런 큰 재앙을 당했던가

 

* 鞠詾 : 큰 재앙

 

注 : 1545년 황준량은 두류산을 유람하고 13제 16수의 시를 남겼는데, 장편고시(장단구) 遊頭流山紀行篇(유두류산기행편)] 225구~230구는 가섭대의 경관을 노래하였다. 참고로 遊頭流山紀行篇은 176운 352구 2,516자로 이루어진 장편고시이다. '선인들의 지리산 기행시3(최석기, 강정화)'의 p36에 가섭대의 注에 영신사지 근처에 가섭대라는 절벽이 있다. 갓(모자)을 쓴 모습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석가섭을 찾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황준량의 장편고시 [遊頭流山紀行篇(유두류산기행편)]의 '천 길의 가섭대가 햇빛에 그림자 드리웠는데/흉악한 섬 오랑캐의 칼날에 상처를 입었구나.'라는 詩句이다. 햇빛과 시간에 따라 바위가 돌출된 절벽으로도 보이고, 석가섭이 깃든 자연佛로도 보이니 빛과 그림자의 오묘한 조화라고 할 수 있다.

 

 

바. 1611년 유몽인 선생의 유두류산록

 

4월 5일 갑술일. <중략>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靈神菴)에 이르렀는데, 여러 봉우리가 안쪽을 향해 빙 둘러서 있는 것이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솟아 있고,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서쪽에 서 있고, 가섭대(迦葉臺)는 뒤에 있었다. 지팡이를 내려놓고 기다시피 비로봉 위로 올라갔지만 추워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

 

仍降萬丈蒼壁. 抵靈神菴. 諸峯環拱面内. 如相向而揖. 毗盧峰在其東. 坐高臺峙其北. 阿里王塔樹其西. 迦葉臺壓其後. 遂投杖. 手足行陟毗盧峯上. 凜乎不可久留也.

 

 

3. 좌고대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

 

가. 1463년 8월 이륙 선생의 유지리산록

 

뒤쪽의 봉우리에는 기이한 바위가 돛대처럼 솟아 있는데 북쪽으로 만 길이나 되는 벼랑에 맞닿아 있고 상처럼 생긴 돌을 그 위에 또 이고서 반야봉을 향해 조금 기울어져 있다. 부여잡고 올라 사방을 향해 절하는 자는 근기가 잘 잡혀 있다고 여겨지는데 해낼 수 있는 자는 천 명 중에 한 두 명이 있을까 말까할 정도이다.

 

後峯有奇石削立如檣. 北臨萬丈. 復戴小石如床. 向般若峯稍低. 人有攀緣而登. 四向拜者. 以爲根性. 然其能之者. 千百僅有一二.

 

 

나.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 8월 17일, 신사일<중략>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라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네모난 돌이 얹혀 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 정도였는데, 승려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를 얻는다고 한다. 이 때 종자인 옥곤(玉崑)염정(廉丁)은 능란히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迦葉殿之北峯. 有二巖突立. 所謂坐高臺也. 其一. 下蟠上尖. 頭戴方石. 闊纔一尺. 浮屠者言. 有能禮佛於其上. 得證果. 從者玉崑廉丁. 能陟而拜. 予在寺望見. 亟遣人叱土之.

 

 

다. 1487년 남효온 선생의 지리산일과

 

○ 10월 정묘일 <중략> 나는 가섭전 뒤쪽에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산의 한 봉우리를 올랐는데, 좌고대(坐高臺)라고 하였다. 거기에는 상, 중, 하 3층이 있었는데 나는 중층까지 올라가서 멈추었는데 심신이 놀라고 두근거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었다. 대의 뒤에는 위험한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좌고대보다 더 높았다. 나는 그 바위에 올라 좌고대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기이한 풍경이었다. 의문은 좌고대 아래에 앉아서 두려워하면서 더 이상 올라오지 못하였다. 이 날 서쪽 방면은 전날보다 훨씬 청명하여, 서해와 계룡산 등의 여러 산을 두루 분별할 수 있었다.

 

○ 十月丁卯朔. <중략> 余從伽葉殿後攀枝仰上一山. 名曰坐高臺. 有上中下三層. 余止上中層. 心神驚悸. 不得加上. 臺後有一危石高於坐高臺. 余登其石. 俯視臺上. 亦奇玩也. 義文坐臺下. 恐懼不得上. 是日之西面淸明. 倍於曩日. 西海及鷄龍諸山. 歷歷可辨.

 

 

라. 1489년 김일손 선생의 속두류록

 

○ 4월 24일, 임자일. 영신사(靈神寺)에서 묵었는데, 이 절 앞에는 창불대가 있고 뒤에는 좌고대가 있는데, 천 길이나 솟아 있어 올라가면 눈으로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동쪽에는 영계(靈溪)가 있는데, 대나무 홈통을 따라 물이 흘러들었고 서쪽에는 옥청수(玉淸水)가 있는데, 매가 마시는 물이라고 승려가 말하였다. 북쪽에는 석가섭상이 있었다. 당 안에는 찬(贊)이 적힌 가섭도(伽葉圖)가 있는데, 비해당의 삼절(三絶)이었다. 연기에 그을리고 비에 젖은 흔적이 있으나 이 진귀한 보물이 빈산에 버려진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가져가려 하였다. 그러자 백욱이 말하기를, “사가(私家)에 사사로이 소장하는 것이, (어찌)명산에 공적으로 보관해두고 안목을 갖춘 사람들이 유람하며 감상하게 하는 것만 하겠습니까?”라고 하여 가져가지 않았다.

 

○ 二十四日壬子. 宿靈神. 前有唱佛臺. 後有坐高臺. 突起千仞. 登而目可及遠. 東有靈溪. 注於剖竹之中. 西有玉淸水. 僧云鷹所飮也. 北有石迦葉像. 堂中有畫迦葉圖贊. 匪懈堂三絶也. 煙煤雨淋. 惜其奇寶之見棄於空山. 欲取之. 伯勖曰. 私於一家. 曷若公於名山. 以備具眼者之遊賞也. 遂不取.

 

 

마. 1611년 유몽인 선생의 유두류산록

 

○ 4월 5일 갑술일.<중략>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靈神菴)에 이르렀는데, 여러 봉우리가 안쪽을 향해 빙 둘러서 있는 것이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 솟아있고,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서쪽에 서 있고, 가섭대(迦葉臺)는 뒤에 있었다.

 

○ 甲戌.<중략> 仍降萬丈蒼壁. 抵靈神菴. 諸峯環拱面内. 如相向而揖. 毗盧峰在其東. 坐高臺峙其北. 阿里王塔樹其西. 迦葉臺壓其後. 遂投杖. 手足行陟毗盧峯上. 凜乎不可久留也. 菴有茶鼎. 香爐. 而不見居僧. 將樵蘇白雲而不知處耶. 抑厭避塵人而潛跡亂峯間耶. 節屆淸和. 始見杜鵑花半綻. 亦知山候稍暖於上峯也.

 

 

4. 비로봉에 대한 선인들의 유람록

 

가. 1463년 이륙이륙 선생의 유지리산록

 

뜰아래 작은 샘이 있는데 물이 세고 매우 맛있어서 신천(神泉)이라고 불리는데 흘러 내려가 화개천이 된다. 동쪽에 바위 봉우리가 있는데 부도(浮屠) 모양처럼 생겼다. 여기 사는 승려들은 귀사(龜社)의 주인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이 죽지 않고 여기에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庭下有小泉. 水性堅. 香甚味. 號神泉. 下而爲花開川. 東有石峯. 如浮屠狀. 居僧以爲龜社主崔文昌. 不死在此云.

 

 

나. 1611년 유몽인 선생의 유두류산록

 

○ 4월 5일 <중략>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靈神菴)에 이르렀는데, 여러 봉우리가 안쪽을 향해 빙 둘러서 있는 것이 마치 서로 마주 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毗盧峰)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坐高臺)는 북쪽에 우뚝 솟아 있고,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서쪽에 서 있고, 가섭대(迦葉臺)는 뒤에 있었다. 지팡이를 내려놓고 기다시피 비로봉(毗盧峰) 위로 올라갔지만 추워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

 

仍降萬丈蒼壁. 抵靈神菴. 諸峯環拱面内. 如相向而揖. 毗盧峰在其東. 坐高臺峙其北. 阿里王塔樹其西. 迦葉臺壓其後. 遂投杖. 手足行陟毗盧峯上. 凜乎不可久留也.

 

 

산천재 남명매
칠선봉 능선
창불대
창불대
좌고대
요사채(옥천)에서 바라본 좌고대 : 사진(칠성님)
좌고대와 가섭대
석가섭
창불대(자살바위)
창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