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미타봉의 소림선방과 향로봉을 찾아서(201225~27)

도솔산인 2020. 12. 27. 20:56

미타봉의 소림 선방과 향로봉을 찾아서(201225~27)

 

 

▣ 일 시 : 2020년 12월 25일~27일

▣ 코 스 : 송대-마당바위-미타봉-향로봉(상내봉)-석굴I-석굴II-윗장구목-마당바위-송대

▣ 인 원 : 2명(덕자 님)

▣ 날 씨 : 맑음 영하 5도

 

 

몰입(flow)은 물리적 시간의 착각을 일으켜 시간이 가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왜곡 현상을 말한다. 강도 높은 몰입을 경험해야 깊은 행복감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선인들의 유람록 복원 또한 몰입의 과정을 통해 아주 조금씩 얻어진다. 몰입의 현상을 경험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예술가의 예술 행위도, 학자들의 연구 활동도, 심지어 이성 간의 사랑(love sport)도 몰입하지 않으면 원하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다. 선인들의 유람길 복원 역시 몰입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몰입은 항상 현재 진행형으로 자신이 주도하여 시간을 이끌어가는 고도의 지각(知覺) 현상이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화암이 줄곧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1914년 엄천면과 휴지면이 통합되면서 휴천면이 되었다. 1888년(고종 25) 간행된 천령지에 엄천면(지명)의 영역은 당북(堂北), 초정(初亭), 소연(所淵), 음법(陰法), 탄촌(炭村, 문정), 용당(龍堂, 용유담)을 포함하고 있다. 당북은 당두재 북쪽 휴천면 대천리와 유림면 미천리 일대를 가리키는 듯하다. 1470년 12월 말 사숙재 강희맹은 김종직이 함양 군수로 내려갈 때,  '송김수찬종직작재함양(送金修撰宗直作宰咸陽)'이라는 송별시를 짓는데 二首의 3구에 엄천이 나온다. '화장사 옛터를 지나 엄천으로 가는 길에 푸른 대밭 띠집 있는 곳 거기가 내 고향일세.' 여기에서 내 고향은 국계마을이다. 화장사 터는 함양군 유림면 화촌리 정자나무골에 있다. 화촌리와 국계리는 인접해있다. '1470년 엄천면의 영역은 어디까지일까. 유림면 유평리와 화촌리까지 엄천면은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하면서 국계 마을을 지났다. 사숙재의 시는 '내 고향'이라는 엉뚱한 제목으로 오도재의 석재 조형물에 새겨져 있다. 화암을 찾았으나 통일신라 시대 창건한 엄천사에서 비롯된 엄천의 지명이 일제 강점기에 홀연히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送金修撰宗直作宰咸陽 二首

 

(二)

智異山高萬丈長 : 지리산 높이 솟아 올라 만 길이나 거대한데

山藏古郡號咸陽 : 그 산속에 묻힌 옛 고을 함양이라 부른다네

花長舊刹嚴川路 : 화장사 옛 절터 지나서 엄천으로 가는 길에

翠竹茅茨是故鄕 : 푸른 대밭 띠집 있는 곳 거기가 내 고향일세

 

私淑齋集 卷之一 七言絶句 출처 : 천령지

 

 

이번 산행의 목적은 소림선방에서 박(泊)을 하고 주변을 돌아보는 것이다. 금년에 미타봉은 12번째 산행이다. 나는 인문학이라는 용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명 바로잡기가 인문학의 시작이자 마침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유람록 답사는 선답하신 분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일이든 처음 가는 길은 어렵고 뒤에 가는 사람은 쉽다. 내가 어찌 보면 최고 수혜자이다. 나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지리산에 들지도 못하는 사람이 장막 안에서 산가지를 놀리며[운주유악(運籌帷幄)], 지리의 옛 지명에 대하여 왈가왈부(曰可曰否)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와유강산(臥遊江山)이다. 선인들의 유람록은 답사를 병행하지 않으면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유람록 복원은 끝없는 발품을 팔아야 한다. 유람록을 이해하지 못하니 사물을 꿰뚫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그분의 유람록과 지명 관련 글은 논리적이지 않고 설득력이 떨어진다. 산행도 당일 배낭과 전자 지도에 의존한다. 산에서 생존 능력이 없으면서 시도 때도 없이 산꾼이라는 말을 혀가 닳도록 입에 담는다. 산꾼의 기준이 무엇인지, 내가 보기에는 우습다. 유람록 복원과 지명은 현재진행형으로 수정과 보완을 거듭하며 진퇴를 반복해야 한다. 일수불퇴(一手不退)하다가 발목이 잡힌 향로봉(상내봉)이 그 대표적인 실례(實例)이다.

 

1924년 8월 16일 심연(心淵) 강계형(姜桂馨, 1875-1936) 선생은 문정동을 출발하여 30명이 넘는 인원을 이끌고 지리산 유람을 떠난다. 세동에서 1박을 하고 마적사지의 적은(跡隱) 강지주(姜趾周, 1856∼1939) 선생 집에 들렀다가 송대에서 1박을 한다. 다음날 아침 마당바위(塲巖)에서 모여 장구목(缶項)을 넘어 사립재(扉峴비현)에 이른다. 장구목은 장구의 허리처럼 잘록한 부분의 능선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이다. 강계형의 코스는 미타봉 아래 사면 길을 이용하여 사립재 아래에서 통천문으로 직접 올라간다. 오늘은 마당바위에서 윗 장구목을 넘어 강계형 길을 따랐다. 이 길은 송대마을에서 동부(洞府)로 마소를 끌고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사립재골로 내려서면 추성리 3번지, 2번지 1번지 집터가 있다. 소림선방에 막영을 구축하고 일강암(一岡巖)을 지나 미타샘으로 향했다. 미타샘은 송대 계곡의 발원지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 소림선방은 소림굴(少林窟)과 선방(禪房)의 합성어이다. 소림선방은 와불의 입속에 해당한다. 인체에 비유하면 선녀굴이 여근이고 미타봉이 남근이면 고환에 해당하는 위치이다. 자연 석굴의 내부에는 사람들이 조성해놓은 축대가 있고 바닥은 평평하다. W2.7m×L3.3m×H2.4m의 크기이다. 미타봉 양지 전면에는 담장이 쌓여있다. 출입구가 선녀굴 쪽에 있고 선녀굴까지 길이 이어진다. 이 자연 동굴은 습기가 전혀 없고 통풍과 채광에도 문제가 없다. 장풍득수(藏風得水), 바람을 막아주고 멀지 않은 곳에 샘이 있다. 박(泊)을 해보면 터의 기운을 몸으로 느낀다.

 

 

일강암(一岡巖) : 사진 지리산아 님

 

다음날 아침 배낭을 데포 시키고 향로봉(상내봉)을 향했다. 먼저 상내봉 삼거리(?)에서 향로 바위(오뚝이 바위)까지 30m, 와불산의 주봉 향로봉(상내봉, 1213.9봉)까지는 약 100m이다. 향로봉과 향로 바위(오뚝이 바위)의 높이는 서로 비슷하고 상내봉 삼거리는 약 2m 정도가 낮다. 상내봉 삼거리도 군계능선의 삼거리이다. 카카오 맵에는 1213.9봉이 와불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어제보다 날씨가 많이 풀려서 봄바람이 부는 것처럼 살갑다. 미타봉으로 내려와서 미타봉 아래 양지에 있는 석굴 I과 석굴 II를 찾았다. 한말 격변기에 동도(東徒)들과 석상용 장군의 의진(義陣)이, 후에는 빨치산들이 이용했을 것이다. 탄수(灘叟) 이종식(李鐘植, 1871~1945) 선생의 비결 명문 11絶에 '晨明早日霜老峯 : 동이 트면 해가 일찍 뜨는 상로봉은/陽色眺會避難處 : 양기가 빠르게 모여드는 피난처네.'라는 문구가 있다. 여기서 상노봉은 향로봉의 방언 이칭이다. 더구나 '동이 트면 해가 일찍 뜬다.'라고 하였으니, 향로봉(상내봉)에 대하여 재론의 여지가 없다. 

 

윗 장구목에서 내려와 마당바위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장암 댁(塲巖宅) 허○○님이 멀리 금마대(금대산)가 여인이 누워있는 '미녀봉'이라고 설명하였다. 내 눈에는 금성이 조림하는 천마의 형국이다. 송대 주차장으로 내려와 백승열 씨 댁에 들러 차 한 잔을 얻어 마시고 탄수(灘叟) 공 집터로 향했다. 탄수(灘叟) 공의 집터에서 바라본 칠성동(七星洞)은 일곱 개의 봉우리가 감싸고 있다. 칠성동과 북두칠성은 연관이 있다. 천수상(天垂象) 지재상(地載象)이라고 하였으니, 하늘에 있는 형상을 땅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으로 이해한다. 덕암의 성혈은 별자리로 지리산의 지도를 그려놓은 것이다. 趙용헌 박사는 '안산(案山)이 일자문성(一字文星)인 진평왕 태자의 태실지는 군왕지지(君王之地)'라고 한다. 영신봉에서 이어진 칠선봉 능선의 일자문성(一字文星)은 북두칠성을 일렬(一列)로 늘어놓은 것이다. 칠선봉의 지도리 추성(樞星)은 좌고대(坐高䑓)이다. 풍수에 대해 까막눈이 뭔가 싶어 글을 썼지만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끝.

 

 

 

국계마을 안내판
국계마을
채봉(비녀봉)
미타봉
마당 바위에서 바라본 금대산
담장
소림선방(굴)
호박전
막영지 앞 거목
젤트 카모
향로봉과 오뚝이 바위
향로봉(상내봉)
코끼리 바위
일강(一岡) 바위
향로의 형상(오뚝이 바위)
석굴I(석간수가 나온다)
석굴II
영랑대
금대산(금마대)
장암(마당바위)
탄수 이종식 선생 금계동 창시 기념비
옛탄수대

 

灘叟䑓(탄수대)

 

                             李鍾植(1871~1945)

 

灘聲七里澹忘歸 : 칠리의 여울물 소리가 돌아갈 생각을 잊게 하고,
回首嚴陵舊釣磯 : 고개를 돌아보니 엄릉이 노닐던 옛적 낚시터네.
不着羊裘誰辨我 : 양 가죽 옷 입지 않았으니 어느 누가 알아볼꼬?
烟江風雨一簑衣 : 비 바람 부는 안개낀 강에서 도롱이 하나 걸친 나를.

 

 

탄수공 집터에서 바라본 칠성동
일자문성(칠선봉 능선)
지리주능선 형제봉(부자암)
백모당터 기와
노지현 1대 마천면장
1938년 함양군에서 편찬한 군세총람(郡勢總覽) 자료제공 : 곽성근 님
1917년 구시락재-거머리재-장동(장재동/적조암) 지도

위 지도는 총독부에서 1903년 제작을 시작하여 1917년에 완성한 지도로 동강마을에서 구시락재와 거머리재를 넘어 적조암을 지나 돌배나무위 산뽕나무가 있는 곳까지 우마가 이동할 수 있는 도로를 표기하고 있다. 이 도로는 당시 제작한 지적도와도 일치한다. 개인적인 의견인데 암자터는 藏風得水(장풍득수)가 기본이다. 지리산길 지도의 지장사 터는 인근에 와요지에서 기와를 옮겨다가 쌓아놓았던 집하장일 가능성이 있다. 땅의 기운이 흩어지는 난달에 암자를 지을 리는 없다.

 

 

※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지장사와 지장사 갈림길 : blog.daum.net/lyg4533/16488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