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북두추성이 조림하는 칠성동을 찾아서(201128~29)

도솔산인 2020. 11. 30. 12:50

북두추성(北斗樞星)이 조림(照臨)하는 칠성동(七星洞)을 찾아서

 

 

▣ 일 시 : 2020년 11월 28일(토)~11월 29일(일)

▣ 코 스 : 백무동-두지터-칠성동

▣ 인 원 : 4명(문 회장님, 임사천님, 반야님)

▣ 날 씨 : 맑음 영하 1도

 

 

지난 4월 21일 대둔산 석천암 천산 스님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천산 스님은 약관에 통도사에 입산한 분이다. 천산 스님의 소개로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조용헌 박사를 만났고, 5월 16일 점필재의 영랑대로(永郞大路) 구롱(九隴) 길에서 방장문 석각을 찾았다. 그 후 함양 서복연구회 문 회장님의 안내로 방장 제일문을 답사하고 탄수 공과 삼송 공을 만났다. 나는 불교도 역학도 명리도 풍수도 모르는 데다가 대학에서 10.26과 5.18을 겪었으니 겨우 고등학교 교과서 정도만 이해하는 반푼이다. 본래 아는 것이 없으니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른다. 기초가 워낙 없으니 고민할 것도 없는 사람이다. 옛말에 '도끼로 닭을 잡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꼭대 님은 어찌하여 그림 속의 닭을 잡는데 도끼를 휘두르는지. 이재구 님이 옆에서 거드는 모습도 재미있다. 병충해를 붓으로 잡으려고 한다. 이것은 현대판 묵희(墨戱)가 아닌가. '선승들이 참선하는 공간으로의 소림 선방은 국역에 큰 문제가 없다.'라는 답을 받았다. 초의선사 선시를 전공한 분의 답이다. 문득 이재구 선생의 장황한 댓글이 떠오르더라.

 

注 묵희(墨戲) : 신참 과거 급제자에게 선배 급제자들이 행하던 일종의 신고식 때 붓으로 얼굴에 먹칠을 하던 놀이.

 

얼마 전 지리 99 가객님이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구'를 발간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든 가객님은 내게 유람록 답사의 동기를 제공했고 영향을 많이 미친 분이다. 그분이 없었다면 나는 점필재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어찌 그분에게 고마운 생각이 없겠는가. 시간이 많이 흘렀고 이번 기회를 놓치면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가객님을 찾아뵙고 축하의 인사를 드렸다. 가객님은 손수 커피를 타 주셨고, 내게 15년 각고(刻苦)의 노력이 담긴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구' 한 권을 내주셨다. 이번에 뵙는 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 말씀을 드렸더니, 할 말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을 달라고 하셨다. 무슨 할말이 있을까. 정말 그럴 수 있을지. 나는 그분과 한 번도 대화를 나눈 일이 없다. 나는 가객님의 유두류록에 대한 열정과 노력을 인정한다. 보름달 아래에서 그분이 좋아하는 점필재의 숙고열암을 읊어드리고 싶은데 불가능한 일이겠지. 가객 님은 지리산에서 선인들의 유람록 복원이란 새로운 한 분야를 개척하신 분이다. 그래서 가객 님을 찾아뵌 것이다. 연로한 모습에 마음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점필재 길의 해석에 대한 다른 견해는 별개의 문제이다.

 

운서루에서 나와 마천 당흥마을 김수태(92세) 어르신의 '일자 문성당'을 찾았다. 나는 지난번 뵈었을 때 삼송 선생 와유강산 필사본을 내주시는 것을 사양하였다. 와유강산은 어르신이 17세(1945년 경)에 펜으로 필사하였다고 한다. 김수태 어르신과 함께 2시간 가까이 교열을 보았다. 와유강산은 1994년 서복회 문 회장님이 처음 탈초하여 마천면지에 소개하였다. 문 회장님이 내게 자료를 보내셔서 일주일 넘게 용인의 임재욱 선생과 함께 교정을 보았다. 판독할 수 없는 글자는 어르신과 만나 일일이 확인하였다. 어르신의 장남 김○○(54년생) 씨는 소년에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40년 넘게 건설교통부에 근무하였다. 이분이 서울에 가지고 올라가 활자화하려고 했지만, 한자를 판독할 수 없어 포기했다고 한다. 이체자가 섞여있고 비결파들이 쓰는 한자가 따로 있어 활자로 옮기지 못했다. 한학자 이용근 어르신도 삼송 선생의 와유강산을 알고 계신다. 당시 문 회장님이 탈초 작업을 하면서 어르신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는데 거절했다고 한다. 이용근 어르신이 왜 거절했는지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겠다. 김수태 어르신과 구두와 필담으로 원문의 오자까지 발견하였다. 어르신의 말씀은 와유강산 필사본을 박물관이나 대학에 기증하면 읽을거리가 없다고 걱정하셨다. 평생 수천 번을 읽었다고 하셨다. 최종 교열을 마치고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대문까지 따라 나오셨다.

 

 

일자문성당의 김수태 어르신

 

거제에 계신 임사천님과 통화에서 증조부(林星辰, 1863~?)의 이야기를 듣고 심장이 멎는 듯했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누구나 다 가슴에 한을 담고 살아간다. 선대가 일제 강점기에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데다가 대개가 가난을 대물림하고, 사회에서 외면을 받고 살아간다. 독립의 유공을 입증하는 것도 후손의 몫이다. 후손이 직접 수형 기록과 공판 기록을 찾아야 한다. 유고집이나 창의 일기가 있어도 후손들이 비용을 부담하여 국역해야 하고, 기록이 있어도 진위를 의심받는다. 독립유공자 중에도 지리산처럼 짝퉁이 있다는 것이다.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후손들에게 은근히 연구비를 기대한다. 그것은 연구비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으로 평생 밥을 먹은 사람들이 가난한 후손들에게 앵벌이를 하는 것이다. 내 눈에는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중개인(broke)으로 보인다. 앰한 보도블록은 교체하면서 정작 나라에서 해야 할 일에는 예산을 배정하지 않는다. 후손들이 담당 공무원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도 발굴되기 어렵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대부분 선대의 서훈을 포기하고 이 나라에서 정체성이 없는 소수자로 살아간다.

 

백무동에서 만난 임사천 님의 이야기는 칠성동에서도 계속되었다. 임사천 님에 따르면 '배는 중국 국적의 상선으로 선주는 양인이다.' '다량의 총(3연발 중국제)과 화약이 국내로 들어왔다.' 조개골로 소총 10정이 들어갔다.'라고 한다. '가지고 들어간 사람은 '선장인 증조부의 수하였다.' 그분의 추정은 3.1 운동 독립선언을 선포하는 증조부가 그 자리에 계셨고 김창수(김구 선생)의 망명을 도왔기 때문에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지리산에 들어온 총은 사라졌고 천석꾼의 집에 총을 맡기고 쌀과 바꾸었다.' 새벽까지 이야기는 이어졌다. 거제 상선포에 정박하였을 때 그 배에 염탐꾼이 들어와서 이야기는 급진전이 된다. 염탐꾼을 선원들이 죽였다고 한다. 염탐꾼은 일제의 끄나풀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이일에 관여했던 사람들 중 일부는 살해되었고, 증조부는 독살되면서 선원들은 흩어지고 총과 화약은 바다에 수장시켰다는 내용이다. 그로부터 25년 후 해방이 되고 부역자들을 처단하는 재판에 열렸는데 이 사건이 조사되었으나 뒤에 흐지부지 되었다고 한다. 100년 전 이야기를 들으면서 날이 밝아왔다. 다만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조개골에서 얼음터로 넘어와 의중마을 천석꾼 죽포 이규현(李圭玹, 1848~1935) 공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젤트 문을 열고 하늘을 보았지만 끝내 하늘은 열리지 않았다.

 

칠성동은 1862년 진주 민란이 났을 때 진주(단성)에서 진주(진양) 정씨가 숨어든 곳이다. 정귀환(56세)씨의 고조부께서 진주민란의 주동자였다. 단성에서 덕산으로 조개골에서 마천으로 넘어온 듯하다. 임사천 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정작 칠성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아침을 먹고 내려오면서 북두 조림과 추성 조림을 다시 관찰하기로 다음을 기약하였다. 선대에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후손들이 만나게 된 것은 필연인지도 모른다. 추성동으로 내려와 석상용 장군 증손자와 손부를 만나 석장군의 독립운동 자료를 받았다. 진평왕 태자의 추정 태실지에서 바라본 영신봉과 칠선봉 능선,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일자문성 능선을 한참 바라보았다. 금마대의 금마는 제왕이 타는 금마일까. 금마의 지명은 백제의 왕궁터인 익산에도 있다. 진평왕 왕자의 태실지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군왕지지가 아닌가. 또다시 탄수대의 방장 제일문과 성교대를 둘러보았다. 칠성동으로 들어가는 카디널 게이트 성교대(통나무 다리, 약작)에서 시작하는 북두 조림 칠성동의 비밀은 무엇일까. 새별들 덕암으로 이동하여 성혈을 보았다. 이곳에도 북두칠성이 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뒤로하고 금계 마을에서 탄수 공 이종식 선생 금계동 창시비와 금계동과 옛 탄수대 석각을 찾았다. 마침 탄 수공의 옛터를 물어보니 친절하게 알려준다. 탄수 공의 집터에서 의탄천이 한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동으로 돌리니 일자 문성이다. 탄수 공 집의 좌향은 해가 떠오르는 동향일 것이다. 그것은 탄수 공이 광복을 예견하고 계명성(금성)이 조림하는 금계동에서 금계가 우는 광복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끝.

 

 

☞ 참고자료 : 삼송공 와유강산

 

亭子(雲鶴亭)를 暫間지나 都馬寺와 君子寺에 옛터를 찾아드니, 年久歲深 古寺터가 俗家成村 되었으니, 山水風景 玩賞하고 澗水聲을 밟아갈제 緩緩한경 쇠소래(새소리) 不知中에 들리거늘, 작지를 머무르고 徘徊하여 살펴보니 中天에 소신 金山景佳 좋은 金坮寺라. 이무遊覽 하는지라 이와같은 名勝処를 過門不入 한다말가. 靑藜杖을 다시날려 寒山石逕 올라가니 數間石室 정케지어 方丈山 第一門이라. 門上에 새겼는데, 白柄端坐 禮佛하니 白雲仙風 奇異하다. 畵中仙境 玩賞하고 淸江石橋 찾아드니 松下問童子하니 碧松寺 정시하다. 碧松寺를 지낸後에 七星洞을 살펴보니 北斗楸城 照臨이라.

 

▶새로운 지명 : 개점골/고점골(괴점골), 연골, 메산바위, 노디목(섶다리)

 

 

화계에서 바라본 영랑대
김수태 어르신
실덕탄에서
두지터 가는 길 초입
개점터(괴점터?) 야철지
백무동 장터목 산장 이봉수씨 옛 집터
똥시(화장실) 아래 돼지를 길렀다고 함.
연골 메산 바위
잣나무 군락지
두지터
칠성동 독가
장구목
두지터 문상희님 댁
조용헌 선생 필획
상황버섯
두지동 마을
아리왕탑이 이런 형태는 아닐까?
칠선봉 능선과 일자문성
진평왕 태자 추정 태실지 금표 석각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391
성교대(오작교)
새별들 덕암
성혈
조성이 중단된 석불
탄수 이종식 선생 금계동 창시비
탄수공 집터에서
금계조림 일자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