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선인들의 발자취를 찾아 떠나는 석각 기행

도솔산인 2020. 11. 9. 11:10

선인들의 발자취를 찾아 떠나는 석각 기행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지리산을 유람하며 남긴 유산기는 70여편에 이른다. 선인들의 유산기를 살펴보면 단순히 산에 올라 경치를 감상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아성찰은 물론 지리산의 역사, 문화 및 인문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선인들이 불일폭포를 유람한 것은 신라시대 비운의 선비인 고운 최치원 선생의 흔적과 이상향 청학동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 최치원 선생과 남명 조식 선생을 만나는 시공을 초월한 석각여행을 떠나보자.

 

▣ 일  시 : 2020년 11월 07일(토)

▣ 장  소 :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와 불일폭포 일원

▣ 코  스 : 쌍계석문-쌍계사 진감선사비-오암-마족대-불일평전-불일암(완폭대 석각)-불일폭포[원점회귀](2.4km)

▣ 인  원 : 학생 25명 인솔교사 5명

 

 

1. 쌍계 석문

 

쌍계사 석문(雙磎寺石門)은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857~?]의 친필로 전하는 ‘쌍계석문(雙磎石門)’ 4자를 말한다. 쌍계사(雙磎寺)는 723년(성덕왕 23) 의상(義湘)[625~702]의 제자인 삼법(三法)이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절 이름은 절 문 앞으로 흐르는 쌍계에서 비롯하였으며, 이로부터 쌍계사 석문이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헌강왕(憲康王)[재위 875~886]이 최치원에게 ‘쌍계석문(雙磎石門)’ 4자를 쓰게 하여 바위에 새겼다고 전한다. 정면에서 바라볼 때 오른편의 타원형 자연 바위에 ‘쌍계’ 2자가 음각되어 있으며, 왼편의 마름모꼴 자연 바위에 ‘석문’ 2자가 음각되어 있다. 두 자연 바위는 5m쯤 떨어져 수문장처럼 서 있다. 옛날에는 법계(法界)와 속계(俗界)를 경계 지었을 것이다.

 

쌍계석문
순상국이호준공유혜불망비(참판 윤용/대교 완용)

 

2. 진감선사비 전액

 

 첫 글자인 敭[昜(양)+矢(시)]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사뭇 다르다. 裵吉基는 이 자를 '敭'으로 보아 '揚'의 古字로 보았으며(裵吉基,『한국미술사』대한민국예술원, 1984,p264), 李智冠은 이 자를 '[昜+矢]'으로 보아 唐의 古字로 보았고(李智冠,『歷代高僧碑文 新羅篇』, 伽山文庫, 1994, p128), 孫煥一은 이 자를 '[矢+]'으로 보아 '傷'의 古字로 보고 있다,(孫煥一, 『孤雲書體硏究』1999) 최석기 교수님의 『한국인의 이상향 지리산 화개동, 2019』을 읽다가 진감선사비의 전액 첫 글자 '敭'를 '唐[昜+矢]'으로 설명하신 부분(p162)에 의문이 들어 메일로 질문을 드렸는데 즉답을 해주셔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다. 海東故眞鑑禪師碑(해동고진감선사비)로 읽어야 한다.

 

 

진감선사비 전액
敭 海東故眞鑑禪師碑(당 해동고진감선사비)로 읽어야 한다.

 

3. 1558년 남명 조식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오암 석각

 

○ 4월 19일 이날 아침 김경이 병 때문에 함께 가는 것을 사양하고 기생 귀천(貴千)을 데리고 급하게 떠났다. 김군은 이때 나이가 일흔 일곱이었지만 나는 듯하여 처음에는 천왕봉까지 오르려 하였으니 사람됨이 마치 이원(利園)에서 노닐다 온 사람처럼 대범했다. 호남에서 온 네 사람과 백유량, 이씨 두 유생이 동행하였다. 북쪽으로 오암을 오르는데, 나무를 잡고 잔도를 오르면서 나아가는데 원우석은 허리에 찬 북을 치고, 천수는 긴 피리를 불고, 두 기생이 따르면서 선두를 이루었다. 제군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물고기를 꼬챙이에 꿴듯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중간 대열을 이루었다.

 

강국년과 음식을 맡은 사람과 음식을 운반하는 종 등 수십 인이 후미 대열을 이루었다. 승려 신욱이 길일 인도하며 나아갔다. 사이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이언경’, ‘홍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㹳巖에는 또한 시은 형제라는 글자를 새겼으니, 아마도 썩지 않는 돌에 이름을 새겨 억만년토록 전하려 한 것이리라. 대장부의 이름은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서, 사관이 책에 기록해두고 넓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입에 거론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구차하게 원숭이와 너구리가 사는 숲 속 덤불의 돌에 이름을 새겨 영원히 썩지 않기를 구한다. 이는 나는 새의 그림자만도 못해, 후세 사람들이 날아간 새가 과연 무슨 새인 줄 어떻게 알겠는가? 두예(杜預)의 이름이 전하는 것은 비석을 물속에 가라앉혀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의 업적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암
오암 석각
오암 석각 탁본(지리산국립공원 경남사무소 제공)

 

4. 선인들이 불일폭포를 감상하며 노닐던 완폭대(玩瀑䑓)

 

조선 시대 선비들은 현실과의 부조화를 위로받고 안식을 얻기 위한 이상향으로 화개 청학동 일대를 찾았던 것이다. 때문에 청학동 유람록에는 수많은 유적들이 나타나고, 그 유적에는 선현들의 자취와 정신과 풍류가 녹아 있다. 완폭대는 청학동 유람의 마지막 캠프이자 정점이었다. 2018417일 이 일대를 탐방 조사하던 중 그 동안 세월에 묻혀있던 옛 선인들의 유산기에 언급된 완폭대(玩瀑䑓)’ 각자를 발견하였다.

 

 

완폭대 석각
완폭대 석각 탁본(지리산국립공원 경남사무소 제공)

 

5. 선인들의 지리산 대표 유람코스인 불일폭포(佛日瀑布)

 

불일폭포(불일암)은 조선시대 지리산을 유람하던 선비들이 꼭 들러야 하는 필수 코스였다. 조식, 김일손, 정여창, 한유한, 남효온, 유몽인, 허목 등 당대의 명사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현재 불일폭포 코스는 쌍계사에서 출발하여 완만한 경사의 약 2.4km 숲길을 따라 오르면 누구나 탐방 가능한 코스이지만, 십 수 년 전만 해도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겨울에는 접근이 힘들 정도로 험한 곳이었으며 선인들의 유산기를 살펴보면 옛날에는 불일폭포로 가는 길이 목숨 줄을 내어 놓아야 할 만큼 험난한 코스였다고 한다.

 

불일암과 불일폭포를 다녀간 선인들의 유산기를 살펴보면 대동소이하다. 쌍계사에서 출발하여 불일암으로 가는 길의 험함과 허공에 위태하게 매달린 암자의 아득함, 불일폭포의 웅장함, 주위 산세의 기이함을 묘사하고 있다. 청학봉(향로봉)과 백학봉(비로봉)이 좌우에 있고 기이한 봉우리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학담(鶴潭)과 용추(龍湫)의 두 못과 '불일폭포를 완상하며 노니는 바위'라는 완폭대(玩瀑䑓) 바위 글씨, 옛날에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청학동인 신선의 세계로 이 일대를 묘사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불일폭포를 일러 개성 송악산의 박연폭포와 자웅을 겨룰 만하다고도 했으나 골짜기의 기이하고 웅장함, 폭포수의 웅장함은 박연폭포보다 더 낫다고도 했다.

 

 

불일폭포I
불일폭포II

 

6. 답사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