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영남알프스에서 10월의 마지막 밤을(201030~1101)

도솔산인 2020. 11. 6. 19:45

영남알프스에서 10월의 마지막 밤을(201030~1101)

 

 

일 시 : 20201030()~1101()

코 스 : 청수좌골-숨은재-영축산-신불재-청석골

인 원 : 10명 산친들과(카리스마님, 산학동자님, 솔박사님, 송연목님, 덕자님, 신종훈, 갈마님, 조세프님, 곰돌이님)

날 씨 : 맑고 다음날 흐림(8)

 

 

  점필재길 복원은 지리산 유람록을 집대성한 최석기 교수님, 점필재길을 화첩으로 복원한 이호신 화백님, 지리산역사문화조사단 일정 민병태 선생님, 정혜종님, 조봉근님, 이상운님, 미산클럽 미산 선생님, 공교수님, 사니조아님, 소혼님, 김선권님, 하림그룹 조박사님, 단사천님, 산아들 윤기현군, 송대마을 임보선님, 산영 曺교수님, 토산 칠성님, 지실연 산학동자님, 솔박사님, 송연목님, 하늘바위님, 삼순이님, 산수담님, 황금어장 조중제님, 곰돌이님, 대전의 월하독주님, 영랑님, 서울의 진정화님, 부산의 이장님 부부, 광주의 반야님 커플, 순천산님 부부, 창원의 굴암산님, 백현님, 지리산 산길따라 김산님, 바위솔, 최성용님, 부산의 카리스마님, 함양 서복연구회 고문 인산가 김윤세 회장님, 서복회 문호성 회장님, 신농 산삼약초원 강재두 부회장님, 칠선계곡 허상옥 사무국장님, 지리산 마실 조용섭 이사장님 외에도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나는 본래 장거리 박 산행 트래커이다. 처음부터 목적이 산행이었고 유람록 복원은 남의 일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궁금증을 풀어가면서 유람록을 읽게 되었다. 선인들의 문헌과 지명이 상이한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있는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으로 개명한 곳도 있었다. 의문을 가지고 바라보니 오류가 생각보다 많았다. 지리 동부만 해도 20곳에 가깝다. 지리산 전체에는 얼마나 될까. 최근 확인한 화암도 마적사지도 기록과 맞지 않는다. 어느 날 강호(江戶)에 내 의견을 냈을 때의 냉담한 반응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나는 생명이 없는 '병풍에 그린 닭'이 되었고, '지리산 병충해'라는 소리를 들었다. 돌연 캠 샤프트가 등장하여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어느날 지리 동부에 닭 한 마리가 전학을 왔다. 처음에는 환대를 받았지만 중간고사가 문제였다. 전학 온 닭이 1등을 한 것이다. 그것이 집단 왕따의 시발점이 되었다. 반장과 다른 의견을 내서 눈 밖에 난 것이다. 냉담한 무반응은 그 서곡이었다. 시쳇말로 집단 왕따를 시킨 것이다. 나는 보기 좋게 이물질이 되었다. 그림 속의 닭과 살아있는 닭이 점필재 길에서 만난 것이다. 여럿이 합세하여 하나를 단도리(단속)하는 것은 쉽다. 은어로 다구리라고 한다. 2006년 내가 가짜 영신사지와 청학연못을 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두류암 터와 상류암 터를 찾지 않았으면 그림 속의 닭은 그렇게 욕(辱)되지 않았을 것이다. 꼭대님이 나를 '병풍에 그린 닭'으로는 부족했던지, '지리산 병충해'라고 매도하였다. '혹세무민'한다고도 하였다. 그 말이 시의 적절한 어휘인지 모르지만, 뭇 닭들까지 皆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금농의 노익장은 정말 대단했다.

 

  최근 함양에서 화암을 가는 팥두재에서 사숙재 강희맹을 만났다. 강희맹은 만년(1474)에 벼슬을 그만두고 함양군 유림면 화장산 아래 국계에 은거했다. 함양 군수 점필재를 화장사로 초대하여 하룻밤을 보내는데, 점필재에 대한 각별한 마음이 고스란히 그의 시에 전해진다. 사숙재의 다른 시에 '작묵희 제기액 증강국균(作墨戲 題其額 贈姜國鈞)'이 있다. 묵희(墨戲)는 신참 과거 급제자에게 선배 급제자들이 행하던 일종의 신고식으로 '붓으로 얼굴에 먹칠을 하던 놀이'이다. 선배가 후배 급제자에게 얼굴에 먹칠을 하고 강물 속에 달을 잡아오라고 한다. 선배는 얼굴에 먹칠을 한 후배를 원숭이라고 칭한다. 후배 급제자는 달을 잡는 시늉을 내고 선배 급제자는 포복절도한다. 읽다가 푸석 웃음이 나오는 내용이다. 얼굴에 먹칠을 한다는 어원은 묵희에서 나온 듯하다. 얼굴에 먹칠을 하는 놀이를 하며 시를 짓고 과거급제를 축하하는 선인들의 해학이 담겨있다.

 

  '원숭이가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 하니/물결 따라 달그림자 조각조각 일렁이네./어라, 달이 다 부서져 버렸나./팔을 뻗어 달 조각을 만져보려 하였네./물에 비친 달은 본디 비어있는 달이라/우습다. 너는 지금 헛것을 보는 게야./품었던 네 의심도 저절로 없어지리./한 줄기 휘파람 소리에 하늘은 드넓은데/소나무 늙은 등걸 비스듬히 누워 있네.' [作墨戲 題其額 贈姜國鈞(묵희를 하며 얼굴에 먹칠하고 강국균에게 주다.)/강희맹(姜希孟, 1424~1483)] <私淑齋集卷之三> 五言古詩

 

  注 墨戲 : 신참 과거 급제자에게 선배 급제자들이 행하던 일종의 신고식 때 붓으로 얼굴에 먹칠을 하던 놀이.

姜子平(1430-1486)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국균(國鈞).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따르면 문과에 장원하여 두 번이나 승지가 되고 벼슬이 전라도 관찰사에 이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실제 살아가면서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경우를 맞닥뜨린다. 한 치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얼마 전 그런 분이 있어 내가 조심스럽게 '조상신에게 가서 막걸리 한 잔 붓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하라.'라는 전언을 넣었다. 극단적인 선택을 막아야겠다는 심정에서 꺼낸 비책이다. 조상신을 섬기는 것은 미신이 아니라는 말도 덧붙였다. 신통하게도 다음날 그분이 선대의 유적인 방장제일문에 다녀갔다고 들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한 고비를 넘긴 셈이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경우는 신들의 전쟁이다. 신은 강한 자를 선택하지 약한 자를 돕지 않는다. 떡고물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유교국가에서 조상신은 흙 수저들에게 유일한 백이다. 아마도 조상신이 있다면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낫다. 완벽한 삶은 없다. 때로는 얼굴에 먹칠을 하고 살아내는 인내도 필요하다.'라고 용기를 줬을 것이다. 묵희(墨戲)는 영광과 치욕의 상반된 의미를 내포한 어휘이다.

 

  3년 전 지리산에도 얼굴에 먹칠을 하는 놀이가 있었다. 갑자기 캠 샤프트가 등장했고 진실을 호도하였다. 숯가마터로 본질을 감추고 오히려 조롱을 계속하였다.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글을 아는 자도 시류에 편승했다는 것이다. 그는 과단성 있게 진실을 외면하고 다수를 선택했다. 온라인에서 '지리산 병충해,' '병풍에 그린 닭'과 '도반이 아니다.'라는 글은 인간이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인격 모독이다. 이런 이야기를 입에 담는 사람은 병살(病殺)이 몸에 들어 건강을 잃는.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의 병은 현대 의학으로 치유하기 어렵다. 이렇듯 사람을 겪어보면 뼈에도 품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일들을 생각해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내가 먼저 몸을 낮추고 손을 내밀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점필재 길의 전자지도를 만들고 있는 카리스마님과 산학동자님의 초대로 영남알프스 영축산에서 10월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이번 산행은 점필재 길의 완성을 축하하는 산행이 되었다. 참치회, 한우 안심 스테이크, 생선회, 오징어와 문어숙회, 돼지고기 훈제, 해운대 황금어장 조 셰프의 대방어 스시와 대구탕, 낙곱새, 하산 후 언양에서 소머리 수육 등, 점필재 길을 팔아 술국밥을 먹은 상팔자 산행을 하였다. 함께한 산친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서 참석한 사람들 중 내가 최고령자가 되었다. 살아가면서 노망을 떨지말고 방을 빼는 것도 타이밍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