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1472년 김종직 유두류록의 숙고열암(200929~1002)

도솔산인 2020. 10. 5. 12:00

1472년 김종직 유두류록의 숙고열암(200929~1002)

 

 

▣ 일 시 : 2020년 09월 29일(수)~10월 2일(금)

▣ 코 스 : 송대-장암-장구목-미타봉-고열암-일강-동부-방장문-쑥밭재-청이당터-영랑대(원점회귀)

▣ 인 원 : 당일 10명[함양서복회 문호성님, 강재두님, 지리산마실 조용섭님, 서울신문 노진환 사장님, 이철우 군수님, 한경택 과장님, 박영일 교수님, 송담 스님, 수피아펜션 백승열 사장님]

- 3박4일 : 2명(김산님), - 영랑대 합류 2명(순천산님)

날 씨 : 맑음(기온 12도)

 

 

지원 박양준선생 書

 

나는 오래전부터 음력 814일 숙고열암(宿古涅庵)을 염원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코로나 사태로 이번 추석 명절에야 드디어 숙고열암(宿古涅庵)을 실행하게 되었다. 산행 전날 함양 서복연구회 문 회장님의 배려로 백무동 느티나무 산장에서 민박을 하였다. 이번 산행은 함양 서복연구회 문호성 회장님을 필두로 한국일보 주필과 서울신문 사장을 역임하신 노진환 선생님과 함양군수를 지내신 이철우 전 군수님, 함양군청에서 정년을 하신 한경택 과장님. 창원 마을이 고향인 가톨릭 관동대 박영일 교수님, 지리산 마실 조용섭 이사장님, 송대 마을의 송담 스님과 수피아 펜션 백승열 사장님으로, 답사를 주선하신 분은 함양 서복회 강재두 부회장님이다. 이분들 중 노진환 선생님은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지장사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야숙지장암(夜宿地藏庵)' 시를 남긴 옥계 노진(盧禛, 1518~1578) 선생의 직계 후손이다.

 

 

夜宿地藏庵


                       노진(盧禛)[1518~1578]

山中無俗物 : 산중이라 세속의 잡된 일 없어
煮茗聊自飮 : 차 끓여 심심찮게 따라 마시며
坐愛佛燈明 : 앉아서 환한 불등 고이 보다가
深宵始成寢 : 깊은 밤 가까스로 잠이 들었지
還有石泉響 : 헌데 또 바위틈의 샘물 소리가
冷然驚曉枕 : 돌연 새벽 단꿈을 놀래 깨우네

 

<玉溪集>

 

 

김종직 선생은 1471(신묘, 성종 2년) 봄에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내려와 1472814~18일까지 두류산을 유람하고 유두류록을 남긴다. 유람의 목적은 8월 보름날 밤에 천왕봉에서 보름달과 다음날 새벽 해돋이를 감상하는 것이었다. 점필재의 지리산 유람이 '공자가 동산에 올라가 노나라가 작다고 하였고 태산에 올라가 천하를 작다.(孔子 登東山而小魯登太山而小天下.)’라고 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높은 산에 올라가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고자 함이 지리산 유람의 주된 목적이라고 생각된다. 유두류록에는 당시 지식인으로서의 의식과 고뇌가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일기가 불순하여 첫날 일몰과 일출을 보지 못하고, 향적사로 내려가 1박을 한 후 다음날 다시 천왕봉으로 올라 기어이 일출을 본다. 선생은 유두류록 말미에서 유람의 소감을 '가슴이 탁 트이고 시야가 넓어짐을 느낀다.'라고 하여 유람의 목적을 성취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1924년 강계형 루트를 따라 장암(마당바위)에서 장구목으로 올라갔다. 미타봉 아래 소나무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지리 동부의 조망은 한 마디로 압권이다. 사립재에서 새봉과 옹암(진주 독바위)을 지나서 잘록한 곳이 쑥밭재이다. 다시 청이당에서 하봉 옛길을 따라 우뚝 솟은 영랑대는 마치 첨탑처럼 뾰족하다. 일강(一岡)에서 내려서면 사립재골을 지나고 아홉 모롱이 길은 새봉의 서쪽 지능선의 세 모롱이, 네모롱이, 다섯 모롱이를 지나면 집터가 나온다. 한참이나 조망을 한 후 배낭을 내려놓고 좌측으로 진입했다. 조금 내려서서 상 허리길을 찾아 진행하면 A형 석굴이 있다. 조금 더 진행하면 거대한 암괴 아래에 숨겨진 석굴이 있는데 천정에서 석간수가 떨어진다. 아마 한말 정미 의병장 석상용 부대와 빨치산들이 이용했을 것이다. 석굴을 확인한 후 다시 미타봉으로 올라가 소림 선방을 찾아 나섰다. 548년 만에야 제 이름을 찾은 미타봉의 소림선방이다. 1472년 김종직의 의논대 시에 호승(선승)들의 수행처로 나와있지만, 500년 넘게 미타봉 아래 숨겨져 있었다. 소림선방 전망대에 오르면 정면으로 선녀굴과 의논대가 보이고, 고열암의 어깨너머로 독녀암(노장대)이 솟아있다.

 

☞ 1924년 강계형 루트 : 문정동-세동-송대(마당바위)-장구목-사립재-통천문-쑥밭재-천례탕-마암당-하봉-중봉-천왕봉

 

 

議論臺(의논대)

 

兩箇胡僧衲半肩 : 참선승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 선방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서 홀로 서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가득 천풍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하네

 

 

미타봉 소림선방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수를 준비하지 못해 최고령 60(60년대 출생)인 백승열 님과 김산 님이 수고를 하였다. 물을 떠 오는 시간이 오래 걸려서 내가 가지 않은 것이 두 분에게 내내 미안했다. 일강에서 고열암으로 진행하다가 숯 가마터에서 조금 내려서면 바위 아래에 용천이 나온다. 고열암에 닿으니 시간이 오후 3시가 넘었다. 당일 팀은 이곳에서 송대로 내려가시는데 의논대에서 배웅을 하였다. 고요가 흐르는 고열암에 남아 지난 일들을 상기하니 감회가 새롭다. 고열암에 와서 얼마나 많이 숙 고열암 시를 되 뇌였던가. 김종직 선생은 숙고열암 시에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뜬 구름은 또한 무슨 뜻인가. 한 밤중에 산 골짜기 닫혀있구나. 오직 올곧은 마음을 가진다면 산신령의 살핌을 얻으려나.' 중앙의 관직을 마다하고 지리산 골짜기 함양 고을 수령을 자처한 이유는 무엇인지. 어머니를 봉양한다는 구실은 있었지만 실상은 훈구파들의 집중적인 견제로 심신이 피폐해져 있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총을 들지 않은 전쟁이 아닌가.

 

바람 한 점이 없는 고열암에서 서산에 해는 지고 마을의 불빛이 나무 사이로 들어왔다. 이따금 도토리가 떨어지는 소리가 적막을 깨웠다. 고열암에 고요한 시간이 한참이나 흘렀다. 동쪽으로 향로봉이 높아 달이 더디 뜨는 것이겠지만, 아마 임을 기다리는 심정이 이와 같으리라. 드디어 한줄기 월광이 숲을 뚫고 들어오더니 금방 사위가 밝아졌다. 젤트 위로 나뭇잎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함양 관아를 출발한 김종직 선생이 피곤함에 포단을 빌려 잠이 들었다가 일어난 시간이었으리라. 시계를 보니 9시가 조금 넘었다. 고열암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와 달빛 아래 서성이는 점필재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보름달은 새벽까지 고열암과 젤트 주변을 배회하였다.

 

 

宿古涅庵(숙고열암)

 

病骨欲支撑 : 지친 몸 지탱하려고

暫借蒲團宿 : 잠시 포단 빌려 잠을 자는데

松濤沸明月 : 소나무 물결 달빛 아래 들끓으니

誤擬遊句曲 : 구곡 선경에 노니는 듯 착각하였네.

浮雲復何意 : 뜬 구름은 또한 무슨 뜻인가?

夜半閉巖谷 : 한밤중 산 골짜기 닫혀있구나

唯將正直心 : 오직 올곧은 마음을 가진다면

倘得山靈錄 : 혹시 산신령의 살핌을 얻으려나.

 

病骨(병골) : 지친 몸, 蒲團(포단) : 부들로 만든 둥근 방석, 句曲(구곡) : 장쑤 성(江蘇省)에 있는 己山 또는 茅山(모산)이라고 함. : 持也(가질장), 倘 : 혹시당. 錄 : (살핌)

 

 

추석날 아침 영랑대에서 점필재를 배웅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고열암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다래덩굴이 얽혀있고 열매가 주렁주렁 익어가고 있었다. 아마 유두류록의 국역본에 다래덩굴을 등나무로 오역한 듯하다. 해발 1,000m가 넘으면 등나무는 없다. 실제로 도사목(倒死木)이 외나무다리(약작, 略彴) 역할을 하고, 행마 같은 모습이 군데군데 눈에 들어왔다. 일강(一岡)으로 가는 길은 고도 차이가 없이 등고선을 따라 사면 길로 이어진다. 일강(一岡) 샘에 들러 나는 진입로에 케른을 쌓고, 김산 님이 샘터를 정비하였다. 이 샘은 송대 계곡의 발원지로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는다고 한다. 미타봉 소림선방의 선승들도 이 샘이 이용하였고 수도자의 생명수인 듯하다. 일강을 넘어 두 번째 모롱이를 지나 동부로 가는 길은 완만하게 이어진다. 사립재 집터를 지나 사립재골을 가로질러 세 모롱이를 넘었다.

 

이 지점을 점필재는 동부(洞府)라고 하였다. 동부(洞府)신선이 사는 지경’을 의미한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수목들이 태양을 가리고 등나무(다래) 덩굴이 덮이고 얽힌 가운데 계곡 물이 돌에 부딪혀 굽이굽이 소리가 들렸다. 무릉도원(武陵桃源) 보다 그리 못하지는 않을 듯했다. 제자 유극기에게 바위의 한가운데에 이끼를 긁어내고 이름을 새기게 하였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다섯 모롱이를 지나면 넓은 집터가 나온다. 집터에서 옹암으로 오르면 거대한 석문이 있는데, 원주민들은 문바위라고 한다. 이곳은 독바위양지 마을에서 청이당을 거치지 않고 광점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다. 여섯 모롱이는 도사목(倒死木)이 넘어져 길을 막고 있다. 일곱 모롱이를 지나면서 이정목을 폰에 담았다. 이곳은 어름터에서 옹암으로 오르는 교차 지점이다. 여덟 모롱이 쉼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방장문(方丈門)이 있다. 방장문(方丈門)은 오봉과 엄천, 송대와 광점동에서 천왕봉을 오르는 길목에 있다.

 

지난 515일 방장문(方丈門) 석각의 발견은 유람록 답사의 정점이 되었다. 아홉 모롱이길을 찾은 후에도 반신반의하였던 점필재 길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언제 누가 새겼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922년 함양 명승고적 보존회에서 마암에 마암당을 건축한 의중마을에 살았던 은계 이진우(李璡雨, 1897~1954) 공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근거로는 의탄 마을에 덕암(德巖)이 이진우 공의 필획이기 떼문이다. 이공은 1920년대에 마천초등학교를 설립하는데 전답 100 두락을 희사한 분이다. 그분의 송덕비는 도계 공원에 있다. 따라서 방장문 석각과 관련 인물에 대한 학술조사가 필요한 듯하다. 방장문을 지나 마지막 아홉 모롱이 길은 어름터에서 청이당으로 이어지는 길과 합류한다. 쑥밭재를 넘어 청이당에 닿았다. 청이당 터는 석축이 일부 남아있고 당터 앞에는 김종직이 쉬어간 계석이 그대로 있다. 지도는 정확성이 생명인데 인문학을 앞세워 검증도 없이 지명을 마구 표기하고 있으니 혼란스러운 일이다. 청이당은 함양 땅이다. 옛날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하봉 옛길이 당시에는 함양과 진주의 경계였고, 지금은 함양과 산청의 경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청이당 물은 산청으로 흐른다.

 

하봉 옛길로 오르는 발걸음은 가볍다. 태풍으로 등로에 쓰러진 나무를 치우며 나는 또 동계 산행 준비를 한다. 마암(행랑굴)에서 물을 취수하였다. 동부 능선에 오르니 가을바람이 살갑기 만하다. 천천히 오르며 초가을의 지리 동부를 만끽한다. 무덤을 지나는데 후손이 아니 다녀간 듯 曺박사님이 벌초한 그대로이다. 드디어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영랑대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천왕봉으로 오르는 점필재 일행을 배웅했다. 점필재는 영랑대를 조용히 내려섰고 우리는 영랑대에 남았다. 익숙한 금마타리 내음이 지리 동부의 가을바람에 실려와 야릇하게 속삭인다. 그동안 점필재의 길을 복원하기 위해 영랑대에 머문 것이 몇 번이던가. 이제 배낭의 중량이 점점 몸에 버겁지만 영랑대에 오르면 그 환희와 희열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다.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마천면 의탄리 의중 마을에 살았던 삼송(三松) 임응택(林應澤, 1879~1951) 공 옳고 그름이 연하 선계에 들지 아니하니, 속세의 생각 쓸어버리고 저녁 바람에 서 있다’라는 시구를 떠올리며 영랑대 위에 홀로 서 있으니 가을바람이 불어와 신선이 된 듯하다.  끝.

 

 

 

마당바위
A형 석굴(함양서복연구회 문호성 회장님)
석굴II
미타봉 소림석굴
소림선방
전방바위에서 바라본 송대
송대마을 수피아 펜션 백승열 사장님
샘터 케른
지리산 산길따라 김산님
一岡泉(일강샘)
고열암
미타봉
세 모랭이 바위
여섯 모랭이 도사목
일곱 모랭이
여덟 모랭이 쉼터
방장문
방장문 후면
청이당터
청이당터 앞 계석
사진 짝꿍님
사진 순천산님
사진 순천산님

 

※ 개인적인 답사 기록으로 저의 주관적인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