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아홉 사리길과 아홉 모롱이길(200904~05)

도솔산인 2020. 9. 6. 04:30

아홉 사리 길과 아홉 모롱이 길(200904~05)

 

 

▣ 일 시 : 2020년 09월 04일(금)~05일(토)

▣ 코 스 : 새재-독바위골 초입(집터)-아홉사리길(새재 왕복)-동부능선-새봉-사립재골 집터-곰샘-새봉-독바위골 초입-새재

▣ 인 원 : 2명(조박사님)

▣ 날 씨 : 비, 맑음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을 복원하면서 산길에 대한 이해를 넓히게 되었다. 길을 검색해보니 '사람과 재화의 공간적 이동을 돕는 교통시설물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차나 우마 및 사람 등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오갈 수 있게 만들어진 거의 일정한 너비로 뻗은 땅 위의 선이다. 이번 산행 첫날은 지리 99에서 발굴한 아홉 사리길을 확인하고, 새봉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지능선과 계곡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아홉 사리길은 예전에 조개골과 독바위 양지 사람들이 새재를 넘어 오봉으로 나가는 길이다. 청이당이 마천의 생활권이듯, 새재까지 도로가 나기 전에는 이곳 사람들은 생초와 화계의 생활권이었다. 그 근거로 집터 주변에서 생초에서 생산된 백토 옹기 편이 발견된다.

 

注 1. 아홉 사리길 : 조개골과 독바위 양지 사람들이 새재를 넘어 오봉으로 나가는 길. 2. 아홉 모롱이길 : 구롱(九隴)이라고 함. 고열암에서 일강을 넘어 동부를 지나면 방장문이 나오고 청이당에 이르는 길.

 

독바위골을 지리산길 지도에서 독바위 양지라고 하는데, 현지 주민들은 독바위 능선에서 부챗살처럼 펼쳐진 남쪽 경작지와 집터가 있는 곳을 말한다. 조개골로 들어가 독바위골과 새봉 좌측 골 초입 샘터가 있는 집터에 배낭 놓았다. 조박사는 조개골을 건너 연결되는 옛길을 확인한 후, 함께 아홉 사리길로 접어들었다. 고도 950m에서 등고선을 따라 아홉 사리길 흔적이 뚜렷하다. 산죽 구간과 너덜을 지나면서 고도를 높여간다. 옛길은 산죽 밭에서 짐승 길로 변하고 흔적이 희미해진다. 2m가 넘는 산죽을 헤치고 모랭이를 돌아 계곡을 가로질러 희미한 길의 흔적을 좇으면 새재(고개)가 바로 지척에 있다. 돌아 나오면서 조금 위에 새로운 상 허리 길을 발견하였다. 독바위 골 상류 집터에서 새재로 이어지는 옛길인 듯하다.

 

독바위골 초입 집터에서 새봉으로 오르는 계곡은 비교적 완만하다. 고로쇠 줄을 스트링 줄로 고정한 것이 보이고, 오름길은 또한 부드럽다. 고도 1,100m를 넘으면서 물길을 따랐다. 마지막으로 물이 흐르는 곳에서 취수를 하여 동부 능선에 올라섰다. 좌틀하여 새봉으로 나아갔다. 너럭바위에 올라서니 써리봉과 중봉 영랑대가 눈에 흐릿하게 들어온다. 새봉에 도착하여 새봉 샘터 구축에 나섰다, 새봉에서 옹암 방향 100m 정도 진행하면, 왼쪽으로 새봉을 우회하는 지점에 닿는다. 여기에서 조개골 방향으로 50m 정도 내려서면, 큰 바위 아래 갈수기에도 물이 흐르는 곳이 있다. 주변에 집터 흔적으로 미루어 이미 사용했던 샘터이다. 바위틈에 호스를 설치하고 '새봉샘'이라고 이름하였다. 새봉에서 직선거리로 약 120m 지점에 있다.

 

해질 무렵에 운무가 휩싸여 타프를 설치했다. 저녁을 먹고 너럭바위에 누워서 달구경을 하였다. 문득 장구령(張九齡, 678~740) 의 시구절이 떠오른다. 스토리는 대략 이러하다. 「망월회원...  바다 위로 밝은 달이 떠오르니, 하늘 끝에서 이 시간 저 달을 바라보겠지요. 그리운 님은 긴 밤을 원망하리니, 밤새도록 그리움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등불을 끄니 서러운 달빛이 방안에 가득한데,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니 밤이슬에 옷만 젖었네요. 아름다운 달빛을 두 손에 담아 그대에게 드릴 수 없으니, 다시 잠을 청하여 꿈속에서 그대 만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유장(悠長)한 동부능선 새봉에서 달빛이 쏟아지는 밤에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끼지 못하였다.

 

 

 

望月懷遠 : 달을 바라보고 멀리 있는 사람을 생각하며

 

 

                    張九齡(678~740) : 중국 당(唐) 현종(玄宗) 때의 시인

 

海上生明月 : 밝은 달은 바다에서 떠오르고

天涯共此時 : 하늘 끝에서 이 순간을 함께하고 있겠지요

情人怨遙夜 : 그리운 님은 긴 밤을 원망하리니

竟夕起相思 : 밤새도록 그리움만 피어오릅니다

滅燭憐光滿 : 촛불 끄니 달빛은 방안 가득 서러운데

披衣覺露滋 : 옷 걸치고 뜰에 나가니 옷은 이슬로 축축합니다

不堪盈手贈 : 달빛을 손에 담아 보낼 수도 없으니

還寢夢佳期 : 다시 잠들어 꿈속에서나 만나렵니다.

 

遙夜 : 기나긴 밤, 竟夕 : 밤이 다가도록, 不堪 : ~할 수 없다

 

 

숙면을 하고 아침에 일어나니 젤트도 뽀송뽀송하고, 타프에도 눈물이 마른 것처럼 이슬이 맺히지 않았다. 배낭을 고라니 박터에 맡겨놓고, 샘터 진입 지점에서 돌아서서 왼쪽으로 진입 새봉 우회 길을 확인하고 사립재골로 내려섰다. 새봉은 서쪽으로 여러 갈래의 지능이 부챗살처럼 뻗어내려 점필재 길의 세 모랭이와 네 모랭이, 다섯 모랭이 만드는데, 토질이 비옥하고 물이 풍부하여 이곳을 洞府(동부)라고 하였다. 洞府(동부)의 의미는 '도교(道敎)에서 말하는 신선이 사는 곳'이다. 유두류록에서 '使之刮苔蘚題名于巖腹'의 문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로 하여금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 한복판에 이름을 새기게 하였다.'라는 문구이다. 유극기가 석각을 정말로 새겼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김종직 선생은 이곳 洞府(동부)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해공이 말하기를 "여기가 아홉 고개(九隴) 중에서 첫번째 고개입니다"라고 하였다. 연달아 서너 고개를 지나자 널찍한 곳(洞府)이 나왔는데, 주위가 넓고 그윽하였다. 나무가 해를 가리고 담쟁이넝쿨과 칡넝쿨이 뒤얽혀 있으며, 시냇물이 돌에 부딪히며 굽이쳐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동쪽은 산등성이지만 그렇게 높지는 않고, 서쪽은 지세가 점점 낮아져 20리를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이른다. 만약 닭···송아지를 끌고 이곳에 들어와 나무를 베어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찰벼··콩 등을 심는다면 무릉도원(武陵桃園)보다 못할 것이 없으리라. 내가 지팡이로 시냇가의 돌을 두드리면서 유극기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 어느 때나 그대와 함께 은둔해 이런 곳에서 노닐어볼까?"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바위에 낀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 한복판에 이름을 새기게 하였다.<출처 :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최석기 외>

 

곰샘에서 내려오는 물길의 합수점을 지나면, 이정표 역할을 하는 기이한 괴목 두 그루가 서있다. 습지에 닿기도 전에 발길을 잡는 자작나무 편상황 버섯을 만났다. 이렇게 점필재의 아홉 모랭이 길은 마치 보물 창고와도 같다. 산막 터가 있던 샘터를 지나 습지를 가로질러 사립재골 집터를 지났다. 9월 초 제9호 태풍 '마이삭'으로 부러진 고목과 떨어진 나뭇가지로 어수선하다. 갑자기 산영님이 '우와! 대박! 표고버섯이다!'라고 하여 돌아보니 표고버섯 군락이다. 나는 견물생심(見物生心)을 주체하지 못하고 배낭을 내려놓았다. 이곳에서 사립재로 나아가는 길은 우리가 설치한 케른이 길을 안내한다. 사립재를 지나 곰샘에 잠시 들러 간식을 먹고 새봉으로 오르면서 덤으로 우회 길을 확인하였다. 이곳에는 친절하게도 우회길을 안내하는 시그널이 부착되어 있다.

 

새봉으로 다시 올라와 새봉 너럭바위를 내려서서 하산 길을 잡았다. 너럭바위 아래에는 거대한 바위를 머리에 이고 있는 석굴이 있다. 이곳으로 내려선 것은 새재(고개)에서 옹암으로 가는 길과 새재(고개)에서 독바위양지로 가는 길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위험한 구간을 내려와 독바위골로 넘어가는 길을 확인하고, 조금 진행하니 거대한 바위와 그 아래 집터(?)와 샘터가 나온다. 주변에는 전답의 흔적이 역력하다. 바위나 돌이 거의 없는 토질의 지형은 건강한 산죽밭을 형성하고, 조개골에 닿을 때까지 능선으로 완만하게 형성되어 있다. 이 길은 집터를 지나 조개골을 건너서 조개골 상류로 이어진다. 공교롭게도 그 지점에 계곡 가운데 인공으로 조성한 쉼터(박터)가 있다. 쉼터 아래 계곡에 내려서서 점심을 먹고 새재로 내려오는데 빗방울이 굵어진다.

 

새재에서 독바위골 입구 집터로 내려와 계곡을 건너는 산길도 확인하였고, 산행을 복기하면서 도상으로 새재에서 옹암까지 산길을 연결하였다. 나는 많은 산친들의 도움으로 점필재 길과 감수재 길을 초벌 복원을 하였다. 유람록 복원하면서 느꼈던 것은 '내가 최고라는 생각'은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 아니면 안 된다.'라는 아만(我慢)은 관찰자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도 눈을 멀게 한다. 유람록 길뿐만 아니라 세상사 또한 다기망양(多歧亡羊)의 고사처럼 갈림길이 많다. 실학자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선생은 '만물을 잘 관찰하는 자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만물은 없다.(善觀物者 無物不爲助)'라고 하였다. 세상에 나보다 나은 선관물자(善觀物者)는 얼마든지 있다. 하물며 사물도 도움이 되거늘 사람이 사물만도 못해서야!  끝.

 

 

독바위골 초입 샘터
조개골 아홉사리길 소나무 전망대에서 바라본 상류암에서 초령가는 길
중봉, 영랑대, 말봉, 두류봉
새봉샘터
곰샘 계곡과 합수점
이정목I
이정목II
표고버섯I
표고버섯II
새봉 석굴

 

거대한 바위

 

▶ 관련 자료 :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최석기 외)

 

「15일(기묘). 동이 틀 무렵에는 날씨가 더욱 흐렸다. 주지가 말하기를 "빈도(貧道)가 이 산에 오래 머물렀는데, 구름의 형세로 보아 오늘은 반드시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기뻐서 짐꾼을 줄여 나머지는 돌려보내고 절을 나와 곧바로 길을 떠났다. 푸른 넝쿨 우거진 수풀 속에는 저절로 죽은 큰 나무가 길에 쓰러져 다리(略彴:외나무 다리)가 되었고, 반쯤 썩은 것은 가지가 땅에 걸쳐 있어 지나갈 때 말을 탄 것처럼 출렁거렸다. 몸을 구부리고 쓰러진 나무 밑으로 빠져나와 한 등달(벽송사능선)를 지났다.

 

[원문]己卯。黎明益陰翳。寮主云。貧道久住此山。以雲卜之。今日必不雨。余喜。减擔夫遣還。出寺。卽行蒼藤深菁난中。大木之自斃者。顚仆于磎徑。因爲略彴。其半朽者。枝條猶拒地。若行馬然。挽出其下。度

 

해공이 말하기를 "여기가 아홉 고개(九隴) 중에서 첫번째 고개입니다"라고 하였다. 연달아 서너 고개를 지나자 널찍한 곳(洞府)이 나왔는데, 주위가 넓고 그윽하였다. 나무가 해를 가리고 담쟁이넝쿨과 칡넝쿨이 뒤얽혀 있으며, 시냇물이 돌에 부딪히며 굽이쳐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동쪽은 산등성이지만 그렇게 높지는 않고, 서쪽은 지세가 점점 낮아져 20리를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이른다. 만약 닭·개·소·송아지를 끌고 이곳에 들어와 나무를 베어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찰벼·삼·콩 등을 심는다면 무릉도원(武陵桃園)보다 못할 것이 없으리라. 내가 지팡이로 시냇가의 돌을 두드리면서 유극기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아, 어느 때나 그대와 함께 은둔해 이런 곳에서 노닐어볼까?"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바위에 낀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 한복판에 이름을 새기게 하였다.

 

[원문] 空云。此九隴之第一也。連度三四。得一洞府。寬閑奧邃。樹木蔽日。蘿薜蒙絡。溪流觸石。曲折有聲。其東。山之脊也。而不甚峭峻。其西。地勢漸下。行二十里。達于義呑村也。若携鷄犬牛犢以入。刊木墾田。以種黍稌麻菽。則武陵桃源。亦不多讓也。余以杖叩澗石。顧謂克己曰。嗟乎。安得與君結契隱遁。盤旋於此耶。使之刮苔蘚。題名于巖腹。

☞ 구롱(九隴) : 아홉 모롱이(모랭이, 모래이)를 가리킴. 동부(洞府) : 도교(道敎)에서 말하는 신선이 사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