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강계형의 장암에서 사립재 가는 길(200926)
▣ 일 시 : 2020년 09월 26일(토)
▣ 코 스 : 송대-○○스님 토굴-장암-장구목-추성리 4번지-2번지-1번지-미타봉앞 전망대-석굴-샘터-일강-선녀굴-송대
▣ 인 원 : 3명(산영님, 칠성님)
▣ 날 씨 : 맑음
길은 인간을 이롭게 하고도 다투지 않는다. 산길에는 이치가 있다. 또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다. 산길은 위험하지 않고 가장 편안해야 한다. 점필재의 구롱길과 감수재의 초령 길을 확인하면서 산길에 대한 안목은 한마디로 괄목상대할 정도로 넓어졌다. 지리동북부에서 아홉 모롱이 길과 방장문을 지나 천왕봉을 오르는 길에서 처음에 집중한 곳은 마암이다. 지명의 이름대로 마암까지 말을 끌고 올라왔다는 가설에서 시작했다. 청이당까지 가축을 올릴 수 있는 길을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점필재의 아홉 모롱이 길이었다. 방장문 석각의 발견은 산길 찾기에 결정적인 힘을 보탰다. 지난주 세진대와 마적사지, 마당바위를 답사하고,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을 다시 읽었다. 장암(塲巖, 마당바위)을 출발하여 장구목(缶項)을 지나 사립재(扉峴)로 진행하는데... 그렇다면 장구목은 어디일까.
산길에 대한 이해를 정리하면 마을에서 마을로, 집에서 집으로, 고개에서 고개로, 샘에서 샘으로, 숯가마에서 숯가마로, 기도터에서 기도터로, 산죽밭에서 산죽밭으로, 바위에서 바위로, 이정목에서 이정목으로 길이 연결되며, 너덜 구간은 돌 포장이 되어있다. 산길은 수석침류(潄石枕流)하거나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가장 평탄하고 높낮이가 적으며 거리가 가장 짧다는 것이다. 산길에서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인간에게 가축이 필요하고 운송 수단으로 마소의 이동이 가능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번 답사는 1924년 8월 16일 강계형이 휴천면 문정동을 출발하여 세동과 송대에서 1박을 하고 마당바위에서 사립재를 잇는 길이다. 의문의 하나는 견불사에서 두류암과 어름터를 잇는 잘록한 고개를 장구목(추성리 산 24)이라고 하는데, 솔봉능선에서 보면 실제 그런 모양이다. 강계형의 일행이 마당바위에서 견불사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갔을 리 만무하다는 점이다. 아마 강계형의 일행도 장암에서 쉬어갔을 것이다. 강계형의 유람록에 나오는 장구목은 장암에서 올라서는 미타봉 능선의 잘록한 지점을 설명하는 보통명사의 어휘는 아닐는지. 장구목이라는 지명은 지리산에도 여러 곳이 있고 전국에 허다(許多)하다.
장암(塲巖, 廣岩䑓)에서 금대산을 바라보니 실제 말의 안장처럼 잘록하고 머리는 임천 쪽으로 향해있다. '금계(金鷄)와 마천(馬川)은 금계포란(金鷄抱卵)과 갈마음수(渴馬飮水)의 형국이다. 金馬坮(금마대)에서 금대(金坮)가 되었다.'라는 조용헌 박사의 설명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천왕봉은 여자의 산이요. 금대산은 남자이다.’ ‘금대(金坮)와 상무주(上無住)가 명당이다.’ ‘나는 점필재는 관심이 없다. 지리산을 유람한 유생(儒生)급이 아니다.’ ‘최소한 최치원과 사명대사, 화랑의 선도에 관심이 있다.’ 풍수로 술술 풀어내는 지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신비롭기만 하다. 강호의 동양학은 또 옥스퍼드를 나오고 하버드를 나와도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한다. 우리 전통문화와 선도 사상의 맥을 잇는 마지막 사람이라고 했다. 석남사의 암수(巖藪), 탄수대의 마애 명문에 나오는 삼문(三門)과 오호(五戶), 성교대(星橋臺)와 칠성동(七星洞) 등 막히는 것이 없었다. ‘易學은 儒學보다 위에 있다.’라는 休休 선생의 말에 솔직히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청이당의 어원은 천례탕에서 온 말이다.’라는 추정은, 지명의 유래도 모르고 유람록을 남긴 유학자들을 비웃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사물을 보는 조용헌 박사의 직관력은 국사무쌍(國士無雙)이다.
장암(塲巖, 廣巖䑓)에서 기존 등로를 따르지 않고 강재두 선생 전답이 있는 골로 길을 잡았다. 초입은 중장비로 길을 내어 평탄하다. 지난주 이미 답사를 한 산영(山影)님의 안내를 받았다. 산길에 관한 한 지리산에서 산영(山影)님을 따를 사람이 없다고 본다. 한 분야에 碩學(석학)은 다른 분야에도 문리가 트이는 것인지. 어릴 때 삼장면에 살면서 중봉까지 뽕잎을 따러 다녔다고 하니 조기교육(?)의 영향일까. 산영(山影)님은 전문가답게 가축 길에 대한 관심이 많다. 청이당에서 상류암까지, 상류암에서 초령까지의 길을 단번에 찾아냈다. 길을 찾으면 유람록과 연결하는 것이 나의 몫이 되었다. 장암(塲巖)에서 장구목(缶項, 부항)을 지나 사립재(扉峴)로 잇는 길도 가축 이동 길의 시각에서 접근하였다. 집터와 전답, 샘터, 돌 포장, 고개(장구목), 집터와 전답(추성리 4번지)에서 다시 집터(추성리 2번지)에 이르러 허공달골에서 사립재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미타봉 능선에서 이곳까지 이어지는 길은 대로 수준이다. 추성리 4번지에서 중허리 길이 숨어있다. 토질이 좋고 경사도가 완만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다. 1번지는 정남향으로 곳곳에 석축이 남아있다. 도기 편이 눈에 들어왔다. 미타봉 능선에서 남으로 뻗은 작은 지능선의 바위 아래에는 샘이 솟는다. 산영(山影)님은 평범한 집터가 아니라고 했다. 마침 바위 아래 말벌집에서 정찰병이 나와서 경고를 한다.
이곳에서 미타봉 능선을 향했다. 거석군(巨石群)을 통과하여 바위마다 올라가서 조망을 확인하고 미타봉 아래 능선에 닿았다. 이곳은 아직도 지도에는 상내봉 능선으로 표기되어 있다. 산은 그대로인데 이름을 지어서 부른 들 무슨 상관이랴. 지명의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 내가 잘못이다. 석굴 샘터를 향해 허리 길로 진입했다. 이곳에서 아래 방향으로 모퉁이를 돌면 샘이 있는 기도터이다. 일행 두 분이 기도터를 다녀오는 사이에 내가 A형 석굴을 발견했다. 북으로는 바람을 막아주고 미타봉 양지에 내부는 바닥이 평탄하고 근처에 샘이 있으니 빨치산 은신처로 추정된다. 탄수 이종식 선생의 비결 명문 논집에 ‘동이 트면 해가 일찍 뜨는 상로봉(霜老峰)은/양기가 빠르게 모여드는 피난처라네‘라는 문구가 허언이 아니다. 문득 선녀굴과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이 주변에는 여러 개의 석굴이 있다는 것이 송대 마을 지인의 전언이다. 석굴을 확인하고 길을 따르다가 물이 나오는 석굴로 올라갔다. 이곳은 교묘하게 바위 뒤에 숨어있다. 미타봉의 소림 선방과는 멀지 않은 거리이다. 석굴(샘터)를 확인하고 다시 미타봉 소나무 전망대 바위에 올라갔다.
전망대에서 한참을 머물러간다. 좌로는 사립재와 새봉, 옹암(진주독바위), 우로는 영랑대, 말봉, 두류봉, 영룡봉까지 펼쳐진다, 가운데는 마지막 아홉 모롱이 쑥밭재이다. 그 아래로는 일강을 넘어 아홉 모롱이 길이 눈앞에 들어온다. 동부와 집터 방장문의 위치를 가늠해본다. 그사이에는 강계형이 사립재 치조(벗)의 집에서 통천문으로 올라간 길도 눈에 들어온다. 장암을 출발하여 장구목을 넘어 사립재골로 들어서서 벗 친구의 집에 들렀으나 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첫 모롱이와 두 번째 모롱이 사이로 새봉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잘록한 지능선의 넘어 통천문으로 넘어간 것이다. 강계형은 통천문에서 옹암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쑥밭재로 진입한 것으로 추정한다. 지난 2월 눈을 맞으며 시작한 일이 한여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이곳에 서있으니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의중마을에 살았던 삼송(三松) 임응택(林應澤, 1879~1951) 선생의 와유강산(臥遊江山)에 있는 상무주암(上無住庵)시 한수가 떠오른다. 머무를 곳이 없는 높은 암자가 벽공에 머물러/쇠 북소리는 다만 흰구름 가운데 있구나./옳고 그름이 연하 선계에 들지 아니하니/속세의 생각 쓸어버리고 저녁 바람에 서 있구나. 갑자기 쇠북소리에 심장이 뛴다. 우리는 난세에 태어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시간을 보니 오후 3시가 넘었다. 연하 선경에서 시시비비 하는 속세의 생각을 씻고 내려서는 길이다. 일강(一岡)에서 숯가마터를 지나 샘터에서 물 한 모금 마시고 선녀굴로 향했다. 너덜을 한참 지나니 선명한 길이 나타난다. 이 길은 선녀굴에서 미타봉으로 이어진 길이다. 선녀굴 직전 작은 석문을 지나니 바로 선녀굴이 나온다. 지적도에는 송대에서 선녀굴까지 도로가 살아있다고 한다.
내가 유람록 길을 복원한 것은 선답자들이 모아놓은 자료와 답사 기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답사를 하면서 의문이 생겼고 멋 모르고 내 생각을 이야기했던 것 같다. 아마 영신사지부터 청학연못, 소년대, 행랑굴(마암)과 청이당 터, 상류암과 두류암 등으로 기억된다. 나는 지리산 인문학이라는 용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거창한 용어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고, 더군다나 지리 인문학은 내게는 해당되는 어휘가 아니다. 금년에도 가능할지 모르지만 나는 아직도 심설과 혹한에 지리 동부에 드는 것을 더 좋아하는 트래커이다. 사람이 살면서 잘못을 할 수도 있고, 또 잘 모를 수도 있다. 설사 한 사람이 실수를 했어도, 말벌떼처럼 달려들어 송곳니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고 본다. 본래 쇠스랑과 낫은 유용한 농기구이지만, 화로(火爐)에 불려 두들겨 패면 창과 칼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묵자(墨子)의 천하에 남이 없다(天下無人)’라는 말로 산행기를 마무리한다. 끝.
1924년 8월 18일 강계형 일행은 이 나무 옆을 지나갔다.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에 장암(塲巖)으로 나온다. 광암대(廣岩䑓)는 1924년 이후에 석각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마당바위에는 장기판이 그려져 있다.
금대산을 누워있는 여인의 가슴으로 보는 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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