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병풍에 그린 닭이 아홉 모롱이 길을 가다(200918~20)

도솔산인 2020. 9. 24. 06:47

병풍에 그린 닭이 아홉 모롱이 길을 가다(200918~20)

 

 

▣ 일 시 : 2020년 09월 18일(금)~20일(일)

▣ 코 스

 -1일차 : 용유담-세진대-마적사지-마당바위-방장제일문-덕암-칠선휴게소

 -2일차 : 적조암-지장사터-환희대-독녀암(노장대)-삼열암-의논대-미타봉(소림선방)-동부-집터-통천문-옹암(진주독바위)

 -3일차 : 옹암(진주독바위)-샘터-빨치산 은신굴-집터-방장문-청이당-석상용장군묘-두류암(頭流巖)-어름터-광점동

▣ 인 원 : 3명(카리스마님, 산학동자), 만난 분 : 순천산님(2명)

날 씨 : 맑음

 

▶ 적조암에서 청이당까지 실측 거리(9.374km)

적조암-2.008km-지장사갈림길-0.426km-환희대-1.628km-고열암[선열암, 독녀암, 신열암, 의논대]-1.103km-소림선방-2.182km-집터-0.726km-방장문-1.401km-청이당 계석 [지장사 갈림길-(0.332km)-지장사] (출처 : 카리스마님)

 

 

자료제공 : 산학동자님
자료제공 : 카리스마 님

 

금년 들어 지리 동부만 25회 산행을 하였다. 금요일 오전에 내려와서 용유담을 지나 세진대와 마적사지를 둘러보고 송대마을 마당바위를 보고 탄수대의 방장제일문과 성교대, 덕암을 확인하였다.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만물을 잘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만물이 없다.(善觀物者 無物不爲助)'라고 하였는데, 나는 남보다 사물을 보는 직관력이 뛰어나지 못하니 시행착오를 거듭해야 했다. 사물을 보는 눈이 어두우니 얻어지는 것이 별로 없었다. 길치는 아니지만 전자 지도를 사용할 줄 모르니 처음 걷는 산길은 어두운 밤길을 가는 것과 같았다. 처음 유람록 답사를 하면서 아무런 욕심이 없이 시작했다. 몇 군데 지명에 대한 의문은 있었지만 영랑대에 올라 풍광에 취하는 것에 올인하였다.

 

영랑대에서 4계절의 낙조와 일출, 조망의 뜨거운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처음에는 유람록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니 궁금한 것도 없었다. 2006년 어느 날 영신사지와 청학 연못에 대한 의문이 문제의 시발(始發)이 되었다.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과 유두류기행시를 읽은 것이 2008년 가을로 생각된다. 고열암에서 만난 숙고열암 시에 취했고, '소나무 물결 달빛 아래 들끓는다.'라는 시구가 마음을 흔들었다. 그동안 전구간을 3박 4일로 여러 차례 답사하였지만, 고열암에서 청이당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있었다. 그냥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한 편만이라도 제대로 복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1.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지장사 터는 어디인가

 

 2008년 처음 지장사 터라는 곳을 답사하였을 때 의문이 들어 유두류록 원문을 다시 읽게 되었다. '지장사 갈림길' 부분에서 구두점의 오류를 발견하고 구두점을 수정하여,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올라갔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벌써 경치가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1리쯤 바위가 있는데 환희대(歡喜臺)라고 하였다.'라고 읽어 점필재가 지장사에 들르지 않은 것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돌배나무에서 직선으로 200m 지점에 있는 암자터를 지장사 터로 추정하는 것은 암자터의 여러 조건-노진의 '夜宿地藏庵' 시, 청자 편, 생초 백토 도기 편, 와편, 암자 뒤 암괴, 암자터 앞 2단 축대, 주춧돌, 샘터, 샘터 석축, 돌배나무 등-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선답자들이 발표한 지장사 터에 대하여 첫 답사 때부터 의문표를 던졌고, 의문은 계속 답사로 이어졌다. 옥계(玉溪) 노진(盧禛)의 '샘물 소리가 이른 새벽 단잠을 깨우네.'라는 시구에 주목하였다. 어느 날 지장사의 샘터와 지장사 객사 터를 확인하였다. 지장사에 관한 문헌의 자료가 희소한 상태에서 단정 짓기는 어려우나, 점필재와 옥계의 기록을 근거로 이곳이 지장사 터가 아닌가 추정한다. 분명한 것은 1472년 8월 14일 점필재는 지장사에 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옥계 노진의 야숙지장암(夜宿地藏庵)

 

 

夜宿地藏庵


                        노진(盧禛)[1518~1578]

山中無俗物 : 산중이라 세속의 잡된 일 없어
煮茗聊自飮 : 차 끓여 심심찮게 따라 마시며
坐愛佛燈明 : 앉아서 환한 불등 고이 보다가
深宵始成寢 : 깊은 밤 가까스로 잠이 들었지
還有石泉響 : 헌데 또 바위틈의 샘물 소리가
冷然驚曉枕 : 돌연 새벽 단꿈을 놀래 깨우네

 

<玉溪集>

 

현재의 지적도를 보면 지금은 모두 지목이 田에서 林野로 바뀌었지만, 작은 필지의 임야는 옛날 전답으로 보인다. 지장사 터의 현 지번은 휴천면 운서리 산 1288번지(지목 임야) 인접 지번이고, 점필재가 지장사 갈림길에서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올라간 위치의 지번은 경남 함양군 휴천면 운서리 1327번지(지목 도로), 지장사 갈림길에서 지장사로 들어가는 길은 1324번지로 면색(面色) 된 부분의 지목은 도로이다. 이 지적도는 일제 시대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작성 당시의 노장동 마을의 규모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휴천면 운서리 산 1288번지(지목 임야)와 인접한 지번을 지장사 터로 추정한다.

 

☞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지장사와 지장암 : http://blog.daum.net/lyg4533/16488063

 

붉은 색이 지장사 진입로이다.

 

2. 함양독바위는 독녀암(노장대)이다.

 

함양독바위의 지명을 고문헌에 근거하여 독녀암(노장대)으로 부르자고 처음 제안한 분은 솔레이 이용훈 박사이다.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는 독녀암(獨女巖)으로 기록하고 있고, 한말 마적동에 은거했던 강지주(姜趾周, 1856~1939)의 세진대기(洗塵臺記)와 문정동에 살았던 강계형(姜桂馨, 1875-1936)의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에 노장대(老將臺)라는 기록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또 다른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1권 경상도 산음현 편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別集 17권 변어전고(邊圉典故)에는 독녀성(獨女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얼마전 산영 조박사님에게 묘정암을 찾았다는 연락을 벋았다. 상대날등에서 바라 본  독녀암 사진은 영락없는 '여인의 형상' 으로 보였다. 바위의 모양으로 지어진 이름이 독녀암인 것이다. '함양독바위'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근거했는지 모르지만, 세인들이 함양 독바위라고 하는 것은 지리산길 지도에 그렇게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도 또한 지명의 정확성이 그 생명이다.

 

 

독녀암은 여인의 형상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가.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 다섯 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자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바위 중턱에 잣나무가 서 있는데, 그 바위를 올라가려면 나무를 건너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 잡고 바위틈을 돌아 등과 배가 바위에 부딪힌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니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었는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숙하게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다.

 

나. 강지주(姜趾周, 1856~1909)의 세진대기(洗塵臺記)

 

방장산은 바다 가운데 삼산의 하나로 크고 깊고 넓기가 인간세상에서 으뜸이다. 거기서 가장 높은 곳을 천왕봉이라 하며, 천왕봉에서 시작된 높고 가파른 산이 동쪽으로 우뚝 솟아 노장대(老將臺)가 되었고, 그 한 가지가 다시 북쪽으로 십여 리를 달려 불룩하게 솟았으니 각산(角山)‧배산(背山)이라 한다. 마을이 있고 마적동(馬跡洞)이라 하는데 내가 사는 곳이다.

 

다, 강계형(姜桂馨, 1875-1936)의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

 

봉우리(향로봉)에서 곧장 뻗어 내린 것은 노장대(老將臺)(*독바위)가 되었고, 노장대(老將臺)의 왼편 어깨에서 한 줄기가 서쪽으로 거슬러 나아가 문필봉(*솔봉)이 되었으며, 그것은 문수사의 주봉을 이루고 문헌동의 바깥 안산(案山)이 되었다. 노장대(老將臺)의 가운데 줄기는 비스듬히 ○里쯤을 나아가서는 굽이돌아 북쪽으로 나아가 문헌동의 안산인 채봉(釵峯 *비녀봉. 양화대 정남의 524m봉)이 되었고, 얼굴을 내밀고 머리를 드리워 양화대를 안으로 감싸는 형세[砂]가 되었다. 노장대(老將臺)의 오른편 옆구리에서 흩어져 내린 여러 줄기는 봉우리와 봉우리가 중첩되고 지맥(*곁다리)이 널리 퍼져 물을 거슬러 서쪽으로 나아가 양화대를 바깥에서 감싸는 형세가 되었다.

 

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1권 경상도, 산음현

 

【고적】 개품부곡(皆品部曲) 다른 이름은 장계(長溪)이다. 현 서북쪽 25리 지점에 있으며 옛날에는 단계(丹溪)에 예속되었던 것이다. 송곡소(松谷所) 현 북쪽 13리 지점에 있다. 고산성(古山城) 현 남쪽 2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가 천 3백46척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독녀성(獨女城) 현 서쪽 27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가 천 7백 30척이고, 시냇물과 샘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마.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別集 제 17 권 변어전고 (邊圉典故)폐지된 산성

 

- 산음 고산성 :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독녀성(獨女城) : 현의 남쪽 27리에 있다.

 

 

3. 김종직의 議論臺(의논대) 詩에 나오는 소림 선방에 대하여

 

고열암 터 아래 의논대에서 정면(직선 거리 600m)으로 보이는 미타봉(1164.9m)의 송대 마을 쪽에 석굴이 있는데, 석실 내부에 바닥을 평탄(平坦)하게 하기 위해 축대를 쌓았다. 그리고 상 허리길이 고열암에서 미타봉으로 연결이 되는데, 삼열암의 승려들이 이 길로 왕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주변의 지명은 암자 이름은 그렇다 하더라도 화암, 환희대, 의논대, 향로봉, 미타봉, 소림 선방 등 모두 불교와 관련된 지명들이다. 환희대는 환희지(歡喜地)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보살이 수행 과정에서 거치는 열 가지 지혜의 경지(10地) 중 첫 번째를 말한다. 미타봉을 상내봉이라고 하는 것도 오류이다. 강계형(姜桂馨, 1875-1936)의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에 향로봉(香爐峰)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있다. 또한 동시대에 의탄 의중마을에 살았던 탄수(灘叟) 이종식(李鐘植, 1871~1945)의 비결 명문 논집에는 상로봉(霜老峰)으로 기록하고 있다, 향로봉(香爐峰)을 경상도 방언으로 상내봉이라고 한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가. 議論臺(의논대) - 김종직(1431~1492)

 

兩箇胡僧衲半肩 : 참선승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 선방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서 홀로 서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 가득 천풍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 하네.

 

나. 강계형(姜桂馨, 1875-1936)의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 이재구 선생 譯

 

산의 여세가 잘게 나눠지고 흩어져 천 봉우리 만 골짜기가 되었고, 힘을 쏟아 큰 줄기가 되어 멀리 아득히 치달리고 뛰어 올라 그 기교를 다하였다. 사립재에 이르렀다가 향로봉(*지금의 상내봉 3거리 옆 봉우리인 듯)이 되었고 정수를 뽑아 우뚝 솟았으니, 이는 군 남쪽 엄천 남녘의 조산(祖山)이 된다.

 

다. 이종식(李鐘植, 1871~1945)의 비결 명문 논집

 

金鷄避亂豫標點 : 금계가 피난처라고 미리 표점하니/一姓一步遠傳昊 : 한 성씨 한 걸음씩 널리 전해졌고/同胞戰亂自足殺 : 동포들은 전란에서 스스로 죽일 수 있다고/灘叟未來秘訣布 : 탄수 공이 앞으로의 일을 비결로 퍼트렸네/晨明早日霜老峯 : 동이 트면 해가 일찍 뜨는 상로봉은/陽色眺會避難處 : 양기가 빠르게 모여드는 피난처네/洞民功德追尊碑 : 동민들은 추존비를 세워 공덕을 기리고/灘叟創始金鷄洞 : 탄수 공은 이곳에 금계동을 창시하였네

 

김종직의 '의논대' 시 2구에 나오는 '소림 선방'은 어디인가? 그동안 막연하게 '바위 사이 한 곳'을 미타봉으로 생각하였지만, 그냥 와불 두상의 바위 사이라고 생각했다. 직접 석굴 내부로 들아가 확인하고 밖으로 나가 조망 바위에 올라가니, 의논대와 고열암이 코 앞에 들어왔다. 또한 미타봉 주변 서너 곳에 일부 남아있는 석축은 수행하는 공간에 외부인의 접근을 막는 담장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미타봉은 아미타불의 형상에서 유래한 이름이고, 미타봉의 석실은 아미타불이 되기 위한 胡僧(참선승)들의 수행 공간으로, 김종직의 유두류 기행시 '의논대'에 '소림 선방'의 시어로 나타나 있다. '소림 선방'은 중국 숭산(崇山)의 소림사(小林寺)에 있는 한 동굴로 달마대사(達磨大師)가 9년간 면벽참선 수행을 했다는 소림굴(小林窟)을 말한다. 미타봉은 아미타불의 형상으로 붙여진 이름일 뿐만 아니라, 달마 대사가 면벽수행했다는 중국 숭산(崇山)의 소림사(小林寺)에 있는 소림굴(小林窟)을 지리산 미타봉에 옮겨다 놓은 것이다.

 

* 아미타불(Amitabha, 阿彌陀佛) : 서방정토에 머물면서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부처다. 다섯 구원불 가운데 하나로 '무한한 수명'이라는 뜻을 가졌다. 아미타불을 믿고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모두 정토에 태어나 복을 누리며 산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아미타불 신앙으로 650년경부터 중국에서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한국에는 선덕여왕 때 자장이 〈아미타경소〉를 계기로 정토신앙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불교신앙의 일반적인 형태로 정착되었다. 동의어 무량광불(無量光佛), 무량수불(無量壽佛) 출처 : 다음 백과

 

 

4.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동부(洞府)와 구롱(九隴) 가는 길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답사를 하면서 대부분의 지명을 이해하였는데, 오랫동안 유독 동부(洞府)구롱(九隴)을 풀지 못하였다. '천 번을 갈아야 비로소 거울이 밝아진다.(千磨鏡始明)'라는 퇴계 선생의 말씀대로 지난 10여 년 동안 아마도 수백 번 가까이 생각한 어휘일 것이다. 내가 아둔해서 글자만 알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 답답함을 풀기 위해 나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졌고, 그것은 곧바로 답사 산행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하여 의문을 풀어가는 과정은 내 삶의 충전재이기도 하다. 점필재 길과 박여량 길에서 마지막 벽에 부딪혀 시간을 보낼 즈음, 뜻밖에 희연(喜緣)을 만나 상류암에서 초령 루트, 동부(洞府)와 구롱(九隴)을 함께 풀게 되었다.

 

김종직 선생은 1472년 4월 14일 고열암에서 자고 다음 날 아침 날씨가 흐리자, 고열암 요주(寮主)(*)가 '오늘은 필시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담부(擔夫, 짐꾼)를 일부 돌려보내고, 다음날 아침 고열암 중에게 시 한 수를 주고, 상 허리길로 (*)미타봉일강(一岡)을 넘어 사립재골의 동부(洞府)를 지나 아홉 모롱이[구롱(九隴)] 길을 돌고 돌아 천왕봉을 향해 유람에 나선다.

 

注 *요주(寮主) : 선사(禪寺)의 소임(所任). 요원(寮元)을 보좌(補佐輔佐)하는 소임(所任)으로, 한 달반 달10일씩 교대함. (*)향로봉 :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에는 위치가 모호하지만, 강계형(1875~1936)의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에는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음(사립재에 이르렀다가 향로봉이 되었고, 정수를 뽑아 우뚝 솟았으니, 이는 군 남쪽 엄천 남쪽의 조산이 된다.) (*)미타봉 :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부처의 형상 아미타불에서 미타봉이라고 한 것으로 이해함.

 

 

贈古涅僧(고열암 중에게 주다)

 

求名逐利兩紛紛 : 명예를 구하고 이익을 좇는 일 둘 다 어지러우니

緇俗而今未易分 : 지금은 승려와 속인을 분간하는 것이 쉽지 않구나

須陟頭流最高頂 : 모름지기 두류산의 최고봉 천왕봉에 올라보게나

世間塵土不饒君 : 세간의 흙먼지는 그대를 배부르게 하지 못한다네

 

紛紛 : 어지럽다. : 검은옷치, 승복치, 승려, 중치

 

 

고열암에서 쑥밭재로 이어지는 상 허리 길인 아홉 모랭이(구롱) 길로 가려면, 초입은 골로 몇 걸음 내려서서 사면 너덜지대를 지난다. 언덕 바위 위로 조금 올라서면 산죽밭이 이어지는데, 희미하게 길이 보인다. 계곡 허리길을 따라가면 점필재가 언급한 도사목(倒死木)의 약작(略彴, 통나무 다리)이 있었던 건 계곡을 건너 대형 숯가마터에 이르고, 경사지를 가로질러 능선에 오르면, 위로는 향로봉(강계형 양화대사수록, 고열암과 벽송사와 사립재 삼거리)이고, 아래로는 미타봉과 벽송사로 이어지는 등달길을 만난다. 경사지 길은 오래 묵어 흙이 많이 흘러내려 길의 흔적이 희미하다. 첫 번째 등달[일강(一岡, 벽송사 능선]을 넘으면서 안내한 승려 해공이 점필재에게 '구롱(九隴) 중 첫 번째입니다.'라고 설명한다. 이곳에서 미타봉은 바로 지척이다.

 

일강(一岡)에서 사립재골 방향 상 허리길로 진입하면, 길은 완만하게 이어지고 숯가마터를 만난다. 여기에서 아래로 진행하다가 너덜길을 건너고 사립재골 집터를 지나 사립재골 상부인 동부(洞府)에 닿는다. 동부(洞府)는 사립재골 고원지대의 습지 주변을 말한다. 유두류록에 '그 동쪽은 산등성이인데 그리 험준하지 않았고, 그 서쪽으로는 지세가 점점 내려가는데, 여기서 20리를 더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일 닭과 개, 소나 송아지(鷄犬牛犢)를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 ,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도원(武陵桃源) 보다 그리 못하지는 않을 듯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동부(洞府)는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곳'으로 '너덜이 없고 평탄하고 넓은 지형으로, 마을을 형성하여 사람이 농사를 짓고 살 수 있는 곳'을 말한다.

 

여기에서 나오는 구롱(九隴)의 의미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아홉 언덕'이지만 순수한 우리말인 '아홉 모롱이(아홉 모랭이)'를 한자로 한역한 생소한 어휘이다. '아홉 모롱이'는 사투리로 '아홉 모랭이', 또는 '아홉 모래이', '아홉 모티이'라고도 하는데, '산기슭의 쏙 내민 귀퉁이'라는 의미이다. 롱(隴)은 (언덕부)+龍(용용, 언덕롱)으로 '구불구불한 산모롱이 언덕 길'을 뜻한다. 순수한 우리말인 '모롱이'를 롱(隴)으로 기록하고 그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본래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등산의 개념에서 생각한 산길의 고정관념이 그 한계였던 것 같다. 산촌 사람들의 생활길은 가축(牛犢, 소나 송아지)을 끌고 또는 짐을 지고 이동하기 때문에 가장 편안한 길이어야 하고, 시간과 거리 또한 단축해야 하니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혼합(混合)된 지혜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김종직 선생이 동부(洞府)에서 청이당에 이르는 길도 상 허리 길인 구롱(九隴) 을 이용하였다. 모롱이를 돌 때마다 연이어 실 계곡과 샘이 나오고, 너덜지대는 돌을 깔아 포장을 하였으며, 쓰러진 고목나무와 거대한 바위가 그림처럼 즐비하게 펼쳐진다. 집터를 지나 어름터에서 독바위로 오르는 능선을 넘어 같은 고도에서 평탄한 지형으로 상 허리길은 계속 이어진다. 송대 마을 지인(知人)의 전언(傳言)에 따르면 '그 길은 독녀암에서 시작하여 쑥밭재로 이어지는데, 지금도 산 아래 마을 주민들이 나물을 뜯을 때 가끔 왕래하는 길'이라고 한다.

 

구롱(九隴) 길은 어름터에서 쑥밭재로 오르는 길과 연결된다. 마지막 구롱(九隴)은 쑥밭재로 올라오는 길과 동부 능선이 만나는 부근으로 추정한다. 점필재는 이곳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홉 고개를 다 지나고 산등성이를 따라 걸어가니 지나는 구름이 갓을 스쳤다. 풀과 나무들은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젖어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하늘과 멀지 않음을 알았다. 몇 리를 못 가서 산줄기가 갈라지는데, 그 산등성이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 땅이다. 안개가 자욱하여 주위를 조망할 수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도착하였는데, 판자로 지은 집이었다. 네 사람이 당 앞의 시냇가 바위를 차지하고 앉아 조금 쉬었다.김종직 선생은 상 허리길로 구롱(九隴)를 지나 쑥밭재를 넘어 청이당에 닿는다. 이렇게 해서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지명과 점필재 루트는 마무리가 된다.

 

 

5. 점필재의 구롱(아홉 모롱이) 길 방장문 석각 발견(200516)

 

지난 5월 16알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조용헌 박사의 취재 산행을 하면서, 지리산국립공원 역사문화조사단에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구롱(아홉 모롱이) 길을 조사하던 중, 여덟 모롱이(팔롱, 八隴)의 석문(石門)에서 방장문(方丈門) 석각을 발견하였다. 이 석문(石門)은 송대와 벽송사 그리고 엄천과 오봉리에서 천왕봉에 오르는 길목에 있다. 쉽게 설명하면 방장문(方丈門)은 지리 동북부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자연 석문으로, 내지리와 외지리를 구분하는 경계(석전 사문에는 봉전령)이다. 이 길은 신라의 화랑 영랑이 3,000명의 낭도를 거느리고 영랑대에 올랐다는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삼국시대 이전에 가야인들이 이미 구축한 산길로 추정된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의 전설이 구전으로 전해지는 지명과 성터가 주변에 산재해 있음을 깊이 있게 음미(吟味)해볼 필요가 있다.

 

점필재의 아홉 모롱이 길은 고도 1,100m, 고저 차이 약 50m 내외, 고열암에서 청이당까지 도상거리로 약 4.75km 정도 이어지는데, 고저 차이가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다. 구롱(九隴)에서 롱(隴)은 阝(좌부변, 언덕부 = 阜)와 龍(용용, 언덕롱)이 결합한 글자이다. 롱(隴)은 용처럼 구불구불한 모롱이 길을 의미한다. 롱(隴)은 모롱이 즉 경상도 사투리로 모랭이 또는 모래이로 이해하면 쉽다. 이 아홉 모롱이 길의 방장문(方丈門)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500년 전 가야인들이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목의 석문(石門)이요, 신라가 가락국을 합병(532년)한 후에는 화랑들이 영랑대로 오르는 선도(仙道)의 문이며, 조선시대에는 관료와 사대부, 유생들이 방장산으로 들어가는 유람의 관문이다.

 

 

가. 1611년 유몽인의 기행시와 두류산록

 

明朝我向石門去 : 내일 아침 나는 석문으로 떠날 것이고/師在頭流雲水間 : 선사는 두류산 구름과 계곡 사이에 머물겠지요.

○ 癸酉. 侵晨而行掠甕巖. 淸夷堂 : 4월 4일 계유일. 새벽에 길을 떠나 옹암(甕巖)을 지나 청이당(淸夷堂)에 들어갔다.

 

☞ 掠은 중국 漢漢字典에 '輕輕擦過'로 되어 있는데, '가볍게 스쳐 지나가다'라는 뜻. 옹암을 가까이에서 보고 지나간 것으로 이해함. 여기에서 1611년 유몽인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석문은 옹암 가까이 있는 석문으로 판단함.

 

나. 1922년 권도용의 방장산부(이재구 선생 譯)

 

두리(杜里)의 폐사(廢寺)를 지나니 양쪽의 바위가 서로 붙어 있는 곳이 있어 무엇이라 부르는지 물었더니 금강문(金剛門)이라고 하였다. 이 또한 승려들이 보이는 대로 갖다 붙인 말이다. 過杜里之廢寺 有兩巖之交粘問奚名則曰金剛門亦禪師之權辭以拈眡

 

☞ 권도용의 동선을 벽송사-어름터-두리의 폐사-집터-여섯 모롱이-일곱 모롱이-여덟모롱이-방장문-아홉모롱이(쑥밭재)-청이당으로 추정하면 방장문이 금강문일 가능성이 있으나 확정하기는 어렵다.

 

다.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이재구 선생 譯)

 

드디어 차례로 서서 나아가 겨우 장구목[缶項부항]에 도착하니 갈증이 나고 침이 말랐다. 곧이어 사립재[扉峴비현]에 당도하여 벗 치조를 방문했더니 아이가 말하기를 조금 있으면 돌아올 거라 했지만 일행에게 뒤쳐질까봐 힘써 길을 올랐다. 아래위의 석문 지났다. 문의 양쪽은 모두 바위이고 가운데로 한 줄기 좁은 길이 통하였다. 바위의 모양은 위가 붙어있고 가운데가 비어 십 여인을 수용할 수 있으며 흰 글씨로 통천문(通天門) 세 글자가 석면에 쓰여 있었다. 遂序立前進纔到缶項而喉渴無涎矣迤到扉峴訪友致祚則兒言少選當返而恐其失伴努力登途過上下石門門之兩傍皆石而中通一逕巖形上合而中虛可容十餘人以白書通天門三字於石面

 

☞ '아래위의 석문을 지났다.' '바위의 모양은 위가 붙어있고 가운데가 비어 십 여인을 수용할 수 있다.' : 사립재에서 통천문 길을 확인함.(200530) 독바위 인근 석문으로 판단함.

 

 

방장문
방장문 석각

 

6. 지리동부 쑥밭재와 청이당의 어원에 대하여

가. 문헌에 나타난 쑥밭재의 명칭

 

쑥밭재의 명칭은 1871년 배찬의 유듀류록에는 애현(艾峴), 1877년 박치복 남유기행과 허유의 두류록, 1937년 김학수의 유방장산기행에는 애전령(艾田嶺), 1887년 정재규의 두류록과 1956년 함양군지에는 봉전령(蓬田嶺)으로 1933년 석전(石顚) 박한영의 석전사문에는 봉전치(蓬田峙)로 나타난다. 애현, 애전령, 봉전령, 봉전치는 쑥밭재를 한역한 명칭이나 쑥과는 연관이 없는 듯하다. 쑥은 1,000m가 넘는 고지대에서 자라지 않는다.

 

쑥밭재

나. 쑥밭재, 일명 애전령(艾田嶺), 초령(草嶺)

 

경남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쑥밭의 '쑥'은 원시어소 [슬/sur]의 변이음이고 '밭'은 [불/bru]의 변이음이다. 기슭을 가리키는 [슬/sur]도 대광상고(大廣上高)의 뜻을 지니고 있다. '쑥밭재'는 크고 높은 뜻의 지명이다. 초령(草嶺)의 한자 草는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새(사이/사)]음을 차자(借字)할 때 많이 썼는데. [풀/불/블] 음을 차자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여지도 있어 일단 설명을 보류한다.

 

출처 : 슭마노르님의 블로그 [슭/sur] 유전자가 들어있는 지명 : http://blog.daum.net/pance73/10068

 

 

. 문헌에 나타난 청이당의 명칭

 

이당에 대한 유람록의 기록은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에는 청이당(淸伊堂), 1611년 유몽인 선생의 두류산록에 청이당(淸夷堂)으로, 1871년 배찬 선생의 유두류록에는 천녀당(天女堂)으로 각각 기록하고 있다. 1472년 김종직 선생이 쉬어간 계석은 청이당터 석축 앞 약 2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1871년 배찬 선생은 이곳에서 '계곡 옆의 바위 위(澗邊石上)에 빙 둘러 앉아서 밥을 먹었다' 라고 한 장소는 같은 바위로 추정된다. 참고로 함양과 산청의 군계는 하봉 옛길로 지금도 청이당터는 함양 땅이다. 전국 방방곡곡의 영지를 순례한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조용헌 박사는 화랑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천례탕(天禮碭, 강계형)을 청이당(김종직, 유몽인)과 천녀당(배찬), 천예당(임대봉 구전)의 어원으로 보고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천례탕(天禮碭)에서 '碭(탕)'은 고금이체자 자전에는 唐(당)의 이체자로 나와 있다. 碭(탕)을 당으로 읽는다고 가정하면. 임대봉씨의 '천예당'은 1924년 강계형의 '천례당(탕)'과 일치한다.

 

 

청이당터 앞 계석
청이당 터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원문] 淸伊堂以板爲屋四人各占堂前溪石上小憩

1472년 8월 15일,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시내 바위(위에서)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占堂 : 청이당

 

2) 1611년 유몽인 선생의 두류산록

 

[원문] 癸酉. 侵晨而行掠甕巖. 淸夷堂. 穿森木亂石叢. 至永郎臺.

1611년 4월 4일, 계유일. 새벽에 길을 떠나 옹암(甕巖)을 지나 청이당(淸夷堂)에 들어갔다. 숲을 헤치고 돌무더기를 가로질러 영랑대(永郞臺)에 이르렀다.

 

3) 1871년 배찬 선생의 유두류록

 

[원문] 小憇于嶺上. 艾峴. 天女堂平田. 從者進午飯. 遂環坐於澗邊石上. 各執匏器. 折木爲匙. 足爲免飢. 各吟一律拈平田之田字.

1871년 95일, 산마루 위에서 잠시 쉬었다가 애현(艾峴)을 지나 천녀당평전(天女堂平田) 이르렀다. 시종(侍從)들이 점심을 내와서 마침내 모두 계곡 옆의 바위 위에 빙 둘러앉아서 각자 바가지 그릇을 잡고 나무를 꺾어 젓가락을 만들어 밥을 먹으니 배고픔을 면할 만하였다. 각자 평전의 ()’ 자를 끄집어내어 시 한 수씩을 읊었다.

 

4)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

 

[원문] 漸漸前進置艾峴. 路於左便而取右. 路踰麓. 則天禮碭也.

1924818(송대 출발) 점점 앞으로 쑥밭재[艾峴애현]로 나아가는데 길은 왼쪽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향했으며 산기슭을 넘자 천례탕(天禮碭 *하늘에 제사 지내는 돌)이었다. [출처 지리 99, 국역 이재구 선생]

 

* 참고자료 :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선인들의 지리산 기행시(최석기외)

 

 

꽃봉산(화암의 위치는 확인 중에 있다.)
당산나무(화암을 확인 중에 있음)
적조암
돌배나무
지장사터
환희대
금마대(금대산)
雲根矗矗水冷冷(운근촉촉수영영)

先涅庵(선열암)

 

門掩藤蘿雲半扃 : 문은 등라에 가리고 구름은 반쯤 빗장을 질렀는데

雲根矗矗水冷冷 : 우뚝솟은 바위의 촉촉수 소리 맑고도 깨끗하구나

高僧結夏還飛錫 : 하안거를 마친 고승은 석장을 날리며 돌아갔는데

只有林間猿鶴驚 : 다만 깊은 산속에서 은거하는 선비가 놀라는구나

 

 

掩藤 : 등나무 : 빗장경 닫을경. 矗矗 : 우뚝솟을 촉. 冷冷 : 맑고 시원하다. 結夏 : 하안거를 마침. : 錫杖, 禪杖 도사 승려가 짚는 지팡이 : 다만. 猿鶴 : '원숭이와 학'의 의미는 猿鶴沙蟲(원학사충)의 준말로 은거하는 선비를 이르는 말. 주목왕周穆王의 군대가 몰살되어 군자는 죽어서 원숭이나 학이되고 소인은 죽어 모래나 벌레가 된다는 고사.

 

 

雲根矗矗水冷冷(운근촉촉수영영) : 雲根은 공기와 바위의 기온 차이로 구름이 생기는 거대한 바위, 선열암의 우뚝 솟은 바위(雲根)에서 톡톡(矗矗 : 촉촉) 떨어지는 矗矗水(촉촉수)를 확인하였다. 촉촉수 다음에 이어지는 시어 '冷冷(냉냉)'冷冷(영령)으로 읽어야하고, "선열암 암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맑고도 깨끗하다.'"라고 읽혀지니 矗矗(촉촉)은 우뚝 솟은 바위의 형태인 의태어와 물방울이 떨어지는 청각적인 의성어가 결합된 절묘한 시어라고 생각한다.

 

선인들이 시를 지은 현장을 찾아 유산시를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시도는 산행의 또 다른 묘미이다. 이번 산행에서도 선열암 높은 바위에 엉긴 이슬이 모여 톰방톰방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떨어진 물방울이 만든 동심원 확인하였으니, 순간의 미세한 자연 현상을 시어로 담아낸 선열암을 통해 548년이라는 시공을 초월한 격물치지(格物致知) 산행이라고 할 수 있다.

 

 

독녀암 석문
신열암 터
고열암

宿古涅庵(숙고열암)

 

病骨欲支撑 : 지친 몸 지탱하려고

暫借蒲團宿 : 잠시 포단 빌려 잠을 자는데

松濤沸明月 : 소나무 물결 달빛 아래 들끓으니

誤擬遊句曲 : 구곡선경에 노니는 듯 착각하였네.

浮雲復何意 : 뜬 구름은 또한 무슨 뜻인가?

夜半閉巖谷 : 한밤중 산 골짜기 닫혀있구나

唯將正直心 : 오직 올곧은 마음을 가진다면

倘得山靈錄 : 혹시 산신령의 살핌을 얻으려나.

 

病骨(병골) : 지친 몸, 蒲團(포단) : 부들로 만든 둥근 방석, 浮雲(부운) : 간신. 인생의 덧없음. 不義 富貴榮達을 누림. 句曲(구곡) :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己山 또는 茅山(모산)이라고 함. 巖谷(암곡) : 산골자기 : 持也(가질장), : 혹시당. : (살핌)

 

 

독녀암(노장대)
의논대에서 바라본 미타봉

 

議論臺(의논대)

 

兩箇胡僧衲半肩 : 참선승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 선방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서 홀로 서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가득 천풍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하네

 

 

소림선방
세모랭이 이정표 바위(사립재로 가는 갈림길)
구롱길의 케른
문바위/석문/통천문
옹암(진주독바위)
옹암 석굴
방장문
1924년 강계형의 천레탕
청이당터 석축
1907년 정미 의병장 석상용 장군 묘
두류암(頭流巖)으로 추정하는 바위
측면 사진

 

7. 석상용 장군 묘소의 지명은 두류암(頭流巖)이다.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폐사지에 대한 논란이 여러 차례 있었다. 두류암(頭流庵) 또한 그중 하나이다. 이번에 해주 석씨 세보에서 의병장 석상용 장군의 묘소 지명을 확인하니 두류암(頭流巖)이다. 지역 주민들이 구두로 '두람(두람→두류암→頭流巖)'이라고 하는 것을, 기와편과 승탑이 있어서 선답자들이 두류암(頭流庵)으로 잘못 해석한 듯하다. 아무튼 사물의 이름은 인간들이 서로 원활하게 소통을 하기 위한 언어이다. 어름터의 '멍에 배미'처럼, 或 석장군 묘소 뒤의 커다란 바위를 두류암(頭流巖)이라고 한 것은 아닐는지.

 

 

▶ 해주 석씨 세보에서 나오는 의병장 석상용 장군 묘소 지명 

 

墓馬川面楸城里頭流巖甲坐有碑石一九八三年八月三十一日獨立有功褒賞受賞

묘 마천면 추성리 두류암(頭流巖) 갑좌 비석이 있다. 1983년 8월 31일 독립유공포상수상

 

 

유람록 복원은 누가 하더라도 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개인의 기록일지라도 후대에 역사문화의 자원이 될 수도 있고, 정보가 온라인을 통해 순식간에 널리 파급되기 때문이다. 정확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어떤 일이든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금물(禁物)이다.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 독약(毒藥)이 된다. 귀(耳)를 열면 비로소 눈(目)이 밝아지더라. 나는 그동안 산친들과의 소통과 교류가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다시 돌아보면 산영(山影) 조규완 박사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아홉 모롱이길 트랙을 따기 위해 부산의 카리스마님이 함께 하였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하나의 오랜 숙제를 해결하고 나니 허탈감이 밀려온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니 무언가 한 가지 일에 몰입했던 시간이 행복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경향각지에서 자비를 들여 함께 참여했던 많은 산친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솔레이 박사의 말대로 점필재 길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제는 후답자들이 점필재 길의 오류를 바로잡고 질정(叱正)을 바라면서 산행기에 갈음한다. 끝.

 

 

※ 개인적인 답사 기록으로 저의 주관적인 생각입니다.